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02:06:55

타구치 소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019><tablebgcolor=#000019> 파일:오릭스 버팔로즈 엠블럼.svg 오릭스 버팔로즈
2025 시즌 코칭스태프
(2021 시즌부터 감독직을 제외한 1, 2군 구별을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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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e5e5e5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000000,#e5e5e5
감독 및 수석·종합코치
71 키시다 마모루 (1군 감독) · 89 코바야시 히로시 (2군 감독)
88 미즈모토 카츠미 (수석 코치) · # 나카가키 세이이치로 (순회 수석 코치) · 76 카자오카 나오유키 (야수 종합 코치)
투수코치
72 히라이 마사후미 · 73 마키노 루이 · 75 아츠자와 카즈유키
타격코치
79 츠지 류타로 · 83 코야노 에이이치 · 85 타카하시 신지
수비·주루코치
3 아다치 료이치 (선수 겸 내야) · 77 소요기 에이신 (내야) · 80 코지마 슈헤이 (내야) · 70 마츠이 유스케 (외야) · 81 타구치 소 (외야)
배터리코치
74 야마자키 카츠키 · 87 사이토 토시오
육성코치
90 하루 토시오 (육성 수석 코치) · 84 스즈키 코헤이 · 86 요시다 신타로 · 91 이이다 다이스케
코칭스태프 투수 포수 내야수 외야수 육성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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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NPB 팀 명단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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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구치 소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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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96블루웨이브우승.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1996

파일:오릭스 버팔로즈 우승 엠블럼 V5.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코치
2022


파일:2006-cardinals-champions.gif 파일:PHI_2008_WSChampion.png
MLB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200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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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외야수 부문 베스트나인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5~1997년,2000년,2001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bordercolor=#000019><tablebgcolor=#000019> 파일:오릭스 버팔로즈 엠블럼.svg 오릭스 버팔로즈
역대 1라운드 지명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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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1c24 {{{#!folding [ 한큐 브레이브스 ]
{{{#555555,#aaaaaa
<tablewidth=100%>
1965년 ~ 1988년
1965년 1966년 1차 1966년 2차 1967년 1968년
나가이케 아츠시
(長池徳士)
미즈타니 타카시
(水谷孝)
히라바야시 지로
(平林二郎)
와타나베 카즈오
(渡辺一夫)
야마다 히사시
(山田久志)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미와타 카츠토시
(三輪田勝利)
코마츠 켄지
(小松健二)
와타나베 히로키
(渡辺弘基)
이시다 마코토
(石田真)
에가와 스구루 (6)[1]
(江川卓)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1978년
야마구치 타카시
(山口高志)
스미토모 카즈야 (6)
(住友一哉)
사토 요시노리
(佐藤義則)
마츠모토 쇼지
(松本正志)
세키구치 토모유키 (1)
(関口朋幸)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1983년
키노시타 토모히로 (1)
(木下智裕)
카와무라 카즈아키 (6)
(川村一明)
야마오키 유키히코 (1)
(山沖之彦)
에노키다 켄이치로 (1)
(榎田健一郎)
노나카 테츠히로 (1)
(野中徹博)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2]
시라이 타카유키
(白井孝幸)
이시이 히로시 (1)
(石井宏)
타카기 코지 (1)
(高木晃次)
이토 아츠노리 (2)
(伊藤敦規)
사카이 츠토무 (2)
(酒井勉)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c74b {{{#!folding [ 오릭스 브레이브스 - 블루웨이브 ]
{{{#555555,#aaaaaa
1989년 ~ 2004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사토 카즈히로 (1)
(佐藤和弘)
하세가와 시게토시
(長谷川滋利)
타구치 소 (2)
(田口壮)
코바야시 히로시 (1)
(小林宏)
히라이 마사후미
(平井正史)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카세 토시히로
(嘉㔟敏弘)
이마무라 후미아키 (1)
(今村文昭)
스기모토 유우 (3)
(杉本友)
카와구치 토모야 (2)
(川口知哉)
아라카키 나기사 (6)
(新垣渚)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야마구치 카즈오 (3)
(山口和男)
우츠미 테츠야 (6)
(内海哲也)
오가와 유스케 (3)
(小川裕介)
카토 다이스케 (3)
(加藤大輔)
카토 타츠오
(歌藤達夫)
히라노 케이이치 (3)
(平野恵一)
2004년
카네코 치히로 (3)
(金子千尋)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9e751f {{{#!folding [ 오릭스 버팔로즈 ]
{{{#555555,#aaaaaa
2005년 ~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T-오카다 (1) (4)
(T-岡田)
노부에 다이스케 (1) (4)
(延江大輔)
니와 마사야 (1) (4)
(丹羽将弥)
카이 타쿠야[3]
(甲斐拓哉)
후루카와 슈이치
(古川秀一)
히라노 요시히사 (3) (5)
(平野佳寿)
코마츠 사토시 (3) (5)
(小松聖)
코바야시 켄지 (1) (5)
(小林賢司)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고토 슌타 (1)[4]
(後藤駿太)
아다치 료이치 (1)
(安達了一)
마츠바 타카히로 (1)
(松葉貴大)
요시다 카즈마사
(吉田一将)
야마사키 사치야
(山﨑福也)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요시다 마사타카
(吉田正尚)
야마오카 타이스케
(山岡泰輔)
타지마 다이키 (2)
(田嶋大樹)
오타 료 (1)
(太田椋)
미야기 히로야 (1)
(宮城大弥)
2020년 2021년 2022년 2023년 2024년
야마시타 슌페이타 (1)
(山下舜平大)
무쿠노키 렌
(椋木蓮)
소타니 류헤이
(曽谷龍平)
요코야마 세이야
(横山聖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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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즈레 1라운더: 첫 지명에서 중복 지명된 선수의 교섭권 획득에 실패했을 때 차순위로 선택한 선수.
(2) 중복 지명 당첨
(3) 역지명, 희망 입단 범위: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한 제도로, 선수를 확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4) 고교생 드래프트
(5)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 2005년~2007년의 3년간은 고교 선수와, 대학&사회인 야구에서 뛰었던 선수의 지명이 분리되어 있었다.
(6) 지명 후 미입단

[1]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아니면 입단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다른 팀의 지명을 모두 거부했다. 1973년에는 한큐에 지명되었으나 거부하고 대학에 진학하였으며, 1977년에는 크라운라이터(現 세이부)의 지명을 거부, 1978년에는 한신의 지명을 거부하고 이른바 '공백의 1일'사건을 일으켰으나 일본야구기구의 중재로 결국 코바야시 시게루와의 맞트레이드를 통하여 쿄진에 입단하게 된다. [2] 다이에와 마찬가지로 시즌은 한큐로 치렀으나, 시즌 직후 매각되어 드래프트는 오릭스로 참가했다. [3] 투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포수와는 음이 같지만 한자가 다르다. 그 쪽은 「甲斐拓也」 [4] 1라운드 복수 지명 추첨에서 무려 3번이나 떨어지고 나서 지명한 선수(...) 2022년까지 뛰다 2023년 주니치 드래곤즈로 트레이드되었다. 여담으로 이 해 오릭스가 1라운드에서 순차적으로 지명한 복수지명 선수는 오이시 타츠야(세이부)- 이시미네 쇼타(롯데)- 야마다 테츠토(야쿠르트).
킨테츠의 1라운드 지명선수는 틀: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1라운드 지명선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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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190322-OHT1I50091-L.jpg
<colbgcolor=#000019><colcolor=#fff> 오릭스 버팔로즈 No.81
타구치 소
田口壮 | Sou Taguchi
생년월일 1969년 7월 2일 ([age(1969-07-02)]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효고현 니시노미야시[1]
출신교 니시노미야 키타 고교 - 간세이가쿠인대학
신체 177cm, 75kg
종교 기독교 ( 개신교)
포지션 외야수,- 유격수- [2]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1년 NPB 신인 드래프트 1순위 ( 오릭스)
소속팀 오릭스 블루웨이브 (1992~2001)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2002~2007)
필라델피아 필리스 (2008)
시카고 컵스 (2009)
오릭스 버팔로즈 (2010~2011)
지도자 오릭스 버팔로즈 2군 감독 (2016~2018)[3]
오릭스 버팔로즈 1군 야수종합·타격코치 (2019~2020)
오릭스 버팔로즈 외야수비·주루코치 (2021~)
국가대표 시드니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팀 (2000)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2.3. 메이저리그 시절2.4.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2.5. 국가대표 경력
3. 은퇴 이후4. 플레이 스타일5. 연도별 성적
5.1. NPB5.2. MLB
6. 여담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본프로야구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했던 前 프로야구 선수. 현재는 친정팀인 오릭스 버팔로즈의 코치.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전직 사회인야구 선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형과 함께 3살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던 타구치는 9살 때부터 유격수를 맡아 프로 데뷔 때까지 계속해서 유격수로 뛰었다.

그 후 간세이가쿠인대학에 진학해서도 야구부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며 통산 타율 .327(376타수 123안타) 10홈런 46타점 이란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였고 리그 수위타자(타격왕)와 MVP를 각각 1차례 수상했다. 통산 123안타는 현재까지 칸세이가쿠인대학 야구부가 소속된 칸사이 학생야구 연맹 최다 기록이다.

이러한 활약으로 말미암아 대학 졸업 당시엔 드래프트에서 거물 대졸 유격수로 주목을 받았고, 1991년 드래프트에서 닛폰햄 파이터즈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지명을 받아 경합 끝에 오릭스가 교섭권을 획득. 오릭스와 계약금 1억 엔, 연봉 1200만 엔이라는 대형 계약을 맺고 입단하며 프로에 데뷔한다.

여담으로 드래프트 이전에 타구치는 논란이 될 만한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당시 1985년 우승 멤버였던 유격수 히라타 카츠오의 노쇠화로 새로운 유격수 자원을 물색하던 한신 타이거스에서 지역 출신 유망주인 타구치에 관심을 보였지만, 타구치는 기자회견을 열어 " 한신에 가고싶지 않은 10가지 사유"를 기자들 앞에서 대놓고 터뜨리는 사상 초유의 드래프트 지명 거부 선언을 해 버린 것. 결국 고작 대학생 야구선수에 크나큰 망신을 당하고 만 한신은 타구치의 지명 계획을 취소해 버렸는데, 이 사건은 당시 한신과 간세이가쿠인대학 간의 사이가 안 좋아서 대학 관계자들이 타구치를 한신에 입단시키지 않기 위해 타구치에게 지명 거부를 종용한 것으로 추측된다.[4]

2.2. 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

파일:external/www.buffaloes.co.jp/130409_54.jpg
대학 졸업 후 1991년 드래프트에서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1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한다. 데뷔 당시 포지션은 유격수였지만 오래 가지 않아 포지션을 외야수로 옮겼는데, 첫 풀타임 시즌인 1994년에 .307 6홈런 43타점 10도루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오릭스 부동의 외야수로 안착하게 되었고, 이후에도 꾸준히 2할 후반대의 타율과 세 자릿수 안타를 기록하며 팀 타선의 한 축을 담당했다. 특히 강력한 어깨를 바탕으로 한 외야 수비 능력이 빛을 발했는데, 스즈키 이치로, 모토니시 아츠히로(前 롯데 자이언츠 코치), 말기에는 다니 요시토모 등과 함께 오릭스의 철벽 외야진을 구축하며 5번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2.3. 메이저리그 시절

2001시즌이 끝난 이후 FA가 된 타구치는 한신 타이거즈의 3년 8억 엔 제의를 마다하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3년 300만달러의 계약을 맺으며 만 33세 나이에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한다. 하지만 NPB에서도 타격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는 아니었기에 그의 빅리그 도전에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이적 후 첫 시즌인 2002년, 타구치는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했고, 시즌 중순과 시즌 말에 각각 콜업되어 19경기에 출장하는 데 그쳤다. 이듬해인 2003년에도 트리플A에서 시즌을 시작했지만, 5월 말에 다시 빅리그로 올라왔고 대수비와 대타 등으로 43경기를 뛰었다.

그리고 2004년, 입단 3년만에 빅리그 개막 로스터에 이름을 올린 타구치는 외야 전 포지션을 소화하며 팀의 핵심 백업 선수로 등극했고, 타격 면에서도 .291 52안타 3홈런 25타점 OPS .756으로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이후 토니 라 루사 감독 밑에서 더 뛰고 싶다는 이유로 카디널스와 재계약을 맺었고, 2005년에는 개인 최다인 143경기에 출장, .288 114안타 8홈런 53타점 11도루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2006년에도 시즌 내내 외야 전 포지션을 오가며 백업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5], 포스트시즌에서도 뉴욕 메츠와의 NLCS 2차전에서 당대 최강의 마무리 투수 중 한 명인 빌리 와그너를 상대로 결승 홈런을 때려내는 등 활약을 펼치며 생애 첫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손에 넣게 된다. 이후 카디널스와 1년 연장 계약을 맺었고, 2007년에도 130경기에 나서며 .290 3홈런 30타점의 성적을 기록했는데, 이 해 내셔널리그 대타 타율 1위(.406)에 오르기도 했다.

2007시즌이 끝난 이후 카디널스를 떠나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1년 계약을 맺었다. 2008시즌에는 두번째 월드시리즈 우승반지와 함께 미일 통산 1500안타를 달성하기도 했지만, 타율은 .220으로 커리어 로우를 기록했다. 시즌이 끝난 이후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고, 2009시즌 말에 빅리그로 콜업되어 6경기를 뛰었지만 재계약은 하지 못하며 미국 무대를 떠나게 되었다.

2.4.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

2010년 친정팀인 오릭스 버팔로즈와 계약을 맺으며 두 시즌을 뛰었다. 이미 불혹을 넘긴 나이에 부상 등이 겹치며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는 못했으나 베테랑으로서 후배 선수들을 이끌어나가는 역할은 나름대로 착실하게 수행했다. 2011시즌이 끝난 이후에도 현역 연장을 원했지만, 다른 구단의 오퍼를 받지 못하며 결국 2012년 중순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2.5. 국가대표 경력

시드니 올림픽 한국과의 예선전에서 3번타자 좌익수로 출장해서 2타점 적시타포함 2안타를 때렸다.
한국과의 동메달결정전에서는 구대성을 상대로 무안타로 침묵했다.

3. 은퇴 이후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다가 2016년 시즌부터 오릭스의 2군 감독에 취임하였다.
2019년 시즌부터는 1군 야수 종합코치 겸 타격 코치로 보직을 변경하였다.
2021년 시즌부터는 외야 수비/주루코치로 보직을 변경하였다.

2024 시즌 종료 후 계약 만료로 오릭스를 떠났다.

4. 플레이 스타일

5. 연도별 성적

5.1. NPB

타구치 소의 역대 기록 (NPB)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1992 오릭스 47 123 33 10 0 1 12 7 5 8 26 .268 .318 .374 .692
1993 31 83 23 7 1 0 12 5 3 3 12 .277 .302 .386 .688
1994 108 329 101 17 1 6 55 43 10 23 62 .307 .354 .419 .773
1995 130 495 122 24 2 9 76 61 14 43 80 .246 .308 .358 .665
1996 128 509 142 24 1 7 74 44 10 29 61 .279 .321 .371 .692
1997 135 572 168 32 4 10 92 56 7 49 74 .294 .351 .416 .767
1998 132 497 135 26 2 9 85 41 8 48 68 .272 .338 .386 .724
1999 133 524 141 21 1 9 77 56 11 29 91 .269 .308 .365 .673
2000 129 509 142 26 3 8 77 49 9 55 80 .279 .353 .389 .742
2001 134 453 127 21 6 8 70 42 6 43 88 .280 .343 .406 .750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2010 오릭스 버팔로스 53 131 31 6 0 3 17 10 1 7 28 .261 .302 .387 .689
2011 62 239 54 10 0 0 27 15 3 15 36 .273 .333 .323 .657
NPB 통산
(12시즌)
1222 4995 1219 224 21 70 630 429 87 352 706 .275 .327 .381 .709

5.2. MLB

파일:MLB 로고.svg 타구치 소의 역대 MLB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2002 STL 19 15 6 0 0 0 4 2 1 2 1 .400 .471 .400 .871
2003 43 54 14 3 1 3 9 13 0 4 11 .259 .310 .519 .829
2004 109 179 52 10 2 3 26 25 6 12 23 .291 .337 .419 .756
2005 143 396 114 21 2 8 45 53 11 20 62 .288 .322 .412 .734
2006 134 316 84 19 1 2 46 31 11 32 48 .266 .335 .351 .686
2007 130 307 89 15 0 3 48 30 7 23 32 .290 .350 .368 .718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2008 PHI 88 91 20 5 1 0 18 9 3 8 14 .220 .283 .297 .580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2009 CHC 6 11 3 1 0 0 1 0 0 1 4 .273 .333 .364 .697
MLB 통산
(8시즌)
672 1524 382 74 7 19 197 163 39 102 195 .279 .332 .385 .717

6. 여담

  • 위의 통산성적을 보면 알겠지만, MLB 성적이 NPB 성적보다 근소하게 낫다. 물론 풀타임 출장 선수는 아니긴 했지만 신체적 전성기가 한참 지난 30대 중반에 진출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말 희귀한 케이스.
  • 국제대회에서 한국팀과의 대결전적이 많다. 1995년 1999년 한일 슈퍼게임에 연달아 참가했고, 2000년에는 시드니 올림픽 본선에도 참가했다. 특히 예선 한국전에서 7회 임창용을 상대로 동점 적시타를 쳤고, 9회에는 진필중을 상대로 끝내기안타가 될 뻔한 안타를 쳤지만, 우익수 이병규의 홈보살로 인해 끝내기에는 실패하고 일본팀도 연장승부 끝에 결국 그 경기에서 패배한다. 이후 동메달결정전 한국전에서는 구대성을 상대로 무안타에 그치고 일본팀도 끝내 메달획득에 실패.
  • 영어는 잘하지는 못하는 듯. 바로 위의 영상은 2006 NLCS 2차전 경기 후 인터뷰인데, 일본 취재진이 일본어로 묻자 태도가 확 달라진다.
  • 2003년에 세례를 받아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 인품이 매우 좋은 선수라 오릭스 시절은 물론이고 세인트루이스 시절에도 동료들과 팬들 사이에서 무척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 세인트루이스에서 뛸 당시 한국의 메이저리그 팬들 사이에서는 ' 달구지'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 NHK에서 2013년 월드 시리즈 해설을 맡았으며 4차전에서는 시구자에게 공을 전달하는 역할도 하였다. 당시 크리스 카펜터 아담 웨인라이트 등이 알아보고 반기는 모습을 보였다.
  • 한신 소속이자 간세이가쿠인대학 후배인 치카모토 코지 선수에게 덕담을 건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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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어난 곳은 후쿠오카 현. 아버지가 자주 전근을 간 탓에 2살 때부터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치바 현, 오카야마 현 등으로 계속 이사를 갔다가 중학교 때 가족이 니시노미야 시에 정착했다. [2] 프로데뷔를 유격수로 했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3] 2017 시즌에는 타격코치 겸임. [4] 이후의 인터뷰에서 해당 대학 출신 선배들이 스카우트로 있던 오릭스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는 뜻이었다고 설명하기는 했지만, 상술했듯 간세이가쿠인대학과 한신 간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과 더불어 후에 타구치가 한신의 FA 오퍼를 거절한 것도 생각하면 진실은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물을 먹은 한신은 1991년 드래프트에서 쿠지 테루요시를 지명했는데, 와다 유타카와 같이 나름대로 수비면에서 기여하면서 히라타의 공백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5] 심지어 2루수로도 간간히 출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