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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치인 이명박과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 문서.2. 보수정당계 정치인
2.1. 친이
자세한 내용은 친이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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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친이계 인사 이재오, 이상득 전 의원 |
주도권을 먼저 잡은 건 박근혜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대표를 맡은 박근혜는 탄핵 역풍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121석을 확보하며 개헌저지선을 확보했다. 이로 인해 기존 민정계는 와해되어 친박으로 흡수되었고 박근혜는 재보궐선거와 2006년 지방선거를 모두 승리로 이끌며 한나라당의 당권을 장악했다. 당권이 친박의 중심인 민정계, 공화계로 넘어가자 구심점을 잃은 민주계는 이명박을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다. 이것이 친이 계파의 탄생이었다.
2.2.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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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시절 김영삼 전 대통령 서울 자택에 방문한 이명박 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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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경남 거제시 장목면 거제휴게소에서 열린 거가대로 개통식에 참석, 김영삼 전 대통령과 환담하는 모습 |
이명박을 정계에 발탁한 인물도 바로 김영삼이다. 김영삼은 운동권 출신에다 현대건설에 입사해 사장까지 오른 이명박을 90년대 영입하여, 총선과 대선에서 자신과 경합했던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을 물먹이기도 했다. 김영삼은 2000년대 17대 대선 정국에서도 박근혜와 당내 경선을 벌이던 이명박을 지지했고, 이명박 또한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김영삼을 깍듯하게 예우했다.
상도동계의 몇몇을 제외한 거의 전부가[2]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경선 때부터 친이계로 편입돼서 이명박을 지지하기도 했다.[3] 또한, 이명박은 김무성, 박종웅, 김문수, 안경률, 김덕룡, 정의화, 정병국, 김태호, 심재철, 이재오, 이병석, 이방호, 박형준, 안상수, 이상득, 김형오, 박희태[4] 등 김영삼계 출신인 다른 친이계 정치인들과 함께 김영삼과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간적으로도 가깝게 지냈다. 특히 이 중 김덕룡은 상도동계 직계인데, 이재오, 이상득, 박희태와 더불어 친이 6인회에 들어가기도 했다.[5]
다만, 이명박 및 친이계가 2008년 한나라당 공천권을 쥐고 한나라당 공천에서 상도동계 직계 인물 박종웅을 공천에서 탈락시키고, 친이계가 아니었던 김무성을 공천에서 떨어뜨리자 이땐 김영삼이 이명박을 비난하면서 김무성의 선거운동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만큼 김영삼이 김무성을 아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2010년대 들어 당대표가 된 김무성이 당시 박근혜 정부에 너무 노골적으로 굽신거리는 행보를 보이자 아들 SNS를 빌려 병문안도 안오냐고 불쾌한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래서 김무성이 급하게 병문안을 갔다.
이명박의 고향인 포항과 본관인 경주는 비록 행정상으로는 경상북도에 소속되어 있지만, 부산과도 지리적으로 멀지는 않기 때문에 실 생활권상으로 PK과도 가까운 지역인데다가[6][7] 이명박의 고향이기도 해서, 압도적인 이명박 지지와 반대로 반박근혜 성향을 보여 정치상으로 PK 계열로 분류되기도 했다.
또한 이명박은 김영삼에게 본인과 친한 저명 인사들을 소개하기도 했고,[8] 재임 중에도 김영삼뿐만 아니라 기타 상도동계 주요 인사들도 대우하였다. 또 문민정부의 핵심 인사들 중에서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중책을 맡은 사람들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문민정부에서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내고 이명박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맡은 한승수와 문민정부에서 경제기획원 차관을 지내고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강만수[9], 그리고 문민정부에서 청와대 제2부속실장을 지내고 이명박 정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정병국이 있다.
어찌됐든 친이계는 보수정당내 민주계에서 상도동계를 잇는 계파로 인정받고 있기에[10] 2015년 김영삼이 사망했을 당시 이명박도 굉장히 비통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2.3. 이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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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담하는 이명박 대통령, 이회창 총재 |
2005년 한 시사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솔직히 노무현, 이회창을 놓고 인간적으로 누가 더 맘에 드냐하면 노무현”이라며 자신을 깎아내리는 발언을 했다. 또 “이회창씨는 당에서 만든 공약을 갖고 두번 다 써 먹었다. 별 내용도 없이”라면서 “나는 서울시장 선거때 당에서 만든 공약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회창 총재의 핵심 측근인 이종구 전 언론특보는 “이전총재가 이시장 발언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에 대해 이회창은 이명박 발언에 대해 극도로 불쾌감을 나타내며 이종구 언론특보 명의의 반박 논평을 통해 “이명박 시장이 서울시장 선거 때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적 지지에 힘입어 당선된 것은 천하가 다 안다. 지나치게 대권병에 든 것은 아닌지 씁쓸하다”고 했다.
특히 이명박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인간적 호감을 나타내며 이회창을 비하한 것을 두고는 ‘비례의 극치’ ‘몰염치’라고 노골적인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이긴 자에게 아부하고 진 자를 짓밟으려는 태도가 아니냐”고 흥분했다.
또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이명박 대선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직을 고사한 배경을 놓고 갈등이 불거졌는데 2007년 10월 10일 이회창 총재가 “대통령이 될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되겠느냐”라며 자신에게 상임고문직을 제안한 적이 없다는 이명박 후보에 대해 직격탄을 날렸다. 서로 시비가 엇갈리면서 갈등이 불거졌다.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도 여러 차례 충돌이 있었다. 당시 이회창은 이명박에 반대하며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이 되었다. 이회창 후보는 "'범죄피의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나라는 동서고금 어디에도 없다. 만에 하나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특검정국이 되고 여야간 사생결단 충돌이 일어날 게 뻔하다"면서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 더 이상 미래는 없습니다."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또한 공약도 이명박은 경제분야로 치우쳐저 있음을 노리고, 이회창은 안보분야에 강점을 두어 보수후보로서의 차별화를 두었다. 또 이명박의 BBK 논란 및 과거 선거법 위반 논란 등을 공격하며 자신의 대법관, 대쪽 총리 이력을 연관시키는 등의
이후 이회창은 자유선진당을 창당하고 18대 총선때 총 18석을 획득, 물론 20석이 기준인 원내교섭단체 지위 획득에 아슬아슬하게 실패했다. 18대 국회 들어선 이후에는 2008년 촛불집회에서 이명박 정부와 여당을 비판하는 등 입지를 세울려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에는 이회창 총재는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우리 정치가 한단계 더 성숙되기 위해서 이명박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해 정치 보복수사 근절 의지를 밝혀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후에는 2012년 19대 총선에서 자유선진당이 참패를 하자 그 해 5월 20일 탈당했고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가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며 새누리당으로 복당하였다. 18대 대선 선거기간동안 박근혜의 지원유세를 다녔고, 박근혜가 대통령이 당선되고 이듬 해인 2013년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난걸로 보인다.
[1]
이후에 한나라당에 합류한
박근혜도 영입하게 된다.
[2]
예외로 강삼재는 이회창을 지지했고, 서청원은 박근혜를 지지했으며, 김무성도 당시에는 친박으로 분류됐다.
[3]
당시 박근혜를 지지하던 친박계가 군부보수계를 대표하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행보였다.
[4]
사실
이상득,
김형오,
박희태는
민정당에서 정치생활을 시작한 인물들이지만, 14대 대선의 민자당 경선에서 김영삼을 지지하면서 김영삼의 민주계로 사실상 편입되었다.
[5]
본문에서 언급되지 않은 나머지 둘은 이명박 본인과 이명박 정부에서
방송통신위원장을 지낸
최시중이다.
[6]
특히
울산, 포항, 경주가 매우 긴밀한 관계로 엮여있다. 예를 들면
현대제철 포항 제철소의 가장 중요한 고객은 울산의
현대자동차 공장이며,
현대자동차의 자동차 시트 공급처는 경주에 본사가 있는
다스(!)라는 회사였다.
[7]
반대로
경상남도
창녕,
합천 지역의 경우 행정상으로는 경남이지만
대구와 워낙 가깝기 때문에 실 생활권상
TK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다. 참고로 이런 모호성 때문에 이 지역에서 태어난 인물들은 각자 선택한 고등학교의 위치에 따라 TK 또는 PK로 서로 다르게 분류되는데, 예를 들면
대구에 있는
영남고를 다닌
홍준표와
대구공고를 다닌
전두환은 TK로,
부산에 있는
경남고를 다닌
강만수와
부산고를 다닌
안경률은 PK로 분류된다.
[8]
대표적으로 정운찬 前 국무총리나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있다.
[9]
다만 이명박이 강만수를 기용한 것은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에 와서도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특히 진보 좌파 진영에서는 이명박이 문민정부 시절에
외환위기를 일으킨 주범으로 꼽히는 강만수를 기용해
대기업과 부동산 부자에 유리한 경제 정책을 폈다고 주장했다.
[10]
다만 이명박의 스탠스는 좀 애매하긴 하다. 친박 세력도 품어야 되기 때문에 김영삼이 싫어한 박정희도 은근히 띄워주는(17대 대선 경선때 이기고 난 이후에도 어릴 땐 나도 운동권에서 박정희 정부 반대 시위도 하고 했지만 지금은..이라면서 말을 흐리기도 했다) 행보를 보였다. 물론 2023년 박정희 추도식에도 안간다고 에둘러 표현한거 보면 이명박 속내는 본인만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