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The Greatest Frenchman | ||||||||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콜뤼슈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장 가방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엠마뉘엘 수녀
|
장 물랭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볼테르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크리스찬 카브롤
|
쥘 페리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미셸 사르두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하룬 타지프
|
에리크 타바를리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다비드 두이예
|
장 자크 골드만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달리다 |
레옹 지트론
|
니콜라스 윌로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파트리크 푸아브르 다르보르
|
프랑시스 카브렐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르노 |
베르나르 쿠슈네르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미셸 세로
|
미셸 드러커
|
라이무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레이먼드 풀리도르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질베르 베코
|
조제 보베
|
장 페라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뤽 베송 |
티노 로시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세르지 레기아니
|
프랑수아즈 돌토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세르주 갱스부르 Serge Gainsbourg[1] |
|
|
|
출생명 | 뤼시앵 갱스뷔르(Lucien Ginsburg)[2] |
출생 | 1928년 4월 2일 |
프랑스 파리 | |
사망 | 1991년 3월 2일 (향년 62세) |
프랑스 파리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79cm |
직업 | 가수, 작곡가, 시인, 배우 |
활동 | 1957년 ~ 1991년 |
배우자 /파트너 |
엘리자베트 레비츠키(1951년 결혼~1957년 이혼) 베아트리스 팡크라치(1964년 결혼~1966년 이혼) 제인 버킨(1968년~1980년) 카롤린 폴뤼스(1980년~1991년 갱스부르 사망) |
자녀 |
딸 나타샤 갱스부르(1964년생) 아들 폴 갱스부르(1968년생) 딸 샤를로트 갱스부르(1971년생) 아들 뤼시앵 갱스부르(1986년생)[3] |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국민 가수이자 작곡가, 시인, 배우. 위대한 프랑스인 20위로 뽑힌 적이 있을 정도의 거물이다.1960~1970년대 프랑스 대중음악의 상징이자 시인 샤를 보들레르에 비견될 정도로 괴팍하고 방탕한 천재의 모습을 보여준 예술가이기도 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전통적인 샹송의 방식을 따른 Boris Vian과 재즈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이 많았으나 이후 샹송의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발라드, 맘보, 라운지, 레게, 팝, 펑크, 디스코, 보사노바, 로큰롤 등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시도하여 샹송의 예술성을 한 단계 끌어올리며 프랑스의 국민가수로 등극했고, 전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쉽게 말하자면 에디트 피아프, 샤를 아즈나부르로 대표되는 중후하면서도 극적인 '고전 샹송'의 형식에서 벗어나 타 장르와의 융합을 통해 '현대 프렌치 팝'으로 변화하던 과도기에서 작곡가이자 작사가이자 가수로서 새로운 트렌드를 이끄며 선구자 역할을 한 중요 인물이다. '위대한 프랑스인' 차트에서 20위에 선정되었으며 프랑스에서 그래픽 노블을 펴낸 조안 스퍼가 직접 그를 위한 전기 영화 한편을 감독했고, 흥행과 비평에도 모두 성공하여 세자르 영화제 작품상을 포함 8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 남우주연상, 음향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아이러니와 말장난과 노골적인 성적 이미지로 점철된 다중적인 의미의 가사를 즐겨 쓴 것으로도 악명이 높은데, 프랑스 현지에서의 평가 역시 '위대한 음악가이자 영원한 국민가수'이면서 '희한하고 일반적이지 않았던 괴짜' 두개의 시선이 뒤섞여 있다.
한국에서의 인지도 자체는 높진 않지만,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는 노래들을 꽤 만들었다. 직접 보컬까지 참여한 노래 중에서는, 커리어 대표곡인 ' Je t'aime… moi non plus'나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재즈 버전으로 리메이크하여 대표 ost로 사용된 ' La Javanaise' 등이 있으며, 작곡한 노래중에서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우승곡인 ' Poupée De Cire, Poupée De Son', 배우 이자벨 아자니가 부른, 한밤의 TV연예 오프닝송으로 유명한 ' Ohio'가 있다. 작사가로서도 활동하여 당대에 유명한 여성 샹송 가수들이 그의 가사를 받아 노래를 불렀는데, 프랑수아즈 아르디의 대표곡인 Comment te dire adieu가 가장 유명하다.
2. 생애
2.1. 30대 이전
세르쥬 갱스부르는 우크라이나에서 프랑스 파리로 이민 온 유대인 부모에게서 1928년 4월 2일에 태어났다. 아버지 이오시프 긴스버그 (1898~1971)는 우크라이나의 하르키우 출신이었고 어머니 올가 베스만 (1894~1985)은 페오도시야에서 태어나 러시아 혁명 이후 프랑스로 건너왔다. 세르쥬 갱스부르는 훗날 프랑스 음악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지만 아이러니컬 하게도 프랑스인 혈통은 없는 유대인 이민자의 자식이었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뤼시앵이었다. 그의 유년 시절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진 않지만, 당시 프랑스는 독일 나치의 점령 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은 유대인의 표식인 노란색 별을 가슴에 달고 지내야 했다. 그는 아버지보단 어머니와 사이가 좋았는데, 갱스부르가 무엇을 하든 그를 사랑했던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는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려 애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아버지에게 꾸중을 듣는 날이면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울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면 눈물이 흘렀는데, 눈물이 귓불에 떨어지는 그 순간, 아! 나는 행복했다.
피아노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그는, 대신 그림 그리기나 장난감 권총을 가지고 노는 일에 더욱 흥미를 느꼈다. 서른 살 이전까지 그림을 그리던 그는, 자신의 삶에 환멸을 느끼며 바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나 그는 연주자 생활에 특별한 감흥은 없었던 것 같다.
연주자 시절에 갱스부르는 엘리자베트 레비츠키라는 여자와 1951년 첫 번째 결혼을 했지만, 1957년 이혼했다. 1964년 갱스부르는 베아트리스 팡크라치라는 여자와 두 번째 결혼을 하고 두 명의 아이들도 갖게 되지만, 그가 브리지트 바르도와 불륜을 저지르면서 1966년에 다시 이혼을 하게 된다.[4]
2.2. 1960년대
1965년, 갱스부르는 직접 작곡 작사한 ‘ Poupée de cire, poupée de son’이란 노래로 제10회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참가하게 된다. 이 곡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프랑스발 버블검 팝인 Yé-yé 음악의 아이돌 중 한 명이었던 17세의 프랑스 갈(France Gall)에 의해 불려졌고 그때까지만 해도 유로비전의 대세였던 중후한 발라드세를 누르고 깜짝 1등을 차지했다. 참고로 프랑스어 제목은 '밀랍 인형, (겨를 넣은) 헝겊 인형'이란 뜻이지만, 헝겁 인형은 '소리(son)를 내는 인형'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으며, 결국 너무 어려 세상물정에 아직 많이 어둡고 나이브한 어린 가수임에도 당대 젊은이들에게 너무나 큰 영향력을 주는 아이돌 가수에 대한 갱스부르의 시니컬한 비아냥이라는 것이 중론이다.[5] 이 곡의 성공으로 갱스부르는 당대 락스타에 맞먹는 큰 명성과 부를 거머쥐게 된다.이후 갱스부르는 프랑스 갈에게 너무도 노골적인 성적 야유가 담긴[6] ‘Les Sucettes(막대 사탕)’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주었다. 1966년 3월에 발표된 이 곡은 유럽 전역에서 커다란 물의를 빚었으며, 곡을 만든 갱스부르 보다는 노래를 부른 프랑스 갈에게 더욱 큰 타격을 줘서 한동안 그녀는 프랑스 음악계에서 퇴출되다시피 했다. 당시 프랑스 사회가 이 곡으로 받은 충격은 박지윤이 댄스곡 '성인식'을 처음 들고 나왔을 때와 동급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이 곡의 뮤직 비디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성인식'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럼에도 갈은 계속해서 갱스부르에게 곡과 앨범 제작을 부탁했는데, 60년대 후반의 대세인 싸이키델릭이 가미된 그녀의 앨범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7]
1967년 갱스부르는 브리지트 바르도의 집에서 바르도와 같이 밤을 보내던 중 “당신이 상상하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 노래를 들려줘.” 라는 바르도의 말을 듣고 즉석에서 ‘Je t’aime… moi non plus’라는, 노골적으로 성적인 가사와 여성의 신음 소리를 연상시키는 소리가 담긴 곡을 작곡하고 다음 날 유리로 만들어진 스튜디오에서 2시간 동안 곡을 녹음했다. 독일인 사업가이자 바르도의 남편[8] 군터 작스(Gunter Sachs)는 아내가 신곡을 녹음한다는 소식을 듣고 구경하러 스튜디오로 갔다가 해당 곡과 갱스부르가 노골적으로 바르도에게 접근하는 모습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내며 "레코드가 둘 사이의 사적인 내용이냐"며 물었고, 갱스부르는 그에게 ‘내 생애 최초의 사랑 노래이자 가장 도덕적인 노래’라고 단언했다고 한다. 그러자 큰 스캔들이 퍼질 것을 염려한 바르도는 레코드사에게 레코드 발매를 하지말라는 요청을 했다. 결국 해당 곡은 이후 제인 버킨이 1970년에 발매한 앨범 “Jane Birkin/Serge Gainsbourg”에 실리면서 대중에게 공개되었는데, 전반적으로 너무 야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대중(지상파)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고[9] 로마 교황청은 공식 성명을 발표해 직접적으로 곡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이 앨범은 여배우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활발한 판매를 보였다. 이어폰 주의
1968년, 갱스부르는 영국의 가수이자 배우였던 18세 연하 제인 버킨과 영화 “Slogan” 촬영 도중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십 년이 넘도록 함께했고, 1971년에는 현재까지 모델이자 배우이며 가수로도 활동하는, 딸 샤를로트 갱스부르를 낳는다. 버킨의 임신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고 이후 둘 사이는 세르쥬의 바람기와 알코올, 마약 중독 증세 등으로 인해 점점 멀어지다가 결국 버킨이 1980년, 프랑스인 영화감독인 자크 드와이옹의 아이를 임신한 채 그를 떠난다.
뚜렷한 이상형은 없어. 다양한 여자를 만나본 나는 오히려 절충주의자라고 할 수 있지. 제인 버킨은 차라리 그림 같은 스타일이야. 화가였을 때 나는 가슴이 작고 호리호리한, 양성적 여자만 그렸어. 내 모든 그림은 제인을 닮았고, 나는 그녀를 만나기 전부터 그녀를 그려왔지.
2.3. 1970년대
그는 1971년 앨범 “ Histoire de Melody Nelson”을 발매했다. 갱스부르가 나레이터로 참여하여 어린 소녀에 관한 성적 이끌림( 롤리타)을 말하는 컨셉 앨범으로 만들어진 이 앨범은 David Holmes, Beck, Dan the Automator 등의 아티스트에게 영향을 주었다.10대 소녀는 자신의 향기와 가시를 자각하는, 막 피어난 꽃이다.
1975년에는 앨범 “Rock Around the Bunker”를 발매했다. 락 사운드가 가득한 이 앨범의 주제는 전부 나치 독일에 관한 것들로 갱스부르는 이 앨범에서 유대인인 그와 그의 가족들이 2차대전에서 받은 고통을 블랙 코미디적으로 비꼬았다. 이 앨범은 1970년대 중반, 복고풍 사운드의 유행을 이끌기도 했다.
음악으로 블랙 코미디를 구사하려면 충분한 양의 경멸, 냉소, 명철함과 약간의 심술이 필요해. 물론 멋진 승부사가 돼야 하는 건 두말 하면 잔소리.
1978년, 갱스부르는 자메이카로 건너가서 ‘Aux Armes et cetera’라는 곡을 발매했다. 이 곡은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의 레게 버전으로, 로비 셰익스피어, 실리 던바, 그리고 밥 말리의 부인인 리타 말리(Rita Marley,1946~)가 코러스로 참여했다. 밥 말리는 갱스부르가 그의 아내에게 에로틱한 가사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것에 화를 표했고, 이 곡의 가사에 반대하는 우익 집단인 알제리 독립 단체로부터는 살해 위협을 받았다. 자신의 음악에 반감을 표하는 사람들에게 <라 마르세예즈>의 원곡 악보를 보여주며, ‘aux armes et cetera’라는 가사가 코러스로 삽입된 것이 사실 원곡에 더욱 가깝다고 주장했다.
2.4. 1980년대
제인 버킨과의 13년 간의 격동적인 관계 끝에, 그녀는 그를 떠났다. 이 시기에 작업한 음반 Pull Marine은 원래 제인 버킨이 녹음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이미 그녀와 결별한 뒤였기 때문에 갱스부르는 제인 버킨과 가장 음색이 닮은 사람을 수소문한 끝에 여배우인 이자벨 아자니에게 가수 데뷔를 제안한다. 초기의 제인 버킨을 방불케 하는 아자니의 창법이나 음색은 아마추어리시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앨범 자체는 크게 성공을 거뒀다. 이 음반의 수록곡 중 Ohio는 한밤의 TV연예의 시그널 송으로 사용되어 국내의 TV 시청자들에게도 익숙하다. 1983년에 갱스부르는 잠시 이자벨 아자니와 사귀기도 했다.1984년 그는 미국 뉴욕에서 녹음한 펑크(funk)와 뉴웨이브 스타일의 앨범 《러브 온 더 비트(Love On The Beat)》를 출시했는데 샤를로트 갱스부르와 함께 부른 <Lemon Incest (Inceste de citron)>[10]와 <Aux Enfants de la Chance>가 근친상간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곡들 뿐만 아니라 이 앨범의 모든 노래들이 매우 외설적이어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앨범의 첫번째 트랙이자 동명의 “Love On The Beat”에는 당시 갱스부르의 연인이던 프랑스 가수 Bambou[11]의 신음소리가 메인으로 깔린다.[12] 그래서 혹자는 “Je t’aime, moi non plus”의 후속이라고도 이야기한다.[13]
1980년대부터 갱스부르는 프랑스 TV쇼에 정기적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방송 출연은 그의 유머와 자극적인 언행으로 인해 논란이 많았다. 그는 종종 술에 취하거나 면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TV에 출연하였고, 같은 해 생방송 중에는 담배를 피우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14] 1984년에는, 방송 도중 과한 세금 정책에 반대한다는 뜻에서 500 프랑 지폐를 태웠고 1986년 4월, 생방송으로 방영되는 마이클 드러커의 음악방송 “샹젤리제 (Champs-Élysées)”에 함께 출연한 미국 여가수 휘트니 휴스턴을 보며, 만취한 상태로 “I want to fuck her”라고 영어로 말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15] 그러자 그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에게 성적 이끌림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실례이다"라는, 변명에 가까운 말을 하기도 했다.
같은 해, 그는 다른 TV쇼에서 가수이자 포르노 영화를 찍은 것으로 유명한 카트린 랭제(Catherine Ringer, 1957~)와 함께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갱스부르는 그녀에게, “You’re nothing but a filthy whore, a filthy, fucking whore(넌 추잡한 창녀, 그것도 아주 더럽고 추잡한 창녀일 뿐,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Look at you, you’re just a bitter old acholic. I used to admire you but these days you’ve become a disgusting old parasite(네 자신을 봐, 넌 늙은 알코올 중독자일 뿐이야. 난 한때 당신을 존경했지만, 요새의 당신은 그저 역겹고 늙은 기생충이 되었을 뿐이지)”라고 반박했다.
한편 1986년 연인 Bamboo와의 사이에 아들 Lucien이 태어났다. 아들의 이름은 갱스부르 자신의 어릴 적 이름과 같은 것이었다.
1988년 그는 “Val d’lsére”라는 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여 지역 극장에서 상당히 취한 상태로 연설을 했다. 그는 무대 위에서 샴페인 병을 들고 브리지트 바르도와의 성생활에 관한 음담패설을 늘어놓다, 비틀거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해 결국 무대 아래로 추락했다. 그 후 그가 모습을 드러내거나 앨범을 발매하는 일은 급격히 줄었다. 그는 안정과 치료 및 회복이 필요했지만 오히려 더욱 술을 찾았고, 몇 년간 그의 건강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알콜 중독으로 인한 간경화가 암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의사의 경고에도 끝까지 수술을 거부했고, 술과 담배를 끊지 못했다.
죽음과 나의 거래는 당신들과 무관해. 담배를 다시 피우고 술을 다시 마시는 건 내 문제일 뿐이야. 만약에 마지막 순간, 여자와 담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담배를 고를 거야. 더 쉽게 버릴 수 있잖아.
내가 종종 의식 분리 상태에 있는 건 담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늘 흐리멍덩해요. 그러나 나는 몽상을 제외한 어떤 마약도 하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으며 나는 내 존재에 관해 알게 되었지. 나는 조무래기 도둑, 얼굴에 황산 세례를 받은 야바위꾼에 사기꾼, 우울증 환자에 미치광이 염세주의자, 오만한 자, 추방된 자, 오점 투성이, 졸렬한 폭력배에 불과하지 않아.
3. 사망, 유산
갱스부르는 1991년 3월 2일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파리에 위치한 몽파르나스 공동 묘지에 묻혔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파리 전체가 멈추었고, 장례식에 참석한 당시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은, “갱스부르는 우리의 보들레르이며, 우리의 아폴리네르입니다. 그는 음악의 위상을 예술의 수준으로 격상시켰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의 집으로 유명한 rue de Verneuil은 여전히 그래피티와 시로 가득 덮여있다.나를 땅에 묻을 때는 전속력으로 묻어줘.
“당신 집의 벽들은 왜 온통 까만색입니까?” 라고 사람들은 묻는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정신병원의 벽들은 온통 하얀색이니까.”
4. 가족
2번 결혼한 것 외에도 여러 애인을 두었으며 4명의 자식을 두었다. 자식들 중 제일 유명한 인물이 딸인 샤를로트 갱스부르. 프랑스 배우이며, 영국 배우 제인 버킨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1971년생인 샤를로트는 가수와 배우로 영어권과 불어권 모두에서 호평과 인기를 모으고 있다. 1980년대 말 한국 KBS에서 <귀여운 반항아(1985, L'Effrontée)>를 방영해줘서 알려졌고, 연기파 배우로 2009년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미국으로 이주 후 첫 번째 할리우드 영화로 2016년 인디펜던스 데이: 리써전스에 출연했다.5. 기타
생전에 어마어마한 골초로 유명했다. 특히 프랑스의 국민 담배인 지탄을 주로 피는거로 유명했는데 하루에 5갑씩이나 피웠다.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고등학생 때 학교신문 기자였는데, 소설 '에브게니 소콜로프' 사인회를 하러 자기 동네 서점을 방문한 세르쥬 갱스부르를 찾아가 인터뷰를 했다. 갱스부르는 그에게 인터뷰를 마칠 무렵 이런 말을 해주었다. "너 말이야, 언젠가는 유명해질 거야. 하지만 가면을 써서 얼굴에 달라붙어 있게 하면 절대 안 돼. 나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갱스부르와 갱스바르[16] 사이 바로 그 가면이거든. 이젠 가면을 벗을 방법이 없어졌어. 딱 달라붙어 있거든. 넌 나 같은 실수를 하지 말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보여 줘. 멍청이들이 싫어하거나 화를 내도 신경 쓸 것 없어.”
Je suis venu te dire que je m'en vais(이별을 전하러 왔어요)를 불렀는데 2024 파리 패럴림픽의 폐회식에서 이 곡이 커버되었다.
갱스부르의 작품은 물론 갱스부르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영화, 음반, 서적 등을 모아 놓은 웹사이트가 있다. 매우 전문적인 수준의 자료 수집이 있으니 참고할 것.
[1]
국제음성기호 표기는 [sɛʁʒ ɡɛ̃zbuʁ\].
[2]
프랑스어 표기법 상으로는 이렇지만, 예명과의 구분을 위해 갱스부르 본인은 '긴스뷔르'로 발음했다.
[3]
일명 룰루(Lulu)
[4]
브리지트 바르도에 대한 그의 사랑의 결과로 'Je t’aime… moi non plus’, ‘Initials B.B.' 등의 노래들이 만들어졌다.
[5]
영국의 아이돌 Twinkle이 이 곡의 번안곡을 불렀는데, 제목은 대놓고 ‘A lonely singing doll’이다.
[6]
해당 곡의 가사는 표면적으로는 막대 사탕을 좋아하는 소녀에 관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펠라치오를 의미한다.
[7]
훗날 인터뷰어가 프랑스 갈에게 왜 더 이상 ‘Les Sucettes’와 같은 노래를 부르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처음 노래를 불렀을때는 가사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지금은 그럴 나이는 지났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8]
세르쥬 갱스부르와 브리지트 바르도는 불륜 관계였다.
[9]
성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인 프랑스에서도 톤을 낮춘 버전만 방송할 수 있도록 했다.
[10]
뮤직비디오를 보면 웃통을 벗고 있는 세르주 갱스부르와 속옷만 입고 있는 샤를로트가 같이 누워있다. 물론 샤를로트 갱스부르는 세르주가 매우 좋은 아버지였다며, 부적절한 일은 일절 없었고 성적 학대가 있었냐는 질문을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화가 난다는 입장이다.
[11]
본명은 카롤린 폴뤼스이며, 어머니는 중국계 베트남인, 아버지는 독일인으로 알려져 있다. 예명인 밤부는 대나무라는 뜻으로, 깡마른 몸매와 베트남 출신이란 점을 반영한 것이며 갱스부르의 전기 영화에서는 중국 혼혈 배우인 밀레느 잠파노이가 연기했다.
[12]
참고로 이 신음소리는 두 사람이 실제로
사랑을 나누는 소리를 직접 녹음해서 썼다고 한다. 굉장히 격정적으로 질러댄다.
[13]
네이버 지식백과, 세르주 갱스부르(Serge Gainsbourg) (두산백과).
[14]
근데 사실 한국에서도 1990년대까지는 방송에서 흡연을 하거나 드라마에서 흡연 장면을 연출하는 행위가 일반적일 정도로, 당시에는 방송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15]
0:58초부터.
[16]
갱스바르는 갱스부르의 노래 가사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이다. 갱스부르가 자연인 갱스부르라면, 갱스바르는 대중의 시선을 의식하는 스타 갱스부르를 가리킨다. 수줍은 싱어송라이터였던 갱스부르는 인기를 얻으면서 점점 술과 파티에 빠진 갱스바르로 변했다.
본 문서에서 인용한 발언의 일부 혹은 전체는 트위터 @Gainsbourg_bot 계정이 번역한 내용을 가져온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하에 해당 내용을 나무위키의 라이선스로 배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