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23:33:12

온달

고구려의 대형
온달 | 溫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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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차산성에 있는 온달과 평강공주상
<colbgcolor=#191970> 관등 대형(大兄)
본관 봉성 온씨, 금구 온씨
가족관계 아내 평강공주
장인 평원왕[1]
처남 영양왕
사망지 아단성
생몰년 ? ~ 590년
『삼국사기』, 제45권, 열전 제5, 온달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평강공주와 만나다2.3. 사위가 되다2.4. 최후
3. 의문점
3.1. 결혼과 출생
3.1.1. 추측1: 하급 귀족 혹은 몰락 귀족 출신의 신흥 세력3.1.2. 추측2: 서역계 귀화인(소그드인)
3.2. 온달이 전사한 곳은 어디인가
4. 기타
4.1. 관련 사적지4.2. 전설4.3. 그 외에
5. 대중매체에서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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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BS 역사스페셜 - 바보 온달, 그는 고구려의 전쟁영웅이었다

고구려의 장수이자 봉성 온씨 시조. 그리고 한국에서 바보 대명사처럼 유명한 인물이다.

평원왕의 딸인 평강공주와 결혼하여 왕의 사위가 되었고 전공을 세워 벼슬길에 올랐으며 영양왕 대까지 활약했다. 전래동화로도 유명한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설화의 주인공이다.[2]

2. 생애

2.1. 초기

溫達 高句麗平原王時人也 容貌龍鍾可笑 中心則睟然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 때의 사람이다. 용모가 못생겨 우스꽝스러웠으나 마음은 순수하였다.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집이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거리를 왕래하니, 그 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온달’ 이라 했다.
삼국사기》 온달 열전
온달은 본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로, 그 생김새가 우스울 정도로 못생겼다고 전한다.

온달은 어릴 적부터 홀어머니와 살았는데 어머니가 두 눈이 멀어 일을 하지 못하였고 집안이 가난하여 먹고 살 길이 없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구걸하며 먹고 살았다. 어찌나 가난했는지 나중에 평강공주와 처음 만났을 때에는 나무 껍데기를 벗겨 먹으려고 산에 가 있었다.

온달이 추레하고 남루한 꼴로 매일 비럭질을 하고 다니다 보니 모습이 우스웠는지 평양성 사람들이 온달을 '바보 온달(愚溫達)' 이라 불렀다고 한다.

바보라고 불린 것에는 다른 해석도 있다. 본문에도 '마음은 순수하였다.'라고 쓰여있듯이 '온달은 가난해서 산을 뒤져서 먹고 살았는데 귀한 약재를 발견해도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의 형편을 감안해 그냥 주거나 적은 대가만 받았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를 두고 바보라고 불렀는데 온달은 별 말 하지 않고 웃어넘겨 더욱 바보 취급을 당했다.'는 설. 요컨대 사람이 너무 좋아서 손해보고 사는 사람이었다는 설이다.

그러나 이후 지휘관까지 되기에 실제로 흔히 말하는 발달장애인이나 저지능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진짜 저지능자라면 학문과 무예를 익혀 고위직에 오를 수가 없기 때문.[3] 그런데 평양 백성들뿐만이 아니라 국왕까지 바보 온달의 소문을 듣고 딸에게 말했을 정도면 온달의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2.2. 평강공주와 만나다

平岡王少女兒好啼, 王戱曰
평원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니 왕이 놀리며 말했다.
“汝常啼 聒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자라면 틀림없이 사대부의 아내가 못되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을 가야 되겠다.” 왕은 늘 이처럼 말하였다.
삼국사기》 온달 열전 中
당시 고구려의 왕이었던 평원왕에게는 평강공주라는 딸이 있었다. 평강공주는 어릴 적부터 자주 울었는데 그럴 때마다 평원왕은 "너는 너무 잘 울어서 시끄러우니 귀족의 안사람으로는 시집을 못 보내겠다. 아무래도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내야겠는걸?"하고 우스개소리를 하며 놀렸다고 한다.

후에 평강공주가 결혼 나이가 되자 평원왕은 딸을 상부(上部) 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평강공주는 " 아버님이 옛날에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했으니 그 사람에게 시집가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평원왕은 어이가 없었으나 평강공주는 "대왕께서는 항상 '너는 필시 온달의 아내가 되리라'라고 말씀하시더니 지금은 어찌 예전의 말씀을 고치십니까?"라며 고집을 부렸다. 결국 평원왕은 크게 실망하였고 화가 난 나머지 밖으로 나가버리라고 꾸짖었다. 물론 아버지 마음에 진짜 나가라는 것은 아니고 아빠 말을 들으라고 으름장을 놓은 거였겠지만 평강공주도 독이 올랐는지 금팔찌와 패물을 챙겨서 진짜로 궁을 나가버렸다. 물론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렇듯이, 이것은 평강공주가 아비에게 뒤끝이 있거나 반항심이 있어서가 아닌, 온달의 순수함과 잠재력을 알아보는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야기의 흥미를 위해 평강공주가 억지를 부리는 이유를 숨겨놨을 뿐.
公主對曰 “古人言, 一斗粟猶可舂, 一尺布猶可縫, 則苟爲同心, 何必富貴然後可共乎?”
“옛 사람의 말에 ‘한 말의 곡식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바느질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단지 마음만 맞으면 되지 어찌 꼭 부귀한 다음에라야 함께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평강공주, 《 삼국사기》 온달 열전 中
평강공주는 그 길로 온달의 움막집을 찾아가서 온달의 어머니에게 대뜸 절하고는 온달이 있는 곳을 물었다. 이때 온달은 배가 고파서 산에 올라가 느릅나무 껍데기를 벗겨 먹으려고 하고 있었는데 평강공주가 산 위로 올라와 온달에게 청혼하였다. 온달은 처음에는 영문도 몰라 귀신에 홀렸다 생각하고 거절했지만 이후 그녀의 진심을 알고는 결혼한다. 평강공주는 궁 밖으로 나오면서 가져온 예물을 팔아서 , , 노비를 구입하여 살림살이를 갖추었고, 비루 먹은 을 사와서는 열심히 길러 훌륭한 말로 키웠다.[4]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해진 온달은 고구려에서 매년 개최하는 사냥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2.3. 사위가 되다

당시에 고구려에서는 매년 3월 3일마다 낙랑의 언덕에서 사냥대회를 열었는데, 이때 산짐승의 고기로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이에 평원왕과 여러 신료들, 5부(五部)의 병사들까지 모두 참석하였다.[5]

온달은 평강공주가 사와서 잘 기른 을 타고 대회에 나갔는데, 수많은 짐승을 사냥하며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평원왕은 대회에서 우승한 온달을 불러 그 이름을 듣고는 크게 놀랐으나, 아직 온달을 사위로 인정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후에 중국 후주 무제[6]가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였는데,[7] 평원왕 역시 군사를 이끌고 이산(肄山)의 벌판[8]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은 이때에도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선봉에 서서 수십 명의 적을 쓰러뜨렸다고 한다. 온달이 맹렬한 기세로 앞장서서 적을 무찌르자 뒤따르던 군사들도 사기가 올라 후주군을 공격하니, 결국 고구려 군대가 대승을 거두었다.
時,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이 때,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 들에서 맞아 싸웠다. 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용감하게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이 기세를 타고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삼국사기
현존하는 삼국사기 중에서 기존의 옥산서원본이나 정덕본은 온달이 참전한 장소를 배산(拜山)으로,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암본에서는 이산(肄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에 주(周) 의 무제(武帝)가 지나[9] 북쪽을 통일하여 위염을 떨치고 , 고구려의 강함을 시기하여 요동에 침입해와서 배산(拜山)의 들에서 맞아 싸우는데, 어떤 사람이 혼자서 용감하게 나가 싸웠다. 칼 쓰는 솜씨가 능란하고 활 쏘는 재주도 신묘하여 수백 명 적의 군사를 순식 간에 목베었다. 알아보니 그는 곧 온달이었다.
조선상고사

이후에 평원왕이 사람들을 모아 전공을 평가하는데, 참전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온달의 전공이 최고라고 평하였다. 이에 평원왕은 "이 사람이 내 사위다!" 라고 기뻐하였다. 평원왕은 예를 갖추어 온달을 맞이하였으며, 대형(大兄) 벼슬을 내렸다. 이후로 온달은 평원왕의 총애를 받아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위엄과 권세가 대단해졌다고 한다.

2.4. 최후

이후 590년, 평원왕이 승하하자 그의 아들이자 온달의 손위 처남인 영양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때 온달은 40여년 전 양원왕 신라에게 빼앗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한 출정을 허락해줄 것을 청하여 영양왕의 수락을 얻었다. 4세기 광개토 대왕의 남진 정책으로 남한강 상류 58성을 차지한 고구려지만 551년에는 신라 거칠부에게 죽령 이북의 10군을 빼앗기고 만다. 이후에도 잦은 신라의 침범이 이어지자, 마침내 온달은 총사령관이 되어 남정군을 이끌고 간 것이다.
惟新羅, 割我漢北之地, 爲郡縣, 百姓痛恨, 未甞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지금 신라가 우리의 한수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군현으로 삼으니, 그곳의 백성들이 애통하고 한스럽게 여겨 한시도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고 불초하다 여기지 마시고 병사를 주신다면 한번 쳐들어가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나이다.”
온달, 《 삼국사기》 온달 열전 中

온달은 출전하기에 앞서 "계립현(鷄立峴)과 죽령 이서(以西)[10] 땅을 되찾지 못하면[11]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鷄立峴·竹嶺已西不歸於我, 則不返也.”)"고 맹세하고는 신라 정벌에 나서다가 그는 격전 끝에 신라군의 화살을 맞아 아단성(阿旦城)에서 전사했다.

그후 기록이 없어서 결국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되찾지 못했다고 추정되었으나 연개소문이 신라에게 죽령 이북의 땅을 '수나라와 전쟁할 때 신라가 죽령 이북의 땅을 뺏었기 때문에 다시 회복하려는 것'이라고 하면서 달라고 요구했는데 이것은 온달이 사망한 590년에서 수나라와의 전쟁이 일어난 598년, 612-614년 사이에 고구려가 죽령 이북의 땅을 잠시 회복했었다는 말이 된다. 바보 온달, 전장에 나서다

다만 이 기간에도 신라와 수나라는 여전히 양국의 사신이 왕래했고, 수도가 동해안에 있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방해를 받지 않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려면 경주부터 한강 하류까지 남한강 루트가 연결돼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온달이 수복한 지역은 적어도 죽령 이북 전체까지는 아니고 조금 더 작았을 것이다. 이를 죽령 이북이라고 표현한 것은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권리를 강조하기 위한 약간의 과장이다.

이후에 고구려인들은 온달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려 하는데 시신을 담은 관이 땅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자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며 "삶과 죽음이 이미 정해졌으니, 이제 돌아가시옵소서." 라고 애원하자 그제서야 땅에서 떨어져 움직였으며 한편 온달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영양왕은 크게 애통해했다. 신채호는 이 부분을 관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는 비현실적인 부분 때문에 사실성을 부정했다. 그는 운구하는 사람들이 '실패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던 온달의 다짐이 생각나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 수 있다고 추론했다.[12]
그래서 거의 해마다 군사를 동원 신라를 침노했으나 마침내 성공하지 못하고 평원왕의 사위 온달의 전사극(戰死劇)이 연출되어, 당시의 시인 문사들이 이 일을 노래하고 이야기하고 이두문으로 기록하여 사회에 전해져서, 일반 고구려인의 적개심을 더욱 굳세게 해서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신라와는 평화가 영영 끊어지고 말았다. (중략) 온달의 죽음으로 인하여 고구려 · 신라 강화의 길이 끊어지고 백제가 고구려와 동맹하여 삼국 흥망의 판국을 이루었으니, 온달전은 삼국시대의 두드러지게 중요한 문자이다.
조선상고사

온달의 죽음으로 인해 고구려의 대 신라 감정이 더 좋지 않게 되면서 이후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는 신라에게 협공을 가한다. 칠중성 전투, 북한산성 전투 등 온달 이후로도 고구려는 꾸준히 신라의 북측을 공격했으며 이 때 고구려는 김유신이 충청도의 고구려의 성을 공략했을 정도로 강원도를 주 경로로 하여 충청도에도 세력을 투사하였다. 특히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개백현과 달을성현은 이때 고구려가 다시 되찾은 걸로 보인다.

3. 의문점

3.1. 결혼과 출생

몰락 귀족? 평양 졸부? 다문화 가정 출신? 온달은 누구였을까

평강공주가 유력한 귀족과 결혼하지 않고 하필이면 비천한 신분의 온달과 결혼한 사실을 두고, 평원왕이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내놓은 술책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며, 혹자는 평강공주의 가출이 집안 문제 때문이었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에도 이런 결혼은 막장드라마 판타지에서나 나올 법한 일. 현대로 치면 대통령이나 총리 등 국가원수도 배출하는 유력 정치인 가문의 딸이 노숙자와 결혼한다는 식인데,[13] 엄격한 신분제였던 고대에 당시 저런 식의 결혼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어찌됐든 온달의 조상이 평민이었건 하급 귀족이었든 아니면 이민족 출신이었든 간에 확실한 것은, 그가 가난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결국에는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갖고 출세했다는 점이다. 공주와의 결혼이라는 우연적 요소가 개입하기는 했지만, 경제적·사회적 제약을 극복하고 목표에 도달하는 입지전적 과정이 온달을 이해하는 데 훨씬 본질적인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3.1.1. 추측1: 하급 귀족 혹은 몰락 귀족 출신의 신흥 세력

보잘것 없던 하급 귀족으로 후주와의 전쟁에서 공훈을 세워서 부마가 되었다는 설이다. 이 때 온달은 대형(大兄)의 벼슬을 받았는데, 이것은 신당서에 나타난 고구려 12관등 중 6등급의 해당하는 관직이므로, 이렇게 대단한 전공을 세우고 관직이 이 정도에 그쳤다는 것은 온달이 하급 귀족이라는 유력한 증거라고 본다. 만약 귀족이 아니었다면 고구려 사회에서는 대형 관직조차 받지 못했을 것이므로, 하급 귀족이나 몰락한 귀족의 자손 정도는 될 것이다. 물론 이것만 해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렇게 등급은 낮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평원왕의 총애를 받고 부마가 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고구려의 고급 귀족들이 이를 "바보와 울보의 결혼"이라고 뒤에서 비꼬면서 바보 온달 설화가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또한 당시 평원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을 지지해줄 신진 세력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결탁했는데, 이들은 기존에 권력을 장악한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하급 귀족들 출신들일 수밖에 없었고, 온달도 그들 중 하나로 추정된다. 단순히 출신이 미천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들과 대립각을 세우기 위해 관직을 받고 부마가 되었을 온달이 기존 세력들의 눈에 곱게 보였을 리가 없을 것이다. 온달 외에도, 기존 기득권 세력이 신진 세력의 출신 배경 등을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사례는 흔히 있다.

역사학자 이기백(1924~2004)은 1967년 '백산학보' 제3호에 기고한 '온달전의 검토'에서 온달이 받은 기록상 최초의 관등이 대형(大兄)임을 근거로 비슷한 추정을 내놓았다. 대형의 등급을 알려주는 기록들이 제각각이라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형은 12~14개의 전체 관등 중에서 2~7관등 정도였다. 이를 근거로 이기백은 "대형이라는 관직을 차지하려면 일정한 신분의 귀족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왕실과 자연스럽게 결혼할 수 있는 고급 귀족은 아니었더라도 하급이나마 귀족의 범주에는 들지 않았겠느냐는 게 그의 추정이었다. #

박인호 한림대 박물관 연구원은 "온달을 통해 본 6세기 고구려 귀족사회"라는 논문을 통해 "온달이 처음으로 받은 관직은 '대형(大兄)'으로 고구려의 7번째 관직"이라며 "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 연남산 등도 대형을 거쳐 막리지에 오른 것을 고려할 때 온달의 신분은 높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6세기 전반 고구려에서 국내성파(옛 수도)와 평양성파(신 수도) 사이에 벌어진 내란 수준의 정계 혼란 속에서 권력을 잃은 국내성파 출신 귀족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불우하게 묘사된 환경도 정치적으로 몰락한 온달 가문의 신세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박 연구원은 왕으로서는 외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력을 결집할 필요가 있었고 온달로 대표되는 국내성파에게 화해의 손길(국혼)을 내밀었다고 주장했다. #

3.1.2. 추측2: 서역계 귀화인(소그드인)

2011년 조선일보 기사-바보 온달은 사마르칸트 왕족의 아들?
2023년 JTBC 방영분-하얀 얼굴에 어눌한 말투.. 온달이 바보로 불린 이유는?

온달이 토착 고구려인이 아니라 고구려로 귀화한 서역 출신 이민족이라는 설도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란계인 소그드인이었을 가능성은 2011년도에 제기되었으나, 이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주장은 2011년 조선TV의 인턴기자에 의해 서술된 한 교수의 주장인데, 그 연관성으로 주장된 중국의 고문서 구당서는 집편년도가 945년, 신당서 역시 1060년으로 590년에 사망한 고구려 무신 온달 장군의 인종이나 출신을 추정할 문서로서는 타당성이 전혀 없으며, 사마르칸트라는 왕조가 있었다는 내용을 찾을수가 없다.

따라서 구당서에 사마르칸트 왕이 온(溫) 이었다는 구문 때문에 온달 장군을 사마르칸트인이라고 생각 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비약적이라고 할 수 있다.[14] 특히 용종(龍鍾)을 "파리하다"라고 해석하는 유튜브의 발언은 더더욱 타당성이 없는데, 소그다르인 왕족 이름이 "온(溫)" 이라는 기록이 온달 장군의 사후 355년이나 지난 945년에 쓰여진 문서라는 것에서 연관성은 찾을수 없다.

온달이 서역인이거나 혼혈일 가능성 점쳐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고구려어가 어눌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 정도뿐이며 현재로서는 고고학적, 문헌학적으로 이렇다 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이 가설을 주류로 보지는 않는다.

이렇게 근거가 부족한 가설이 뜬금없이 나온 이유는 한국의 다문화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는데 2010년대 초반 당시는 이민자 2세나 혼혈 가정들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 이민자와 사회통합 일환으로 한국사 인물들 중에 외국계로 추정되는 인물들을 발굴하고 재조명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 가설이 처음 대중에 공개된 2011년 조선일보 기사나 2023년 JTBC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온달이 다문화 가정이라는 걸 유독 강조하고 있다.

3.2. 온달이 전사한 곳은 어디인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영양왕 1년(서기 590년), 온달이 영양왕에게 청하여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찾고자 출정하면서 "계립현(鷄立峴, 현 조령 인근[15])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다시 찾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하고 떠나, 아단성(아차성[16])에서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온달이 전사한 장소가 문제인데, 서울특별시 아차산 아차산성 충청북도 단양군 온달산성이 서로 온달과의 연고를 주장하고 있다. 이 두 장소 중에서 서울 아차산설을 주장하는 것이 이병도 정약용으로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나, 서울은 온달이 되찾아오겠다던 죽령에서 너무 멀기 때문에 겨우 18km 북쪽에 위치한 단양군 온달산성이 맞다는 설이 대립한다.

아차산의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계통의 유물들이 출토되기도 하고, 또한 당시 고구려군이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진 돌로 지은 전초기지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문헌상으로도 광개토대왕 당시 아신왕을 털어버릴 때 수륙양면으로 공격하여 미추홀(인천)과 아단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압박하다가 근성의 백제 아신왕이 계속 저항하려 하자 아리수(한강)를 건너 백제 위례성이 함락 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아차산성 쪽이 유력하다. 만약 단양 온달산성이 아단성이라면 광개토대왕은 인천에서 바로 단양을 점령하고 송파구에 있는 백제왕을 압박하다가 다시 한강을 건너 송파구를 공격하여 점령했다는 뒤죽박죽인 동선이 나온다.

또한 '계립현과 죽령 서쪽'이 단순히 그 인근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넓은 의미로 ' 한강 유역 전반'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기에 참조 서울이 해당될 수도 있다. 다만 지자체들간의 싸움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확실하지는 않다' 정도지만.

그러나 아차산성의 발굴조사성과와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군의 발굴성과는 엄연히 다르다. 쉽게 아차산이라는 말이 나오니 둘 다 고구려 유적이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아차산성 출토 유물은 일부 백제 유물을 포함한 신라 유물 일색이었고, 아에 신라에 의해서 축조된 산성으로까지 추정되고 있다. 즉, 아차산성이 아단성이라면 광개토대왕 아신왕대의 기록이랑은 맞지 않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었으나 2016년에 고구려 와당이 아차산성에서 확인되면서 이것도 복잡해지게 되었다.

온달산성 자체도 신라가 세운 신라 산성일 가능성이 높은 게, 일단 남한강 남쪽에 있어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공격을 남쪽에서 막는 데 유리한 위치다. 그리고 구조적으로도 인근에 있는 신라가 세운 단양 적성비와 함께 축조된 단양 적성, 보은 삼년산성과 거의 같은 구조, 같은 입지이다. 수구문지를 비롯하여 체성부의 외견상 구조 등 모든 것이 틀림없이 신라라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성 내부에서 바깥으로 배수하기 위한 시설 및 수구문지의 구조가 전형적인 신라 스타일이거니와, 성벽 전체가 신라 스타일이라 후대에 개축으로 바꾸었다고 보기가 어렵다. 이 자리에 만약 원래 고구려 산성이 있었다면, 거의 성 전체를 뜯어고친 셈이다. 고구려 산성에도 배수시설은 있었을 텐데...

이처럼 복잡한 온달의 격전지에 대한 쟁점은 서울교대 임기환 교수의 기고문에 잘 정리가 되어 있다.

4. 기타

4.1. 관련 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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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차산성에 있는 온달과 평강공주상
  •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에 온달 장군이 쌓아 올렸다는 온달산성이 있다. 사적 제264호이며 1979년 지정되었다. 이곳에 국내 영화, 사극 촬영 명소로 유명한 온달관광지도 있다. 매년 관광객 10만명 이상이 오면서 단양군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됐다. # 또 온달동굴(천연기념물 261호), 온달전시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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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군 온달산성 충북 단양군 온달동상

4.2. 전설

  • 온달과 관련있는 전설은 주로 한강 주변과 충주 주변에 널리 퍼져 있다. 곧 단양의 온달산성 주변과 한강가 아차산 주변으로, 온달이 활동한 지역이다.
  • 단양군에 있는 온달동굴은 이곳에 온달과 평강공주가 함께 머물렀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또 온달이 온달산성에 있을 때 때때로 이 동굴에 찾아와 여러 가지 전략을 구상하기도 하고 심신을 단련하기도 하는 등 수양을 쌓은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 같은 위치에 온달이 쉬고 갔다고 하여 휴석동이라 불리는 인근 마을에도 온달의 흔적이 남아있다. 마을 뒷산에 놓인 윷판바위는 온달이 군사들과 윷놀이를 했다는 곳이다. 온달이 바위에 손으로 직접 말판을 그렸다는 것이다.
  • 충주 월악산에 가면 지름 1m의 돌이 있는데[17], 온달이 그 돌로 공기놀이를 했다는 전설이 있다. 크기가 어른의 한 아름쯤 된다. 온달이 이곳에 와서 머물 때 심심풀이로 이 돌을 들고 공기 받기를 했다는 것이다. 힘센 장정이라도 들 수 없는 무거운 돌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 단양군 향산리에 면위실이 있다. 면위실은 면위곡이라고도 하며 온달이 이곳에서 위험을 면하였다하여 붙은 마을 이름이라고 한다.
  • 단양군 장발리에 있는 선돌에도 출처를 알 수 없는(?) 민간전설이 내려온다. 온달 누이동생에 대한 전설이다.
  • 충주 미륵리에는 마을 중심부를 말무덤이라고 부르는데, 옛날 온달장군이 적병과 싸우다가 그의 말이 창에 맞아 죽어 그 말을 이곳에 묻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 아차산에는 온달 장군이 태어났다고 하거나 또는 온달이 물을 먹어서 온달샘으로 불리는 민간전설이 채록된 약수터가 있다. 온달샘은 온달이 이 산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 마셨다는 우물이다. 온달샘 바로 옆에 석탑이 세워져 있다. 사람들은 온달샘을 기리려고 탑을 세웠다고 말한다. 이 탑은 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 루성 아래에는 온달이 주먹을 쥐고 결의를 다지는 형상을 한 ‘주먹바위’가 있다. ‘주먹 바위’ 옆에 평강공주가 통곡한 곳으로 알려진 ‘통곡바위’도 있다. 온달의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한다. 마침내 평강공주가 와서 시체를 부여안고 통곡을 하자 그때서야 관이 움직였다고 한다. 그 이후 평강공주가 통곡하는 모습을 한 바위가 생겨났다고 전한다.

4.3. 그 외에

  • 설화가 정말 유명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대 사람이고 어떤 업적을 세웠는지는 유명하지 않은 특이한 인물이다. 역사 좀 안다는 사람들도 을지문덕 온달이 동시대 인물이라고 하면 놀라는 경우가 다수.[18]
  • 한국사에서 그야말로 여자 잘 만나 인생 확 편 사람의 아이콘격의 인물이다. 다만 본인이 무능한데 아내 덕과 빽으로만 출세한 것은 아니다. 일단 온달은 아내의 조언을 잘 귀담아들었으며 기마 실력과 무예도 충분히 갖춘 사람이었고 전쟁에서 큰 활약을 세울 수준의 기량도 있었다. 온달이 부마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왕이 인정할 정도로 큰 무공을 그 자리에서 스스로 세웠기 때문. 숨겨진 천재 혹은 아내 밑에서 엄청 노력한 노력충이다.
  • 자주 쓰이는 표현은 아니지만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반대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로도 쓰인다. 즉, 잘난 여자가 자신을 빛내줄 거라 믿는 남자들을 빗대어 바보 온달 컴플렉스라 한다. 또다른 은어로 아예 온달이 있는데 여자친구 혹은 아내보다 못난 남자를 뜻한다. 근데 따지고 보면 온달은 능력은 있었어도 조력자를 못 만나던 남자가 결혼 잘 해서 출세한 케이스인데, 바보 온달 취급을 받으려면 적어도 남자 쪽에 잠재력이 있어야 정상이다. 즉 바보 온달이 아니라 트로피 허스번드 내지는 무능한 공처가라고 불러야 의미가 정확해진다.
  • 충북 단양군의 온달산성과 석회동굴에 이름을 붙인 온달동굴에서 매년 10월초에 온달문화축제를 하고 있다.
  •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에 봉성 온씨를 위한 사현사가 있다. 금구 일대는 고구려 멸망 후 유민들이 많이 정착한 곳으로, 봉성 온씨의 관향도 이곳에 있다.
  • 2021년 3월 온달 장군이 시조인 금구(金溝) 온씨 문중이 자신들의 족보를 대전 한국족보박물관에 기증했다. 한국족보박물관 심민보 학예연구사는 “온달 장군을 시조로 모시는 온씨 집성촌이 전북 김제 금구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수소문한 끝에 문중 관계자를 만날 수 있었다”며 “역사적 인물인 온달 장군 관련 소중한 자료이니만큼 기증해달라 요청했더니 문중 측에서 흔쾌히 응했다”고 말했다. 2015년 인구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금구 온씨는 전국에 1581명이 있다. #
  • 무덤의 위치와 관련해 한때 단양군에 있는 방단적석 유구의 '태장이묘'가 온달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으나 발굴 조사결과 유품이나 매장과 관련된 시설도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다.[20] 북한 학계에서는 위치와 벽화를 보고 추정하여 평양 진파리4호고분을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합장무덤으로 주장한다. 중국 어디엔가 있다고 주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학계에서는 그야말로 뜬구름을 잡고 있는 모양.
  • 바보가 아닌 사마르칸트 출신의 왕족이었단 설이 있다.
  • 북한에서는 고구려의 부흥을 일으킨 뛰어난 장수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다.
파일:attachment/gwangiandjini.jpg }}}||
파일:충청북도 단양군 온달&평강.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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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구(광이&진이) 단양군
  •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온달전은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한제국 말기의 문장가 김택영은 나라가 기울자 중국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그는 당시 한반도 역대 문장가 9명을 뽑고, 그들의 글 가운데 대표작을 가려 '여한구가문초(麗韓九家文鈔)'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김택영이 뽑은 첫 번째 문장가가 김부식이었고, 그의 문장 6편이 골라졌다. '동문선'에 실려 전해오는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와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를 제외하면, 나머지 4편은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글이다. 김후직, 거칠부, 백결선생, 그리고 온달의 전기였다. 고운기 한양대학교 교수는 "이 가운데 온달전(溫達傳)은 김택영의 안목을 빛나게 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12세기 우리 문화의 척도이려니와, 온달전은 사기가 자랑하는 백이와 숙제의 전기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천한 백성으로 태어나, 게다가 바보 소리나 듣는 떠꺼머리가, 아름다운 훈육을 받아 성장하는 과정과, 기울어가는 나라의 기둥을 다시 세우려 죽기까지 각오하고, 끝내 비운의 죽음을 맞이해서는 차마 시신마저 안타까워 자리를 뜨지 않았다는 대목에서, 김부식의 마음과 김택영의 마음은 온달 속에 좋이 포개진다. 김부식이 있으므로 온달이 있고, 김택영이 있으므로 문장의 가치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거꾸로 말하자면, 김택영이나 김부식 같은 이들이 온달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새삼 전해 주었다."라고 평했다. #

5. 대중매체에서

신분 차이를 극복한 사랑이라든가 주도적인 여성상, 평민에서 귀족이 되었다가 전사하는 파란만장한 생애 등 여러모로 사극에 어울리는 요소를 가지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드라마로 많이 만들어지지 않는 인물. 아무래도 초창기 한국 사극이 조선시대 위주로 다루다가 고려시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원효(1986) 정도를 제외하면 삼국기 태조 왕건처럼 왕이나 그에 권하는 권력자가 주로 조명되는 탓인 듯 하다. 1976년 인형극 온달은 방송되었다. 다만, 2010년대 들어서 온달과 평강공주를 주제로 한 창작물들이 꽤 나오고 있다.
  • 최인훈의 희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에서는 실은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것이 아니라 부관에게 살해당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혼령이 되어 나타나서는 자신의 억울함을 평강공주에게 호소한다. 근데 원수를 갚기는커녕 평강공주도 흑막에게 살해당한다.
  • 1961년 개봉한 이규웅 감독의 영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에서는 배우 신영균이 연기했다.
  • 1986년 북한에서 만든 영화 <온달전>도 있다. #그런데,이 시기의 적대국가는 신라라고 명확히 밝히지 않고,외적이라고 돌려 지정했다.[21]
  • KBS2의 1987년 <동화나라ABC>에서 국산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나온다. 어린이 영어 교육과 학습 목적으로 제작하였다고 한다.온달의 성우는 유해무
  • 메가드라이브 게임 <공작왕 2>가 국내정발될 때 온달장군으로 현지화가 되었다.
  • 2005년 EBS 드라마 < 점프>에서는 시즌 1 평강공주 편에 등장한다.
  • 만화 < 신암행어사>에서는 질병의 고통에 시달린 평강의 도피처로 만들어진 상상 속의 존재로 본다. 다만 작가는 평강과 온달이 아주 행복했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 2017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마이 온리 러브송>에서는 배우 이종현이 연기했다. 기존의 온달 이야기와 달리, 신분의 차이로 역사를 각색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 천추태후 후속작으로 온달 이야기를 다룬 사극을 기획 중이었으나 천추태후가 쪽박을 차서 엎어졌으며 제작비도 올라가고 PPL을 넣을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도 겹치면서 TV조선에서 저예산으로 만드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제작되지 않았다.
  • 2019년 네이버 웹소설인 루크 비셸 따라잡기도 바보 온달을 성별을 바꾸어 서구 판타지로 배경을 바꾼 설정으로 만들어졌다.
  • 2021년 KBS에서 드디어 온달과 평강공주의 사랑을 다루는 드라마 < 달이 뜨는 강>에서는 배우 나인우가 연기했다.[27] 이 드라마에서는 온달을 몰락한 귀족의 아들로 설정했다. 고구려 태왕보다 막강한 귀족 권력자들의 모함을 받아 한순간에 무너진 집안의 자제로 성장했다는 설정을 내놓고 있다. 드라마로서 작품의 평은 좋았고,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또 시청률도 나름 준수하게 나왔다. 다만, 작품의 고증이 심각하게 엉망이었다는 평이다.
파일:8f1faf63006292260ffbce4be33c418c.jpg }}}||
달이 뜨는 강에서의 온달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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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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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때는 왕의 권력이 휘청거리던 시기여서 평원왕이 자기 편을 기르려고 신분은 낮지만 능력이 있는 온달을 사위로 삼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2] 비슷한 예시인 서동의 사례와는 달리 중국 측 기록에 의거한 정사 삼국사기에 온달열전으로 수록된 이야기라 완전한 전래동화나 설화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3] 무관직은 단순히 무술 실력이 좋다는 이유로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특히 고위직으로 갈수록 개인의 무예보다는 군대를 지휘하고 전략을 짜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4] 말 중에는 정말로 늙어서 털이 빠지는 재기 불능의 말도 있지만 단순히 먹을 걸 못 먹어서(말 주인이 키울 능력이 없어서) 싸게 파는 경우도 있었다. 이걸 알아보는 걸 보면 말을 보는 눈도 좋은 단순히 온실 속에서 자란 공주님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고구려라는 국가가 태생이 기마 민족 국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왕족으로서 이 정도의 소양은 갖추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예를 들면 고구려의 건국 신화에서부터 국조(國祖)인 주몽(또는 어머니 유화부인)이 겉보기에는 비루먹은 준마를 미리 알아보는 재능을 지녔다고 한다. [5] 즉 나라의 주요 지배층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는 뜻인데, 이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 왕실에서 상당히 중요한 행사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6] 정황상 북제를 멸망시키고 북중국을 통일한 시기. [7] 북제 멸망이 577년이고 우문옹은 578년에 사망하니 대략 577년~578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8] 배산(拜山)이라고도 한다. [9] 중국. [10] 사실상 이 지역은 죽령 이북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기에, 죽령 이북이라고 알려지는 경우가 있다. 죽령은 당연히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이에 있는 백두대간상의 고개이다. [11] 온달의 최종 목적지는 단양 신라 적성비가 있는 단양군과, 단양과 같은 생활권인 제천시 지역을 두고 한 말로 보인다. 실제로 남한강 상류인 제천-단양을 장악하면 한강 하류 일대에 있던 신라 영토는 신라 본국과 월경지로 절단 당한다. [12] 그러면서 신채호는 전혀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조선사략>에 따르면 공주는 '국토를 아직 수복하지 못했으니 공께서 어찌 귀환하시겠습니까? 공이 귀환하실 수 없으니 첩이 어찌 홀로 귀환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한 차례 통곡한 뒤 졸도했다"며 "고구려인들은 공주를 그 땅에 함께 묻었다"고 조선상고사에 썼다. 온달의 시신이 움직이지 않은 게 아니라, 공주가 전투 현장에서 졸도해 온달과 함께 그곳에 묻혔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시신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말이 나왔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조선사략>은 시간적인 거리로 보면 <삼국사기>보다 신빙성이 낮지만, 위의 문구만큼은 전쟁시대의 분위기에 부합하므로 이 책에서는 <조선사략>을 채택하기로 한다"고 신채호는 적었다. [13] 혹은 지금도 군주제가 남아있는 나라의 왕실의 자녀가 빈민 집안의 자제와 혼인하는 격. [14] 지 교수가 주장하는 『 삼국사기』서술 '온달의 외모가 우스꽝스럽고 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다녔다는 容貌龍鍾可笑(용모용종가소) 부분 역시 한문 그대로를 두고 본다면 해석의 여지가 다를 수 있다. 용종 龍鍾이란 단어가 얼굴이 못생겨서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식으로 읽히는 부분이 용 (龍)자와 종(鍾)자의 한문 의미로 납득되지 않고, 이것을 중국어로 읽었을때야 비로서 龙钟 쇠약하다 노쇠하다 라고 읽히기 때문에, 애초에 삼국사기의 해석부터 특히 제대도 된 건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5] 정확히는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를 잇는 '하늘재'라는 고개다. 참조 [16] 아단성의 '단(旦)'과 아차성의 '차(且)'의 한자 모양이 비슷해, 두 이름이 동시에 전해진다. [17] 미륵대원지 바로 옆에 있다. [18] 사실 꼭 이들만 그런 게 아니고 삼국시대 말기의 3대는 정말 소위 말하는 삼국시대의 영웅호걸들과 설화의 주인공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다. 신라는 진흥왕, 이사부, 거칠부, 김무력, 김유신, 김춘추, 선덕여왕, 자장법사의 시대였고, 백제는 무왕, 선화공주(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도 있음), 계백, 의자왕, 흑치상지, 고구려에서는 을지문덕, 연개소문, 양만춘, 평원왕, 평강공주, 온달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도 없다. [19] 단 사극에서 온군해가 온달의 아들로 나온 적이 없다. 연개소문에서 온군이라는 캐릭터가 온달의 아들로 서술된 적은 있었다. [20] 조선시대 불탑의 다른 형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양말고도 안동이나 경북 북부에도 이런 시설들이 있다. 전 구형왕릉도 이러한 사례 중 하나다. [21] 신라를 남한으로 의식했는지, 평양성파와 국내성파의 내분 소재로 타임슬립을 하였다. [22] 딱 삼국시대 금관이다. [23] 유니크 메이스 [24] 앞에 귀면와 무늬가 새겨져 있는 유니크 워드 [25] 삼국시대풍 갑옷 [스포일러?] 한 게 아니라 여자로 환생했다. 이름은 해원으로, 독립운동가로서의 임무 때문에 남장을 했다. [27] 원래 지상파 방영분은 6화까지 지수가 연기했으나, 지수가 학교폭력 논란으로 하차하면서 나인우가 합류해 1~6화 분량을 재촬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