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03:33:24

시리아-레바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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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레바논

1. 개요2. 역사적 관계
2.1. 고대2.2. 고대 말2.3. 중세2.4. 근세2.5. 근대2.6. 20세기2.7. 21세기
3. 대사관4. 관련 문서

1. 개요

시리아 레바논의 관계. 두 국가간의 국민감정은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지만 외교적으로는 이스라엘이라는 공공의 적을 두었음에도 불구 서로 매우 불편한 관계이다. 양국은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했지만, 프랑스와의 관계에 대해선 차이가 매우 크다. 레바논은 프랑스와의 관계가 매우 우호적이고 프랑스어가 널리 쓰이지만, 시리아는 반서방 국가이다보니 프랑스어 화자가 적고 프랑코포니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게다가 시리아는 기독교에 대한 증오심이 있고[1] 레바논에 내정간섭을 한 적도 있어[2] 레바논과 사이가 가까워질래야 가까워질수 없다.

시리아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헤즈볼라는 레바논에서 서로 물과 기름 수준으로 사이가 좋지 않은 마론파와 순니파(주로 팔레스타인인 난민)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맡고 있다. 레바논 국민들 입장에서는 시아파를 탐탁지 않게 여기더라도 헤즈볼라를 함부로 견제했다가는 레바논이 종파 갈등으로 뒤집어질 것을 알기에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 이는 레바논이 이스라엘이나 시리아보다 국력이 약한데다가 국가가 여러 종파로 분열되어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고대 레바논의 해안지대에서는 페니키아 티레, 시돈, 비블로스 등 여러 도시국가들이 번영을 누렸었다. 페니키아인들이 발명한 페니키아 문자는 고대 시리아의 아람 왕국으로 전파되었고 아람 문자의 기원이 되었다.[3]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아람어는 중동 각지의 랑구아 프랑카로 기능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헬레니즘 시대와 고대 로마 시대에 이르면 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에 이르는 지역 모두 일상생활에서 아람어가 보편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2.2. 고대 말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일대는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가장 먼저 번성하기 시작한 지역으로 서기 4세기 무렵이면 레바논과 시리아 전역 주민 대다수가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기독교는 아리우스파의 아타나시우스파 간의 대립을 거쳐 서기 5세기에는 단성론/ 합성론 관련한 교리 충돌이 격화되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 신조를 따르기 거부한 시리아의 아람어 사용자들은 야코부스파로 불렸으며, 반대로 시리아와 레바논 일대의 그리스어 사용자들은 비잔티움의 그리스인들을 따라 칼케돈 공의회 신조를 따르게 되었다. 시리아 현지에서는 이렇게 칼케돈 공의회를 따르는 사람들을 "말카"(왕당파)라고 불렀다. 당시 레바논의 기독교인 상당수는 칼케돈파와 단성론의 절충안인 단의론을 지지하기도 하였으나 어느쪽으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하는데 이들이 마론파의 기원이 되었다.

2.3. 중세

레반트 지역은 정통 칼리파 시대 우마르 치하의 아랍 무슬림들에게 정복되었다. 이후 들어선 우마이야 왕조 시대 야코부스파 기독교인들은 아랍어를 배우고 우마이야 왕조 주류에 편입되면서 급속도로 이슬람화된 반면 마론파 신도들은 레바논 산악지대로 피신하여 기독교를 유지하였다. 수백년 후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미치광이 통치자 알 하킴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다른 무슬림들과의 싸움을 피해 레바논 산악지대로 숨어드는데 이들은 드루즈라고 불렸다.

1099년 제1차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이 시리아 각지에서 무슬림들로부터 격렬한 저항을 겪은 것과는 반대로 레바논 산악지대에 숨어있던 마론파들이 십자군을 환영하였다. 이후 레바논 산악지대의 드루즈교도들도 십자군 측에 합류하였다. 1182년부로 마론파는 정교회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교황수위권을 인정하면서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마론파는 레반트 지역에서 십자군이 축출된 이후에도 교황청과 활발한 교류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시리아 일대는 십자군 전쟁의 여파로 현지 아랍계 기독교인 인구의 입지가 크게 축소되었고, 십자군에 협력하였던 알라위파가 박해를 받으면서 시리아 인구의 대다수는 순니파 무슬림이 되었다.

2.4. 근세

십자군 전쟁 이후 시리아와 레바논 일대는 맘루크 왕조의 영토였으나 오스만 제국 셀림 1세가 1516년 맘루크 왕조의 병력을 알레포 근처에서 벌어진 마르즈 다비끄 전투에서 격파한 것을 계기로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현지 아랍계 기독교인 인구가 지즈야를 충분히 내는 조건 하에서는 터치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마론파들은 기존의 교황청 외에도 프랑스 및 이탈리아의 가톨릭계와 왕성한 교역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실리주의적 입장에서 아랍인 순니파 무슬림들만 일방적으로 편들지 않고 무슬림들 외에도 지역 내 그리스 정교회 및 마론파, 아르메니아인들과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밀레트 제도를 통해 자치권을 주며 통제하였다. 레반트 지역에서 무역을 하던 베네치아인 상인들은 무슬림들보다는 아랍계 기독교인이나 아르메니아인들과의 교류를 선호하였다. 당시 아르메니아인들이 시리아의 알레포를 중심으로 정착하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오늘날 레바논 일대에도 정착하였다. 종종 예니체리들이 시리아-레바논의 부유한 기독교인 상인들을 구타하고 재산을 강탈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살인과 강도강간을 동반하는 전시 약탈보다는 조폭들의 보호비 갈취에 가까웠다. 대신 예니체리들은 이 지역의 상업망이 베두인들의 파괴적인 약탈을 막는 역할도 해냈다.

2.5. 근대

19세기 오스만 제국 내 무슬림들은 오스만 제국이 서구의 경제 침탈로 계속 약화되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고 자국 내 소수민족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레바논 산악 지대에서 발생한 기근과 다마스쿠스에서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이 학살 등으로 사회 분위기가 뒤숭숭해졌고, 19세기 말 시리아와 레바논, 팔레스타인 일대의 아랍인들 상당수가 프랑스인들의 도움을 받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등으로 이주하였다.[4] 이민자들 중에는 마론파나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같은 동방 가톨릭 교회 신도들이 많았지만 무슬림이나 드루즈교도, 알라위파 인구도 적지는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시리아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1920년에 시리아 아랍 왕국을 선언하였으나 불과 몇 개월 뒤 마이살룬 전투 패배로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당시 레바논 역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프랑스는 시리아 내 다수 무슬림들을 통제할 전략으로 순니파 무슬림들과 사이가 나빴던 소수파 알라위파들을 지원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시리아의 정치 지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6. 20세기

레바논과 시리아는 독립 이후 데이르 엘 아차이르(Deir El Aachayer), 카스르(Qasr), 카아(Qaa), 크파르 쿠크(Kfar Qouq) 등 레바논-시리아 국경 지대에 위치한 동부 내륙 지역 영토들의 소유권을 두고 국경 분쟁을 겪고 있다. 사실 이들 지역들은 모두 지리적, 정서적으로 시리아와 더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가 해당 지역 주민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들 지역들을 전부 다 레바논 땅에 편입시켰다. 당연히 식민지 시절에 획정된 국경선이다 보니 시리아에서는 이 지역들 모두 원래 시리아에 속해있었고, 식민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이라며 레바논을 상대로 이 일대에 대한 영토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나 레바논은 시리아의 주장을 무시하며 해당 지역들을 실효지배하고 있다. 게다가 레바논은 시리아가 이 지역들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제기하면 시리아한테 한때 시리아령이었다가 1939년 터키에게 합병된 하타이와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한테 빼앗긴 골란고원부터 먼저 되찾은 다음에 이야기해보라며 맞선다.

시리아는 1970년대부터 이어진 레바논 내전을 틈타서 군대를 파견했다.

레바논 기독교인들도 시리아를 두고 의견 차이가 다른데 레바논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한 동방 가톨릭 계열인 마론파 신도들은 친이스라엘 성향이 강하다. 애니와 실사 합성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에서 묘사된 팔레스타인인 난민 학살 사건의 주동자들이 바로 마론파 신도들로 이뤄진 군부 조직 팔랑헤이다. 전통적으로 마론파들은 친유럽 성향이 강했고 무슬림 및 이슬람에서 갈라져 나온 종파 신도들을 매우 증오하던 입장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마론파 신도들은 시리아가 무기를 지원하면서 레바논 내전을 부채질했다고 생각해서 시리아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 마론파와는 반대로 레바논의 정교회 및 시리아의 도움을 받는 시아파 헤즈볼라는 시리아를 매우 옹호하는 편.

2.7. 21세기

시리아는 친 이스라엘 정책을 펼치던 라피크 하리리 총리 암살의 배후로도 지목되어왔다. 하리리 총리 암살 이후 레바논에서는 삼나무 혁명이 발발하고 UN,미국을 위시로 한 국제사회에서는 이를 지지하며 시리아를 압박했고 결국 시리아는 결국 2005년에 군대를 철수했다. #

2008년,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레바논의 주권을 인정해 역사상 처음으로 상호간의 대사관을 설립하면서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설립되었다. #, #

2009년 10월 8일, 사우디와 시리아 양국이 레바논 사태의 해법을 촉구했다. #

2010년 7월 30일, 사우디와 시리아 양국 정상들이 레바논을 방문했다. #

레바논에도 시리아 내전으로 레바논으로 이주한 난민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레바논 정부는 시리아 난민들이 늘어나자 공권력을 이용해서 강제퇴거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 결국 2019년 1월 30일에 레바논에서는 레바논 현지인들과 시리아 난민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

레바논의 헤즈볼라 시리아 내전에서 친정부 편으로 참전하고 있다.

2021년 6월 2일에 알리 압델 카림 주 레바논 시리아 대사는 레바논 당국에게 시리아 난민들을 고국으로 귀국시키는 일에 시리아 정부와 협력해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

코로나19 팬데믹과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등 악재를 만나 레바논 경제가 역사상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으면서 레바논 정부 측에서 시리아인 난민들을 대거 시리아로 송환하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

이 이후에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레바논으로 확전 되면서 레바논 주민들의 시리아 행이 늘어나고 있으며, 시리아 내전 당시 레바논으로 피난 온 시리아 난민들도 다시 시리아로 되돌아 가고 있다.[5]

3. 대사관

2008년 12월에 시리아 대사관이 베이루트에 설립되었고 2009년 3월에는 다마스쿠스에 레바논 대사관이 설립되었다.

4. 관련 문서



[1]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이 세속적이라 정부 차원에서는 기독교와 소수 종파를 보호해 준다. 다만 무슬림들의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은 상당히 있으며, 무엇보다 내전으로 반군 사이에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퍼진 바람에 기독교 공포증이 더욱 높아졌다. [2] 레바논 내전 당시 시리아는 이스라엘과 함께 레바논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서로 친시리아-반이스라엘, 친이스라엘-반시리아 성향의 지도자를 만들기 위해 병림픽을 벌였다. 결국 내전 이후에도 라피크 하리리 총리가 시리아와 헤즈볼라의 지원을 받은 걸로 의심되는 폭탄 테러에 의해 숨지는 등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3] 이 아람 문자는 오늘날 아랍 문자의 기원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페니키아 문자가 그리스로도 전파되면서 오늘날 알파벳의 기원이 되었다. [4] 1차대전 이전까지 이들은 대개 오스만 제국 여권을 들고 왔기 때문에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투르코(터키인)라고 불렸다. 자세한 내용은 레바논계 브라질인, 아랍계 아르헨티나인 문서 등 참조 [5] 왜 내전 중인 시리아로 향하는지에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위에서도 서술 되어 있듯 양국의 국민 감정은 좋은 편에 속하고 완전히 종전을 한 것은 아니지만 정부군의 승리가 된 것은 기정 사실화 되어 있고, 시리아 정부 자체도 딱히 타 종파나 타 종교에 대한 탄압은 없기에 자신의 종교와 관계 없이 시리아로 떠나는 레바논인이 늘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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