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 조세권(趙世權) |
이명 | 조선(趙璿), 조준(趙濬) |
자 / 호 | 상중(尙中) / 운사(雲史) |
본관 | 옥천 조씨[1] |
출생 | 1858년 8월 20일[2] |
전라도
순천도호부
주암면 죽림리 (현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죽림리)[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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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8년 10월 15일[4] (향년 100세) |
전라남도 곡성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391호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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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58년 8월 20일 전라도 순천도호부 주암면 죽림리(현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죽림리)에서 아버지 조병선(趙秉善, 1826. 11. 12 ~ 1893. 11. 17)[5]과 어머니 제주 양씨(1826. 8. 7 ~ 1905. 9. 23)[6] 사이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분개한 마음을 품게 되었는데, 이듬해인 1906년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는 임병찬과 합세하여 전군장(前軍將) 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전라북도 태인군· 정읍군· 순창군, 전라남도 담양군· 곡성군 등지에서 활약하며 일본군과 교전했다.
그러나 얼마 후 대한제국군 진위대에 패전하고 최익현, 임병찬, 고석진(高石鎭) 등이 체포되어 일본 대마도로 끌려가자 한성부와 각 지방을 배회하며 동지를 규합해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했다. 이어 그는 박이환(朴駬桓)· 문형모(文亨模) 등 동지들과 의병을 다시 조직해 전라북도 태인군·정읍군·순창군, 전라남도 담양군·곡성군, 지리산 일대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1908년에는 군자금 부족으로 잠시 귀향했고, 자신의 소유하던 순천군 주암면 일대 논밭 30여 마지기를 처분하고 군마를 이용해 의병진에 헌납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자신의 논밭과 가옥 등 재산 일체를 은밀히 의병진 군자금으로 처분했고, 끝내 가산을 완전히 탕진했다.
경술국치를 당한 뒤 1913년 임병찬이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자 이듬해인 1914년 독립의군부에 기꺼이 동참할 것을 표하고 전라남도 순천군 대표에 선임되어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감시와 견제가 더욱 삼엄, 격렬해지자 1915년 중화민국 상하이로 망명하기 위해 평안북도 정주군까지 갔으나 일본군이 국경을 폐쇄하고 이들을 탄압하면서 그 사이 많은 의병 동지들이 희생되었다. 결국 1918년부터 충청남도 공주군 반포면 학봉리의 동학사를 비롯해 여러 사찰을 전전하며 은둔생활을 영위하다가 일본군의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농평마을 인근 석굴에 은거했다. 은거 생활 동안 금식으로 자결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 뒤 쇠약해진 몸으로 귀향했고, 고향에서 8.15 광복을 맞았다. 이후 객지생활에서 얻은 천식과 기관지염 등 여러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1958년 10월 15일 전라남도 곡성군에서 별세했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6년 11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