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12:48:16

유리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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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명왕 | 琉璃明王
파일:유류왕.jpg
동명왕릉 능문 제당에 그려진 유리명왕 벽화.[1]
출생
(음력)
<colbgcolor=#fff,#1c1d1f> 기원전 38년[2]
북부여 또는 동부여
사망
(음력)
18년 10월 (향년 56세)
고구려 국내성 두곡 이궁(豆谷 離宮)
능묘 두곡 동원(豆谷 東原)[3]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 왕태자
기원전 19년 4월 ~ 기원전 19년 9월 (5개월)
고구려 제2대 국왕
기원전 19년 9월 ~ 18년 10월 (37년 1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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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고(高) / 해(解)?[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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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왕 시조 동명성왕
모후 예씨부인(禮氏夫人)
형제자매 3남 중 장남[6]
왕후 왕후 송씨, 화희, 치희
자녀 6남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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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 고도절, 고해명, 고무휼[7]
왕자 고해색주, 고재사, 고여진
왕녀 1명[8]
종교 토착 신앙
시호 유리명왕(琉璃明王)[9]
유류왕(儒留王)[10] }}}}}}}}}

1. 개요2. 이름3. 생애
3.1. 부여 시절과 태자 책봉
3.1.1. 쿠데타 설
3.2. 치세
3.2.1. 외치3.2.2. 내정
3.3. 사망
4. 기타5. 《 삼국사기》 기록6. 대중 매체에서7. 관련 인물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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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제2대 왕.

평소 사냥을 좋아했고, 재위기간 중 전한, 신나라, 선비족, 부여와 대립했으며, 주변의 양맥을 쳐서 멸망시키고 고구려현을 빼앗는 등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넓혔고, 고구려의 기틀을 마련한 영주(英主)였다.[11] 몇 안 되는 고구려의 시조 중 하나인 〈 황조가〉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

2. 이름

전해지는 이름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출처는 다음과 같다.
표기 현대 한국어 발음 상고한어 재구음 등장 사료 비고
儒留 유류 *no C.ru (백스터-사가르)
*njo m·ru (정장상팡)
광개토대왕릉비 고구려 공식 표기.
孺留 유류 *no-s C.ru (백스터-사가르)
*njos m·ru (정장상팡)
삼국사기》, 《 삼국유사 고구려 표기에 가장 근접, 《삼국사기》 〈잡지〉 -고구려- 기록.
累利 누리 *[r]ojʔ C.ri[t]-s (백스터-사가르)
*rolʔ rids (정장상팡)
《삼국유사》
類利 유리 *[r]u[t]-s C.ri[t]-s (백스터-사가르)
*ruds rids (정장상팡)
《삼국사기》, 《 제왕운기
閭諧 여해 *ra ɡriːl (정장상팡) 위서 字始閭諧를 '자는 처음에 여해였다.'로 해석한다.
閭達 여달 *ra daːd (정장상팡) 위서 고구려로 도망쳐 온 뒤에 바꾼 이름이다.

삼국유사》 〈왕력〉 -유리왕- 부분에
‘유리왕의 성은 해씨(解氏)이다.’
라는 기록도 있다. 동명성왕은 고씨이고, 유리명왕은 해씨이므로 동명성왕과 유리명왕은 혈통이 다르다는 견해가 있다. 즉 해씨 고구려설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 반면 동명성왕은 원래 해씨였으나 부여를 탈출하고 고구려를 세우면서 고씨로 성을 바꿨고, 아들인 유리명왕은 그 사실을 모른 채 부여에 남아 있다가 탈출한 것이므로 여전히 해씨를 사용했던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고대에는 성씨 문화가 엄밀하게 정착되진 않았었다. 동명성왕이 부여에 있을 때 함께 했던 부여 왕족들 또한 성씨가 이름과 같이 표기되지 않는다. 후대에 성씨가 기록된 것들도 많아서 같은 계통이라도 다른 성씨를 사용하기도 하고, 나중에 바뀐 성씨와 옛 성씨가 혼재되기도 하는 등 확실하게 확인하기는 어렵다.

3. 생애

3.1. 부여 시절과 태자 책봉

유리는 추모 부여에 있었던 시절에 아내 예씨부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었다. 추모는 유리가 태어나기 전에 부여를 떠났고 유리는 아버지 없이 성장했다.《 구삼국사》에 따르면 유리는 뜻이 크고 절개가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기이한 기절이 있었고, 장난꾸러기였다.
유리가 어릴 적 길거리에서 참새를 쏘다가 실수로 물을 길어 가던 부인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화난 부인이 꾸짖었다.
이 아이가 아비가 없어서 이처럼 논다.[12]

유리는 부끄러워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어머니가 대답했다.[13]
“너의 아버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서 나라에 용납되지 못했다. 그래서 남지(南地)로 도망하여 개국(開國)하여 왕을 칭했단다. 떠날 때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아들을 낳으면 내가 남긴 물건이 있는데 그것을 7각형의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 두었다고 말하시오. 만약 이것을 찾는다면 곧 나의 아들임을 알겠소.’라고 하셨다.”
어느날 실수로 다른 사람의 항아리를 깼는데, 그 사람에게 패드립을 들은 뒤 아버지를 찾게 되었다. 이후 유리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7각형의 돌과 소나무를 한참 찾았다. 그러던 중 자기 집의 소나무 기둥과 그 밑 7각 주춧돌 밑에 증거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옥지, 구추, 도조 등 세 명의 동지들과 함께 동명성왕을 찾아갔다. 흔히 알려진 이야기가 이 부분이다.
유리는 이 말을 듣고 산에 가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지쳐 돌아왔다. 어느 날 아침, 마루 위에 앉아 있다가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주춧돌이 7각형이었다.

그는 곧 기둥 아래를 뒤져서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찾아냈다.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옥지(屋智), 구추(句鄒), 도조(都祖) 등의 세 사람과 함께 떠나 졸본(卒本)에 이르렀다.

부왕을 만나 부러진 칼을 바쳤다. 임금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합쳐 보니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14]

임금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때에 와서 왕위를 잇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 -유리명왕조-
동명성왕과 재회한 유리는 자신이 왕의 아들임을 확인하고 고구려의 태자가 되었다. 이런 식의 아버지를 찾는 일화는 세계적으로 은근히 발견되는데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전설적인 영웅 테세우스가 유명하다.

중국측 사서인 《위서》에도 이와 비슷한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朱蒙在夫餘時, 妻懷孕. 朱蒙逃後生一子, 字始閭諧. 及長, 知朱蒙爲國主, 卽與母亡而歸之. 名之曰閭達, 委之國事. 朱蒙死, 閭達代立. 閭達死, 子如栗代立. 如栗死, 子莫來代立, 乃征夫餘, 夫餘大敗, 遂統屬焉.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처가 임신해 있었다. 주몽이 달아난 뒤에 아들 하나를 낳아서 자를 처음에는 여해(閭諧)라고 했다. 자라서 주몽이 나라의 주인이 되었음을 알고 곧 어머니와 함께 도망쳐 돌아오자 이름을 여달(閭達)이라 했고 국사를 위임했다. 주몽이 죽고 여달이 대를 이어 즉위했다. 여달이 죽자 아들 여율(如栗)이 대를 이어 즉위했고,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莫來)가 대를 이어 즉위해 부여를 정벌했는데, 부여가 크게 패하고 마침내 통합되어 소속되었다.
《위서》

다만 《위서》의 해당 문구는 후대에 논란이 되었는데, 계보에 끼워맞춰 '여달'을 '유리', '막래'를 '모본'의 음차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으며, 혹은 '막래'가 부여를 쳤다는 말에서 '막래'를 '무휼'의 음차로 보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여율'이라는, 《삼국사기》 등의 우리 자료에는 없는 인물이 추가되는 것이 문제이다. 이 경우, 구려후 추 항목에 나온 것처럼 두 고구려 왕이 합쳐져 신화적으로 탄생한 존재를 유리명왕으로 보기도 한다.

3.1.1. 쿠데타 설

유리명왕의 태자 책봉과 동명성왕의 승하는 5개월이라는 짧은 시간내에 일어났다. 그리고 같은 해에 이복형제가 고구려를 떠난 기록을 근거로, 당시 왕의 죽음과 함께 정치 환경에 극심한 변동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여기서 유리명왕을 내세운 어머니 예씨 부인의 세력이, 동명성왕과 소서노를 위시한 졸본 세력과 대척점에 있었고, 이 싸움에서 친유리파가 이겨 동명성왕으로부터 왕위 계승권을 탈취하는 한편, 정적이었던 소서노 비류, 온조 형제를 남쪽으로 내쫓았다는 설이 있다.

갑자기 찾아와서 친자라고 주장하는 청년의 말만 믿고, 그동안 함께 했던 세력을 무시한채 바로 태자에 임명하는 것이 일반적인 책봉은 아니라는 점, 《 구삼국사》의 《동명왕편》을 인용한 《 동국이상국집》의 기록에서 유리명왕의 혈육 입증 과정 중 출혈이 있었다고 기록한 점, 동명성왕이 혈육에 대한 추가 증명을 요구한 점, 이에 유리가 왕의 처소에 들어오는 햇빛을 막았다는 점을 근거로 유혈사태 및 왕의 감금이 있었다는 해석이 있다.
전한(前漢) ( 제12대 성제) 홍가(鴻嘉) 4년 여름 4월에 고구려(高句麗)로 달아나서 칼 한 조각을 왕에게 받들어 올렸다. 왕이 가지고 있는 부러진 칼 한 조각을 내어 합하니 피가 나면서 이어져 한 칼이 되었다. 왕이 유리에게,“네가 실로 내 자식이라면 무슨 신성(神聖)함이 있느냐?”라고 물으니, 유리가 즉시 몸을 날리어 공중에 솟구쳐 창구멍으로 새어 드는 햇빛을 막아 기이한 신성을 보이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동국이상국집》 전집 제3권 고율시(古律詩) 《동명왕편》(東明王篇) 병서(幷序)

또한 《 동국이상국집》 이나 광개토대왕릉비 에서 동명성왕의 죽음을 승천으로 말한 것은 이러한 정변 사태를 건국조에 대한 찬양으로 미화한 것이라는 설과 함께, 《 삼국사기》에서 제2대 유리명왕~제5대 모본왕까지의 왕계를 굳이 해씨로 언급하여 성씨가 달랐다는 것을 강조하는 기록 등을 유리명왕 반란설의 추가 근거로 든다.
(추모왕이) 그러다가 세위(世位)를 즐기지 않게 되자, (하늘이) 황룡(黃龍)을 내려보내 왕을 맞이했다. 왕은 홀본 동쪽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승천(昇天)하셨다(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履龍頁昇天)
광개토대왕릉비

가을 9월에 왕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으니 이때 나이 40세였다. 태자(太子)가 왕이 남긴 옥편(玉鞭)[15]을 대신 용산(龍山)에 장사했다고 한다.
동국이상국집》 전집 제3권 고율시(古律詩) 《동명왕편》(東明王篇)
해당 기록들은 단순히 신화적인 미화만이 아니라, 실제 시신이 없는 장례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옥편(玉鞭)으로 대신 장사했다는 기록을 내세운다. 이 설에 따르면, 동명성왕은 반란으로 실권한 후 잠적을 해서 역사에서 사라졌거나, 최악의 경우 자살 혹은 살해를 당했다고 본다.

그런 후 일단 제5대 모본왕까지 왕계가 여달(=유리)계로 이어지다가 모본왕의 권력 독점에 반발한 계루부 귀족들이 모본왕을 살해한 후 팽팽한 대립 끝에 일종의 집단 지도 체제가 이어지다가, 결국은 동명성왕쪽 가계인 제6대 태조대왕의 즉위로 합의되어 주몽계에게 왕계가 다시 돌아갔다는 해석은 고구려사 전공 신형식 교수, 여호규 교수 등도 주장하는 학설이다.

3.2. 치세

기원전 19년 신생 국가의 태자가 된 지 5개월 만에 바로 왕위에 오른 유리명왕은 재위 2년( 기원전 18년) 가을 7월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을 왕후로 삼았다. 삼국사기상 기년으로는 같은 해에 이복형제인 온조 백제를 건국한 걸로는 되어 있다.

하지만 재위 3년( 기원전 17년) 10월에 왕후 송씨가 사망했고, 유리명왕은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후실로 삼았다. 한 사람은 골천 사람 화희(禾姬)였고, 다른 한 사람은 전한 사람 치희(稚姬)였다. 어느 날 유리명왕이 사냥을 갔는데 그 동안 두 후궁이 크게 싸워 결국 치희가 전한으로 돌아가 버렸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유리명왕이 급하게 그녀를 찾아 달랬으나 끝내 치희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이때 유리명왕이 슬픔을 느끼고 지은 시가 바로 〈 황조가〉다.
[ruby(翩翩黃鳥, ruby=편 편 황 조)] 펄펄 나는 저 꾀꼬리
[ruby(雌雄相依, ruby=자 웅 상 의)] 암수 서로 정답구나.
[ruby(念我之獨, ruby=염 아 지 독)] 외로울사 이 내 몸은
[ruby(誰其與歸, ruby=수 기 여 귀)] 누구와 함께 돌아갈꼬.

3.2.1. 외치

유리명왕의 치세 동안 소국이었던 고구려는 주변 국가와 크고 작은 전쟁들을 벌였다. 기원전 9년에 유리명왕은 상습적으로 노략질을 일삼던 동호 선비족과 전쟁을 벌이고 선비를 복속시켰다.
재위 11년 여름 4월, 임금은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선비(鮮卑)는 그들의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으면서,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을 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근심거리로다. 만약 이들을 없애버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장차 그에게 큰 상을 줄 것이다.”

부분노(扶芬奴)가 나와서 말했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수비가 견고한 나라이지만, 사람들이 용감하기만 하고 어리석습니다.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임금은 말하였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은가?”

부분노가 대답했다.
“사람을 시켜 배반한 것처럼 해서 저들에게 보내 거짓말을 하되, ‘우리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므로 겁이 많아 움직이기 어렵다.’라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선비는 필시 우리를 쉽게 생각해서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 틈을 기다렸다가 정예병을 이끌고 사잇길로 들어가 수풀에 숨어서 그 성을 엿보겠습니다. 이때 임금께서 군사를 그 성 남쪽으로 출동시킨다면 그들이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그러면 신은 정예병을 이끌고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임금께서는 친히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양쪽에서 협공을 한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임금은 그 의견에 따랐다. 선비는 과연 문을 열고 군대를 출동시켜 뒤쫓았다. 이때 부분노는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으로 들어가니 선비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되돌아 달려 들어왔다. 부분노는 성문을 지키며 막아 싸워 수많은 선비족들의 목을 베어 죽였다. 임금은 깃발을 들고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게 되자 계책이 없고 힘이 다해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임금은 부분노의 공을 생각하여 식읍을 상으로 주었으나, 부분노는 사양하면서 말했다.
“이것은 임금의 덕입니다. 신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그는 결국 받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十一年 夏四月 王謂群臣曰 鮮卑恃險 不我和親 利則出抄 不利則入守 爲國之患 若有人能折此者 我將重賞之 扶芬奴進曰 鮮卑險固之國 人勇而愚 難以力鬪 易以謀屈 王曰 然則爲之奈何 答曰 宜使人反間入彼 僞說 我國小而兵弱 怯而難動 則鮮卑必易我 不爲之備 臣俟其隙 率精兵從間路 依山林以望其城 王使以羸兵出其城南 彼必空城而遠追之 臣以精兵走入其城 王親率勇騎挾擊之 則可克矣 王從之 鮮卑果開門出兵追之 扶芬奴將兵走入其城 鮮卑望之 大驚還奔 扶芬奴當關拒戰 斬殺甚多 王擧旗鳴鼓而前 鮮卑首尾受敵 計窮力屈 降爲屬國 王念扶芬奴功 賞以食邑 辭曰 此王之德也 臣何功焉 遂不受 王乃賜黃金三十斤 良馬一十匹
전한 신나라와도 재위기간 내내 불편한 사이를 유지했는데, 유씨의 황위를 찬탈하여 신나라를 세운 왕망이 강제로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해 가려 하고, 심지어 고구려 장수를 죽이자 격노한 유리명왕이 신나라의 동북 변경을 선제 공격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끝내 양국의 관계는 파탄이 났다. 당시 고구려와 왕망 사이의 관계는 고구려-신 전쟁 문서 참고.
재위 31년(서기 12년) 한나라[16]의 왕망(王莽)이 우리 병사를 징발하여 흉노를 치도록 했다. 우리 병사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왕망이 강제로 보내니, 모두 변방으로 도망쳐 법을 어기고 재물을 약탈하는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다가 죽임을 당하자 한나라의 주(州), 군(郡)에서는 잘못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왕망에게 아뢰어 말했다.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군에게 그들을 위로하고 안도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 그들에게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부여의 무리 중에 반드시 응하여 따르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우리가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한 터에 부여와 예맥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것은 큰 걱정거리입니다.”

왕망은 이를 듣지 않고, 엄우에게 공격을 명했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머리를 베어서 수도 [17]로 보냈다.

한서》(漢書)와 《 남사》, 《 북사》(南北史)에서는 모두 ‘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었다.’고 이른다. 왕망이 기뻐하며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고쳐 부르고, 이를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했다. 이로부터 고구려가 한나라의 변경 지방을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三十一年 漢王莽發我兵 伐胡 吾人不欲行 强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我 嚴尤奏言 貊人犯法 宜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 穢貊復起 此大憂也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 斬之 傳首京師[兩漢書及南北史皆云 誘句麗侯騶斬之] 莽悅之 更名吾王爲下句麗侯 布告天下 令咸知焉 於是 寇漢邊地 愈甚
재위 33년(서기 14년) 가을 8월, 임금은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령하여 병사 20,000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계속 진군하여 한나라[18]의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했다.
三十三年 秋八月 王命烏伊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
그리고 부여와도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당시 고구려와 부여의 관계는 고구려가 많이 밀리는 형국이었다. 유리명왕 때의 고구려는 부여보다 국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부여는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하고, 인질을 요구하는 등 계속 압박해 왔고 이런 불편한 관계는 나중에 대무신왕이 부여 왕 대소왕을 죽이면서 끝이 났다.
14년( 기원전 6년) 봄 정월, 부여 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 문안하고 인질 교환을 청했다. 임금은 부여가 강대한 것을 꺼리며 태자 도절(都切)을 인질로 삼으려고 했으나, 도절이 두려워하여 가지 않자 대소가 화를 냈다.
十四年 春正月 扶餘王帶素遣使來聘 請交質子 王憚扶餘強大 欲以太子都切爲質 都切恐不行帶素恚之
겨울 11월, 대소가 군사 50,000명을 이끌고 침략하여 왔으나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많이 얼어 죽자 곧 돌아갔다.
冬十一月 帶素以兵五萬來侵 大雪人多凍死 乃去
32년(서기 13년) 겨울 11월, 부여 사람들이 침입하자 임금은 아들 무휼을 시켜 군대를 통솔하여 막도록 했다. 무휼은 병사가 적어서 대적할 수 없을까 걱정하여 기이한 계책을 썼는데,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리는 것이었다. 부여 병사들이 곧바로 학반령(鶴盤嶺) 아래에 이르자 숨어있던 병사들을 출동시켜 불의에 공격하니, 부여군이 크게 패배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은 병사를 풀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三十二年 冬十一月 扶餘人來侵 王使子無恤 率師禦之 無恤以兵小 恐不能敵 設奇計 親率軍 伏于山谷以待之 扶餘兵直至鶴盤嶺下 伏兵發 擊其不意 扶餘軍大敗 棄馬登山 無恤縱兵盡殺之

3.2.2. 내정

  •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를 하며 도읍을 옮겼다.
    재위 21년 봄 3월, 설지가 국내성으로의 천도를 건의했다.

    재위 22년 겨울 10월, 국내성으로 천도했다.
  • 유리명왕은 무당 무속신앙을 믿었다.
    유리명왕 재위 19년( 기원전 1년) 가을 8월, 교제[19]를 지낼 때 쓸 돼지가 달아났다. 임금은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를 시켜 쫓게 했다. 그들은 장실(長屋) 늪 가운데 이르러 돼지를 발견하고 칼로 그 다리의 힘줄을 끊었다. 임금이 이것을 듣고 분노하여 말했다.

    “제천(祭天)에 쓸 제물에 어떻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가?”


    임금은 마침내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던져 죽였다.


    9월, 임금이 병에 걸렸다. 무당이 말했다.

    “탁리와 사비가 귀신이 되었습니다.”


    임금이 그를 시켜 귀신에게 사과하게 하니, 곧 병이 나았다.

    十九年 秋八月 郊豕逸 王使託利 斯卑追之 至長屋澤中得之 以刀斷其脚筋 王聞之怒曰 祭天之牲 豈可傷也 遂投二人坑中殺之 九月 王疾病 巫曰 託利 斯卑爲祟 王使謝之 卽愈
  • 과한 사냥으로 대보(大輔) 협보와 마찰을 빚었다. 개국공신이었던 협보가 내쫓긴 것은 액면 그대로 유리명왕의 과한 사냥 사랑 때문일 수도 있지만, 고구려의 지배층들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유리명왕의 치세에 5차례의 사냥 기록이 보인다.
    12월, 임금이 질산(質山)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5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보(大輔) 협보(陜父)가 간하여 말했다.

    “임금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했으니 마땅히 부지런히 힘쓰고, 치안 관련의 행정을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달려 사냥을 가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습니다. 만약 임금께서 잘못을 고쳐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저는 정치는 황폐하고 백성들은 흩어져서 선왕의 업적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협보의 관직을 파면하고, 그에게 관청의 동산을 맡아보게 했다. 협보는 분개하여 남한(南韓)으로 가버렸다.

    二十二年 冬十月 王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 十二月 王田于質山陰 五日不返 大輔陜父諫曰 王新移都邑 民不安堵 宜孜孜焉 刑政之是恤 而不念此 馳騁田獵 久而不返 若不改過自新 臣恐政荒民散 先王之業 墜地 王聞之 震怒 罷陜父職 俾司官園 陜父憤去之南韓
  • 태자를 두 번이나 바꾸고, 아들을 자결시키며 신하와 불화를 일으키는 등 전체적으로 유리명왕의 치세는 많이 혼란스러웠는데, 이는 아직 강성하지 못한 고구려의 국력 때문이기도 했고, 유리명왕 본인의 잘못이기도 했으며, 고구려 지배층의 분열 때문이기도 했다. 무려 3명의 아들이 죽거나 자살했다.( 도절, 해명, 여진)
  • 유리명왕은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던 듯한데, 첫 번째 태자 도절이 죽어 아들 해명(解明)을 태자로 세웠으나 해명이 황룡국의 왕이 보낸 활을 바로 부숴버리며 황룡국 왕을 부끄럽게 하자 분노하여 바로 그를 자결시켰다.[20] 비록 행위의 의도가 어쨌든 한 나라의 원수가 보낸 선물을 해명태자가 바로 부숴버린 건 잘못되었으나 그렇다고 아들을 매몰차게 죽여버린 아버지 유리명왕의 잘못도 크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삼국사기》의 저자였던 김부식은 이를 두고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잘못했다며 혹평했다.
    사관이 논평한다.

    효자가 부모를 섬길 때는 마땅히 곁을 떠나지 않고, 효를 다해야 하는데, 문왕(文王)이 세자였을 때와 같이 해야 한다.

    해명이 따로 별도에 있으면서 용맹한 것을 좋아한 것으로 이름이 났으니 죄를 얻게 된 것은 당연하다.

    또 전하여 오는 말에 ‘자식을 사랑하거든 의로운 방도로 가르쳐서, 사악한 길로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임금은 처음부터 미리 가르치지 않다가 죄악을 짓게 되자 몹시 미워하여 죽이고 말았다.

    이는 아비가 아비답지 못했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論曰 孝子之事親也 當不離左右以致孝 若文王之爲世子 解明在於別都 以好勇聞 其於得罪也 宜矣 又聞之 傳曰 愛子敎之以義方 弗納於邪 今王 始未嘗敎之 及其惡成 疾之已甚 殺之而後已 可謂父不父 子不子矣

3.3. 사망

재위 37년인 서기 18년 4월에 유리명왕이 총애하던 6남 여진(如津)이 물에 빠져 죽는 참변이 일어났다. 이에 충격을 받은 왕은 애통해하며 사람을 시켜 시체를 찾으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다른 사람이 여진의 시체를 찾아냈고, 유리명왕은 그에게 을 하사했다.

여진의 죽음에 의한 충격 때문이었는지 여진이 죽은 지 1년도 안 돼서 유리명왕은 두곡의 이궁에서 승하했다. 향년 56세 전후였다. 두곡의 동원에 장사를 지내고 시호를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 했다.

4. 기타

  • 동국통감》은[21] 영토를 넓혔으나, 태자를 죽인 일에 대해서는 아쉬운 왕으로 평가했다.
    "유리(瑜璃)는 유복자(遺腹者)로 다른 나라에 있으면서, 그가 승습(承襲)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는데, 다행히 왕위를 이어서 선비(鮮卑)를 항복받고 양맥(梁貊)을 멸했으며, 나라를 개척하여 점차 넓히어 나갔으나, 작은 죄에 분개하여 두 신하를 베고, 용맹스러운 것을 미워하여 태자(太子)를 죽였으니, 이는 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 삼국사기》에 의하면 민중왕은 유리명왕의 아들이고, 모본왕( 대무신왕의 아들),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고재사의 아들)은 유리명왕의 손자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실로 알려져 있지만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초기 고구려 왕계도 백제, 신라에서 나타난 복수 왕계 체제에서 예외가 아니었으며 165년 신대왕의 즉위 이후에야 주몽계로 완전히 일원화된 것을 백제처럼 왕계를 조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보고 있다. 백제, 신라와 달리 고구려의 건국 연대는 사서와 고고학 연대가 거의 같다는 것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계루부 안에서 주몽계와 유리(=여달)계가 실제로는 별도 왕계며 왕위 계승을 놓고 긴장이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 유리(여달)계가 주몽계와 별개의 왕계가 맞고 유리명왕이 추모왕의 아들이 아니라면 사서에서 유리명왕이 부여 출신이 강조되는 점을 보아 유리명왕 또한 주몽처럼 부여에서 고구려로 이주한 세력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22] 주몽계와 유리계가 둘 다 계루부 안에 속한 걸로 추정되는 데다 둘 다 부여에서 온 것이 강조되는 점, '성은 해씨이다'가 강조되는 유리계의 특성, 백제 초기 왕계를 양분하던 고이왕계와 초고왕계 모두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부여 왕조임을 고려하면[23] 유리계 또한 부여 해씨의 방계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 한서》<왕망전>에 왕망 신나라를 세운 뒤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12년 고구려의 군사를 징집하려다가 저항하자 고구려 왕을 죽이고 고구려를 하구려로 격하해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에서는 왕망이 죽인 자는 연비(延丕)라는 고구려 측 장수였고, 이를 왕망이 고구려 왕을 죽였다며 위조해 기록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서》와 《삼국사기》의 서술 구조와 내용이 일치하고, 마지막 결론만 다름으로 미루어 볼 때 《삼국사기》의 기록은 《한서》를 참조했거나 《한서》에 영향을 받은 기록을 바탕으로 했음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 과연 누구의 기록이 맞는지 다른 자료가 없어 추정하기 어렵지만 중국과 고구려의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중국 기록에만 나오는 주몽의 아들/손자인 고구려왕 여율이 사실 고여진으로 유리명왕이 12년 사망하고 12~18년 재위기는 여율(여진)의 재위기간인데 고구려가 중국에게 왕이 죽은 걸 수치스러워해 해당 사실을 숨기고자 여율(여진)의 재위기간 자체를 삭제한 것이 아니냐는 가설이 있다. 삼국사기에서 여진과 유리명왕은 동년에 사망하기 때문.[24] 주몽 다음으로 집권하여 카리스마와 공로가 대단했던 여달왕과 여율을 합쳐 유리명왕을 만든 거라는 고구려사 전공 여호규 교수의 가설은 여율을 고여진과 동일시하지는 않으나, 기본 골자는 이 주장과 비슷하다.
  • 중국 기록에만 나오는 주몽-여달- 여율-막래의 족보, 유리명왕이 도절에게 보인 냉담한 태도와 해명을 죽인 점, 대무신왕이 호동을 죽게 한 점, 대무신왕 사후 모본왕이 어리다는 이유로 민중왕이 즉위한 점, 53년 모본왕이 사망하고 태조대왕이 즉위하기까지 20~30년의 공백이 있었다는 게 정설이라는 점, 태조대왕이 중국 기록대로 121년 사망이 정설임에도 차대왕이 146년에 즉위했다고 삼국사기가 기록한 점, 148년 태조대왕의 적자 막근과 막덕이 차대왕에게 살해당한 점(막근은 엄밀히는 자살인데 차대왕 때문에 죽은 건 맞다), 165년 차대왕이 죽고 신대왕이 즉위하기까지 미심쩍은 정황 등 주몽계인 고구려 왕조가 초기 고구려 왕계를 일원화하면서 주몽계가 아닌 여러 고구려 왕들을 삭제한 정황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왕계로 추정되는 유리명왕을 고구려의 2대 왕이라 기록한 것으로 보아 유리명왕은 단순한 고구려의 2대 왕이 아니라 고구려 역사에서 굉장히 의미가 깊은 왕이었던 모양이다. 고이왕계의 고이왕이 백제 역사에서 워낙 확고한 족적을 남기고 고이왕계가 3세기 후반~4세기 중반까지 장기집권하다 근초고왕 대부터 초고왕계로 일원화되었기 때문에 고이왕계의 존재 자체를 지우지 못하고 일계로 조작한 백제의 사례를 고려하면 유리계가 고구려 초기에 비중이 매우 컸던 모양이다. 백제 2대 왕 다루왕이 실존 논란까지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매우 약한 것과 비교하면 유리명왕의 존재감을 알 수 있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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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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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유리명왕 본기〉
一年 유리명왕이 즉위하다
二年秋七月 왕후를 맞아들이다
二年秋九月 노루를 잡다
二年冬十月 신기한 참새가 궁궐에 모이고, 온조가 백제를 건국하다
三年秋七月 골천에 별궁을 짓다
三年冬十月 왕비 송씨가 죽어 새로 두 여인과 결혼하다
十一年夏四月 부분노의 계책으로 선비를 굴복시키다
十三年春一月 화성의 위치를 관찰하다
十四年春一月 부여가 인질 교환을 요청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다
十四年冬十一月 큰 눈으로 부여의 공격이 실패하다
十九年秋八月~九月 왕이 돼지가 달아난 죄를 물어 사람을 죽이자 병에 걸리다
二十年春一月 태자 도절이 죽다
二十一年春三月 설지가 국내성으로 천도를 건의하다
二十一年夏四月 사냥을 하다
二十一年秋八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一年秋九月 국내성 지역에 가서 지세를 돌아보다
二十二年冬十月 국내성으로 천도하다
二十二年冬十二月 협보가 왕이 정치에 힘쓸 것을 건의하다
二十三年春二月 왕자 해명을 태자로 삼다
二十四年秋九月 날개가 있는 사람을 조정에 등용하고 우씨 성을 주다
二十七年春一月 황룡국 왕이 보낸 활을 태자 해명이 부러뜨리다
二十七年春三月 태자가 황룡국 왕을 만나고 돌아오다
二十八年春三月 왕의 명으로 태자 해명이 자살하다
二十八年秋八月 부여를 섬기라는 요구를 거절하다
二十九年夏六月 검은 개구리와 흰 개구리가 싸우다
二十九年秋七月 두곡에 별궁을 짓다
三十一年 왕망이 하구려후라 부르다
三十二年冬十一月 왕자 무휼이 부여의 침략을 물리치다
三十三年春一月 왕자 무휼을 태자로 삼다
三十三年秋八月 양맥과 한의 고구려현을 정복하다
三十七年夏四月 왕자 여진이 죽다
三十七年秋七月 별궁이 있는 두곡에 행차하다
三十七年秋冬十月 유리명왕이 죽다

6. 대중 매체에서

  • 2006년 MBC 드라마 < 주몽>에서는 아역 시절에 정윤석, 소년 시절에 안용준이 연기했다. 부여궁을 도망쳐 나온 어머니 예씨 부인과[25] 개고생하는 모습이 절절하게 나온다.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실제로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다녔다는 걸 알고 원망을 푼다. 아직 예씨 부인의 태중에 있었을 시절에 주몽이 예씨 부인과 헤어지게 되었으므로 '부러진 칼'이라는 존재감이 있었지만 어째 태자 신분을 되찾은 뒤 존재감을 상실했다.
  • 파일:바람의나라 유리명왕.jpg
    2008년 KBS 드라마 < 바람의 나라>에서는 배우 정진영이 연기했다. 외부에선 강대국 부여가 호시탐탐 고구려를 노리고, 내부에선 5부의 수장들인 대가들이 왕권을 능멸하며, 수틀리면 반역도 작당하는 내우외환의 상황에서 장남을 잃고, 딸 세류를 정략혼으로 보내며, 아들 무휼은 저주받은 아이라 하여 죽은 걸로 위장해서 숨기고, 차남은 외교 문제로 자결하며, 심지어 본인은 반역자인 배극에게 시해를 당하니 그야말로 비운의 아버지 역할이다. 하지만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부여를 물리치고, 고구려를 북방의 패자로 경영하겠다는 야망과 포부, 그리고 그를 뒷받침할 능력과 카리스마를 지닌 강력한 군주의 면모 또한 묘사된다. 5부 대가들의 유리명왕에 대한 평가를 봐도 그들이 유리명왕을 만만히 여겨서 쥐고 흔드는 것이 아니라 유리명왕을 두려워해서 견제하는 것에 더 가깝다.
  • 2010년 KBS 드라마 < 근초고왕>에서는 백제 창건에 대해 다뤄질 때, 부친 추모를 찾아와 태자로 책봉받는 장면에서 잠깐 나왔다. 소서노
    "당신 아들이 부여궁에서 호의호식할 동안 우리 아들은 칼침을 맞고, 화살을 맞으며 사선을 넘었습니다!"

    라며 폭발할 때 대꾸조차 못한다.

7. 관련 인물

8. 둘러보기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 왕실의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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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 하백
 
 
해모수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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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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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왕
고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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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익 6대
태조대왕
 
 
 
 
 
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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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왕
고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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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돌고
 
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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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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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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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러진 칼날을 바치는 인물이 유리명왕이다. 부여에서 도망친 유리명왕이 아버지 동명성왕을 만나는 이야기를 토대로 그려졌다. [2] 아버지 동명성왕이 북부여에서 탈출한 이후에 태어났고, 기원전 18년 20세의 나이에 혼인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출생년도는 기원전 38년으로 추정된다. # [3] 우산하 0호 추정 [4] 고주몽의 아들이므로 자연스럽게 고씨가 되어야 하겠으나 정작 고씨로 기록된 문헌은 없다. [5] 북사》 기준. 《 위서》에서는 유리명왕의 아들로 나온다. [6] 동생 비류, 온조. [7] 후한서》에 따르면 제6대 태조대왕 대무신왕의 후손이다. [8] 《삼국사기》 기록. [9] 고려 표기 [10] 고구려 표기인 〈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 [11] 琉璃明王의 黃鳥歌 硏究 ― 작품 속에 드러난 情調를 중심으로 ― [12] 고려 시대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는 《 구삼국사》의 내용을 일부 인용해서 부연 설명을 하고 있는데, 물동이가 깨진 그 부인에게 "아비도 없는 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진흙으로 탄환을 쏘아서 깨진 부분을 막아준 후 돌아왔다고 한다. [13] 이것도 그냥 대답해 준 것은 아니고, "너는 아빠 없이 태어났는데?"라고 했더니 유리가 사색이 되어서 "세상에 아빠 없이 태어나는 자식이 어디 있어요?"라면서 자결하려고 하자 놀라서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설명해 준 것으로 《동명왕편》에 나온다. [14] 고려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쓰면서 인용했던 《 구삼국사》에 따르면 이때 동명성왕이 "네가 내 아들이라면 어떤 신기(神氣)가 있는지 보여봐라."라고 묻자 유리는 공중으로 뛰어올라서 햇살을 디디고 서 보임으로써 자신의 신성함을 보였다고 한다. 이에 동명성왕은 기뻐하면서 유리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고, 태자로 삼았다고 한다. [15] 한자 사전을 뜻하는 《 옥편》과는 다른 단어로, 옥 채찍을 의미한다. [16] 이때는 신나라였다. [17] 상안(장안) [18] 이때는 신나라였다. [19] 하늘에 지내는 제사. [20] 자세한 이야기는 해명태자 문서 참조. [21]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890416&cid=62135&categoryId=62281 [22] 주몽이 졸본부여왕 연타발의 사위가 됨으로써 고구려 초대 왕이 되었음을 고려하면 유리명왕이 주몽의 사위였을 수도 있다. 대무신왕 대소왕의 막내 동생 갈사왕의 손녀 차비 해씨와 혼인하는 등 당대 예맥에서는 동성혼이 가능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23] 건국 연대를 2세기 중후반에서 기원전 1세기로 조작하기는 했지만, 고이왕계는 부여 시조 해부루의 후손 우태의 후손이고 초고왕계는 주몽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맞는 것으로 추정된다. 주몽계가 북부여 시조 해모수의 후손을 자처하기는 했으나 고고학적으로 주몽은 엄연히 부여 출신이 맞으며, 부여 시조 동명왕의 설화를 베끼거나 대소왕과의 관계 등 부여 왕조 출신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둘 다 부여 왕조의 분가 출신이다. 또 부여는 해모수의 고리국에서 이주한 세력이 현지 세력과 합쳐서 만든 나라이며(사서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된다) 주몽 탄생 이전에 고리국은 부여에게 역흡수당했기 때문에 고리국 왕조 시절에 씨족이 분가했다 한들 주몽이 부여 출신임은 달라지지 않는다. [24] 자세한 사항은 구려후 추 항목 참조. [25] 예씨 부인은 송지효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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