최근 수정 시각 : 2024-09-03 21:39:16

지아들러

제1차 세계 대전의 독일 해군 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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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60px-SMS_Seeadler_cropped.jpg

1. 제원2. 개요3. 활동
3.1. 출동 - 대서양 해역3.2. 태평양으로

1. 제원

전장 83.5m
전폭 11.8m
높이 5.5m
기준배수량 1,571t
최대출력 500hp
최대속력 9kn
항속력 불명
무장 10.5cm 단장속사포 2문, 중기관총 2정
탑재기 수 없음
승조원 64명
동형함 없음

2. 개요

함 자체는 세계 대전 이전인 1892년에 취역하였다.

유틀란트 해전 영국 해군에게 열세였던 독일 제국 황립 해군 현존함대전략의 기치아래 함대주력을 킬 군항에 머무르게 했다. 적이 없어진 영국 함대는 해상봉쇄에 의해 독일경제의 소모를 노렸다. 이러한 상황하에 독일 해군은 유보트가장 순양함에 의한 통상파괴전으로 이행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의 봉쇄선은 엄중하여 간단히 돌파할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독일 해군 사령부는 상선으로 가장한 범선이라면 봉쇄선을 보다 쉽게 돌파하지 않을까 생각하여, 범선 근무 경력이 오래되었고 태평양 대서양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각국의 언어에도 능통했던 해군 대위 펠릭스 폰 루크너(Felix von Luckner) 백작에게 이 일을 맡겼다.

가장순양함으로 사용될 배로는 전쟁초기에 북해에서 독일해군의 U-36에 의해 포획되었던 미국 선적의 마스트 3개의 범선이던 패스 오브 발마하(Pass of Balmaha, 1,571톤, 영국에서 1915년 건조)를 개조하여 사용하기로 했다. 선체에는 10.5cm 속사포 2문, 중기관총 2정이 바깥에선 보이지 않게 은폐된 채 장비되었는데, 이 배가 바로 가장순양함 SM 지아들러다.

지아들러 함은 악천후 및 도주 등 고속이 필요할 시 사용할 500마력의 보조 디젤 엔진을 탑재, 기범선(機帆船)으로 개장되었다. 은밀함을 요하는 무기-탄약고는 말할것도 없고 연료 탱크, 음료수 탱크, 식량 저장고도 새로 만들어졌다. 포로 수용을 위해 선실도 개조하여 장교 상선사관 포로용 특별 선실, 포로 전용 식당도 구비했다.

루크너 대위는 처음에 함명을 < 알바트로스>로 고려했지만 동형함이 존재했기 때문에 부하와 상담하여 <지아들러(Seeadler), 바다독수리>로 정했다.

3. 활동

3.1. 출동 - 대서양 해역

영국의 봉쇄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타국적, 특히 중립국 상선으로 위장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루크너 대위는 지아들러 함을 노르웨이 범선 <마레타> 호로 위장키로 하고, 마레타 호에 직접 잠입해 항해일지를 훔쳐내어 이를 토대로 지아들러 함을 위장했다. 그러나 그 사이 <마레타>호가 출항하면서 이 배로 위장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그래서 대안으로 소재불명의 노르웨이 범선인 <칼레모에> 호의 이름을 빌렸는데 이것 역시 영국 해군에게 포획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궁여지책으로 루크너는 만약 발각시 적당히 얼버무리기로 하고 출항을 결의했다. 위장 선명은 행운을 기원하는 약혼자였던 <일마>의 이름을 땄다.
1916년 12월 21일에 6명의 장교와 57명의 부사관, 수병들을 태우고 지아들러는 빌헬름스하펜 해군 기지를 출항했다. 도버 해협을 통과할수는 없었기 때문에 브리튼 제도의 북쪽을 돌아가는 루트를 선택했다. 12월 25일에 아이슬랜드 남동쪽 해협에서 영국 해군의 순양함인 HMS 어벤저 함에 포착되어 검문을 받았는데, 다행히 정체를 들키지 않고 지아들러는 항해를 계속했다.
1917년 1월 9일에 지브롤터 해협에서 영국 선적의 석탄운반선 <글래디스 로열>을 발견한 루크너는 신호를 보내 접근한 뒤에 독일 해군기를 내걸고 발포했다. 국제법상 상선이나 아군 군함 등으로 위장한다 해도 공격 직전에 자국 국기나 해군기를 걸면 위법이 아니다. 위협사격을 3발 정도 했을 때 <글래디스 로열>은 정선했다. 루크너는 선원들을 자함으로 이송시킨 후 <글래디스 로열>은 폭약을 설치한 후 폭침시켰다.
이후 지아들러는 순조롭게 임무에 착수하여 정체를 숨기고 접근해 불시에 독일 해군기를 내걸고 발포하여 정선시킨후 포획하는 작전을 거듭했다. 선원들은 모두 지아들러에 이동시킨 다음 배는 침몰시켰다. 포로는 병기, 탄약고가 위치한 배의 전방부에만 들어가지 않고 항해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선 선내에서 자유가 허락되었다.
다음날인 1월 10일에 근해에서 영국 선적의 설탕 수송 기선인 <런디 아일랜드>도 포획 후 격침시켰다. <런디 아일랜드>의 선장은 이전에 포로 선서에 서명한 적이 있었기에 적선에 수용되는 것은 전쟁법 위반이라 따졌지만 루크너는 이를 듣지 않았다. 지아들러호는 지브롤터 해협을 떠나 더욱 남하했다.
브라질과 서 아프리카를 잇는 대서양의 거의 중앙에서 무역풍을 타고 오는 배를 기다렸다. 1월 21일에 프랑스 선적의 범선인 <샤를 그노>를 포획한 후 격침시켰다. 1월 24일에 캐나다 선적의 스쿠너 범선인 <퍼스>도 역시 포획, 격침했다. <퍼스> 호의 선장은 아내를 대동하고 신혼여행중이었다.
2월 3일에 프랑스 선적의 초석 운반 범선인 <안토낭>을 포획격침했으며 2월 9일엔 이탈리아 선적의 초석 운반 범선 <부에노스 아이레스>도 역시 포획격침했다. 2월 19일엔 영국 선적의 곡물 수송 범선인 <핀모어>를 발견해 포획했는데 <핀모어>호는 루크너가 전에 탄 적이 있던 배여서 285일간 함께 항해하면서 폭풍 질병, 식량부족과 부족으로 생사를 함께 했던 인연깊은 배였다. 루크너는 <핀모어>를 폭침시키기 전에 혼자서 선내를 둘러본 후 추억에 잠겼었다고 한다.

2월 26일에 영국 선적의 가축 수송선인 <브리티시 여멘>을 포획격침했는데 이 배엔 여성이 한 명 타고 있어서 <퍼스>호의 선장 아내와 사이좋게 지냈다고 한다. 이날 밤 프랑스 선적의 <라 로슈포코>를 포획해 격침했으며 3월 5일엔 프랑스 선적의 <듀플렉스>호를 포획격침했다.
3월 11일에 영국 선적의 기선 <혼거스>를 발견했는데 이 배의 갑판엔 5인치(12.7cm)포가 구비되었었고 무선장치도 있었다. 루크너는 정면에선 이길수 없었기에 계략을 꾸몄다. 먼저 연기를 내서 불이 난 것처럼 꾸미고 여장을 한 수병을 갑판에 세워 구조를 요청하게 했다.
<혼거스>가 구원을 위해 가까이 다가왔을 때 갑자기 독일 해군기를 내 걸고 포격에 나서 무선실을 파괴시켰는데 이 포격으로 인해 <혼거스>의 선원 더글러스 페이지가 추락하면서 증기파이프에 부딪혀 사망했다. 그는 지아들러의 교전 행위에서 유일한 사망자였다.
이어서 큰 소리를 내며 발포하며 선원들을 위협하여 패닉상태에 빠트렸는데 <혼거스>의 선장은 결국 공포에 질려 항복했다. 이 기선엔 고가인 코냑 500상자와 샴페인 2,300상자, 바이올린 피아노 등의 악기류, 고급 회화 가구 등이 실려있었는데 루크너는 이를 모두 지아들러로 옮긴 후 배를 침몰시켰다.
이 때 승조원과 포로를 합쳐 지아들러엔 약 300명이 승선하게 되었는데, 이는 수용능력의 한계에 해당했다. 3월 20일에 프랑스 선적의 범선인 <캄브론느>를 포획하자 루크너는 포로를 이 배에 태워 육지로 보냈다. 지아들러는 태평양으로 향했는데 해역을 벗어날 시간을 벌기 위해 <캄브론느>의 마스트를 절반으로 잘라내 속력을 내지 못하게 했다.
루크너는 포로에게 며칠 분의 식량을 주고 회화와 샴페인 몇 개를 선물로 주었다. <캄브론느>의 지휘는 <핀모어>호의 선장이며 최연장자였던 뮬렌에게 위임했다. 루크너는 뮬렌에게 육지에 다다를 때까지 타 선박과 연락을 취하지 말도록 부탁했다. 뮬렌은 약속대로 도중에 기선을 봐도 그냥 지나쳤다.
<캄브론느>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하여 포로는 전원 해방되었다. 이것은 기사도적인 의미뿐만이 아니라 해당 해역에서 통상파괴작전이 이루어졌음을 연합국 측에 알리는 효과도 있었다. 포로의 말을 듣고 지아들러의 존재가 드러나자 영국 해군은 남미대륙 최남단 케이프 혼(Cape Horn)에 함대를 파견하여 이를 포착하게 했다.

3.2. 태평양으로

지아들러는 이를 벗어나기 위해 더욱 남하하여 케이프 혼을 통과했다. 1917년 4월 18일에 영국 해군의 가장순양함 <HMS 오틀랜토>를 발견한 루크너는 악천후 속에 지아들러호를 돌입시켜 적함의 접근을 뿌리쳤다. 케이프 혼을 지난 후 루크너는 여벌의 구명보트에 지아들러라 써 넣은 후 바다에 흘려보냈다. 이 중 몇 척이 영국 함선에 의해 건져져 지아들러가 폭우속에 침몰한 것으로 발표하게 되었다.
이것은 얼마간 지아들러호의 추격을 중지시켰다. 태평양으로 나아간 지아들러는 크리스마스 주변에서 행동을 개시했다. 이때는 미국이 독일에 선전을 포고한 직후여서 미국 선박도 공격대상이었다. 6월 14일에 미국 선적의 범선 <A. B. 존슨>을 포획해 격침한 후 6월 18일에는 미국 선적의 <R. C. 슬레이드>를 포획격침했다. 7월 8일에도 미국 선적의 < 마닐라>를 포획격침했다.
태평양에서 영국, 일본, 미국 함대의 추격을 당하게 된 지아들러호는 이전처럼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는데, 물과 음식도 떨어지자 루크너는 보급과 휴식을 위해 소시에테 제도로 향했다. 7월 29일에 몽펠리어 섬에 도착했지만 산호초로 인해 해안으로는 다가가지 못하여 외항에 배를 정선시킨 후 루크너와 선원들은 섬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런데 8월 2일에 쓰나미가 섬을 덮치면서 산호초 위로 밀려올라간 지아들러는 선체에 큰 구멍이 생겨버려 항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루크너 대위는 섬을 개간한 후 부하 장병들과 을 짓고 생활했는데, 이를 <지아들러부르크(Seeadlerburg)>라고 명명했었다.

하지만 루크너는 섬을 탈출하기로 하여 구명보트를 타고 인근 섬을 돌면서 적당한 선박을 노리기로 했다. 섬에 남겨진 부하 장병들의 지휘는 부장 클링크 중위에게 위임하고 루크너 대위는 석달 후 자신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독자적으로 탈출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8월 23일에 루크너 대위는 5명의 부하들과 함께 보트를 타고 출항했다. 루크너와 부하들은 쿡 제도로 향하여 8월 26일에 쿡 제도 남부의 아티와 섬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