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의 시리아 정복 전쟁 아랍어: فَتْحُ الشَّام 영어: Muslim conquest of Sy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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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629년 ~ 646년 | |
장소 | 레반트, 시리아 | |
원인 | 아라비아 전역을 제패한 이슬람 제국의 팽창 정책. | |
교전 세력 |
동로마 제국 가산 왕국 타누흐 사산 왕조 |
이슬람 제국 |
지휘관 |
이라클리오스☠ 자발라 이븐 알 아이함 테오도로스 트리티리오스† 바한† 그레고리† 토마스 바르단 부키나토르 니케타스[1] |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 자라☠ 아므르 이븐 알 아스 알 샤흐미 슈라빌 이븐 하사나☠ 야지드 이븐 아비 수피안☠ 압둘 라만 이븐 아비 바크르 이야드 이븐 간므 이븐 주하이르 알 피르☠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 이크리마 이븐 아브 야흘 아므르 이븐 히샴† |
결과 | 이슬람 제국의 시리아 정복. | |
영향 | 이슬람 제국의 팽창 가속화, 우마이야 가문의 시리아 지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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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29~646년, 이슬람으로 개종한 아랍인들이 교세 확대를 위해 동로마 제국령 시리아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 사산 왕조와 함께 중동 세계를 양분하던 동로마 제국이 위축되고 이슬람교가 아라비아를 넘어 전세계로 확장되는 계기가 된 전쟁이다.
2. 배경
기원전 64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셀레우코스 제국을 멸망시키고 시리아를 속주로 편입한 이래, 로마 제국은 7세기 동안 시리아를 지배했으며, 시리아 동부 지역은 아랍인들이 세운 가산 왕국이 로마의 속국으로서 자리잡았다. 동방의 강대국 파르티아와 사산 왕조가 시리아를 노려 침략해 일시적으로 점거한 적도 몇 차례 있었지만, 로마의 반격으로 도로 밀려났다.그러던 603년, 사산 왕조 샤한샤 호스로 2세는 동로마 제국 황제이자 지난날 그를 복위시켜주기도 했던 마우리키우스가 지난해에 포카스의 반란으로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마우리키우스의 장남 테오도시우스라고 사칭한 자를 전면에 내세우며, 찬탈자를 몰아내고 은인의 아들을 복위시키겠다고 선포하며 로마-페르시아 전쟁을 단행했다. 사산 왕조군은 극심한 내부분열로 쇠약해진 로마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해 시리아에 이어 소아시아, 이집트 일대를 모조리 공략하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위협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사산 왕조에게 정복되는 듯했으나, 622년 이라클리오스가 반격을 가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는 사산 왕조군이 광활한 점령지를 지키기 위해 병력을 분산시키느라 정작 본거지인 메소포타미아가 비어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점령지를 일일이 탈환하는 대신 적의 본거지로 직공했다. 그의 계책은 절묘하게 맞아들어갔고, 사산 왕조군은 급히 그를 막으려 했다가 연전연패했다. 628년 6월 로마군이 수도 크테시폰 근방까지 진격해오자, 호스로는 거듭된 패전에 격분해 귀족 및 장군과 병사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노예들을 대거 징집해 크테시폰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이려 했다가 귀족들의 정변으로 폐위되었고 아들 카바드 2세가 새 샤한샤로 등극했다.
카바드 2세는 네스토리우스파 주교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이라클리오스에게 보내 평화 협정을 맺기를 원한다고 알렸다. 이라클리오스는 배상금 지불, 모든 포로의 석방, 예루살렘에서 탈취한 성십자가 반환, 사산 왕조가 빼앗아간 모든 영토 양도, 수비대와 야전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그는 즉각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이라클리오스는 만족한 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장장 25년간 이어지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사산 왕조의 압제를 20여 년간 받았던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의 행정 및 군사 체계를 복구하는 데 애를 먹어야 했다.
이라클리오스는 시리아를 탈환한 후 가자에서 사해 남쪽 끝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방어선들은 도적떼로부터 보급로 및 교통로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때 요새 대부분은 사산 왕조가 또다시 쳐들어 올 것을 대비해 시리아 북부에 집중되었고, 남쪽의 아라비아에서 북상할 때 저지할 방어선은 상대적으로 허술했다. 아라비아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은 가끔 약탈하러 왔다 갈 뿐 큰 위협이 된 적은 없었고, 가산 왕국이 그 방면을 지켜주고 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라클리오스에게는 불행히도, 오랜 세월 유목과 상업 활동에 전념하며 조용히 지냈던 아랍인들이 무함마드가 창시한 이슬람교로 통합되면서, 동로마 제국은 새로운 강적을 마주하고 만다.
3. 전개
629년, 보즈라로 가던 무함마드의 사절단이 가산 왕국 군대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무함마드는 보복을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그해 9월 요르단 강 동쪽의 무타크 마을 인근에서 벌어진 무타크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 전투에서 자이드 이븐 하리타를 포함한 3명의 무슬림 지도자가 전사했고,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메디나로 귀환했다. 630년 메카에 입성하면서 수 년간 이어지던 아랍 내전을 종식하고 아라비아를 평정한 무함마드는 우사마 이븐 자이드에게 군대를 맡겨 무타크 전투의 패배를 보복하게 했다. 우사마는 632년 5~6월에 가산 왕국군을 격파하고 시리아 일대를 약탈한 뒤 귀환했다.632년 6월 무함마드가 사망하고 아부 바크르가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몇몇 아랍 부족들이 이 때를 틈타 반란을 일으켰지만 1년 만에 제압되었다. 그 후 아부 바크르는 사산 왕조로 왈리드가 이끄는 무슬림군을 파견했고, 왈리드는 사산 왕조군을 모조리 격파하고 이라크 일대를 거점으로 삼았다. 잇따른 성공에 고무된 아랍 부족들이 대거 몰려들자, 아부 바크르는 군대를 4개 군단으로 편성해 각각 지휘관과 공략 목표를 지정했다.
아므르 이븐 알 아스 알 샤흐미는 팔레스타인을 공격하고, 야지드 이븐 아부 수피안은 다마스쿠스를 공격하며, 슈라빌 빈 하사나는 요르단을 공격하며,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 자라흐는 에메사를 공격하게 했다. 이렇듯 4개 방면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 로마군이 어느 한 쪽에 집중하지 못하게 했다. 만약 군단이 한 번의 주요 전투에 집중해야 할 경우,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 자라흐가 총사령관을 맡도록 했다.
634년 4월, 무슬림군은 메디나에서 출진했다. 야지드가 먼저 떠났고, 슈라빌, 아부 우바이다, 아므르가 각각 하루씩 늦게 진군했다. 아부 바크르는 각 군단장들을 전송하면서 "부하들에게 가혹하게 대하지 말고, 적을 만났을 때 등을 돌리지 말며, 여자나 아이나 노인을 죽이지 말고, 동물을 함부로 죽이지 말며, 협약을 어기지 말고, 십자가의 숭배자들이 저항하면 검으로 공격하되 복종하면 지즈야를 내는 대가로 신앙의 자유를 줘라"라고 지시했다.
야자드의 군단은 타부크 너머로 이동하다가 사해의 남쪽 끝으로 이어지는 아라바 계곡으로 진격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아므르는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하여 엘라트에 도착했다. 로마군은 두 군단이 팔레스타인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2개의 분견대를 각각 나눠서 파견했지만 모조리 격파되었다. 한편 아부 우바이다와 슈라빌은 개별적으로 진군하여 634년 5월 초 보즈라와 자비야 사이의 지역에 도착했다.
한편 가산 왕국으로부터 무슬림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한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시리아 북부에 주둔한 군대에게 적을 저지하라고 지시했다. 황제의 명령을 받든 로마군은 아이즈나딘으로 이동한 뒤 아므르의 군단과 교전했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이후 그들은 요르단과 남부 시리아에 있던 나머지 무슬림 군단의 측면이나 후방을 치려 했다. 무슬림 측 기록에 따르면, 당시 로마군의 규모는 1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아부 우바이다로부터 대규모 로마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급보를 접한 아부 바크르는 우바이다가 강력한 적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인 경험이 없는 점을 고려해 앞서 사산 왕조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한 뒤 이라크에 있던 왈리드를 시리아 전선으로 보내기로 했다.
왈리드는 칼리파의 명령을 받들어 634년 6월 초 8천 병력을 이끌고 시리아로 출발했다. 이라크에서 시리아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다음랏울잔달을 경유하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메소포타미아를 통과하여 아르라카로 가는 길이었다. 왈리드는 다음랏울잔달을 통해 시리아로 가는 전통적인 통행로는 몇 주를 가야 하니 시급한 지원을 받아야 하는 아군에게 신속하게 가지 못할 거라 여겼다. 또한 메소포타미아를 통과한다면 도중에 로마 요새들을 지나가야 하니 역시 현명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아라비아 사막을 강행 돌파해 시리아로 가기로 작정했다. 무슬림측 기록에 따르면, 그의 병사들은 이틀 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않고 행군한 뒤 미리 정해진 오아시스에 도착하여 목을 축였다고 한다.
사막을 강행 돌파하면서 상당한 전력 손실을 입었지만, 왈리드는 끝내 사막을 통과한 뒤 시리아 북부 지역으로 들어섰다. 무슬림군이 여기로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수비대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사와 아라크, 타드무르가 잇따라 함락되었고, 알수크나, 알 카리타인, 하와린 역시 콰르틴 전투와 하와린 전투에서 동로마군이 왈리드에게 참패한 뒤 항복했다. 그 후 왈리드는 다마스쿠스를 지나친 뒤 가산 왕국의 수도 보스라로 이동했다. 가산 왕국군이 이를 막기 위해 출격했지만, 마라지 알 라하브 전투에서 왈리드에게 참패했다.
한편, 시리아의 무슬림군 최고 사령관 아부 우바이다는 슈라빌 이븐 하사나에게 보스라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슈라빌은 4,000명의 소규모 병력으로 보스라를 포위했다. 가산 왕국군은 저들이 곧 다가올 더 큰 무슬림군의 선발대라는 걸 눈치채고, 그 전에 저들을 무찌르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요새화된 도시에서 출격해 사방에서 수라빌의 군대를 공격했다. 하지만 슈라빌이 끈덕지게 버티는 사이, 왈리드, 아부 우바이다의 군대가 잇따라 도착했다. 결국 가산 왕국군은 참패한 뒤 보스라에 틀어박혔고, 무슬림군은 보스라를 포위하여 식량을 얻지 못하게 했다. 634년 7월 중순, 모스라는 굶주림에 시달린 끝에 항복했다. 이리하여 가산 왕국은 멸망했고, 가산 왕국의 마지막 군주 자발라 이븐 알 아이함은 기병대를 거느린 채 보스라에서 탈출한 뒤 로마군과 합세했다.
그 후 아부 바크르의 지시에 따라 아부 우바이다로부터 시리아의 무슬림군 총지휘권을 전달받은 왈리드는 로마군이 집결하고 있던 아즈나다인으로 진격했다. 634년 7월 30일, 양측은 아즈나다인에서 시리아의 패권을 놓고 격돌했다.(아즈나다인 전투) 그 결과 동로마군은 참패했고, 시리아는 무슬림군의 침략에 취약해졌다. 왈리드는 여세를 몰아 동로마 제국의 요새 도시인 다마스쿠스를 공략하기로 했다. 다마스쿠스 수비대 지휘관 토마스는 적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에메사에 있던 이라클리오스에게 지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요새 수비를 강화할 시간을 벌기 위해 적의 행군을 지연시키고자 병력을 파견했다.
634년 8월 중순, 다마스쿠스에서 90마일 떨어진 티베리아스 호수 인근에서 벌어진 야쿠사 전투에서, 무슬림 별동대가 다마스쿠스에서 출격한 로마군을 격파했다. 다마스쿠스의 또다른 로마군은 634년 8월 19일 마라스 사페르 전투에서 다시 무슬림군에게 격파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슬림군의 진격 속도가 크게 줄어들었고, 토마스는 이 틈을 타 공방전을 준비할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 8월 20일 다마스쿠스에 도착한 왈리드는 도시를 포위하는 한편, 도시를 주변 지역으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다마스쿠스에서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길목에 분견대를 배치하고 다마스쿠스-에메사 경로에도 분견대를 배치했다.
이라클리오스는 다마스쿠스를 구하기 위해 구원군을 파견했지만 다마스쿠스에서 20마일 떨어진 사니타 알 우카브 전투에서 무슬림군에게 패배했다. 토마스는 포위를 풀기 위해 번번이 출격했으나 왈리드에게 패배했다. 결국 634년 9월 18일, 식량이 바닥나서 굶주려 죽는 이들이 속출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 토마스는 왈리드에게 항복했다. 이 소식을 접한 이라클리오스는 에메사에서 안티오키아로 철수했다. 왈리드는 그들을 요격하기로 하고 기병대를 파견했고, 그들은 지름길을 통해 다마스쿠스 북쪽 190마일 지점에 있는 마라이 알 데바즈에서 로마군을 따라잡아 큰 타격을 입혔다.
634년 8월 22일 아부 바크르가 사망했고, 우마르가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그는 왈리드를 해임하고 아부 우바이다를 새로운 시리아 총사령관으로 선임했다. 아부 우바이다는 다마스쿠스 공방전이 벌어지던 중에 새 칼리파의 이같은 명령서를 받았지만, 왈리드가 이 일로 빈정이 상해 공방전을 제대로 이끌지 않을 것을 우려해 다마스쿠스가 함락할 때까지 침묵했다. 나중에 우바이다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왈리드는 "아부 바크르가 죽고 우마르가 칼리파가 되었다면, 우리는 그에게 복종한다"라며 기꺼이 총사령관 직을 그에게 넘기고 그의 밑에서 게속 복무했다.
우바이다는 베이루트에서 동쪽으로 30마일 떨어진 잘레 근처의 아부 알 쿠즈를 공략하기로 했다. 이때 그는 아부 알 쿠즈 수비대의 규모를 잘못 파악하고 얼마 안 되는 병력을 파견했다. 수비대는 곧바로 이들을 포위해 섬멸하려 했지만, 우바이다가 뒤늦게 일이 잘못 되었다는 걸 깨닫고 왈리드를 급파했다. 왈리드는 634년 10월 15일 아부 알 쿠즈 전투에서 수비대를 격파하고 수백 명의 로마인 포로와 전리품을 챙겨 돌아왔다. 이리하여 시리아 중부가 무슬림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시리아 북부와 팔레스타인 사이의 연락망은 단절되었다.
아부 우바이다는 뒤이어 강력한 비잔티움 수비대와 아즈나다인 전투의 생존자들이 있는 해발 500피트의 산악 요새 파흐를 공략하기로 했다. 이 지역은 동로마군이 무슬림군과 아라비아와의 연락망을 끊을 수 있는 거점이었으며, 여기에 몰린 대규모 적군을 남겨둔 채 팔레스타인을 맘놓고 공격할 수 없었다. 왈리드는 선봉대를 이끌고 파흐로 진군했고, 635년 1월 23일 요새 인근 평원에서 회전을 벌이는 쪽을 택한 로마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리하여 후방의 위협을 없앤 뒤, 슈르발과 아므르가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하여 635년 2월 티베리아스와 셰안을 공략했다. 뒤이어 야지드가 우마르의 명령을 받들어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을 공략하고자 진격했다. 로마 수비대가 팔레스타인으로 침투하는 적을 막고자 출격했으나 아즈나딘 전투에서 아므르와 슈르발의 협공으로 궤멸되었다.
이후 아므르는 나블루스, 아마와스, 가자, 유브나를 잇따라 석권했고, 슈르발은 아크레와 티레를 공략했으며, 야지드는 시돈, 아르카, 자바일, 베이루트 등 항구도시들을 점령했다. 이리하여 예루살렘과 카이사레아를 제외한 팔레스타인, 요르단 남부 시리아가 무슬림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야지드는 우마르의 명령에 따라 카이사레아를 포위했지만, 공성 무기가 없어서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다. 한편, 아부 우바이다와 왈리드는 북부 시리아를 공략하고자 북쪽으로 이동했다. 이렇듯 무슬림군이 남쪽과 북쪽으로 각각 이동하면서 다마스쿠스의 방비가 허술해지자, 이라클리오스는 재빨리 테오도로스 트리티리오스 휘하의 기동대를 파견해 다마스쿠스를 탈환하게 했다.
테오도로스의 로마군은 이동하던 중 마라이 알 로마에서 이븐 우바이다와 왈리드의 무슬림군과 마주쳤다. 양측이 서로 대치하고 있던 야밤에 테오도로스의 로마군 절반이 조용히 진영을 빠져나와 다마스쿠스로 이동했다. 그러나 로마군의 움직임은 무슬림 정찰대에게 고스란히 포착되었고, 왈리드는 우바이다에게 허락받은 뒤 별동대를 이끌고 다마스쿠스를 향해 질주했다. 그 후 우바이다는 마라이 알 로마에 남은 로마군을 상대로 승리했고, 왈리드 역시 다마스쿠스를 막 포위 공격하려던 로마군을 급습하여 궤멸시켰다. 테오도로스는 소수의 추종자들만을 거느린 채 이라클리오스 황제에게로 달아났다.
7일 후, 우바이다는 헬리오폴리스로 쳐들어갔다. 헬리오폴리스는 짧은 저항 끝에 항복하고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조했다. 이후 우바이다는 왈리드를 에메사로 파견했다. 이때 에메사가 1년간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우바이다는 왈리드로부터 에메사의 제안을 전달받고 고심 끝에 점령지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집중하기 위해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라클리오스는 무슬림군이 진군을 멈춘 사이에 안티오키아에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집결시킨 뒤 에메사에 군대를 파견했다. 이에 우바이다와 왈리드는 로마 측이 평화 협약을 위반했다고 질책하고 에메사로 진군했다. 그들은 적의 저항을 모조리 분쇄하고 에메사를 포위했고, 2달간의 포위 끝에 636년 3월에 에메사를 공략했다.
갈수록 전황이 악화되었지만, 이라클리오스는 포기하지 않고 반격 계획을 구상했다. 그는 무슬림군을 상대로 회전을 벌이는 건 승산이 적다고 판단하고, 모든 주요 도시에 대규모 증원군을 보내고 무슬림 군단들이 그 도시들에 매달리느라 고립되게 한 뒤 각개 격파하기로 했다. 또한 사산 왕조의 샤한샤 야즈데게르드 3세에게 자신의 딸 마얀을 시집보내 양국간의 동맹을 체결한 뒤, 자신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역습을 감행하는 동안 야즈데게르드는 이라크에서 반격을 가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라클리오스의 원대한 계획은 시작부터 삐끗거렸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극심한 내부분열로 인해 반격에 쓸 군대를 제 때에 마련하지 못했고, 결국 이라클리오스가 시리아로 쳐들어갈 때 이라크를 어찌하지 못했다. 이라클리오스는 이를 모른 채 636년 6월 대규모 병력을 시리아로 급파했다. 왈리드는 이라클리오스의 계획을 눈치채고 우바이다에게 각개격파될 우려가 있으니 모든 무슬림군을 한 곳에 집중시킨 후 적과 회전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우바이다는 이를 받아들여 시리아의 모든 무슬림군을 자비야에 집결시켰다. 이후 우바이다는 기병이 효과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야르무크 강 평원으로 철수했다. 그 사이 왈리드는 동로마군 선봉대와 맞붙어 타격을 입혔다.
636년 7월, 무슬림군은 야르무크 평원에 도착했다. 1~2주 후, 바한이 이끄는 로마군과 가잔 왕국의 마지막 왕 자발라 이븐 알 아이함의 아랍군이 현장에 도착했다. 바한은 적을 견제하고자 자발라의 아랍군을 아랍군 진영 인근에 보냈지만, 왈리드가 이들을 급습해 패주시켰다. 그 후 양자는 한 달간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러는 사이 칼리파 우마르가 파견한 지원군이 도착했고, 양자는 곧 회전을 벌이기로 했다. 전투 전날 밤, 우바이다는 군사 회의를 소집한 뒤 자신의 지휘 역량은 왈리드에게 못 미치니 그에게 총 지휘권을 맡기고 자신은 야전 사령관을 맡겠다고 밝혔다. 그리하여 모든 시리아 방면 무슬림군 총사령관을 임시로 맡은 왈리드는 636년 8월 15일부터 6일간 동로마군을 상대로 야르무크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동로마군은 참패했고, 바한, 테오도로스 트리티리오스, 그레고리 등 숱한 로마군 장성들이 전사했다.
야르무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무슬림군은 이전에 점령했던 지역을 도로 장악했다. 이제 남은 것은 예루살렘과 카이사레아였다. 둘 중 어느 곳을 공략할 지를 놓고 장군들과 논의한 끝에, 우바이다는 예루살렘을 공략하기로 했다. 4개월간 이어진 공방전 끝에, 예루살렘은 항복을 선언했다. 단, 칼리파가 직접 와야만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아므르는 왈리드가 우마르와 매우 닮았으니 그가 대신 칼리파를 자처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왈리드는 "칼리파는 오로지 우마르 뿐이다"라며 완강히 거부했고, 우마르가 637년 4월 현장에 도착한 뒤 예루살렘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 후 야지드의 군단은 다마스쿠를 거쳐 베이루트를 공략했고, 아므르와 슈라빌의 군단은 팔레스타인의 나머지 지역을 정복하러 떠났으며, 우바이다와 왈리드는 17,000명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북 시리아 전역을 정복하고자 북상했다.
우바이다와 왈리드는 에메사를 상실한 동로마 제국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새인 칼키스로 향했다. 칼키스는 시리아에서 안티오키아와 아나톨리아, 아르메니아로 가는 길목을 통제하는 요충지였다. 요새 수비대 지휘관 메나스는 이슬람군 선봉대가 칼키스에서 동쪽에서 3마일 떨어진 하지르에 이를 때 급습하여 섬멸하기로 했다. 그러나 선봉대를 맡은 왈리드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하지르 전투에서 메나스를 격파했다. 우바이다의 본대는 곧 왈리드와 합세한 뒤 칼키스를 포위했고, 칼키스는 637년 6월 항복했다. 그 후 무슬림군은 북쪽으로 진군하여 알레포를 포위해 637년 10월 적의 맹렬한 저항을 물리치고 함락시켰다.
이제 다음 목표는 안티오키아였다. 우바이다와 왈리드는 안티오키아로 진군하기 전에 도시를 아나톨리아로부터 고립시키기로 했다. 그들은 도시 북쪽 길목에 기동대를 파견했다. 로마군은 어떻게든 안티오키아 포위를 막기 위해 애썼지만 모조리 격퇴되었다. 안티오키아 수비대는 야르무크 전투 이후 이라클리오스에게 더는 대규모 병력을 지원받을 가망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637월 10월 30일에 모든 병사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안전하게 갈 수 있다는 조건하에 항복했다. 이후 왈리드가 북쪽으로 계속 진군하여 아나톨리아의 카즐리르막 강까지 진군했고, 우바이다는 남쪽으로 진군하여 라즈키아, 야블라, 타르투스를 점령했다.
이라클리오스는 무서운 기세로 몰아붙이는 적을 피해 에데사로 이동한 뒤 자지라와 아르메니아를 지키기 위한 방어선 구축을 완료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동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산길을 통해 무슬림군을 회피하다가 킬리키아 성문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넋두리를 남겼다고 한다.
"잘있거라, 시리아여. 그대에게 기나긴 작별 인사를 고한다. 나의 사랑하는 속주여. 너의 아름다움은 이제 이교도의 수중에 있구나. 오, 시리아여, 그대에게 평화가 있으라. 그대가 적들의 손에 얼마나 아름다운 땅이 될 것인가!"
이라클리오스는 시리아를 포기했지만, 나머지 속주를 지킬 시간을 벌기 위해 자지라의 기독교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은 즉시 대규모 군대를 소집한 뒤 무슬림군의 사령부가 위치한 에메사로 진격했다. 우바이다와 왈리드가 급히 그들보다 앞서 에메사에 도착했지만, 적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꼼짝없이 포위당했다. 왈리드는 요새 안에서 말라죽느니 차라리 야전으로 승부를 보자고 제안했지만, 우바이다는 이를 거부하고 우마르에게 밀사를 급파해 자지라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우마르가 요청에 따라 1,000명의 기동대를 파견해 자지라를 공격하자, 기독교 군대는 고향을 지키고자 그곳으로 철수했다. 이때 왈리드가 요새에서 출격해 기독교도 군대의 후미를 쳐서 큰 타격을 입혔다.
그 후 이라크의 무슬림 사령관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는 우마르의 지시에 따라 자지라를 정복하기 위해 이야드 이븐 간므 이븐 주하이르 알 피르 휘하의 군대를 파견했다. 639년에서 640년 사이에 락까가 무슬림군의 손에 넘어갔고, 자지라 대부분이 저항을 포기하고 지즈야를 바치고 충성을 맹세했다. 그렇게 자지라를 무너뜨린 뒤, 우바이다는 왈리드와 이야드 이븐 간므에게 자지라 북쪽의 동로마 영토를 공략하게 했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이동하여 에데사, 아미타, 말라티아와 아르메니아 전체를 공략하고 아라라트 등 북 아나톨리아와 중앙 아나톨리아를 급습했다. 이라클리오스는 이에 대응하여 안티오키아와 타르투스 사이의 모든 요새를 버리고 그곳에 사는 백성들을 전부 아나톨리아로 이송시켜서 무슬림 지배 지역과 아나톨리아 본토 사이에 무인 지대를 만들었다.
우바이다와 왈리드는 내친김에 아나톨리아까지 석권하려 했지만, 우마르는 이를 저지하고 시리아로 돌아가서 통치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왈리드가 너무 많은 승리를 거두면서 명성이 자신을 능가할 정도가 된 것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우상 숭배 금지는 이슬람의 교리인데 민중들이 왈리드를 신으로 섬기니 불경하다"는 이유로 해임했다. 왈리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마르에게 계속 충성했고, 에메사에서 여생을 보내다 642년에 사망했다. 이 때에 장군의 몸이 되어 전장에서 죽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였는데, 그의 부인이 "알라의 검이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이 전쟁에서 져서 죽으면 그 꼴이 뭐가 되겠는가"라며 위로하자 그제야 편히 눈을 감았다고 전해진다.
639년, 시리아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 자라, 슈라빌 이븐 하사나, 야지드 이븐 아비 수피안, 이야드 이븐 간므 이븐 주하이르 알 피르 등 시리아 방면 장성들이 잇따라 병사했다. 이에 우마르는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을 신임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선임해 시리아를 다스리게 했다. 당시 그의 처지는 영 좋지 않았다. 시리아에 주둔한 무슬림군 대부분이 역병으로 죽거나 무력해졌고, 기독교를 신봉하는 현지 주민들은 이교도인 아랍인들의 지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무아위야는 이들을 회유할 필요성을 느끼고, 시리아에서 기독교를 신봉하는 아랍 부족인 칼브 부족장의 딸 마이순과 결혼했다. 이후 기독교도들에게 관용을 베풀었고, 동로마 제국의 과중한 과세로 고통받던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세금을 대폭 삭감했다. 이에 주민들은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이와 함께 병력을 대폭 충원하고 철저한 훈련을 실시했으며, 우수한 장비를 가급적 확보하고 병사들의 봉급을 인상하고 정기적으로 지급했다. 그 결과 시리아의 무슬림군은 강력한 전투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장병들은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한편, 그는 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의 행정 체계를 대폭 수용해 행정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시리아를 재정비하는 데 성공한 우마위야는 645년에서 646년 사이에 시리아 해안에 있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요새인 트리폴리를 함락하면서 시리아 정복을 완료했다.
4. 이후
시리아를 사실상 자신의 영지로 삼는 데 성공한 무아위야는 해군을 보유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동로마 함대가 지중해를 항해할 수 있는 한,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의 해안선은 절대로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집트 총독 아드불라 이븐 사드와 함께 제3대 칼리프 우스만을 설득하여 이집트와 시리아에 대규모 함대를 건설하는 것을 허락받았다.그 후 기독교인 선원들과 무슬림 군대로 구성된 해군을 창설하여 해상 원정을 감행해 키프로스(649년)와 로도스(654년)를 잇따라 점령하고 아나톨리아의 리키아 해안에서 동로마 해군을 괴멸시켰다.( 마스트 해전) 이와 동시에 정기적으로 아나톨리아에 약탈 원정을 떠나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우스만의 지시에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655년 우스만이 암살당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은 중단되었다. 무아위야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칼리파에 즉위한 뒤 우스만의 살인자들을 체포하고 처벌하는 걸 제대로 이행하지 않자 반감을 품었다. 그는 알리가 칼리파 살인의 공범이라고 간주하고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시리아에 구축한 세력을 발판 삼아 알리에 도전했다.( 1차 피트나) 수년 간의 내전 끝에 661년 알리가 피살당하고 알리의 아들 하산 이븐 알리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무아위야는 무아위야 1세로서 칼리파에 등극하고 우마이야 왕조를 건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