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09 23:02:01

와다 유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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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 감독 80 오카다 아키노부
1군 78 히라타 카츠오(수석코치) · 88 안도 유야(투수코치) · 90 쿠보타 토모유키(투수코치)
83 시마다 무네히코(배터리코치) · 73 미즈구치 에이지(타격코치) · 77 이마오카 마코토(타격코치)
81 바바 토시후미(내야수비·주루코치) · 74 후지모토 아츠시(내야수비·주루코치) · 96 츠츠이 소(외야수비·주루·전력분석코치)
2군 86 와다 유타카(2군 감독) · 85 후쿠하라 시노부(투수코치) · 72 에구사 히로타카(투수코치) · 89 와타나베 료(투수코치)
87 노무라 카츠노리(배터리코치) · 84 히다카 다케시(배터리 코치 보좌) · 91 키타가와 히로토시(타격코치)
75 야마자키 노리하루(타격코치) · 70 타나카 슈타(내야수비·주루코치) · 76 쿠도 타카히토(외야수비·주루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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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fe01><colcolor=#000000> 한신 타이거스 No. 86
와다 유타카
和田豊 / Yutaka Wada
생년월일 1962년 9월 2일 ([age(1962-09-02)]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치바현 마츠도시
포지션 2루수, 3루수, 유격수
투타 우투우타
학력 치바현립 아비코 고등학교 - 니혼대학
프로입단 1984년 드래프트 3순위 한신 타이거스 입단
소속팀 한신 타이거스 (1985~2001)
지도자 치바 롯데 마린즈 1군 타격코치 (2001~2003)
한신 타이거스 2군 종합코치 (2004)
한신 타이거스 1군 타격코치 (2005~2006)
한신 타이거스 1군 수비주루코치 (2007~2008)
한신 타이거스 1군 타격코치 (2009~2011)
한신 타이거스 감독 (2012~2015)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 (2023~)
프런트 한신 타이거스 시니어 어드바이저 (2016~2022)


1. 소개2. 데뷔 이전3. 현역 시절4. 코치, 감독 시절
4.1. 2012년4.2. 2013년4.3. 2014년4.4. 2015년
5. 기타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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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한신 타이거스 선수이자 現 2군 감독. 한신의 암흑기였던 1980년대 말 ~ 1990년대에 활약한 선수로써 17년간의 선수생활 동안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적은 한번도 없지만 꾸준히 3할 언저리 타율을 기록한 교타자 2루수.

2. 데뷔 이전

치바현 출신으로 아비코 고등학교에 진학, 1학년 때 하계 코시엔에 출장했지만 2회전에서 이시미네 카즈히코[1]가 4번타자로 활약하던 토미시로 고교에 연장 접전 끝에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엔 니혼대학으로 진학하여 1학년 때 팀을 대학리그 2부 우승과 함께 1부 승격에 공헌했고 3학년 때는 대학리그 수위타자를 수상했다. 또한 2년 연속 일미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 대표로 선출되기도 했으며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되어 일본의 금메달 획득에 공헌했다. 그 후 1984년 드래프트 3순위로 한신 타이거스에 지명받으며 프로에 데뷔한다.

3. 현역 시절

파일:external/funtrendnews.info/%EF%BC%91%EF%BC%90.jpg
데뷔 첫 해인 1985년은 39경기 49타석의 기회를 받으며 백업 멤버로 그럭저럭 뛰었는데, 그 해 한신은 일본시리즈 우승을 했다. 그리고 다시 우승하기 까지는 38년이 걸렸다

다음 해인 1986년엔 고작 8경기 5타석의 기회를 받는 데 그쳤지만, 3년차인 1987년부터 다시 계속해서 출장기회를 늘려가다가 1988년, 무라야마 미노루 감독 아래에서 포텐이 터져 테이블 세터로 중용되면서[2] 이전의 주전 유격수이자 1985년 우승 멤버였던 히라타 카츠오를 밀어내고 주전 유격수 겸 리드오프로 도약했다. 이후 2루수, 유격수를 오가면서[3] 한신 타선의 주축 교타자로 맹활약하며 테이블 세터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다만 장타력이 꽤나 낮아서[4] 이전의 리드오프였던 마유미 아키노부보다는 종합적으로 밀렸었다. 사실 이건 마유미가 너무 사기캐였지만 하지만 1~2번 타순에서 안타를 꾸준히 쳐내고 번트도 많이 성공시키는 등 컨택과 작전수행 능력을 두루 갖춘 전형적인 교타자였으며 여기에 1992~1994년 3년 연속 골든글러브(NPB)를 차지하는 등 안정적인 수비력도 두루 갖춘 선수였다.

1990년대, 특히 1990년대 중반 한신의 주력 선수 중에는 신조 츠요시 히야마 신지로, 야기 히로시와 같은 공갈포 선수들이 많았기에[5] 와다의 교타력이 그만큼 더욱 돋보였다. 1993년엔 리그 최다안타를 기록했고[6] 1997년에는 개막 이후 24경기 연속 안타[7]라는 일본 기록을 달성하였는데, 당시 롯데 자이언츠 8888577이나 LG 트윈스 6668587667을 연상시키던 암흑기에서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 상태이던 한신 팬들은 와다의 타율만이 야구 보는 유일한 낙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한다. 그리고 신조와 히야마의 중심타선에서 폭풍삼진 하지만 그 해 시즌 도중인 7월,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 데드볼을 맞아 중지가 부러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2개월 간 출장하지 못하다가 시즌 말에 겨우 복귀하면서 결국 타율은 3할에 도달했지만 96시합 출장에 그쳤는데, 이 해를 끝으로 와다는 하향세를 타기 시작한다. 바로 다음해인 1998년에 다시 풀 출장에 가까운 130시합에 출장했지만 타율이 .272로 전년도보다 떨어졌고, 이듬해인 1999년 노무라 카츠야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부턴 주전 자리에서 밀려나[8] 출장기회가 급감했다.

2001년부터 선수 겸 타격코치를 맡았지만 코치 겸임 때문에 성적이 크게 하락했고, 결국 2001 시즌 종료 직전에 은퇴를 발표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은퇴식 때 같은 치바 현 출신이자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이던 나가시마 시게오가 축하해주기도 했다.

현역 시절인 1985~2001년가지의 통산 성적은 1713경기 타율 .291(5972타수 1739안타)/OPS .711, 29홈런 407타점 94도루이다.

4. 코치, 감독 시절

파일:external/daily.c.yimg.jp/f_08374700.jpg

은퇴 이후 2003년까지 1군 타격코치, 2004년엔 2군 종합코치, 2005년~2006년엔 다시 1군 타격코치, 2007년~2008년엔 1군 수비주루코치, 2009년부터 또다시 1군 타격코치를 맡는 등 여러 보직을 오가며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2011년 한신 타이거스는 마유미 아키노부와 2년 계약 연장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마유미 아키노부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경기 운영으로 말이 많았다. 잦은 야수 교체[9], 접전에서의 약한 모습 등이 지적을 받았다. 급기야 6월에 한신은 리그 꼴지까지 추락했고, 그 시기 한신 전기철도 주주총회에서는 마유미가 까이고[10] 있었다.

그래도 한신 프런트는 계약 기간은 지켜 주려고 별 삽질을 다 벌였고 팀도 3~4위권에서 외줄타기 경쟁을 벌였지만, 팬심은 이미 마유미에게 등돌린 지 오래였다. 9월엔 메가폰이 관중석에서 날아들 정도였고, 관중석도 빈 자리가 늘었으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권 경쟁에서도 밀리면서 마유미는 결국 10월 중에 해임되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메우는 사람이 바로 이 와다 유타카.

4.1.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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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에서 그 유명한 스파이스(...)를 말하는 장면.

지금 전력에서 약간의 양념[11]만 더 있으면 우승 도전 가능하다 라고 설레발을 쳤으나, 그에게 돌아온 건 같은 해의 KIA 타이거즈를 연상케 하는 최악의 타격부진김기아, 김한신5위라는 최종 성적표였다. 타이거즈는 어떻게 다시 강팀이 되었나 이 타격 부진으로 제일 크게 고생한 선수가 한신의 에이스 노우미 아츠시. 저반발 통일구의 버프를 받아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하고도 10승 10패에 머물렀다! 윤석민상 수상 여기에 노우미와 맷 머튼의 트러블 설이 퍼지는 등 팀 케미스트리도 와해된 듯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시즌 전 말한 '양념'(스파이스)이 이런 거였냐!는 비아냥만 남게 되었으며 '스파이스'는 와다 감독의 야구를 비판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4.2. 2013년

2013년에는 스파이스를 치기 위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입성에 실패했던 니시오카 츠요시, 후쿠도메 고스케 등을 데려왔고, 신인 후지나미 신타로 등이 가세하면서 0홈런 0타점에 빛나는 실패작 외국인 선수 브룩스 콘래드는 잊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뒤를 이어 시즌 2위를 넉넉히 수성하는 데 성공했다. 1위와 2위와의 차이도 넉넉했지만. 그러나 클라이맥스 시리즈 1스테이지에서 원정팀이자 3위였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2경기동안 15점이나 내주며 1승도 못하고 2패로 완벽히 틀어막히며 광탈하고 말았다. 히야마 신지로가 시리즈이자 현역 마지막 타석에서 2점짜리 홈런을 날린 것이 그나마 훈훈한 위안거리.

파일:external/newsjouhousaishin.inupolice.com/9edddda26c525b4deb43c2fe0943017e.png
여담으로 시즌 중 예능인 호시 나나와의 불륜 문자가 발견되는 스캔들이 나기도 했다. 스파이츄

한편, 한신은 그간 우승을 못 하는 이유가 후지카와 큐지의 부재로 인한 빈약한 뒷문이라 생각하고 이를 보강하기 위해 오승환을 영입하였다. 이쯤 되면 한국의 타이거즈 와 똑같다

4.3. 2014년

그럭저럭 팀이 3위에 안착하긴 했지만 중계 투수진들이 너무 부실하다는 점이 문제로 거론되는 중. 오승환이라는 확실한 마무리까지 가면 되는데 이게 안 되는 상황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5월 13일 현재 세리그 3위에 안정적으로 자리잡긴 했지만 실상은 역전패를 너무 많이 당했다는 것이 문제다. 역전패만 아니었어도 리그 1위까지 노려볼 수 있었을 정도였다.

결국은 시즌 막판 오승환을 갈아서 겨우 리그 2위에 안착시켰고 1년 재계약이 확정되었다. 그러고 오승환을 또 갈면서 리그우승팀 요미우리를 개발살 내버리며 2014년 일본시리즈에 진출했으나, 니시오카 츠요시의 삽질 플레이 끝에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다.

4.4. 2015년

4월 23일 현재 팀은 9승 13패 리그 5위로 쳐져 있다. 이에 대해 와다 감독의 안일한 경기 운영과 부진한 타자의 '뚝심' 기용이 쿤 문제로 지적되는 중.

그런데 5월과 교류전에서 승을 좀 벌어놓으며 순식간에 거인을 끌어 내리고 선두 자리를 먹었다! 더 희한한 건 팀타율 팀방어율 팀득점 팀실점 전부 최악이거나 그 일보 직전인데 1위라는 거. 당시 센트럴 리그는 리그 1위조차도 5할 밑의 승률을 기록한 적이 있었을 정도로 초 막장 상태였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7월 5일 경기에서는 비디오 판독을 요청하기 위해 덕아웃에서 2루까지 전력질주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2루에 누우신 분의 포스에는 못 미친다[12]

8월 들어 가끔 가다 이상하게 말아먹는 거만 빼면 세리그 1위를 어케든 지켜내고 있다. 그러나 리그 1위 주제에 승패마진이 +한 자릿수란 게 함정...

그렇게 9월까지 1위자리를 지켜왔지만 9월 들어와서 언제나 그래왔듯이 팀 전체가 부진에 빠지면서 3위까지 추락했다. 가을의 풍물시그리고 10경기를 채 남겨놓지 않은 9월 25일 현재 선두 야쿠르트와는 4게임차로 벌어져서 구단 창단 80주년을 기념해서 목표로 설정한 리그 우승은 절망적인 상황. 지난 해에도 지도력에 의문을 표하는 의견이 구단 내외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한신 역사상 처음으로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돌파한 일본시리즈 준우승 감독을 내칠 수 없어서 계약을 1년 연장했고[13] 암암리에 재계약의 조건이 기본이 리그 우승이고 최소한 2위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해서 일본시리즈까지 진출하는 것[14] 이라는 소문이 오사카 지역의 미디어를 통해서 전해지는 가운데,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오사카 지역 미디어는 전부 올시즌을 끝으로 재계약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해임될 것이 유력하다고 보고 있었고, 결국 추석 연휴 중에 이번 시즌을 끝으로 감독직을 사임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후임으로는 가네모토 도모아키가 취임했다.

퇴임 후엔 한신 구단에서 시니어 어드바이저 직을 수행하였다가, 2023년 오카다 아키노부가 감독으로 돌아온 한신의 2군 감독으로 취임했다.

5. 기타

미스터 타이거스라는 소리를 듣는 인물 중 하나. 선수-지도자 커리어 내내 한신 타이거스 외의 다른 팀 유니폼에 손 댄 적 자체가 없다. 그야말로 한신의 성골. 이 때문에 와다가 현역 시절에 썼던 등번호 6번은 타이거스의 교타자를 상징하는 번호이기도 했다. 와다 이전에는 70~80년대 타이거스의 교타자였던 후지타 타이라의 번호였고, 와다 이후에는 가네모토 도모아키가 사용하다 가네모토 은퇴 후 준영구결번으로 둔 상태다. 그런데 그동안 무수한 한신 출신 OB들이 감독을 하면 말아먹었던 거에 비해 일단은 2014년 일본시리즈에 나가봤으니 요시다 요시오, 오카다 아키노부 등 감독으로서 나름 성공한 몇 안 되는 OB이기도 하다.

다만 전체적으로 베테랑이나 타 팀 출신 선수의 기용에 많이 의존하는 경향[15]이 있다고 한다. 일본판 류중일? 근데 그 류중일도 삼성 성골이었다[16]

6. 관련 문서



[1] kt wiz의 코치를 맡았던 그 분 맞다. 이시미네는 고교 졸업 후 와다보다 먼저 프로 입단을 결정해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강타자로 활약하다가 훗날 FA로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해 와다와 함께 팀메이트로 뛰기도 했다. 근데 먹튀.. [2] 오노 히사시, 나카노 사토루와 함께 당시 유행하던 아이돌 그룹에 빗대 소년대라 불렸다. [3] 정확히는 바로 다음해인 1989년 2루수로 전향했다가 1990~91시즌에 유격수로 복귀했고 1992년 2루수로 재전향하여 이후 은퇴 때까지 쭉 2루를 보게 된다. 단 예외적으로 1996년엔 3루수 2루수를 번갈아 맡았으며 이후로도 부포지션으로 종종 3루를 보았다. [4] 커리어 17년 간 장타율이 3할 대에 머물렀으며 4할을 넘긴건 1986년(.667)과 1990년(.401)이 전부이다. 그것도 1986년엔 상술했다시피 8경기 5타석밖에 출장하지 않았기에 표본이 너무 적어서 사실상 없는 기록이고, 1990년은 개인 첫 3할에 현역 시절 가장 많은 8홈런을 치긴 했지만 이 해까지 코시엔에 럭키존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그라운드가 상대적으로 작아서 홈런을 치기 쉬웠고, 이 후엔 3년 연속 무홈런을 기록하는 등 홈런을 거의 치질 못했기에 거의 뽀록으로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실제로 와다는 이 시즌과 1996년(5홈런)을 제외하곤 5홈런 이상을 친 적이 없다. [5] 그나마 야기 히로시는 컨택이 약간 낫긴 나았지만 3할을 한 번도 못 치는 등 신조나 히야마랑 다를 바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야기는 1992 시즌 이후 부상으로 급격하게 하락세를 보이면서 1996년 시즌 종료 후 방출 후보로까지 몰렸다. 그나마 1997년 시즌부터 한신 감독에 복귀한 요시다 요시오가 야기를 차기 시즌 전력에 포함시켜서 위기를 넘겼고, 그 때부터 전문 대타로 변신해 부활에 성공하면서 2004년까지 활약했다. 그리고 1997년 시즌 한신은 큰 맘 먹고 전직 메이저리거 거포를 영입했지만 그 결과는... [6] 다만 타이틀 제정이 이듬해인 1994년(...)에 이루어져서 상은 못 받았다.. [7] 이전 기록은 1953년 한큐 브레이브스 래리 레인즈가 세운 20경기 연속 안타였다. [8] 이 때 주전 2루수에 이마오카 마코토가 들어오게 되었다. 이마오카도 처음엔 다소 헤메는 모습을 보였으나 2002년부터 포텐이 터졌다. [9] 지명타자 없는 센트럴 리그임을 감안해도, 심할 땐 투수 대주자로 기용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물론 임창용 삼성 시절에 대주자로도 뛰어 봤고, 멀리 갈 거 없이 임정우 2013년 6월 2일 경기에서 대주자 기용이 된 적 있었다. [10] 야구와는 백만년 떨어져 있는 순전히 경영 관련 회의에서까지 언급될 정도면 말 다했다. 하지만 그 회사는 원래 야구단 성적이 주총 주요의제 가운데 하나이다. [11] 원문에서는 '스파이스'(スパイス) [12] 참고로 일본은 웬만하면 비디오 판독 자체가 없다. 그나마 제한적으로 하는 비디오 판독도 홈런/파울 판독에만 쓴다고. [13] 일본시리즈 준우승 감독에게 고작 1년 연장 밖에 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팀에서 이 사람의 지도력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난 것이라 하겠다. 이 팀 자체가 감독을 툭하면 갈아치워대는 막장스러운 행각을 자주 펼쳐서 6년 이상 재임한 감독이 요시다 요시오 딱 1명에, 그것도 3번이나 재임해서 겨우 채운 거란 유명한 사실을 감안해도 말이다 [14] 3위면 안된다. 왜냐하면 3위일 경우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해도 전부 원정경기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포스트 시즌의 입장수입을 하나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 운 좋게 일본시리즈에 갔다고 해도 홀수 해엔 퍼시픽 리그 팀이 홈 어드밴티지를 얻기 때문에 사상 초유의 9차전까지 일본시리즈가 계속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잘해봐야 3경기밖에 홈경기를 개최하지 못한다. [15] 일본어 위키 참고 [16] 2018년부터 서울 LG 감독으로 부임하며 진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