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10:30

송진우(야구)/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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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화이글스 레전드 송진우.png

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프로 시절
3.1. 1989년3.2. 1990년3.3. 1991년3.4. 1992년3.5. 1993~1999년3.6. 2000년3.7. 2001년3.8. 2002~2006년3.9. 2007~2009년
4. 연도별 주요 성적

[clearfix]

1. 개요

송진우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

2. 아마추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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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70주년 기념 OB All-Star
in 2016. 동아일보

OF 상원고

OF 상원고

OF 광주일고

SS 경북고

2B 경북고

3B 배명고

RHP 경북고

LHP 세광고

1B 선린상고

C 경동고
파일:jhTcbjb.jpg
충북 증평군 출신으로 야구부가 있는 청주로 유학을 왔다. 세광고시절부터 뛰어난 좌완투수로 주목받았고 1982년 고2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세광고의 첫 우승을 일궈냈다.[1] 그러나 1983년 고3때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리한 출전을 강행하여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준우승을 이끌었지만 동국대로 진학한 이후 3학년 때 까지 투수로는 그리 많은 경기를 뛰지 않았다. 오히려 야수로서 타격재능이 꽤 좋아서 코너 외야수나 중요한 상황에서 대타로 기용되기도 했다.[2][3]

야수로서 수비는 '한국의 그렉 매덕스'라 불리는 급[4]. 기교파 투수로 변한 후 공배합에 따라 다음 수비위치를 정확하게 잡는다. 투수 직선타구, 투수 앞 땅볼, 번트 병살 처리는 KBO 리그 역대 최고급. 끊임없는 노력으로 대학 4학년 때 재기에 성공한다.

3. 프로 시절

3.1. 1989년

파일:0d1koc3.jpg
올림픽에 출전시키기 위한 협회의 강제적인 유보로 인해 프로행이 1년 늦춰진 송진우는 1989년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한다. 입단 초 좌완임에도 최고 구속 145km라는 강속구를 뿌리며 주목을 받았다.

그 이전인 1988년에 한국실업리그 세일통상 야구단에 입단했다.[5][6]

입단 첫 해부터 송진우는 자신의 기량을 증명한다. 첫 데뷔전을 완봉승(9이닝 4피안타)으로 장식하며 그 해 기록 방어율 2.81에 9승 10패 9 세이브를 기록했다. 비록 두자리 승수를 기록했던 이강철, 류명선, 박정현 등보다는 다소 부족했지만, 당당히 빙그레 마운드의 한축을 담당하는 주역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3.2. 1990년

파일:빙그레 이글스 시절의 송진우.jpg

프로 2년째인 1990년에는 더욱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시즌 내내 마무리 투수 역할에 주력하며 방어율 1.82에 11승 7패 27세이브를 기록, 구원(구원승+세이브 수 기준) 부문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후 데뷔 4년동안 50승을 거둬 매년 평균 10승 이상을 올리면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었다. 또한 이 1990 시즌부터 그의 상징인 등번호 21번을 달기 시작했다. 데뷔 첫해인 1989년에는 등번호 1번을 달았다.

3.3. 1991년

1991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는 8회 투아웃까지 퍼펙트로 막아냈으나, 대타 정회열이 때린 파울플라이를 이중화가 잡지 못하자 결국 볼넷으로 살아나가면서 깨졌고, 이어 홍현우한테 안타를 맞고 노히트 노런 무산, 장채근한테 싹슬이 2루타를 맞으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정회열과의 대결에서 특히 2-2 카운트에서 나온 볼 판정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란거리다. 송진우는 지금도 그 때의 공이 스트라이크였다고 생각한다며 아쉬움을 토로했고, 해당 경기의 주심이던 이규석 주심 역시 그때의 판정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시각이 엇갈린다.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정회열은 '스트라이크 줘도 할 말 없는 공'이라고 밝힌 바 있다. 훗날 이규석 심판이 당시 빙그레 포수였던 유승안을 만나는 자리에서 물었더니[7] 유승안의 첫 마디가 ‘빠졌어요'였다고 밝혔다. 유승안은 "몸쪽 직구였다. 선수 입장에선 무조건 들어온 상황이다. 그 때 당시 그 정도 볼이면 스트라이크에 더 가깝지 않나 싶다. 물론 심판 판정 나름이지만. 규석 형이 워낙 정확하게 판정을 하니까 더 할 말은 없다."라고 덧붙였다.

3.4. 1992년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92 KBO 리그 다승 1위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92 KBO 리그 세이브 1위
1992년에는 선발- 마무리 할것없이 경기에 나가[8]. 구원왕과 다승왕을 동시에 차지(19승-25포인트)했다. 하지만 당시 김영덕 감독이 이를 위해 멀쩡히 호투 중이던 선발 한희민을 5회 이전에 송진우로 교체하여 세간의 비난을 받으면서 빛이 바랬다. 게다가 이날 송진우가 김영덕 감독의 무리한 교체 투입으로 다승 1위를 확정지은 경기 상대는 하필 18승으로 다승왕 경쟁을 벌이던 이강철의 해태[9]여서 더욱 비난거리가 되었다.[10][11] 이는 빙그레의 우승 실패와 함께, 그 해 투수 부문 골든 글러브가 롯데의 신인 염종석에게 돌아가는 요인이 되었다.

3.5. 1993~1999년

송진우는 1989년 데뷔 이후 6년 간 사실상 풀타임 선발로 뛴 적이 단 한 해도 없다.[12] 김영덕 감독 체제에서 송진우의 기용 방식을 보면 김응룡 감독의 선동열 기용 방식과 놀랍도록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팀 내에서 최고의 구위를 지닌 투수를 정기적인 휴식이 필요한 고정 선발 대신 선발+중무리 방식의 혼합을 택한 것. 이로 인해 선동열과 마찬가지로 은근히 통산 기록에서 손해를 좀 본 케이스라고도 볼 수 있다. 송진우는 강병철 감독 체제하의 1994년 더블스토퍼를 통해 구대성이라는 마무리 대체재가 등장하고[13] 난 이듬해인 1995년이 되어서야 전업 선발투수로 활약할 수 있었다.[14] 하지만 이때는 이미 보직을 넘나들며 관리를 받지 못한 후유증(구위, 구속 감퇴)이 나타나고 있던 시기라는 점이 아쉬운 대목.

1997년을 기점으로 송진우는 통산 100승을 기록했지만 6승 12패 방어율 4.60으로 내리막을 걸었고,[15] 방어율이 4.79으로 치솟은 1998년에는 언론에선 은퇴를 거론하기도 했으며,[16] 시즌이 끝나자 구단은 그를 애리조나 교육리그로 보냈을 정도다.[17][18] 하지만 그 교육리그에서 서클체인지업[19]을 배우게 되는데 이를 바탕으로 기교파 스타일로 변화하게 되고,[20][21] 1999년엔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하면서 15승 5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4.00[22] 9완투승 2완봉승을 기록한 2선발로서 18승을 기록한 1선발 정민철, 14승을 기록한 3선발 이상목과 함께 한화의 우승을 이끈다.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209271104761006120.jpg
1999년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짓고 환호하던 모습 [23]

그리고 이후 송진우의 서클체인지업은 역대 최고의 명품 서클체인지업으로 평가받으며, 원래 슬라이더가 주무기였던 송진우의 새로운 주무기가 된다.[24][25] 당시 언론에서는 송진우의 체인지업을 언급할 때마다 애리조나 교육리그를 들먹이곤 했었는데, 정작 송진우 본인은 한 인터뷰에서 자기는 교육리그에서 그립만 배웠을 뿐이고, 실제로 쓰는 방법은 제이미 모이어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당시 제이미 모이어는 시애틀의 선발투수로 이따금 박찬호와 선발 맞대결을 펼치며 국내 TV에도 중계되곤 했었다. 송진우보다도 3살이나 더 많은 투수가 140이 안되는 구속에 서클체인지업을 활용하며 메이저리그 2선발로 맹활약하는 걸 TV로 보고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시애틀 1선발은 랜디 존슨.[26]
파일:fhQuK2v.jpg
그의 서클체인지업 그립

3.6. 2000년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2000 KBO 리그 승률 1위
2000년에는 선수협 활동으로 인해 개막 한 달만에 뒤늦게 합류했으나 13승 2패 4세이브 ERA 3.40으로 승률왕에 방어율 5위에 오르며 이상목, 정민철의 이탈로 약해진 한화 투수진의 리더이자 에이스 역할을 담당했다. 개막 이후 9연승하기도 했고 그 해 5월 18일 해태전[27]에서 최고령 노히트노런(115구, 탈삼진 6개, 사사구 3개)을 기록했다. 20세기 마지막 노히트 노런이자 2014년 6월 24일 찰리 쉬렉이 5,150일 만에 다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할 때까지 마지막으로 있었던 노히트 노런이었다. 국내 투수들 중에서는 여전히 마지막 노히트 노런.[28]

3.7. 2001년

4월~6월 말까지는 거의 선발로[29] 던지다가 6월 30일부터 7월 말까지는 구원 등판을 하고, 다시 선발로 투구하면서도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즌 최종 37경기(24경기 선발) 등판하여 185⅓이닝 동안 10승[30] 8패 2세이브 ERA 3.84를 기록했다.[31]
파일:RSHIwzU.jpg
6월 3일 청주구장에서 열린 LG전에서 투수로서는 최초이자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끝내기 안타를 쳐냈다. 그것도 2001년 다승왕, 구원왕, 승률 1위를 기록한 신윤호에게 말이다.

상황은 이러했는데, 지명타자로 출전한 김태균이 9회 말 1루수로 들어갔기 때문에 지명타자가 소멸되고 9번타자 자리엔 8회부터 등판한 워렌이 들어가있었다. 그러면서 5:7로 지고 있던 것을 타선이 연속 3안타를 쳐내며 6:7로 한 점 추격한 후 8번타자 조경택의 타석 때 신윤호의 공이 폭투가 나면서 한 점 더 추가하며 동점, 이후 조경택 마저 볼넷으로 나간 뒤 (아마도 도루로 2루를 간 후) 9회 말 1사 2,3루의 끝내기 찬스 때 워렌 대신 동국대 시절 강타자로도 이름나있던 송진우에게 대타를 맡긴 것이다. 심지어 타석에 들어서기 전 감독이 ‘번트를 대겠느냐’고 물었을 때 "신윤호의 공이 빠르니까 번트는 힘들겠다. 그냥 휘두르겠다."고 하고는 '땅볼만이라도 굴려서 주자가 들어오게 해야겠다'는게 원래 생각이었는데 결국 우익수 옆에 안타를 쳐내며 경기를 기어코 이긴 것이다.[32][33]

3.8. 2002~2006년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자 (2002)

히스토리 17 "난 거북이였다" 최초 200승 '송골매' 송진우의 전설
파일:2002년 골든글러브 수상자들.jpg
2002년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송진우
2002시즌 개막전을 완봉으로 장식하며 시작. 시즌 3승을 올린 경기에서 당시 선동열이 가지고 있던 최다승기록 146승을 뛰어넘었고 5월 19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150승을 기록했다. 결국 이 해에 18승을 거두면서 최고령 다승왕 최다 이닝 투구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였다.[34] 2004시즌 KIA와의 경기에서 만 37세 7개월로 최고령 완투승 기록을 세웠고, 2005시즌에는 만 39세 6개월로 최고령 완봉기록을, 그리고 대망의 2006시즌 8월 29일 개인통산 200승을 달성하면서 200승-100세이브를 동시에 달성, 일본프로야구 에나쓰 유타카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200승 100세이브를 기록하였다. 3번째 달성은 존 스몰츠. 같은 해 9월 24일에는 최고령 선발승(40세 7개월 8일) 기록도 세웠다.[35]
파일:통산 200승을 달성한 송진우_A.jpg
파일:통산 200승을 달성한 송진우_B.jpg
파일:통산 200승을 달성한 송진우_C.jpg
통산 200승을 달성한 송진우

3.9. 2007~2009년

파일:한화 이글스 시절의 송진우.jpg
그러나 2006년 한국시리즈 기간 중에 부상으로 시즌아웃된 이후 또 한 차례 부진을 겪게 되어 2007시즌에는 주로 중간 계투요원으로 나와 2구원승을 거두는 데 그쳤고[36], 2008년에는 선발로 복귀하여 팀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등 승운이 따르지 않아 6승에 그쳤으나 팀 내에서 류현진 다음으로 많은 이닝을 소화하는 등 꾸준히 활약했다. 2009년에는 중간계투로 다시 전환하여 4월 8일 두산전에서 구원승을 올려 최고령 승리투수 기록을 다시 갱신했다.
파일:최초 2000탈삼진을 달성한 송진우.png
최초 2000탈삼진을 달성한 송진우
2008년 6월 6일 대전구장에서 우리 히어로즈(현 넥센 히어로즈)를 상대로 선발 등판하여 8회 마지막 아웃을 남겨놓고 송지만 선수와 대치(송회장vs송집사). 이 대결을 삼진으로 장식하며 대망의 2000 탈삼진을 달성했다.
파일:역대 최초로 3000이닝 투구를 기록한 송진우.jpg
3000이닝 투구를 기록한 송진우
4월 9일 두산전에서는 이대수를 우익수 플라이로 잡아내며 달성하였다. 3,000 이닝 등판이라는 또 다른 대기록을 달성했다.

2009년 8월 16일, 본인의 명성에 걸맞은 피칭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판단, 팀 리빌딩에 맞춰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가족, 그리고 구단과의 상의를 통해 은퇴를 선언했다.[37][38]
파일:송진우 은퇴식.jpg
파일:영구결번된 송진우.jpg
파일:은퇴식에서 헹가래를 받는 송진우.jpg
송진우 은퇴식

은퇴경기는 2009년 9월 23일 LG와의 홈경기에서 은퇴경기 겸 은퇴식을 가졌다. 또한 그의 등번호 21번도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21번이 영구결번으로 지정된 것은 박철순 이래 두번째. 단 한 타자( 박용근)만을 3구로 상대해 내야안타를 맞고[39][40] 한화 이글스 좌완 에이스의 계보를 이은 류현진이 구원 등판하면서 그의 21년간의 프로야구 활약은 마무리되었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 푸른 글씨는 KBO 최다,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역대 기록(투수)
연도 소속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9 빙그레 35 156⅔ 9 10 9
(3위)
- 0.474 2.81 116 7 93 97 57 49 1.30
1990 50
(2위)
128⅓ 11 7 27
(1위)
- 0.611 1.82
(2위)
80 2 54 102 29 26 1.04
1991 36 184⅓ 11 10 11 - 0.524 2.78 142 13 72 126 67 57 1.12
1992 48
(1위)
191⅓ 19
(1위)
8 17
(1위)
- 0.704
(5위)
3.25 157 17 101 130
(4위)
79 69 1.33
1993 25 72⅔ 7 7 8 - 0.500 3.72 64 8 35 53 40 30 1.32
1994 한화 33 133 9 10 10 - 0.474 3.92 119 10 64 90 76 58 1.34
1995 26 183 13 8 0 - 0.619 3.20 165 11 79 121 78 65 1.31
1996 31 213
(3위)
15 9 0 - 0.625 3.25 185 18 94 160
(4위)
80 77 1.26
1997 27 146⅔ 6 12 0 - 0.333 4.60 156 17 61 73 85 75 1.40
1998 24 114⅔ 6 10 0 - 0.375 4.79 125 19 46 72 66 61 1.47
1999 35 186⅔ 15
(5위)
5 6 - 0.750
(4위)
4.00 180 24 64 132 99 83 1.29
2000 28 135 13 2 4 1 0.867
(1위)
3.40
(5위)
121 19 61 105 60 51 1.31
2001 37 185⅓
(3위)
10 8 2 0 0.556 3.84 181 20 95 139
(3위)
99 79 1.44
2002 31 220
(1위)
18
(2위)
7 0 0 0.720
(5위)
2.99
(2위)
199 16 65 165
(3위)
82 73 1.15
2003 42 129⅔ 9 7 7 2 0.563 3.12 111 9 46 93 48 45 1.17
2004 28 172
(5위)
11 8 1 0 0.579 3.61 162 19 51 100 73 69 1.20
2005 23 127⅔ 11 7 0 0 0.611 3.81 126 13 49 88 61 54 1.32
2006 26 147⅓ 8 8 0 0 0.500 3.60 147 10 56 94 64 59 1.32
2007 42 35⅔ 2 2 1 10 0.500 4.54 34 5 11 29 19 18 1.23
2008 31 132⅔ 6 8 0 2 0.429 4.48 141 13 68 73 72 66 1.53
2009 14 7⅓ 1 0 0 2 1.000 7.36 7 2 7 6 7 6 1.91
KBO 통산
(21시즌)
672 3003
(1위)
210
(1위)
153
(1위)
103 17 0.579 3.51 2718
(1위)
272
(1위)
1272
(1위)
2048
(2위)
1341
(1위)
1170
(1위)
1.29
역대 기록(타자)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삼진
1991 빙그레 1 1 0.000 0 0 0 0 0 0 0 1
1992 1 1 0.000 0 0 0 0 0 0 0 0
1994 한화 1 1 0.000 0 0 0 0 0 0 0 1
2001 2 1 1.000 1 0 0 0 1 0 0 0
KBO 통산
(4시즌)
5 4 0.250 1 0 0 0 1 0 0 2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9년 5완투 2완봉
1991년 11완투
(4위)
1완봉
1992년 4완투 1완봉
1994년 3완투 0완봉
1995년 7완투 1완봉
1996년 5완투
(4위)
0완봉
1997년 5완투
(3위)
1완봉
(4위)
1998년 1완투 0완봉
1999년 8완투
(1위)
2완봉
(1위)
2000년 2완투 1완봉
(1위)
2001년 1완투 0완봉
2002년 8완투
(1위)
1완봉
(4위)
2003년 1완투 0완봉
2004년 1완투
(5위)
0완봉
2005년 1완투
(5위)
1완봉
(2위)
2008년 1완투 0완봉
KBO 통산 64완투
(7위)
11완봉


[1] 이 우승은 세광고 야구부 창단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국대회 우승이다. [2] 그런데 야수로 뛰었어도 대성했을 것이라는 게 중론. 대학야구에서 대타로 나올 때 홈런을 자주 기록했으며 프로에 와서도 대타로 자주 기용되기도 했다. 실제로도 송진우는 끝내기 안타를 기록한 적도 있다. 2001년 6월3일 LG전에서 9회말 7-7 동점 상황인 9회말 1사2, 3루에서 대타로 나서 당시 강력한 중간계투였던 신윤호를 상대로 우전 끝내기 안타를 때리는 깜짝쇼를 연출했다. [3] 투수가 안타를 친 사례는 여러 번 있으나 끝내기 안타는 송진우가 최초이자 유일한 기록이다. 참고로 통산 8타수 4안타의 뛰어난 타격재능을 보였다. [4] 그렉 매덕스는 골드글러브 통산 18회의 수상에 빛나는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투수 부문 수비수였다. 특히 현역 마지막 해에 골드글러브는 물론 세이버메트리션들이 제정한 필딩 바이블 어워드의 초대 수상자이기도 하다. [5] 세일통상의 오너는 재일교포로 당시 KBO의 제8구단으로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시험삼아 실업리그에 뛰어들었다. 당시 송진우를 비롯 대학야구 최고의 선수들을 영입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세일통상 팀은 창단 4개월 만에 해체하게 된다. 야구단에 지나치게 돈을 쓴 것이 오너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며, 그 직후 회사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 때문에 송진우와 최해명(현 두산 베어스 코치)은 소속 팀이 없는 상태에서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다. [6] 사실 프로 직행이나 다름 없었던 송진우가 실업팀에 입단하게 된것은 88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서 프로팀에 가지 못하고 1년 실업팀을 전전하게 된 것이었다. 82년 최동원, 이해창, 임호균, 김재박등과 같은 케이스. 당시에는 프로선수는 올림픽에 출전 할 수 없었다. [7] 당시 포수를 봤으니까 누구보다 정확할테고 준비 없이 갑자기 물어야 마음속의 대답이 나올 것 같았다고 했다. [8] 사실 무엇보다도 원래 마무리 투수로 낙점했던 김인권이 마무리 투수로서 자질이 영 형편없었고, 세이브 상황에서 불을 질러대는 김인권을 보다 못해 김영덕 감독은 세이브 상황에서 송진우를 올리는 수를 두는데 이게 꽤 먹혀서(...) 웬만한 상황에서 송진우를 올리게 된다. [9] 그 해 해태는 에이스 선동열이 시즌 초반 어깨 건초염으로 전력에서 장기간 이탈해 있었다. [10] 이에 질세라 이강철도 다음날 빙그레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선발로 나와 '공동' 다승왕의 기회를 살리려 애썼지만, 그해 KBO 역사상 최초의 시즌 40홈런을 돌파하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장종훈의 홈런 기록을 41개로 늘려주는 제물이 되면서 쓸쓸히 패전투수가 되었다. [11] 당초 송진우는 인터뷰에서 "이강철도 같은 상황에서 안 나올거라는 보장 없었다"고 말했다가 '그 감독에 그 선수'라는 식의 더욱 강한 비난을 받았고, 훗날에야 다른 인터뷰에서 '밀어주기는 나쁜 짓'이라며 후회하는 듯한 말을 했다. [12] 1990년은 아예 전업 마무리(중무리) 투수였다. 또한 1992년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선발 투수다, 마무리 투수다 의견이 갈리는데, 게임사와 야구팬들 사이에선 선발 투수로 분류하고, 일반인들은 마무리 투수로 본다. 그리고 1993년은 1990년과 더불어 유이한 마무리로 활약한 시절. 데뷔이후 그가 얼마나 혹사를 당했는지 알수 있는 대목. [13] 정확히는 시즌 중반 구대성과 송진우의 보직이 각각 마무리와 선발로 변경되었다. [14] 그러나 95~96년 이후에도 송진우는 생각보다 계투 등판을 많이 했다. 풀타임 선발로 완주한 시즌은 95~96, 02, 04~06시즌 정도에 불과하며 이중 순수 선발로만 출전한 시즌은 95, 06시즌뿐이다. [15] 선발과 마무리를 겸업하며 지나친 이닝을 소화한 후유증으로 구속과 구위가 꾸준히 줄어들었는데, 145km에 육박하던 구속이 32세이던 97년에는 140km를 잘 넘기지 못했다. 누가 보기에도 완연한 쇠퇴기였다. [16] 더군다나 이 해에 외국인 선수제도가 도입되면서 많은 외국인 타자가 들어왔는데, 이들은 긴 리치를 활용해 슬라이더를 걷어내며 빠른공-슬라이더 조합의 투피치 들에게 특히 강했다. 더군다나 국내타자들 마저 외국인 타자에 자극을 받아 웨이트 트레이닝을 강화하며 타격기술을 향상시켜 1999년은 역대 최고의 타고투저로 남게된다. [17] 애리조나 교육리그는 20대 초반의 선수들을 기본기 위주로 가르치며 실전감각을 쌓게 하는 곳인데, 참가선수 연령이 20대 중반을 잘 넘기지 않는다. 30대 선수에게 교육리그에 참가하라는 얘긴 굉장히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실제로 송진우는 그 때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했었다고 한다. [18] 박정진의 경우에도 2009년 방출대상에 올랐다가 한대화 감독이 부임하면서 기회를 얻었는데, 구단은 그를 애리조나 교육리그로 보내버렸다. 거기서 뭘 배워오라는 것보다는 루키들을 상대로 마지막 테스트를 해보려는 의미였던듯. 송진우나 박정진 모두 결과가 좋았던 점에서 최소한 정신 재무장 효과는 있는 것 같다. 만약 여기서 은퇴했다면 송진우는 그냥 빙그레 시절에 몇년 활약했던 에이스로, 박정진은 골수팬만 겨우 알수있는 무명선수로 남았을것이다. [19] 당시 교육리그 의 한 순회 코치가 젊은 선수들에게는 일일이 지시하며 가르쳤는데, 송진우 나이를 물어보더니 이게 좋을 것 같다며 서클체인지업 그립만 가르쳐주고 훈련에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고 한다. [20]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박찬호 배영수의 경우에서처럼 제구도 필요없이 힘으로 던져대던 파워피쳐가 자신의 약해진 구위를 인정하고 노화를 받아들인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하지만 송진우는 단순히 기교파로 변신하는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당대 투수 중 최고의 제구력을 인정받기까지 했다. [21] 하일성에 의하면 심판들도 겨울동안 쉬게 되면 스트라이크존에 대한 감각이 무뎌져서 각팀의 스프링캠프에 찾아가 감각을 익히곤 하는데 송진우의 공을 보면 스트라이크와 볼의 경계에 대한 감이 잡기 좋다고 했다. 그만큼 스트라이크존 끄트머리에서 공 반개씩 넣고 빼는 제구에 능수능란 했다는 얘기다. [22] 평균자책점이 다소 높기는 했지만, 이때가 역대 최강급의 타신투병 시즌이었던걸 감안하면 매우 준수한 평균자책점이었다. 더구나 이 평균자책점이 당해 8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23] 파일:99플옵4차전.gif [24] 정작 송진우는 은퇴경기 해설에서 송진우를 구원해 등판한 류현진의 체인지업이 더 낫다고 평했다. 팔스윙의 균일함에서 류현진이 더 낫다고. [25] 일본 진출 전의 구대성에게 가르쳐주어 구대성의 주무기가 되기도 하고, 이것을 구대성은 류현진에게 전수하였다. 이 얼마나 훈훈한 계보인가 [26] 송진우를 비롯해 크게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활용하는 외국인 투수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자, 수많은 국내투수들이 체인지업을 익히게 됐고 이는 2000년대 중반 투고타저가 극심해지는 주요 원인이 된다. [27] 송진우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이 날은 하필이면 해태 타이거즈가 창단 이후 처음으로 5월 18일에 광주 무등 야구장에서 홈경기를 연 날이었다. [28] 그 후 2008년 7월 4일 KIA 타이거즈 이범석과 2010년 6월 10일 SK 와이번스 김광현9회 2사에서 아깝게 노히트 노런을 놓쳤다. 공교롭게도 이 두 번 모두 상대팀은 삼성 라이온즈였다. [29] 5월 31일 롯데전 홈 경기에서 구원 등판하긴 했으나 이는 이상군의 은퇴식으로 인해 첫 타자만 상대한 후 바로 원래 선발이었던 송진우가 이어 던진 것이다. 결과는 7이닝 3실점(1자책)의 호투였으나 팀 타선이 뒤 늦게 터지면서 ND. [30] 9월 5일 현대전 9이닝 1실점 1완투승 포함. [31] ERA가 다소 높아보이기도 하고 승수도 10승 뿐이기는 하나 이 해 리그가 여전히 타고투저 흐름이었기 때문에 ERA+는 127.4에 sWAR*도 4.03을 찍은 준수한 시즌이었다. 게다가 한국나이로 36세 였던 것을 감안해야된다. [32] 사실 투구사인을 읽어서 쳤다고 한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놀라운 사건이긴 하지만. [33] 2015년에 한화 이글스에서 다시 한 번 투수 권혁이 끝내기가 가능한 상황에서 타석에 서기도 했다. 결과는 삼진. [34] 남들은 보통 은퇴를 고려하는 36세에 220이닝을 던졌다는 것 자체가 이미 괴물이다. 게다가 노쇠화를 심하게 타는 투수라는 보직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놀라운 일. [35] 최고령 선발승은 2008년 9월 13일까지 갱신되었다. [36] 그래도 기록의 사나이답게 데뷔 첫 10홀드를 기록했다. [37] 은퇴를 앞두고 박동희 기자와 인터뷰에서, 2군에 내려가 보름 정도 지냈을 때, 1군에 다시 못 올라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다. 그리고 100일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결국 손을 들고 은퇴선언을 한 것이라 말했다. [38] 그런데 재밌는 건 은퇴경기 당시 불펜피칭 자체는 한화 내 어지간한 다른 투수들보다 공 끝이 더 좋았다는 것(...). 몸 관리를 어떻게 한건지 짐작조차 가질 않는다. [39] 투수 오른쪽 빠른 내야 땅볼이었다. 현역 시절 또 다른 내야수라 할 정도로 투수 수비의 일인자였던 송진우였다면 충분히 잡을 수도 있었으나, 아무래도 오랜만의 등판인데다가 나이가 나이인지라 공을 놓치고 내야안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40] 여담으로 만약 국내 골든글러브가 수비만을 평가하는 상이었다면 그 상은 송진우가 현역시절 독차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간결한 투구 후 빠른 수비동작, 번트 수비에 맞선 정확하고 빠른 송구로 선행주자를 잡아내는 것은 그의 전매특허. 전문가들이 수비를 잘하는 투수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게 송진우다. 이래저래 한국의 그렉 매덕스라는 닉네임이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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