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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경성감옥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히라야마 가쓰오(平山勝夫) |
호 | 혁세(赫世) |
본관 | 평산 신씨[1] |
출생 | 1885년 8월 15일[2] |
경상도
예안현 읍내면 관저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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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4년 12월 15일 |
경상북도
경산군 경산면
중방동 (현 경상북도 경산시 중방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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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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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신동희는 그의 5촌 당질이다.
2. 생애
신상면은 1885년 8월 15일 경상도 예안현 읍내면 관저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신태호(申泰昊, 1854. 4. 18 ~ 1919. 9. 2)와 어머니 예안 이씨(禮安 李氏) 이종수(李宗秀)의 딸 사이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예안면 선양리(현 도산면 선양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옮겼다.일찍이 예안군 읍내면 서부리(현 도산면 서부리)에 설립되었던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수학하였으며, 1919년 예안면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던 1919년 3월 11일, 전국 각지에서 3.1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그날 밤 9시 이시교(李時敎)·이중원(李中元)·이남호(李南鎬)·백남학(白南鶴)·이광호(李洸鎬) 등 평소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예안면사무소 숙직실로 불러 <독립신문>을 보여주며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제의했다.
참석자들이 모두 찬성하자, 그는 그들과 함께 여러 차례에 걸쳐 숙의한 끝에 거사일자를 예안면 장날인 3월 17일로 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인근 동리에 연락을 취하여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면사무소 숙직실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3월 17일 오후 3시 30분경, 장터에는 다른 장날과는 달리 수천명의 시위군중이 장꾼으로 가장하고 운집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30여명의 주동자들이 면사무소 뒷편의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 일본인들이 그곳에 세워놓은 대전기념비(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린 후, 태극기를 높이 들고 장터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신호로 장터에 나와 있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누비고 다녔다. 이때 주재소에서 일본 경찰 소다 도키치(曹田藤吉)이 출동하여 25명의 시위군중을 체포해갔다. 이에 격분한 그는 오후 7시경,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주재소로 달려가, 그곳을 포위하고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무력을 행사하며 제지하자, 투석으로 맞서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고 일본 경찰 3명을 포로로 잡아 이들의 무장을 해제시킨 후, 시위대열의 앞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곧 안동 주둔 일본군 수비대가 출동하여 공포를 쏘아대며 시위군중을 해산시키고, 이어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펼쳤다. 그도 3월 20일에 체포되어 14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안동경찰서에 인치되었는데, 유치장이 좁아 복도에 수용되었다. 이때 그는 일어서서 만세 삼창을 선창하여 여기에 수용되어 있던 다른 사람들도 독립만세를 외쳤다.
곧 체포된 그는 1919년 3월 23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당일 경성감옥에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다. 이때문에 1912년 8월 1일에 수여받았던 이른 바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 또한 1920년 5월 박탈당했다. #
1920년 4월 26일 특별 사면으로 출옥하였다. 그 뒤 예안기독교청년회에서 활동하다가 1921년 4월 신응한(申應漢)·이광호(李洸鎬)·이시교(李時敎) 등과 함께 예안경찰서에 체포되고 같은 달 28일 안동경찰서에 송치되었다. 1921년 6월 24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금고 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공소하여 같은 해 12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혐의로 벌금 50원[4]을 감형받았다.
이후 경산군 경산면 삼북동(현 경산시 삼북동)으로 이주하였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경산군 경산면장을 역임했으며, 1937년 4월 10일 경산금융조합 감사에 취임하였다.
1940년 4월 18일 히라야마 가쓰오(平山勝夫)로 창씨개명하고 그해 6월 5일 경산군 경산면 중방동(현 경산시 중방동)으로 이주하였다. # 1944년 12월 15일 별세하였으며, 사후 경산면민장이 치러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신상면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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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파평 윤씨 윤계유(尹啓遺)의 딸과의 사이에 장남 신응택(申應澤)과 차남 신학진(申鶴鎭, 1911. 11. 6 ~ 1995. 1. 27)[5] 등 두 아들을 두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차남 신학진은
대구고등보통학교와
대구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35년경부터 1945년
8.15 광복 직전까지
만주국군에서
군의관을 지낸 인물이었다.[6] 이때문에
친일인명사전 군 분야에 수록되기도 했다.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 1957년 9월 대한민국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그래서 사후 국립서울현충원 제1장군 묘역에 275호로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