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1 15:40:09

야마다 히사시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width=480><tablebordercolor=#000019><tablebgcolor=#000019> 파일:오릭스 버팔로즈 엠블럼.svg 오릭스 버팔로즈
역대 1라운드 지명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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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1c24 {{{#!folding [ 한큐 브레이브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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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
1965년 ~ 1988년
1965년 1966년 1차 1966년 2차 1967년 1968년
나가이케 아츠시
(長池徳士)
미즈타니 타카시
(水谷孝)
히라바야시 지로
(平林二郎)
와타나베 카즈오
(渡辺一夫)
야마다 히사시
(山田久志)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미와타 카츠토시
(三輪田勝利)
코마츠 켄지
(小松健二)
와타나베 히로키
(渡辺弘基)
이시다 마코토
(石田真)
에가와 스구루 (6)[1]
(江川卓)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1978년
야마구치 타카시
(山口高志)
스미토모 카즈야 (6)
(住友一哉)
사토 요시노리
(佐藤義則)
마츠모토 쇼지
(松本正志)
세키구치 토모유키 (1)
(関口朋幸)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1983년
키노시타 토모히로 (1)
(木下智裕)
카와무라 카즈아키 (6)
(川村一明)
야마오키 유키히코 (1)
(山沖之彦)
에노키다 켄이치로 (1)
(榎田健一郎)
노나카 테츠히로 (1)
(野中徹博)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2]
시라이 타카유키
(白井孝幸)
이시이 히로시 (1)
(石井宏)
타카기 코지 (1)
(高木晃次)
이토 아츠노리 (2)
(伊藤敦規)
사카이 츠토무 (2)
(酒井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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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 2004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사토 카즈히로 (1)
(佐藤和弘)
하세가와 시게토시
(長谷川滋利)
타구치 소 (2)
(田口壮)
코바야시 히로시 (1)
(小林宏)
히라이 마사후미
(平井正史)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카세 토시히로
(嘉㔟敏弘)
이마무라 후미아키 (1)
(今村文昭)
스기모토 유우 (3)
(杉本友)
카와구치 토모야 (2)
(川口知哉)
아라카키 나기사 (6)
(新垣渚)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야마구치 카즈오 (3)
(山口和男)
우츠미 테츠야 (6)
(内海哲也)
오가와 유스케 (3)
(小川裕介)
카토 다이스케 (3)
(加藤大輔)
카토 타츠오
(歌藤達夫)
히라노 케이이치 (3)
(平野恵一)
2004년
카네코 치히로 (3)
(金子千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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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9e751f {{{#!folding [ 오릭스 버팔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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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T-오카다 (1) (4)
(T-岡田)
노부에 다이스케 (1) (4)
(延江大輔)
니와 마사야 (1) (4)
(丹羽将弥)
카이 타쿠야[3]
(甲斐拓哉)
후루카와 슈이치
(古川秀一)
히라노 요시히사 (3) (5)
(平野佳寿)
코마츠 사토시 (3) (5)
(小松聖)
코바야시 켄지 (1) (5)
(小林賢司)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고토 슌타 (1)[4]
(後藤駿太)
아다치 료이치 (1)
(安達了一)
마츠바 타카히로 (1)
(松葉貴大)
요시다 카즈마사
(吉田一将)
야마사키 사치야
(山﨑福也)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요시다 마사타카
(吉田正尚)
야마오카 타이스케
(山岡泰輔)
타지마 다이키 (2)
(田嶋大樹)
오타 료 (1)
(太田椋)
미야기 히로야 (1)
(宮城大弥)
2020년 2021년 2022년 2023년 2024년
야마시타 슌페이타 (1)
(山下舜平大)
무쿠노키 렌
(椋木蓮)
소타니 류헤이
(曽谷龍平)
요코야마 세이야
(横山聖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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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즈레 1라운더: 첫 지명에서 중복 지명된 선수의 교섭권 획득에 실패했을 때 차순위로 선택한 선수.
(2) 중복 지명 당첨
(3) 역지명, 희망 입단 범위: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한 제도로, 선수를 확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4) 고교생 드래프트
(5)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 2005년~2007년의 3년간은 고교 선수와, 대학&사회인 야구에서 뛰었던 선수의 지명이 분리되어 있었다.
(6) 지명 후 미입단

[1]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아니면 입단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다른 팀의 지명을 모두 거부했다. 1973년에는 한큐에 지명되었으나 거부하고 대학에 진학하였으며, 1977년에는 크라운라이터(現 세이부)의 지명을 거부, 1978년에는 한신의 지명을 거부하고 이른바 '공백의 1일'사건을 일으켰으나 일본야구기구의 중재로 결국 코바야시 시게루와의 맞트레이드를 통하여 쿄진에 입단하게 된다. [2] 다이에와 마찬가지로 시즌은 한큐로 치렀으나, 시즌 직후 매각되어 드래프트는 오릭스로 참가했다. [3] 투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포수와는 음이 같지만 한자가 다르다. 그 쪽은 「甲斐拓也」 [4] 1라운드 복수 지명 추첨에서 무려 3번이나 떨어지고 나서 지명한 선수(...) 2022년까지 뛰다 2023년 주니치 드래곤즈로 트레이드되었다. 여담으로 이 해 오릭스가 1라운드에서 순차적으로 지명한 복수지명 선수는 오이시 타츠야(세이부)- 이시미네 쇼타(롯데)- 야마다 테츠토(야쿠르트).
킨테츠의 1라운드 지명선수는 틀: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1라운드 지명선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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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0019> 파일:오릭스 버팔로즈 엠블럼.svg 오릭스 버팔로즈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한큐 시절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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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ffffff
<rowcolor=#9e751f> 1936春夏 1936秋 1937春~1937秋 1938春 1938秋
미야타케 사부로 키타이 마사오 이시다 미츠히코 미야타케 사부로 오다노 카시와
<rowcolor=#9e751f> 1939 1940 1941 1942 1943
아사노 카츠사부로 시게미츠 미치오 아사노 카츠사부로 하시모토 쇼고 텐포 요시오
<rowcolor=#9e751f> 1944 1946~1948 1949 1950~1952 1953
카사마츠 미노루 텐포 요시오 이마니시 렌타로 텐포 요시오 시바타 에이지
<rowcolor=#9e751f> 1954 1955 1956~1958 1959 1960
카지모토 타카오 시바타 에이지 카지모토 타카오 요네다 테츠야 카지모토 타카오
<rowcolor=#9e751f> 1961 1962 1963 1964 1965
요네다 테츠야 이시이 시게오 카지모토 타카오 요네다 테츠야 아다치 미츠히로
<rowcolor=#9e751f> 1966 1967 1968 1969~1971 1972~1973
이시이 시게오 요네다 테츠야 이시이 시게오 요네다 테츠야 아다치 미츠히로
<rowcolor=#9e751f> 1974 1975~1986 1987~1989 1990 1991
타케무라 카즈요시 야마다 히사시 사토 요시노리 호시노 노부유키 사토 요시노리
<rowcolor=#9e751f> 1992~1994 1995 1996~1998 1999~2000 2001
호시노 노부유키 사토 요시노리 호시노 노부유키 코바야시 히로시 카네다 마사히코
<rowcolor=#9e751f> 2002 2003 2004 2005~2007 2008
에드 야날 요시이 마사토 구대성 카와고에 히데타카 카네코 치히로
<rowcolor=#9e751f> 2009 2010 2011 2012 2013~2014
코마츠 사토시 카네코 치히로 키사누키 히로시 알프레도 피가로 카네코 치히로
<rowcolor=#9e751f> 2015 2016~2017 2018 2019~2020 2021~2022
브랜든 딕슨 카네코 치히로 니시 유키 야마오카 타이스케 야마모토 요시노부
<rowcolor=#9e751f> 2023 2024
야마시타 슌페이타 미야기 히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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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003595><tablebgcolor=#003595> 파일:주니치 드래곤즈 엠블럼.svg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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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 현재
1대
이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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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2대
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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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3대
네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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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939)
4대
고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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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941)
5대
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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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942)
6대
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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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43)
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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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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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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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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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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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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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보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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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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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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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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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1967)
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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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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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crayfish-study.sakura.ne.jp/MUS-MEMOPIC01.jpg
현역 시절 역동적인 투구폼을 자랑하던 야마다.

파일:external/c2.atwiki.asia/4fda647fb8ed377cca4e.jpg
2009년 WBC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 시절.
이름 야마다 히사시(山田久志)
생년월일 1948년 7월 29일 ([age(1948-07-29)]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아키타현 노시로 시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68년 드래프트 1위
소속팀 한큐 브레이브스(1969~1988)
감독 주니치 드래곤즈(2002~2003)
1976~78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MVP
가토 히데지
( 한큐 브레이브스)
야마다 히사시
( 한큐 브레이브스)
찰리 매뉴얼
( 긴테쓰 버팔로즈)
1977년 일본시리즈 MVP
후쿠모토 유타카
( 한큐 브레이브스)
야마다 히사시
( 한큐 브레이브스)
오오스기 카츠오
( 야쿠르트 스왈로즈)

1. 개요2. 프로 입문 전3. 현역 시절4. 은퇴 이후5. 여담

1. 개요

일본의 전직 프로야구 선수이자 지도자, 해설가.

20시즌 간의 프로 커리어를 한큐 브레이브스 에서만 쌓은 프랜차이즈 선수의 대표적 인물이자 일본 프로야구의 언더핸드 스로 투수로서는 통산 최다승인 284승이란 기록을 보유한 서브마린 투수이다.

2. 프로 입문 전

1948년 7월 29일 아키타현의 노시로 시 태생인 야마다는 고교 선수였던 형 츠토무의 뒤를 이어 야구를 시작했고, 형의 모교이던 노시로 고교로 진학했다. 원래 포지션은 3루수 였지만 2학년 여름 고시엔 대회 예선 때 자신의 실책으로 끝내기 패배를 당한 것을 계기로 투수로 전향했다고. 고등학교 졸업 당시 와세다 대학, 아지아 대학 등의 대학교에서 입학 제의가 왔으며 부모도 대학 진학을 권유했으나 사회인야구팀 후지제철 가마이시에 입단했다. 후지제철 시절부터 투구폼을 사이드암 스로에서 언더핸드 스로로 바꾸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3. 현역 시절

1967년 드래프트 회의 때 하위권인 11번으로 니시테쓰 라이온즈에 지명 되었으나 거부하였고, 이듬해인 1968년 한큐에서 1위로 지명[1]하였지만 척추 분리증으로 인한 허리 통증으로 재활에 들어가는 바람에 약 1년을 쉬고 1969년 시즌 도중 비로소 한큐 유니폼을 입었다.[2]

입단 첫해엔 7경기 등판에 1패, 평균자책 5.40 으로 부진했으나 2년차 시즌인 1970년 팀의 주력 투수이던 요네다 테츠야, 가지모토 타카오, 아다치 미츠히로 사이에서 실력을 드러내며 선발 한 자리를 꿰차고 10승 17패, 평균자책 3.19로 나름대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1971년 22승을 거두고 평균자책 홀더(2.37)가 된 것을 시작으로 1986년까지 17시즌 연속 두 자리 승수를 거두는 등 명실상부한 한큐의 에이스로 이름을 날렸다.

야마다는 언더핸드 스로 투수임에도 속구 스피드가 상당하여 힘을 앞세우는 파워피칭으로 타자들을 압도하곤 했는데, 당시 한큐 감독이던 니시모토 유키오가 항상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컨트롤이다"라고 다그쳐도 야마다는 "무슨 말씀을! 직구에 힘만 있으면 한가운데로 던져도 절대 못 칩니다!" 라고 대놓고 반발할 만큼 상당한 배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야마다가 은퇴한 지 20년 이상 지난 후, 옛 스승을 문안하러 온 야마다에게 니시모토가 그 당시를 회상하며 "지금까지 나한테 정면으로 대든 녀석은 네놈밖에 없다" 며 쓴웃음을 지었다는 얘기도 있다.[3]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정면 승부만 고집하다 1971년 일본시리즈 3차전 때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 사다하루에게 끝내기 라뱅쓰리런 홈런을 두들겨 맞고 피눈물을 흘린 적도 있고(...), 통산 피홈런 2위(490피홈런) 기록을 갖고 있다.[4]

그러나 1972년 시즌 이후 고질적인 무릎 통증으로 자신의 무기이던 구속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1973~1975년까지 두 자리 승수는 거두었지만 평균자책이 야마다답지 않게 3점대 후반에서 4점대 초반을 오가는 부진에 빠졌다. 결국 야마다는 팀 대선배이자 동료인 아다치 미츠히로에게 전수받은 싱커를 새로운 구종으로 장착[5]하며 기교파 투수로 변신, 1976년 26승 7패 5세이브, 평균자책 2.39로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다. 또한 한큐의 1975~1977년 3년 연속 일본시리즈 제패에도 큰 공을 세웠고 그 중 1977년엔 2승 1세이브를 기록하며 한큐의 일본시리즈 3연패에 크게 공헌하며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6][7]

이후로도 한큐의 에이스로 활약한 야마다는 1982년 4월 29일 롯데 오리온즈를 상대로 통산 200승을 거두었고,[8] 1975년부터 1986년까지 12년 연속 개막전 선발 투수라는 진기록도 세웠다. 1986년 14승을 끝으로 연속 두 자리 승수 시즌이 17년에서 중단됐고, 이듬해인 1987년(그해 7승 7패, 평균자책 3.72)에 통산 2,000탈삼진을 달성[9]했으나 이미 야마다의 기량은 눈에 띄게 쇠퇴했다. 결국 1988년 4승 10패, 평균자책 4.88의 시즌 기록을 끝으로 장장 20년 동안 이어 온 현역 생활을 마감, 그라운드를 떠났다. 추가로 야마다는 이해 한큐 브레이브스의 시즌 최종전이자 한큐의 이름을 걸고 치르는 마지막 경기였던 1988년 10월 23일 대 롯데 오리온즈 홈경기 더블헤더 2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완투승을 기록, 본인의 현역 마지막 경기와 더불어 한큐 구단의 마지막을 승리로 빛내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10]

야마다의 통산 성적은 654게임 등판 3865이닝, 283완투 31완봉, 284승 166패 43세이브, 2058탈삼진, 평균자책점 3.18이다.

4. 은퇴 이후

현역에서 물러난 야마다는 NHK, 닛칸스포츠 등에서 해설가로 일하던 중 1994~1996년 친정팀인 오릭스 블루웨이브 투수 코치로 그라운드에 복귀했다. 1997년 오릭스를 나와 해설가 생활을 하던 중 1999년 주니치 드래곤즈 투수 코치로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고[11], 2002년 호시노 센이치 후임으로 주니치 1군 감독으로 임명되어 2시즌 동안 팀을 이끌었지만 2003년 시즌 도중 성적 부진을 이유로 해임당했다(...).[12]

2004년부터 CBC(중부일본방송)의 해설가로 활동 중이며, 2009년 WBC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로 감독인 하라 다쓰노리에게 투수 기용의 전권을 거의 다 위임받아 마운드를 이끌며 일본의 WBC 2연패에 공을 세웠다.

2006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5. 여담

  • 선동열 1999년 6월에 3경기 연속 구원에 실패하고 난 후, 당시 투수코치였던 야마다 히사시에게 이제 더 이상 야구를 못하겠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해들은 야마다 코치가 호시노 센이치 감독에게 건의해 선동열이 2군에서 조정기를 가져주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조정기 후 1군에 복귀한 선동열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고, 그해 9월 30일 주니치의 센트럴리그 우승결정 순간 팀의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
  • 2003년에 본인의 자서전이 한국어판으로도 번역되었다. 책제목은 <승부근성을 가진 사람이 먼저 성공한다>이다.


[1] 이 해 한큐의 드래프트는 1위 야마다 히사시, 2위 가토 히데지, 7위 후쿠모토 유타카라는 3명의 명구회 회원을 배출한 희대의 황금 드래프트였다.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드래프트로 손꼽히는 1968년 드래프트에서도 가장 풍작을 거두었던 팀이 한큐였다. [2] 여담으로 계약금을 많이 받기 위해 구단에 부상을 숨기는 선수들이 많은 상황에서 야마다는 허리 부상이 완치된 후 계약서에 사인하는 모습을 보고 구단 계약 담당자는 사이닝 보너스를 더 얹어주었다고 한다. [3] 당시 철권통치의 대명사로 경기 중이라도 형편없는 플레이를 벌인 선수에게 주먹을 날리는 것을 서슴지 않던 니시모토 앞에서 대든다는 것은 살기가 싫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야마다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실력을 가진 선수였으니 니시모토가 참고 넘어간 듯 하다. [4] 단, 원체 언더핸드 투수가 피홈런에 약하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5] 야마다는 직구 중심의 피칭에 한계를 느끼고 아다치에게 싱커를 가르쳐 달라고 했지만 아다치는 "직구가 통용될 때는 싱커는 던지지 않는 게 좋다" 며 싱커 그립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야마다는 굴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매일같이 연구를 거듭하였고 이 모습에 감명받은 아다치는 마음을 바꾸어 야마다에게 싱커 던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다치는 후일 "자신보다 젊고 힘도 좋은 야마다가 싱커를 장착하면 큰 위협이 된다고 느꼈다. 팀에 같은 유형의 투수가 두 명은 필요 없으니까" 라고 생각했다며 털어놓았다. 그리고 야마다는 아다치가 싱커를 세세하게 가르쳐 주지 않고 "나는 이렇게 싱커 그립을 잡지만 투수마다 나름 방법이 다르니 그 뒤는 알아서 생각해 보라"는 식으로 힌트만 준 것에 대하여 "오히려 선배가 생각할 기회를 준 덕분에 나 자신만의 싱커를 익힐 수 있었다. 만약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 주었다면 나의 싱커는 아다치의 아류작에 불과했을 것"이라며 아다치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6] 다만 정규시즌 때와는 달리 야마다의 일본시리즈 성적은 1977년을 제외하곤 그다지 좋지 못하다. 위에서 말한 오 사다하루에게 끝내기 홈런을 얻어맞은 1971년 일본시리즈 3차전을 비롯해 1시합 14피안타를 포함해 피홈런 6개(시리즈 기록)를 기록한 1978년 일본시리즈, 후반부에 아카헬 타선에게 무자비하게 난타당하는 모습을 보이며 0승 3패(시리즈 단일 기록)를 기록한 1984년 일본시리즈 등 일본시리즈에서는 등판할 때마다 썩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리즈 통산 성적은 6승 9패 1세이브에 그쳤으며, 일본시리즈 통산 패전(9패), 통산 피안타(122개), 통산 피홈런(23개) 역대 1위라는 썩 달갑지 않은 기록을 보유 중에 있다. [7] 반대로 올스타전은 통산 7승을 거둘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였다. [8] 그런데 이날 상대 타자이던 오치아이 히로미츠에게 홈런 세 방을 맞았다(...). [9] 기요하라 가즈히로에게 뽑아냈다. 재미있는 것은 1987 시즌 개막전에 기요하라에게 홈런을 얻어맞았다. 통산 200승 상황의 데자뷰? [10] 이날 경기는 함께 한큐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후쿠모토 유타카의 현역 마지막 시합이기도 했다. [11] 주니치에 몸담았을때는 유니폼에 H.YAMADA로 박혀있는데 같은 코치진 중에 성씨가 같은 카즈토시가 있어서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카즈토시는 1984년 50살 투수로 유명한 야마모토 마사와 함께 고향팀인 주니치에 입단해서 1990년 아들이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오토 시게키[14]와 함께 삼성에서 타격코치한 적이 있는나가시마 기요유키와 2:1 트레이드로 히로시마로 옮긴뒤 1995년 커리어하이를 찍었으나 1996년 다시 오토 시게키와 함께 주니치에 복귀했으나 부상으로 은퇴하고 말았다. 그후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코치로 2010년까지 프런트에 몸담았다가 11년부터 선수생활을 마감했던 히로시마에 쭈욱 몸담고 있다. 여담으로 카즈토시의 아들이 유명배우이다. [12] 잔여 시즌은 수석 코치이던 사사키 쿄스케가 감독 대행으로 지휘했고, 그 후 팀 성적이 크게 상승하며 주니치는 그 해 리그 2위로 시즌을 마쳤다. 그리고 이듬해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감독직에 올랐다. [13] 밑에 언급되는 야마다 자서전에 수록된 이종범의 책 추천사 중.

[14] 조성민의 데뷔 첫세이브때 삼진쳐먹은 적 있다. 승리투수는 아이치현 출신인 마키하라 히로미였다. 당시 요미우리는 투수진붕괴와 기요하라의 대왕 먹튀질때문에 꼴찌로 꼬라쳐박는 중이었으나 조성민을 갈아마시면서 4위로 시즌을 마쳤다. 조성민은 이해 팀 최다세이브 기록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