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키 사토시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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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키 사토시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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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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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
두산 베어스 등번호 29번 | ||||
이승준 (1999~2002) |
→ |
이리키 (2003) |
→ |
김수훈 (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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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키 사토시 [ruby(入来, ruby=いりき)][ruby(智, ruby=さとし)] | Satoshi Irik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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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7년 6월 3일 |
미야자키현 미야코노죠시 | |
사망 | 2023년 2월 10일 (향년 55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카고시마실업고등학교[1] |
신체 | 178cm, 80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89년 드래프트 6순위 ( 킨테츠) |
소속팀 |
킨테츠 버팔로즈 (1990~1996)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96) 킨테츠 버팔로즈 (1997~1998)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9~2000) 야쿠르트 스왈로즈 (2001~2002) 두산 베어스 (2003) 라뉴 베어스 (2004) |
가족 | 동생 이리키 유사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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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前 프로야구 선수. 일본프로야구, 한국 프로야구, 대만 프로야구 리그 3개 리그에서 활동했던 저니맨이자 KBO 리그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선수 제도를 통해 입단한 일본인[2] 선수다.2. 선수 경력
2.1. NPB 시절
카고시마 실업 고등학교 진학을 거쳐 사회인야구팀 미츠비시 자동차 미즈시마에서 뛰다가 1989년 킨테츠 버팔로즈에 6순위로 지명받아[3] 프로에 데뷔했다. 입단 후 6년간 임시 선발과 불펜 투수를 오고갔으나 1996년에 1군에 등판하지 못하다가 6월에 포수 요시모토 료와 맞트레이드되어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이적했다. 그러나 히로시마에서도 딱히 기회를 받지 못하며 6경기 등판, 0승 3패의 부진한 성적에 그쳤고 시즌 후 다시 요시모토와 트레이드되어 킨테츠로 돌아가게 된다.1999년에 사토 히로유키와의 맞트레이드로 동생인 이리키 유사쿠[4]가 뛰고 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면서 요미우리 구단 역사상 최초의 형제 선수로 기록되지만, 1999년에는 22경기 출장에 그쳤고 2000년에는 아예 1군에 올라오지 못하면서 시즌 후 방출되었다. 그리고 2001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입단했는데, 여기서 이리키는 10승 3패 평균자책점 2.85의 성적을 거두며 만 34세의 나이에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다. 마찬가지로 그 해 13승을 거두면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 동생 유사쿠와 함께 올스타전에도 출장했고, 그 해 야쿠르트의 센트럴리그-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하는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이듬해인 2002년에는 1승 3패 평균자책점 6.66으로 크게 부진했다. 이 해에 사생활 문제 등으로 이혼을 하는 등 부침을 겪었고 불성실한 태도 등으로 인해 방출을 당하게 된다. 여기에 사생활 문제가 일본 구단들 사이에서 소문이 쫙 퍼진 탓에 구속이나 구위 등 경쟁력은 아직 있었음에도 일본에서의 활약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2.2. KBO 리그 시절
이렇게 일본에서의 입지를 잃은 이리키에게 손을 내민 것은 두산 베어스였다. 두산은 2002년 12월 23일 총액 15만 달러(계약금 3만 달러, 연봉 7만 달러, 옵션 5만 달러)[5]에 이리키를 영입하며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재일교포를 제외한 최초의 일본인 선수가 한국 땅을 밟게 됐다. #김인식 감독은 진필중이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면서 비게 된 마무리 자리를 이리키에게 맡길 계획이었고, 이리키는 5월 초 한 때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등 두산의 새 마무리 투수 역할을 준수하게 해냈다. 그러나 5월 하순으로 갈수록 마무리 자리가 적응되지 않는지 성적이 하락했고, 특히 피안타가 많아진 탓에 마무리 투수의 덕목인 안정감에서 문제를 드러냈다.
결국 김인식 감독은 선발로 부진하던 구자운과 이리키의 보직을 맞바꿔 6월 중순부터 이리키는 선발로 나서게 됐다. 갑작스러웠으나 결과는 나쁘지 않았는데, 리그 최다인 5번의 완투를 기록하는 등 이닝이터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승운은 조금 없긴 했어도 시즌 중반 합류한 마크 키퍼와 함께 선발진을 잘 이끌었다.[6] 그러나 재계약은 실패. 공격적인 투구 스타일 때문에 이닝 소화력이 좋았지만, 반대급부로 피홈런이 많은 데다 제구도 은근히 들쭉날쭉했던 탓에[7] 잘 던지다가 한 번씩 크게 무너지는 일이 적잖았다. 결정적으로 일본 시절부터 지적된 성실하지 못한 태도가 발목을 잡았다.
시즌 성적은 39경기(5완투 1완봉) 7승 11패 5세이브 평균자책점 3.74. 선발 투수로의 성적은 20경기 131이닝 7승 9패 평균자책점 3.92다.
2.3. CPBL 시절
2004년 이리키는 대만프로야구 팀 라뉴 베어스(現 라쿠텐 몽키스)와 계약을 맺었다. 라뉴에선 11경기에서 4승 6패 평균자책점 3.39를 기록하다 시즌 도중에 방출되었고 결국 그 해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3.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8]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WHIP |
2003 | 두산 | 39 | 159 | 7 | 11 | 5 | 0 | 3.74 | 155 | 17 | 53 | 9 | 87 | 1.31 |
KBO 통산 (1시즌) |
39 | 159 | 7 | 11 | 5 | 0 | 3.74 | 155 | 17 | 53 | 9 | 87 | 1.31 |
4. 사망
2023년 2월 10일 오후 9시 50분경 미야코노죠 시내에서 운전 도중 반대 방향에서 오던 승용차와 충돌하여 운전 중이던 차가 도로 근처의 논밭으로 추락하는 교통사고를 당했고[9], 의식불명에 빠진 상태로 긴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결국 약 2시간 후인 오후 11시 45분에 중증 두부외상으로 사망했다. 향년 55세. # 당시 인근의 미야자키시에서 투수코치로 오릭스 버팔로즈 스프링캠프를 지도하던 동생 유사쿠는 형의 사망 소식을 듣고 곧바로 미야코노죠시로 가느라 사고 다음 날인 11일 훈련에 참석하지 못했다.사후 미야자키현 경찰본부에 따르면 사회복지 분야에서 개호사로 일하고 있었다고 하며, 한일 야구 팬들은 모두 이리키의 사망을 애도했다. 사망 1주일 전 가족들이 다 같이 어머니의 기일에 같이 모였는데 그 자리에서 동생 유사쿠가 아버지를 부탁한다고 말하자 '(자신에게) 맡겨두라'고 한 것이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되고 말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5. 기타
- 첫째 동생인 이리키 유사쿠는 현재 오릭스 버팔로즈의 투수 코치를 맡고 있으며 막내동생 이리키 히로유키도 야구선수였다. 단 히로유키는 프로에 진출하진 않았다.
- 동생 유사쿠와 일본프로야구 시절 통산 승수가 35승으로 동일하다. 심지어 형제 모두 커리어하이가 2001년 시즌이었고 그 해 올스타전에서 나란히 등판했다.
- 동생 유사쿠의 회고에 따르면, 포수 사인을 잘 외우지 않고 자기 멋대로 던져서 요미우리 시절 주전 포수이자 함께 배터리를 짰던 무라타 신이치가 엄청 고생했다고 한다. 증언
- 2002년 사생활 문제로 일본야구계를 떠들석 하게됐다. 결국 이해 첫번째 부인과 이혼을 하게 되고 재산 대부분을 날리고 어쩔수 없이 일본야구계를 떠나게 되었다.
- 박명환야구TV에서 잠깐 언급됐다. 정수근이 말하기로는 맥주와 여자를 좋아했다고 한다. 아예 욕조에 얼음과 물을 부어놓고 맥주를 가득 담근 후에 주변 동료들에게 마시자고 꼬셨다고.[10][11]
- 한국이 술값이 비싸다고 불만을 토로했다.[12] 그래서 처음에 하이트를 즐겨마셨으나 팀동료가 두산이니까 카스를 먹으라는 지적을 받고 카스로 바꾸었다...
- 프로 입단 후에 2차례 결혼했는데, 2번째는 은퇴 후 학생 시절에 만났던 여자친구를 다시 만나 재혼했다고 한다. 은퇴 후에 전처에게 줄 위자료와 본인의 낭비벽 등으로 생활고를 겪고 일용직을 전전하는 등 고생하고 있었는데 이때 지금의 아내가 많이 도와 주면서 결혼까지 이어지게 되었고, 아내 덕에 처남이 운영하는 도시락 체인점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튀김 등 각종 요리를 할 때 이것저것 주의를 받는 것을 못 견뎌서 몇년 만에 그만뒀고 이후 취직과 실직을 거듭하며 아내에게 의존하는 삶을 사는 바람에 아내가 결국 본업인 미용실까지 그만두면서 남편을 재취업시키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생전 이리키 본인의 말에 의하면 한평생 야구만 해왔기 때문에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 지를 모르겠다고.
6. 관련 문서
[1]
스기우치 토시야,
혼다 유이치의 고교 선배다.
[2]
KBO 최초의 일본인 선수는
김홍명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미야기 히로아키 이다. 순수 일본인이지만 현역연장을 위해 재일교포라고 속이고 한국에서 활동을 했다.
[3]
노모 히데오의 8구단 동시 1위 지명으로 유명했던 드래프트로, 노모 이외에도
후루타 아츠야,
사사오카 신지,
사사키 카즈히로,
신죠 츠요시 등 거물 선수들을 여럿 배출해낸 드래프트다.
[4]
이쪽도
요미우리 자이언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뉴욕 메츠,
토론토 블루제이스 산하
마이너리그-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를 거친 저니맨이었다. 여담으로 2006년 메츠 스프링캠프에서 당시 복용하던 영양제가 금지약물 검사에 걸려 50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은 적이 있다.
[5]
이후 영입된 일본인 선수들은 엔화 기준으로 계약을 맺었지만, 이리키는 특이하게도 달러 기준으로 계약을 맺었다.
[6]
반대로 마무리로 전환한 구자운도 선발로는 5점대 평균자책점으로 부진했지만, 마무리로는 2점대 평균자책점에 세이브도 18개를 챙기며 나름 성공적인 보직 교환이 됐다.
[7]
어떤 날은 한 경기에 6~7이닝을 던지면서 볼넷을 하나도 안 내주는데, 어떤 날은 반대로 4~5개씩 볼넷을 헌납했다. 한 경기 최다 볼넷 기록이 7개에 달하는데, 그러고도 선발로써의 BB/9이 3.02에 그친 점을 보면 기복이 상당히 컸던 편.
[8]
KBO에서의 성적만 기입
[9]
상대 승용차 운전자는 별다른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10]
이 이후 두산 외국인 선수들은 술 관련하여 이야기가 없으며, 오히려
더스틴 니퍼트는 "지금 먹은 술이 좋을수도 있지만 이 한잔 때문에 너희들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 대리운전 없이 운전하고 가면 나한테 혼날줄 알라"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오히려 니퍼트의 출신지인 웨스트버지니아 주는 미국에서도 음주 관련 규제가 엄격한 편에 속하며, 다른 외국인 선수들도
맷 랜들은 음악,
로버트 스탁은
리그 오브 레전드를 좋아했다.
[11]
일본의 경우 구장에서 선수가 직접 만든 자신만의 칵테일 메뉴를 팔기도 한다. 한국과는 확실히 다른 문화가 있는 편.
[12]
한국은 주세때문에 소주 막걸리를 빼고는 일본에 비해 술값이 상당히 비싼편이다. 2003년도에는 지금과 같이 수입사 경쟁이 심하지 않아 더 비싼편이였다.특히나 수입맥주는 버드와이저 등을 제외하고는 3천원이 넘는 고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