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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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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오기 아키라 (仰木 彬)
출생 1935년 4월 29일
후쿠오카현 나카마시
사망 2005년 12월 15일 (향년 70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포지션 2루수
투타 우투우타
학력 후쿠오카 현립 토치쿠 고등학교
프로입단 1954년
소속팀 니시테츠 라이온즈 (1954~1967)
지도자 니시테츠 라이온즈 코치 (1968~1969)
킨테츠 버팔로즈 1군 수비·주루코치 (1970~1983)
킨테츠 버팔로즈 1군 수석코치 (1984~1987)
킨테츠 버팔로즈 감독 (1988~1992)
오릭스 블루웨이브 감독 (1994~2001)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 (2005)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킨테츠 버팔로즈]] 역대 감독
오카모토 이사미
(1984~1987)
오기 아키라
(1988~1992)
스즈키 케이시
(1993~1995)
[[오릭스 버팔로즈|오릭스 블루웨이브/버팔로즈]] 역대 감독
도이 쇼조
(1991~1993)
오기 아키라
(1994~2001)
이시게 히로미치[1]
(2002~2003.4)
이하라 하루키
(2004)
오기 아키라
(2005)
나카무라 카츠히로
(2006)
파일:1996블루웨이브우승.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감독
1996

1. 소개2. 유년 시절3. 현역 시절4. 코치 시절5. 킨테츠 버팔로즈 감독 시절6. 오릭스 블루웨이브 감독 시절7.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 시절8. 타계9. 에피소드

1. 소개

일본의 야구선수, 지도자, 해설가. 1960년대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황금기를 이끈 멤버 중의 한 명이며, 은퇴 후에는 니시테츠, 킨테츠, 오릭스의 코치와 감독을 지내며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명감독이기도 하다.

또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진출하여 최고의 활약을 펼친 투수 전설이 된 타자를 육성한 감독이다.

2. 유년 시절

부모님은 학교의 선생님이었는데, 아버지는 군대에 징집되어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가 젊은 나이에 전사하여 홀어머니 슬하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거기다 어린 시절엔 여동생 2명을 모두 병으로 잃는 아픔까지 겪어야 했다. 이러한 집안 사정 때문에 오기는 제철소에 취직해서 어머니를 부양하겠다는 일념으로 공업 고등학교 진학을 희망했지만, 당시 토치쿠 고교 야구부 OB 측에서 오기의 입학을 설득하여 결국 토치쿠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토치쿠 고등학교에 재학 중엔 투수 내야수로 뛰었으며, 3학년 때인 1953년 투수 겸 4번 타자로 팀을 하계 코시엔 대회에 진출시켰지만 2회전에서 오사카의 강호 나니와 상업 고등학교[2]에 패퇴한 바 있다.

3. 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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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테츠 시절의 오기.

졸업 당시 니시테츠 라이온즈, 난카이 호크스, 주니치 드래곤즈 3구단의 입단 제안을 받았는데, 본인은 난카이 입단을 희망했고 실제로 난카이, 주니치 모두 계약금으로 100만엔이란 거금을 제안했지만, 니시테츠는 이보다 적은 60만엔을 계약금으로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이었던 미하라 오사무가 직접 자택으로 찾아와 어머니에게 "저에게 (오기를) 맡겨주십시오"라고 열심히 설득한 것에 감명을 받아[3], 1954년 니시테츠 라이온즈에 계약금 60만엔, 연봉 34만엔으로 입단하면서 프로에 데뷔한다.

투수로 입단하면서 프로에 데뷔했지만, 프리 배팅 때 투구하는 오기의 공이 프로에선 통하지 않을 것이란 것이라고 생각한 미하라 오사무 감독이 2루수로 전향할 것을 지시하면서 오기는 투수를 포기하고 2루수로 포지션을 바꿨다. 이는 당시 니시테츠의 주전 2루수이던 미야자키 카나메[4]가 37세의 적지 않은 나이였다는 점을 고려한 것도 있다. 이후 캠프 때 오기를 주전 2루수로 키워내기로 방침을 잡은 수뇌진에게서 혹독한 2루수 훈련을 받았다.

사실 오기는 고교 시절 투수뿐 아니라 내야수로서도 실력이 좋았던지라 데뷔 시즌부터 바로 주전 2루수 자리를 꿰찼고, 비록 타율은 낮았지만 나름의 장타력과 빠른 발, 견실한 수비력으로 나카니시 후토시, 이나오 카즈히사가 투타 양면에서 핵심 멤버로 뛰는 가운데 유격수 토요다 야스미츠와 함께 퍼시픽리그 최강의 키스톤 콤비를 결성하여 수비 등에서 팀을 지탱하며 니시테츠의 황금시대를 이끄는 데 한 몫을 거들었다. 한편으로 오기는 시합이 없을 땐 스승인 미하라 오사무 감독과 같이 야구 이론에 대해 항상 의논하고 공부하거나 일반상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도자로서의 기초를 쌓기도 했다.

1955년 5월 22일 대 톤보 유니온즈 전에선 퍼시픽리그 최다 기록인 1시합 6안타를 기록하기도 했고, 1960년엔 현역 시절 최다 기록이자 유일한 시즌 100안타를 기록하면서 2루수 부문 베스트나인을 수상했다.

1963년 이후론 외국인 선수 영입 등으로 인해 출장기회가 감소해 갔고, 결국 1967년 시즌을 끝으로 14시즌 통산 800안타, 70홈런 326타점 116도루, 타율 0.229의 기록을 남기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4. 코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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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테츠 코치 시절. 맨 앞줄 가장 오른쪽이 오기 아키라. 왼쪽의 등번호 68번은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

은퇴 후 오기는 2년 간 니시테츠 라이온즈에서 코치를 역임한 뒤 1970년 킨테츠 버팔로즈 감독을 맡고 있던 니시테츠 시절 스승 미하라 오사무의 부름을 받고 킨테츠 코치로 취임하여[5] 수비, 주루 코치 보직을 맡았으며 경기 때 주로 3루 주루 코치로 출장했다. 1979년 일본시리즈 7차전 때 에나츠 유타카의 그 유명한 에나츠의 21구 당시 오기가 3루 코치를 맡고 있었고 이 때 스퀴즈 번트로 홈을 노리던 3루 주자 후지세 시로가 아웃당하여 결국 일본시리즈 우승에 실패한 흑역사도 있었지만, 1974~1981년까지 킨테츠의 감독을 맡았던 니시모토 유키오는 오기가 전임 미하라 감독의 오른팔 이었음에도 그를 실력만으로 중용했고, 평소 "오기는 벤치의 사인을 한번도 틀린 적이 없다"라고 칭찬할 정도로 훌륭한 주루 코치이기도 했다. 오카모토 이사미가 감독으로 재임한 1984~1987년에는 킨테츠의 수석 코치를 역임했다.

5. 킨테츠 버팔로즈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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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테츠 감독 시절의 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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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퍼시픽리그 우승 후.

무려 20년 동안 코치를 역임하던 오기는 1988년 오카모토 이사미의 후임으로 킨테츠 버팔로즈의 감독에 취임하며 처음으로 감독직을 맡게 되었고, 감독으로선 초보였지만 코치 시절 쌓은 풍부한 경험과 지도력을 바탕으로 감독 데뷔 시즌이었던 1988년부터 치열하게 세이부 라이온즈와 리그 우승 경쟁을 벌이며 킨테츠 버팔로즈를 퍼시픽 리그의 상위권 돌풍의 핵으로 상승시켰다. 그러나 이 해 시즌 막판에 난카이 호크스, 한큐 브레이브스[6]와의 시즌 마지막 맞대결을 모조리 패하면서 최종전이었던 10월 19일 롯데 오리온즈와의 더블헤더 2경기를 전부 이겨야 우승할 수 있는 상황이 찾아왔다.

1차전은 시작부터 롯데에게 7회까지 3:1로 끌려다니다가 8회에서 겨우 동점을 만든 뒤, 9회초 2사 2루 상황에서 터진 대타 나시다 마사타카[7]의 극적인 중견수 앞 역전 적시타로 간신히 승리하고[8] 2차전에 들어갔다. 2차전에서도 롯데에게 선취점 1점을 내주는 등 고생했지만 6회에 동점으로 만든 데 이어 7회에 2점을 내어 역전에 성공하면서 3:1로 앞서나갔다. 그러나 7회 말에 킨테츠의 선발 타카야나기 이즈미가 롯데 타자 오카베 아키카즈에게 솔로포를 얻어맞은 데 이어 급히 투입된 주전 마무리 투수 요시이 마사토 니시무라 노리후미에게 동점 적시타를 얻어맞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고, 8회 초에 어찌저찌 1점을 추가해 4대 3으로 재역전하자 오기는 8회 말에 에이스 투수 아와노 히데유키[9]를 마무리로 투입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그러나 아와노마저 이 해 수위타자를 수상한 롯데의 타카자와 히데아키에게 동점 솔로 홈런을 얻어맞는 바람에 경기가 연장전에 돌입하게 되었고, 결국 경기 개시 후 4시간이 지날 시, 9회 이전에 4시간을 넘긴 경우를 제외하면 4시간이 지난 시점의 이닝까지만 소화하고 경기를 마무리짓는다는 당시 퍼시픽리그 시간제한 규정에 의해 연장 10회 무승부로 마무리되면서, 세이부 라이온즈를 밀어내는 데 실패하고 승률 2리 차이로 아쉽게 2위에 머물렀다. 이날의 더블헤더는 이후 10.19로 불리면서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명승부로 각인된다.[10]

이듬해인 1989년, 킨테츠는 시즌 상반기까지 한큐의 후신 오릭스 브레이브스에게 다소 적잖은 게임차로 2위에 머물렀지만, 후반기에 오릭스가 하락세를 탄 것을 틈타 세이부와 함께 상승세를 올리며 오릭스, 세이부와 시즌 막판까지 치열한 우승 경쟁을 벌였고, 더블헤더가 포함된 세이부와의 최종 4연전을 4연타수 홈런을 쏘아올린 랄프 브라이언트의 맹활약으로 모조리 쓸어담으며 결국 최종전 직전이었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129번째 경기에서 승리하여 극적으로 9년 만의 퍼시픽리그 우승을 달성했다.[11] 이 해의 기적적인 리그 우승을 계기로 오기의 지도력은 스승인 미하라 오사무 별명미하라 매직을 본떠 오기 매직 이라 불리며 찬사를 받았다. 대신 에이스였던 아와노 히데유키의 팔을 제물로 바쳤다[12]그러나 이 해 일본시리즈에서는 후지타 모토시 감독이 이끌던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먼저 3승을 따놓고도 내리 4연패로 역관광 당하면서 코앞에서 우승을 놓치는 비운을 맛보았다.

이후 오기는 노모 히데오, 아카호리 모토유키 등의 에이스 투수진과 사회인야구 출신의 즉전감 유망주 이시이 히로오 등을 주축으로 성장시키는 데 성공하여 투타 양면에서 킨테츠의 전력을 크게 강화하며 1992년까지 팀을 3위-2위-2위로 상위권으로 이끌었고, 1991-92시즌엔 2년 연속으로 세이부 라이온즈와 우승 경쟁을 벌였지만 끝내 2번 모두 미끄러지면서 1989년 이후로는 우승을 이뤄내지 못한 채 결국 1992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킨테츠 감독에서 사퇴하였다.

6. 오릭스 블루웨이브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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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 블루웨이브 감독 시절의 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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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스타디움 고베에서의 홈경기 중. 옆의 선수는 스즈키 이치로.

킨테츠 감독에서 사임한 뒤 1년 간 아사히 방송, 큐슈 아사히 방송, 스포츠 닛폰의 해설가로 활동하던 오기는 1994년 도이 쇼조의 후임으로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감독으로 취임하며 현장으로 복귀한다.

오기는 초창기부터 뛰어난 잠재력을 선보였지만 도이 감독과의 불화로 2군을 전전하던 외야수 스즈키 이치로, 타구치 소를 주전으로 발탁하여 그 해 이치로가 역대 최초 시즌 200안타 달성과 동시에 수위타자를 획득하며 향후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로써의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 킨테츠에서 보여준 지도력을 오릭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하며 도이 쇼조 감독 재임 하에 한동안 침체의 늪에 빠져있던 오릭스를[13] 취임 첫해 킨테츠 버팔로즈와 공동 리그 2위로 이끌었다.[14]

이듬해인 1995년, 그 해 1월 17일 발생한 고베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연고지 팬들의 마음을 위로한다는 의미로 오릭스 선수단은 "힘내자 고베(がんばろうKOBE)"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유니폼 소매에 붙이며 각오를 다졌고, 시즌 초반엔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밀렸으나 점차 압도적인 상승세를 보여주며 6월 후반에 세이부를 밀어낸 후 독주를 이어간 끝에 고베 연고이전 후 첫 퍼시픽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다.[15] 그리고 15승 27세이브를 거두면서 팀의 마무리 투수로 맹활약 했던 히라이 마사후미의 팔을 또 제물로 바쳤다. 하지만 그 해 일본시리즈에선 아쉽게도 노무라 카츠야가 이끄는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1승 4패로 패퇴하며 오기는 또 다시 시리즈 제패에 실패했다.

일본시리즈에서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맞이한 1996년에도 오기는 출중한 지도력으로 퍼시픽리그 2연패를 달성했고, 일본시리즈에선 이 해 무려 11.5게임차를 따라잡는 극적인 리그 우승을 달성한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지휘 하의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작년에 야쿠르트에게 당했던 대로 4승 1패로 물리치며 본인의 현역 시절이었던 1958년 일본시리즈 우승[16] 이래 무려 38년 만에 감독으로써의 숙원이었던 일본시리즈 제패를 이뤄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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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일본시리즈 우승 후 헹가레를 받는 오기.

이후 오기는 다시 리그 우승, 일본 시리즈와 연을 맺지 못했지만, 1999년까지 오릭스를 A클래스(리그 3위 이내)로 이끌며 킨테츠 감독 시절까지 포함하면 11년 연속 A클래스, 14년 연속 5할 승률의 대기록을 세우며 명감독으로서 부족함 없는 명성을 남겼다. 그러나 중심 타자인 이치로와 타구치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진출하고 그 외 주전급의 선수들이 FA로 팀을 떠나면서 전력 약화를 이기지 못한 채 팀은 2000~2001년 시즌 2년 연속 4위에 그쳤고, 결국 오기는 2001년 시즌을 끝으로 오릭스 유니폼을 벗었다. 한편으로 그 해 9월 26일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열린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와의 마지막 대결에서 8회까지 5-2로 앞서가다 키타가와 히로토시에게 세계 최초 및 유일한 대타 역전 끝내기 리그 우승 홈런을 허용하기도 했다.

오기는 2002~2004년 아사히 방송과 스포츠 닛폰의 해설가로 복귀하여 활동하였고, 2004년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 야구전당에 입성하였다. 그런데 그 해 연말 열린 명예의 전당 입성 기념 파티에서 오기는 "오늘은 파티이기도 하지만, 저의 생전장(生前葬) 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라고 좌중들에게 말했는데, 사실 오기는 이미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하지만 오기는 자신의 투병 사실을 공표하는 일 없이 현역 시절 팀 동료이자 킨테츠 시절 수석코치로 함께 한 나카니시 후토시 등 친분이 깊었던 소수 외에는 비밀로 하고자 했다.

7.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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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 버팔로즈 감독으로 돌아온 오기. 그러나 유니폼을 입고 미소짓는 그의 얼굴은 그 해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폐암으로 투병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기는 "그라운드에서 쓰러지는 것이 소망이다"라는 포부와 함께 2005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합병으로 탄생한 오릭스 버팔로즈의 감독으로 취임하며 4년 만에 다시 현장으로 복귀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로,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고령 감독 취임이었다.[18]

그러나 암 치료와 동시에 고령의 나이로 감독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시합 도중임에도 덕아웃에서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거나 벤치에 등을 기댄 채로 움직이질 못하는 등 투병과 고령으로 인해 체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모습이 눈에 띄었고, 특히 후반부 세이부 돔에서의 원정경기에선 구장 계단을 자력으로 올라가질 못해 외야의 대규모 장비 출입구를 통해 그라운드로 들어와야 했던 모습이 포착될 정도로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오기는 최선을 다해 팀을 지휘하여 3년 연속 최하위였던 팀을 리그 4위로 이끄는 성과를 보였다. 시즌 종료 후 구단에서는 감독직을 계속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오기는 고령과 건강 문제를 이유로 결국 퇴임했고 그것이 오기의 그라운드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오기의 감독 통산 성적은 988승 815패 53무 승률 0.548 이다. 덧붙이자면 오기는 킨테츠 시절 코치로써 보좌했던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처럼 선수와 지도자 생활을 전부 퍼시픽 리그에서 영위했다. 여담으로 선수와 지도자 경력을 전부 대형 사철과 관련된 팀에서 기록했다.[19]

8.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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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 아키라 환송회 때 덕아웃에 걸린 오기의 유니폼과 꽃다발.

오릭스 감독에서 물러난 오기는 오릭스 구단의 시니어 어드바이저로 취임하여 키요하라 카즈히로 영입에 몰두하는 등 현장 뒤에서도 팀의 전력 강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폐암 악화로 인해 입원 치료를 받게 되었고 퇴임 2개월 만인 2005년 12월 15일, 결국 지병인 폐암을 이기지 못하면서 해를 넘기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

오기의 사망 소식을 접한 프로입단 동기인 노무라 카츠야"한번 더 감독으로서 그 녀석과 붙어보고 싶었다" 며 애통해 했고, 그 외의 많은 야구인들이 그의 죽음에 대해 진심으로 애도를 표했다. 오기의 장례식은 생전 그의 바람대로 조용히 치러졌지만, 오기의 지인들은 후에 별도로 각각 블루웨이브의 홈구장이었던 고베 종합운동공원 야구장과 오기의 고향 나카마 시에서 천국 환송회를 개최하여 고인의 영면을 빌었다.

2019년 4월 29일, 오릭스 버팔로즈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열린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홈경기에서 팀 전원이 블루웨이브 유니폼에 오기 감독의 등번호인 72번을 달고 출전했으며(선수명은 미표기) 8회말 2사 1루 3-3 동점 상황에서 요시다 마사타카가 결승 투런 홈런을 날리며 팀에 승리를 안겼다. 이 날 72번을 모두 달았던 이유가 바로 오릭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오기의 생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니시무라 노리후미 감독은 "이 등번호를 달고 절대로 질 수 없다. 이길 수 있어 좋았다" 라고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이 날 경기는 헤이세이 시대의 마지막 퍼시픽 리그 경기가 치러진 날이었다.

9. 에피소드

  • 감독 시절 육성했던 노모 히데오, 스즈키 이치로, 다구치 소, 하세가와 시게토시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진출했으며, 이 4명의 선수는 입을 모아 오기를 사부님으로 존경하고 있다.
  • 1996년 올스타전 당시 퍼시픽 리그 감독이던 오기는 경기 막판 우익수 스즈키 이치로 투수로 등판시켰다. 팬 서비스 차원의 깜짝 이벤트였지만 센트럴 리그 감독 노무라 카츠야"지금 장난하는 거야 뭐야" 라고 반발하며 항의의 뜻으로 마쓰이 히데키 대신 투수 타카츠 신고 대타로 타석에 들여보냈다.[20] 결과는 내야 땅볼로 이치로의 승리.
  • 승리를 위해서라면 투수 운용을 다소 무리하게 하는 부분도 있었다. 위에 얘기했듯이 아와노 히데유키나 아카호리 모토유키, 히라이 마사후미 등의 선수 생명을 단축시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21] 이 때문에 킨테츠 감독 시절 곤도 히로시 투수 코치, 요시이 마사토와 자주 의견 충돌이 있었고, 오릭스 감독 재임 중에도 투수 코치이던 야마다 히사시와 종종 대립하곤 했다.[22]
  • 스즈키 이치로의 성이 평범하다며 특징을 주기 위해 등록명을 이치로로 할 것을 제안한 이가 오기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당시 타격 코치이던 아라이 히로마사가 이 아이디어를 제안하여 오기가 허락했다고 한다.
  • 일본 야구계에 길이 남는 명장이었지만, 사생활에선 선수 시절부터 주당 날라리로 유명했다고 한다 애초에 미하라 오사무 감독이 젊을 때의 오기와 자주 야구와 일상생활 얘기를 한 게 오기의 이런 날라리 성향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고. 심지어 현역 시절 시마바라에서 열린 니시테츠 구단 캠프 땐 휴일 날 몰래 아마쿠사에 배를 타고 놀러갔다가 풍랑으로 당일 돌아오지 못하고 다음날 몰래 복귀하다가 미하라 감독에게 걸려서 혼쭐이 난 적도 있을 정도였다.
    감독으로 취임한 이후에도 젊을 적 기질을 숨기지 않았는데, 그라운드에서는 냉철한 지휘로 선수들을 이끌었지만 사석에서는 유행이 지난 펀치 파마 헤어스타일에 싸구려 양복 차림으로 아재개그를 날렸다고 한다. 심지어 킨테츠 감독 시절엔 경기 후 연회 자리에서 술게임을 벌여서 술을 가장 빨리 먹은 선수를 다음 시합 때 선발 멤버로 뽑은 적까지 있을 정도. 여담으로 이 당시 퍼시픽 리그 심판 마에카와 요시오가 킨테츠 선수단의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오기의 이런 모습에 어이없던 나머지 가까이 있던 카네무라 요시아키를 불러 "너희 팀은 뭐 이런 바보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냐"라고 깠다고 한다
  • 오기가 사망한 날은 2005년 12월 15일인데, 오기는 그 해 12월 20일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뛰던 스즈키 이치로와 저녁식사 약속을 잡았던 상태였다. 이 때문에 날이 갈수록 상태가 안 좋아지자 오기는 주치의를 붙잡고 20일까지는 어떻게든 살아있게 해 달라며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오기의 폐암은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고, 결국 오기는 이치로와의 식사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덧붙여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전력외 통보를 받고 퇴단하여 오릭스 버팔로즈의 영입 제안을 받았던 키요하라 카즈히로와도 별도로 저녁 약속을 잡았지만 마찬가지로 오기의 죽음으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 죽기 직전까지 오기는 키요하라가 오릭스로 오도록 설득했고 결국 키요하라는 오릭스 버팔로즈에 입단하여 3년간 뛴 후 은퇴하게 되는데, 은퇴시합 때 키요하라는 오기에게 "천국에 계신 오기 씨. 저에게 마지막으로 활약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그에게 감사했다.
  • 자신의 저서인 "이기는 이유가 있다"에서 각자의 개성을 개화시키는 자주성 존중형 인재 육성 기술을 설명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일본프로야구계는 히로오카 타츠로(야쿠르트, 세이부), 노무라 카츠야(야쿠르트), 모리 마사아키(세이부) 등 데이터 분석에 근거한 치밀한 플레이를 실천하는 감독들이 일본시리즈 제패를 거듭했는데, 이 시대는 각 스타들의 돌출된 능력에서 팀 전체의 종합적인 전력으로 싸우는 시대로 변화하는 과도기였다. 번트, 진루타 등 팀플레이를 중시하고 중간계투, 마무리 투수 등의 역할을 세분화하여 팀 전체의 견실한 전력으로 경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정석으로 되가던 시대에 오기는 그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돌출된 능력의 개화'이라는 방침을 가지고 갔고, 그런 지휘가 낳은 걸작중의 하나가 바로 노모 히데오였다. 노모는 드래프트 당시 아마추어 최고급 투수로 주목받으며 역사상 최다인 8개 구단으로부터 지명을 받았는데, 개성적인 토네이도 투구법으로 화제를 불러오긴 했으나 데뷔 시즌 초반에 명성에 걸맞은 실적을 내지 못하자 주위에서는 투구법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해졌다. 그러나 오기는 "저는 땀이 나오기 시작하면 컨디션이 좋아집니다"라는 노모의 의견을 존중하며 투구법 변경 대신 등판 이닝수를 오히려 늘리는 결정을 했고,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 준 오기의 배려 덕분에 노모는 서서히 부진을 떨쳐내고 프로 무대에서 선풍을 일으키며 그 해 퍼시픽리그 최초의 사와무라상, 리그 신인왕을 비롯해 구원왕, 골든글러브를 제외한 퍼시픽리그 투수 타이틀을 모조리 독식했다. 노모는 "저는 지금의 형태로 계속 해왔었고 이대로 가고 싶습니다. 연습 방법도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대로 시켜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제가 이기지 못하면 그 때 생각해주십시오"라고 자신의 의지를 꾸준히 관철하는 타입이었는데, 서울 올림픽 은메달 수상 등 이미 아마추어 때부터 실적을 내왔던 노모였기에 오기는 노모가 주장하는 것이라면 우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여 성공을 거뒀다.
    오기의 육성 이론은 기본적으로 각 선수의 개성을 판별한 뒤 이를 살릴 수 있게 선수들을 존중하는 방식이었으며, 이렇게 선수가 자신의 스타일대로 플레이하여 결과가 나와야 감독이나 코치의 지도를 받아 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자기 분석이 되어 있지 않은 선수의 이기심을 용인하는 방임주의가 결코 아니며 데뷔 전 아마추어에서 충분히 검증된 선수 본인의 실력을 파악하고 의견을 들으며 결과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물론, 선수의 개성과 상황을 지켜 보면서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지원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1] 시즌 도중 해임. [2] 現 오사카 체육 대학 나미쇼 고등학교. 장훈의 모교이기도 하다. 참고로 장훈은 1956년 전학생으로 입학했다. [3] 본인은 후에 니시테츠로 입단한 것에 대해 "그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느꼈다"라고 회고했다. [4] 니시테츠 사회인 야구팀에서 뛰다가 1950년 양대리그 시작과 동시에 니시테츠가 프로팀으로 창단한 니시테츠 클리퍼즈에 선수 겸 감독으로 입단하면서 프로에 데뷔했다. 그후 니시테츠가 같은 후쿠오카 니시닛폰 파이레츠를 합병하면서 니시테츠 라이온즈가 된 이후 실제 지휘는 총감독으로 1951년 취임한 미하라 오사무가 맡게 되었지만 감독 지위 자체는 1952년까지 유지했고 이후 오기 등에게 밀려 출장기회가 감소하자 1954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에도 니시테츠에서 1955~1957년까지 3년간 코치, 조감독을 맡았지만 퇴단 8년 후인 1965년에 향년 49세로 사망했다. [5] 그러나 미하라는 1970년을 끝으로 킨테츠 감독에서 사임하고, 이듬해인 1971년 야쿠르트 아톰즈 감독으로 취임했다. [6] 두 팀 모두 1988년을 끝으로 각각 다이에, 오릭스에 매각되어 호크스는 후쿠오카로 이전하고, 브레이브스 역시 1991년에 블루웨이브로 구단명을 바꿨다. [7] 나시다는 이 해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에 1차전의 이 적시타가 그의 현역 마지막 안타가 되었다. 2차전에서도 출장했지만 이 땐 타석이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1차전이 마지막으로 타석에 선 경기가 되었다. [8] 당시 규정상 더블헤더 1차전은 9회까지만 진행하며 9회 말까지 승패가 가려지지 않을 경우 무승부로 처리했기 때문에, 만약 나시다가 범타로 물러나고 킨테츠가 9회 초를 무득점으로 끝마쳤다면 바로 무승부 이하가 확정되어 곧바로 킨테츠의 우승이 좌절될 상황이었다. [9] 1987년 퍼시픽 리그 신인왕 수상자이며, 노모 히데오 입단 이전의 킨테츠의 에이스 투수였다. 그런데 아와노는 이날 1차전 9회말에 등판하여 1이닝을 던졌고, 그 이틀 전엔 무려 128개의 공을 던지며 9회까지 완투했던 상태였다! 결국 직전 경기들에서의 연이은 투구로 지친 탓인지, 후술하겠지만 아와노는 동점 홈런을 얻어맞게 된다. [10] 이날 긴급 편성된 더블헤더 2차전의 TV 중계는 시청률 31.4%로 퍼시픽리그 정규시즌 경기 중계로는 역대 최고 기록을 남겼다. [11] 이 해 후반기에 전년도보다도 역대급으로 치열한 우승 경쟁이 벌어진 나머지, 2위 오릭스와 3위 세이부와의 게임차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1~3위까지의 승률 차이는 고작 1리밖에 나지 않았다. [12] 아와노는 1989년에도 29경기(28선발)에 등판해서 21완투 235.2이닝을 던지며 엄청나게 굴려졌다. 참고로 데뷔시즌 및 신인왕을 수상한 1987년에도 32경기(30선발) 22완투 249.2이닝을 기록했는데, 프로 입성 때부터 지속적으로 혹사를 겪은 셈. 그리고 이 혹사와 보크 규정 개정으로 인한 투구폼 변경이 겹치면서 1991년 이후엔 하락세에 시달리다 요미우리, 요코하마를 거쳐 1999년 은퇴했다. [13] 성적 자체는 오릭스 블루웨이브 원년이었던 1991년부터 오기가 부임하기 직전인 1993년까지 3년연속 3위(오릭스 브레이브스 시기까지 포함 시엔 5년 연속)로 상위권을 지켰으나, 도이가 수비 중심의 야구를 앞세우면서 기존 브레이브스 시기의 주전 선수들과 팀 방침의 이견으로 불화를 일으켜 타 팀으로 이적하는 단초를 마련하거나 실력이 뛰어난 선수들을 중용하지 않고, 스즈키 이치로 등 재능 있는 유망주들을 코치진의 방침에 반하는 스타일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홀대하며 팀이 점점 내부에서 썩어가던 게 문제였다. [14] 다만 이 해는 시즌 막판의 하락세에 더해 전반전 최하위였던 킨테츠 버팔로즈의 후반 대약진과 시즌 내내 상위권 경쟁을 벌이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분투에 밀려 B클래스로 떨어질 뻔한 아찔한 시즌이기도 했다. 실제로 4위에 그친 다이에와의 승률 차는 불과 6모(.0006)에 불과했는데, 이 해 다이에는 네모토 리쿠오 감독의 지휘 아래 시즌 후반까지 상위권을 유지하며 난카이 시대부터 이어져 온 16년간의 비밀번호 탈출에 기대를 모았으나 결국 시즌 막판에 킨테츠의 약진과 자신들의 부진까지 겹치면서 근소차로 4위에 머무르며 비밀번호 탈출에 실패했다. 다이에의 비밀번호는 이로부터 4년 뒤인 1998년에야 깨졌다. [15] 1989년 오릭스에 팀이 인수된 후 1991년 고베 연고지 이전을 한 뒤의 첫 리그 우승이었다. 팀 역사상으론 한큐 브레이브스 시대였던 1984년 이래 11년 만의 우승이었다. [16] 그 유명한 이나오 카즈히사가 혼자서 시리즈 4승을 거뒀던 시리즈였다. 그 이듬해인 1959년엔 스기우라 타다시가 한술 더 떠서 4연투 4연승으로 시리즈 4승을 거뒀다. [17] 팀 역사상으론 오릭스로 매각되고 고베로 연고이전한 이래 최초의 일본시리즈 우승이자 한큐 브레이브스 시대였던 1977년 이래 무려 19년 만의 경사였다. [18] 이듬해인 2006년 71세의 나이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에 취임한 동갑내기 노무라 카츠야가 바로 기록을 경신했다. [19] 다만 오릭스 감독 시기는 이미 한큐 전철이 팀을 매각한 후 이전의 팀컬러가 많이 지워졌기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다. [20] 전업 투수도 아닌 야수한테 타자가 범타라도 친다면 그게 더 망신이라고 판단한 점도 있었다. 다만 이치로는 아마추어 시절까진 투수로도 뛰다 프로 입성 후 타자로 완전히 전향했다. [21] 정확히는 아와노는 2000년, 히라이는 2014년까지 어떻게든 현역 생활을 이어갔으나, 전성기 때의 지나친 혹사로 인해 이후 은퇴할 때까지 지속적인 부상과 성적 부진에 시달렸다. [22] 재미있게도 이후 아와노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곤도와, 히라이는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야마다와 다시 선수-감독 관계로 재회하며 선수생활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