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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82642><colcolor=#f0ad73> | |
출생 | 1348년( 충목왕 4) |
사망 |
1412년
10월 9일[1] (향년 63 ~ 64세) (음력 태종 12년 8월 25일) |
충청도 청주목 진주 (現 충청북도 진천군) |
|
재임기간 | 제2대 영의정부사 |
1402년
5월 28일[2] -
12월 20일[3] (음력 태종 2년 4월 18일 - 11월 17일) |
|
봉호 |
|
본관 | 청주 이씨 |
부모 |
부친 - 이정(李挺) 모친 - 강릉 김씨 김계초(金繼貂)의 딸 |
부인 | 경주 최씨 - 최잉(崔陾)의 딸 |
자녀 |
장남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이애(李薆, 1363 ~ 1414)[4] 차남 이백관(李伯寬) 3남 이백신(李伯臣) 4남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 1381 ~ 1451)[5] 5남 이백현(李伯儇) |
[clearfix]
1. 개요
여말선초의 관료, 조선의 정승이다.2. 생애
조선 건국 후 우산기상시, 평안도병마도절제사, 참지문하부사 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이후 1차 왕자의 난에 개입해 정사공신에 이름을 올렸으며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에 올랐다. 아들과 함께 양 왕자의 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공신 중의 공신이다. 아들 이저[6]는 태조의 적장녀인 경신공주와 결혼했으며 또 다른 아들인 이백강은 태종의 적장녀인 정순공주와 결혼했다. 즉, 태조와 겹사돈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 보면 정말 많은 탄핵을 당했는데도 용케 살아남는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탄핵된 내용을 보면 살려두는 게 용한 수준. 왕실과의 혼인 관계와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신이라는 점이 작용했던 것 같다. 먼저 정종 때 사병 혁파 정책이 시행되자 사병을 내놓지 않고 버티다가 사병 혁파를 주장한 사람들을 가리켜 "한 두 놈이 한 덩어리 고기와 같다."고 불평하였다. 사실 대간에서는 이거이가 왕실과 인척 관계이기에 조영무 등만 탄핵하고 넘어가려 했지만 이거이의 저 언행에 어지간히 빡쳤는지 정종이 받아주지 않았음에도 계속 상소를 올려 이거이의 처벌을 청했다. 이후 정종이 이거이 부자를 불러 탄핵의 내용과 같은 말을 했는지 묻자 그런 일이 없다고 답해 이를 불쌍하게 여긴 정종이 이거이를 계림부윤으로 좌천시키고 적당히 봐 주었다. 이러고도 이거이는 정신을 못 차렸는지 부임지로 가는 행차를 아주 화려하게 하여 또 비판받았다.
이후 태종 때 또 한 건이 터졌는데 조영무에게 "태종의 아들들이 왕 되면 권력에서 밀려날 것 같으니 만만한 상왕을 다시 앉히자"고 한 것. 이는 대놓고 역모를 모의한 것이다.
처음에 임금이 의안 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ㆍ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 등을 불러 밀교(密敎)하였다.
“신사년에 조영무(趙英茂)가 나에게 고하기를, ‘신(臣)이 이거이의 집에 가니, 이거이가 신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의 부귀한 것이 이미 지극하나, 종시(終始) 보존하기는 옛부터 어려우니, 마땅히 일찍이 도모해야 한다. 상왕(上王)은 사건을 만들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금상(今上)은 아들이 많지만, 어찌 다 우리들을 연휼(憐恤)하겠는가? 마땅히 이를 베어 없애고 상왕을 섬기는 것이 가하다.」하였습니다.’하였다. 내가 이를 듣고, 조영무에게 경계하여 누설하지 말도록 한 지 이제 이미 4년이다. 이거이도 이미 늙었고, 조영무도 또한 곧 늙을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유고(有故)하면, 이 말은 변별(辨別)하기가 어렵다.”
임금이 이거이를 궐내(闕內)에 비밀히 불러 조영무(趙英茂)와 대질(對質)하여 변명(辨明)하게 하고, 유사(攸司)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다. 종친 이화(李和)와 공신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 등 35인이 예궐(詣闕)하여, 이거이의 말을 변별(辨別)하여 밝히도록 하고, 또 유사(攸司)로 하여금 이를 알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종친ㆍ공신ㆍ삼부(三府)ㆍ대간(臺諫)에게 명하여 대궐의 뜰에 모여 증거(證據)하여 듣도록 하였다.
태종실록 태종 4년 갑신(1404) 10월 18일
“신사년에 조영무(趙英茂)가 나에게 고하기를, ‘신(臣)이 이거이의 집에 가니, 이거이가 신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의 부귀한 것이 이미 지극하나, 종시(終始) 보존하기는 옛부터 어려우니, 마땅히 일찍이 도모해야 한다. 상왕(上王)은 사건을 만들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금상(今上)은 아들이 많지만, 어찌 다 우리들을 연휼(憐恤)하겠는가? 마땅히 이를 베어 없애고 상왕을 섬기는 것이 가하다.」하였습니다.’하였다. 내가 이를 듣고, 조영무에게 경계하여 누설하지 말도록 한 지 이제 이미 4년이다. 이거이도 이미 늙었고, 조영무도 또한 곧 늙을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유고(有故)하면, 이 말은 변별(辨別)하기가 어렵다.”
임금이 이거이를 궐내(闕內)에 비밀히 불러 조영무(趙英茂)와 대질(對質)하여 변명(辨明)하게 하고, 유사(攸司)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다. 종친 이화(李和)와 공신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 등 35인이 예궐(詣闕)하여, 이거이의 말을 변별(辨別)하여 밝히도록 하고, 또 유사(攸司)로 하여금 이를 알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종친ㆍ공신ㆍ삼부(三府)ㆍ대간(臺諫)에게 명하여 대궐의 뜰에 모여 증거(證據)하여 듣도록 하였다.
태종실록 태종 4년 갑신(1404) 10월 18일
탄핵을 받은 후 태종이 이거이와 조영무를 불러 그러한 일이 있느냐고 묻자 이거이는 눈물을 흘리며 "두 아들이 부마이고 저도 과분한 자리에 있는데 어찌 딴 생각 품었겠습니까? (조영무가 진짜 그런 일이 있다고 말하자) 조 대감!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나를 해하려 하오?"라고 변명을 했다. 이에 조영무는 "그대가 있고 없음이 내게 무슨 손익이 있겠소? 난 단지 신하 간의 의리보다는 군신 간의 의리가 중하다고 생각해 말한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점잖게 표현은 됐지만 "당신한테 원한은 없지만 주상께서 시키셨소. 미안하게 됐소." 정도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태종이 이거이는 공신이니 봐주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해 본인의 아들들과 함께 고향인 진주(鎭州)[7]으로 유배를 갔고 이후로도 "이거이를 죽여야 한다"는 대간의 탄핵이 들어왔지만 태종은 무시한 채로 태종 12년(1412년) 고향에서 죽었다.[8] 이거이가 정말로 저런 말을 했다면 이건 역모죄를 넘어 국가전복죄나 내란죄이며 왕과 왕자들을 내친다는 것은 왕족 자체를 불신하거나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정도전의 죄목인 종친 모해죄보다 더욱 막중한 죄다. 그런데 신하들이 사형하라고 계속 상소를 올리는데도 끝까지 처벌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애초에 정계 축출을 목적으로 적당히 쑈를 한 것으로 봐야할 듯.[9][10]
3. 기타
이름이 이름인지라 야구 경기에서 가끔 김거김과 같은 용도로 이름이 언급되곤 한다.4. 대중매체
여말선초가 사극으로 많이 만들어지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사극에 등장한 경우가 거의 없다. 용의 눈물과 태종 이방원뿐이다. 그마저도 태종 이방원에서는 본 무대였던 1차 왕자의 난까지는 언급도 안되다가 사병혁파때 처음 등장하고 조사의의 난 이후 퇴장하는 역할로 나왔다.-
1996년
KBS 드라마 <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강재일[11]이 연기했다. 159부작의 초장편 사극이고 그만큼 방대한 분량을 다루기에 나름 비중을 가지고 출연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상당히 입체적인 이미지의 권신으로 등장하는데 이방원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이를 축하하는 연회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방원의 공신들 중 가장 많은 사병을 거느린 인물로 도성에서만 100여 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12] 야심이 없다고는 하지만 서열 2위 왕자인 이방의가 도성 집에서 거느리던 사병이 20여 명이라는걸 고려하면 엄청난 숫자. 가진 게 많은 만큼 1차 왕자의 난 이후 진행된 이방원의 사병 혁파에 가장 격렬하게 반발했고 2차 왕자의 난 때도 한동안 관망하다 뒤늦게 참여했다. 2차 왕자의 난이 진압되고 사병들이 해체될 때 다른 공신들처럼 바로 유배보내지 못하고 직접 그의 집을 찾아가 사병을 포기할 것을 종용했다. 세자가 된 이방원에게 반기를 들었다가는 역적이 되는지라 결국 포기하고 사병을 내놓은 후 지방으로 좌천된다. 이때 유배당한 다른 공신들은 곧 자시 부르겠다는 이방원의 서찰을 받고 감격하지만, 이거이만은 이때도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이방원 주변 사람들이 우직한 무장이나 온건한 학자 타입이 대부분인데 의외로 하륜과 함께 나름의 비전을 갖고 국가를 꾸려가고자 하는 인물. 문제는 그가 바라는 신권주의는 재추가 6부 위에 군림하며 국정을 운영하던 고려식 재상 중심제였고 이는 정도전이든 이방원이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하륜 중심으로 조선의 관제가 만들어질 때 실권에서 소외되어 허울 좋은 재상직만 지키는 신세가 된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딴 생각을 하다 조사의의 난이 벌어지자 조영무를 찾아가 "난이 성공해서 정종이 복위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논의를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난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거이를 주시하던 태종은 이성계를 환궁시켜 걸리적 거릴 게 없어지자마자 이거이 제거에 착수한다. 태종은 목숨을 끊어버릴 생각이었으나 사가의 항렬상 사돈어른인지라 죄를 묻기 전에 이성계를 찾아가 허락을 받으려 했고 이것이 그의 목숨을 구했다. 이성계는 "나와 척지면서까지 널 많이 도와준 사람인데 죽여서 되겠냐"며 피를 보지 말라 충고하고 태종은 이를 받아들여 서인으로 만들어 귀양보낸다. 조사의의 난이 실패하면서 모든걸 내려놓은 이거이는 조영무를 불러 대질 심문을 하는 태종에게 자신의 소신을 밝힌 후 담담히 귀양길에 오른다. 이 부분이 마음에 걸렸는지 훗날 조영무는 목숨을 거두기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이천우와 이야기를 나누며 "생애에 아무런 한이 없는데 민씨 형제와 이거이를 옹호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말을 남긴다.
-
2021년
KBS 대하드라마 <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차기환[13]이 연기했다. 절제사 신분으로 세자였던 이방원이 시도했던 사병 혁파에 반대 목소리를 냈지만, 결국 직을 잃고
계림부윤으로 좌천되었다. 조사의 난 시점에서 다시 조정에 복귀한 상태로 나오며, 태종과 함께 난을 진압하러 출정한다. 다만 출정 전 조영무에게 이방원에게 불만을 표하고 상왕 시절이 좋았다는 말을 하는데 조사의의 난 진압 직후 조영무가 이 말을 그대로 이방원에게 일러바친다. 이후 조사의의 난에서 공을 세운 공신들을 치하하는 분위기 좋은 자리에서 갑자기 이방원이 이거이의 충심을 문제 삼고 아들과 함께 유배를 떠나면서 퇴장한다. 실록에서처럼 조영무에게 항의하진 않지만, 이방원에게 질책당하는 도중 조영무를 슬쩍 쳐다보는 것으로 이거이도 사정을 파악한 것처럼 연출된다. 그리고 이방원은 사돈인 이거이를 유배 보내면서 장인인 민제에게 처가인 민씨 가문도 저렇게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민씨 형제 다음가는 눈새이다
-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태조, 정종실록과 태종실록에서 등장한다. 태조 편에서는 이숙번, 이저, 조영무, 민무구, 민무질과 함께 정안군측 인물로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무장한 걸로 첫 등장한다. 이후 반란에 성공해 이숙번, 조영무,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기세등등하게 나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후 태종실록에는 시범 케이스 편에서 등장하는데 사병 해체에 반발하다가 좌천돼서 부임지로 내려가는데 그 행차가 너무 거창해서 대간에게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1401년 이거이가 조영무에게 “이들을 모두 쳐 없애고 상왕을 섬기는 게 좋지 않겠소? 상왕은 주상처럼 일 꾸미기를 좋아하지 않소.”라고 반역에 가까운 말을 했다가 조영무가 이방원에게 보고해 결국 유배가면서 등장 종료.
[1]
율리우스력
9월 30일
[2]
율리우스력
5월 19일
[3]
율리우스력
12월 11일
[4]
태조의 차녀
경신공주의 부마.
[5]
태종의 장녀
정순공주의 부마.
[6]
초명은 이백경이다. '경'자가 정종의 이름 '경'과 동일하여
피휘하였다. 후에 이름이 세자 이제와 비슷하다 하여 이애로 또 개명하였다. 이거이는 처신에 경솔한 면이 있었지만 이저는 그보다 더 행실이 나빴는데, 예를 들어 무인정사 이후 이거이와 이저는 죽은
이방번과
이방석의 첩을 득템했는데 문제는 이저가 득템한 첩이 이거이와 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대간들은 "이게 할 짓이냐!!!"며 탄핵했지만 태종이 넘어가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7]
오늘날
충청북도
진천군의 옛 이름.
[8]
공신이니 봐주겠다는 것도 있지만 아버지의 언질도 약간의 영향이 있어 보인다.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이 태조와 만나서 "이거이 부자가 이런저런 혐의가 있어서 죽음으로 다스릴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태조에게 말을 하는데 왕위에서 물러난데다가
조사의의 난 이후 남은 권력마저도 모두 사라져 뒷방 늙은이가 된 태조가 "그래도 사돈지간에 주상을 도와서 같이 일했던 공신이니 목숨만은 살려주라"고 언질을 한다. 이거이는
무인정사의 주역으로 자기 자식들과 총애하던 신하들을 도륙낸 사돈인데도 말이다. 아무래도 이성계는 피비린내에 진저리가 나 피보는 건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물론 태종이 유래가 없을 정도로 숙청의 강도가 온건한 편이기는 했다.
[9]
웃긴 건 양위 쇼에서 웃은
민무구와
민무질은 유배 후 사형, 형들의 억울한 죽음을
세자에게 넌지시 토로한
민무휼과
민무회도 사형에 처했다는 것. 이거이는 사돈에 불과하지만 민씨 4형제는 자신의 처남들인데 말이다. 사실 태종이 이거이에게 천수를 누리게 할 의지가 강했다고 봐야 한다. 태종이 이거이를 진짜 죽이려고 생각했다면 정황 증거가 모호한 발언보다는 어디까지나 1차 왕자의 난 당시 표면적으로 임의로
무안대군을 살해한 죄를 묻는 것도 가능했지만 반란 당시에만 '내가 화가 매우 났지만 정국이 불안하니 참는다'고 말했을 뿐 단 한 번도 무안대군 살해 치죄문제를 물은 적이 없다. 그리고 같은 유배라도 이거이 부자의 경우는 본관이 있는 고을인데다 좌천 당시 구설수에 오른 정황 등으로 미루어 당시 기준으로 재산 규모도 상당할 가능성도 높은지라 '중앙정치참여 금지' 성격에 가깝다. 하륜의 설화 당시 이미 죽은 정도전이 이숭인 장살문제를 혼자 뒤집어 쓴 것과는 대조된다.
[10]
역설적으로 민씨 4형제는 고려시대부터 중앙 정계에 연이 많은 명문가 외척이라 더 처분을 가혹하게 한 측면도 있다.
[11]
2000년
KBS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는
추허조 역, 2006년
KBS 드라마 <
대조영>에서는 묵철 역.
[12]
다들 도성 밖에 농장을 가지고 있고 사병들이 딸려 있으니 수는 늘어난다. 2차 왕자의 난 이후 사병 혁파가 추진될 때 조영무가 도성 밖 사병들을 언급하고 이방원 측도 이를 경계해 도성 인근 병력을 모두 장악한 다음 "어명없이 병력 이동은
역모로 규정하겠다"는 명을 내려 철저히 대비하고 사병 혁파를 착수했다.
[13]
2000년
KBS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는 염흔 역, 2005년
KBS 드라마 <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신립 역, 2014년
KBS 드라마 <
정도전>에서는
조반 역 등 사극에서 얼굴을 많이 비추던 배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