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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colbgcolor=#ffffff,#191919> 1597년 1월 31일 |
프랑스 왕국 퐁쿠베르트 | |
사망 | 1640년 12월 31일 (향년 43세) |
프랑스 왕국 랄루베스크 | |
국적 | 프랑스 |
종교 | 가톨릭 |
소속 | 예수회 |
직업 | 성직자 |
성인명 |
요한 프란치스코 레지스 |
시복 | 1716년 5월 18일 (교황 클레멘스 11세) |
시성 | 1737년 4월 5일 (교황 클레멘스 12세) |
축일 | 6월 16일[1], 7월 2일[2] |
수호 | 레이스 직조공, 의료 사회복지사, 사생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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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가톨릭 신부이자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 매일매일 끊임없이 프랑스 남부 지역을 두 발로 뛰며 학대를 당한 여성들, 부모를 잃거나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고아들,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 등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한 가장 근면성실하고 봉사 정신이 투철한 인물로 많은 가톨릭 사제들의 모범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일례로 프랑스의 신부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레지스의 삶을 본받으려 노력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2. 생애
장프랑수아 레지스는 1597년 1월 31일 프랑스 남부 옥시타니 지방에서 당시 위그노 전쟁에서 공을 세워 막 귀족으로 봉해진 아버지와 귀족 집안 자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레지스는 베제에 있는 예수회 학교를 졸업하고 1616년 12월 7일 툴루즈에서 예수회에 입회했다. 이후 예수회에서 양성 과정을 보내는 동안 그는 수사학을 공부해 당시 여러 고등교육기관에서 문법을 가르쳤으며, 동시에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이렇게 교육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남들보다는 비교적 긴 실습기를 가진 그는 1630년 5월 19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스페인에 가서 페스트를 앓고 있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함께 일했던 예수회 동료들 중 몇몇이 병에 감염되어 사망하였으나 레지스는 무사하였다.이후 파미에에 있는 예수회 학교로 파견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낭트 칙령 이후 종파간의 싸움은 멎었으나 교회는 아직도 여러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어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이에 레지스는 주간에는 학교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가톨릭 신자들의 사목에 전념하였다. 그의 사목활동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당시 몽펠리에 교구의 주교는 그를 특별히 가톨릭 신자의 양성을 위해 초대하였다.
1634년 주교의 요청으로 레지스는 비비에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원래 캐나다로 파견되어 원주민들에게 선교 활동하기를 원했으나 결국 그는 일생동안 프랑스 남부의 산악지방을 돌며 사목활동에 헌신하게 되었다. 그는 어느 마을의 본당에 도착하면 며칠을 그곳에 머물면서 신자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였고, 어린이들에게는 알기 쉬운 방법으로 교리를 가르쳤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고백성사의 은총을 베푸는 등 휴식은 물론 제대로 식사할 틈도 없었을 정도로 바쁘게 보냈다. 그리고 다음 지방으로 자리를 옮겨서 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그의 간결하고 깔끔한 설교는 당시 프랑스 남부 지방의 신자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1640년 12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 지던 날, 폐렴에 걸린 레지스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껴 본당에서 하고 있던 설교와 가르침을 중단하고 선교 본부로 돌아가 3일간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 뒤 총고해를 했다. 건강 상태가 조금 호전되자 그는 다시 본당으로 돌아가 중단되었던 일을 계속 이어 나갔다. 그리고 12월 30일 밤에 레지스는 그를 간호하던 평수사에게 “주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가 천국의 문을 열고 기다리고 계신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3. 기적
1637년 당시 레지스는 마르테스 지방 험악한 산지의 오솔길을 따라 전교를 하러 떠났는데, 길을 걷다가 덤불에 걸려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중상을 입은 레지스는 병원 의사에게 가지 않고 오른쪽 다리에만 의지한 채 약 10km이나 떨어진 교회의 고백소로 가서 곧바로 고백성사를 베풀었다.이로부터 수 시간이 지난 후 그 교회의 신부는 레지스가 괜찮은지 확인하러 갔는데 그는 여전히 교회 안 고백소에 앉아 있었으며 그의 다리가 기적적으로 완쾌되어 있음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