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16:42:49

세르비아 왕국(1217년~13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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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3893> 세르비아 왕국
Српско краљевство
Srpsko kraljevstvo
Србија
Srbija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Flag_of_Serbia_1281.svg.png
국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Balkans_1265.jpg
1217년 ~ 1346년
성립 이전 성립 이후
세르비아 대공국 세르비아 제국
<colbgcolor=#d00> 위치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수도 라스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주요 국왕 스테판 네마니치(1196~1228)
스테판 우로시 1세(1243~1276)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1331~1355)
언어 중세 세르비아어
종교 세르비아 정교회
종족 세르비아인
주요사건 1217년 건국
1242년 몽골군의 침략
1284년 스트루미카, 프릴레프, 오흐리드, 크로야, 마흐바, 베오그라드 공략
1290년 브라니체포 공략
1300~1312년 스테판 드라구틴 스테판 밀루틴의 내전
1330년 벨버즈드 전투
1336년 수마디야 전투
1345년 세레스 공략
1346년 세르비아 제국 선포
1348년 테살리아 공략
1350년 보스니아 전쟁
1355년 스테판 두샨의 사망
1371년 마리차강 전투와 왕국의 붕괴
언어별 명칭
세르비아어 Српско краљевство / Србија
(Srpsko kraljevstvo / Srbija)
그리스어 Βασίλειο της Σερβίας
불가리아어 Сръбско кралство
이탈리아어 Regno di Serbia
라틴어 Regnum Rasciae
독일어 Regno di Serbia
영어 Kingdom of Serbia
1. 개요2. 역사
2.1. 성립 배경2.2. 1168 ~ 1196 스테판 네마냐: 세르비아 통합2.3. 1196 ~ 1228 스테판 네마니치: 세르비아 왕국의 성립2.4. 1228 ~ 1243 스테판 라도슬라프, 스테판 블라디슬라프: 혼란기2.5. 1243 ~ 1276 스테판 우로시 1세: 경제 부흥과 대외 확장, 중앙집권화2.6. 1276 ~ 1321 스테판 드라구틴,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 내전기2.7. 1321 ~ 1331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 불가리아 제2제국과의 대결2.8. 1331 ~ 1346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 발칸 반도의 패자2.9. 1346 ~ 1371 세르비아 제국: 짧은 영광과 붕괴
3.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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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마니치 왕조 휘하에서 번영하여 스테판 두샨 대의 세르비아 제국의 초석을 놓은 전신.

라틴 제국 성립 이후 패권자가 사라진 발칸 남부에서 세력을 대폭 넓히며 제2차 불가리아 제국과 에페이로스 공국을 격파했고, 1261년에 복구된 동로마 제국과도 싸워 1300년경이 되면 현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지역 대부분을 점령한다.

2. 역사

2.1. 성립 배경

서기 6세기, 남슬라브인들은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반도에 대거 이주하였다. 이중 한 부류였던 세르비아족은 아드리아 해 연안의 디나르 산맥과 사바 강 사이 일대에 정착하였다. 콘스탄티노스 7세가 저술한 <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De Administrando Imperio)>에 따르면, 당시 동로마 제국 황제 이라클리오스가 세르비아인들이 이곳에 정착하도록 도와줬다고 한다. 그들은 추판(Zupan)이 이끄는 수많은 공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주목할 만한 세력은 라쉬카, 파가니아, 쟈후믈례, 트라부니야, 두클랴였다.

이중에서 먼저 두각을 드러낸 곳은 라쉬카로, 이곳의 지도자는 세르비아인들의 대표 노릇도 했다고 한다.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군주 블라스티미르(Властимир, 재위 830~851)는 842년 동로마 제국 테오필로스 황제의 동의하에 자치국을 세웠다.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 프레시안 1세는 이에 위협을 느껴 세르비아를 전격 침공했지만, 3년간의 전쟁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845년 별다른 영토 변경 없이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이후 차슬라프 클로니미로비치(Часлав Клонимировић, 재위 927?-960?)의 재위기에 영토를 대대적으로 확장하여 세르비아계 공국들을 모두 통합했다. 그러나 960년경 헝가리 대공국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뒤 강물에 던져져 익사하였고, 라쉬카는 사분오열된 뒤 동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

그 후 세르비아 공국들의 주도권은 두클랴가 확보했다. 두클랴는 불가리아와 동로마 제국 양자에게 공물을 바치면서, 한쪽이 강해지면 그쪽 편에 들어가는 식으로 세력을 유지했다. 그러다 1018년 불가리아가 멸망하자, 두클랴는 동로마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 하지만 1025년 바실리오스 2세가 사망한 뒤 동로마 제국은 정국 혼란으로 점점 쇠약해졌고, 과도한 세금에 분노한 불가리아에서 폭동이 빗발치면서 산골짜기에 위치한 두클랴에 대한 통제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스테판 보이슬라프는 이 기회를 틈타 추종자들을 끌여들였고, 1034년 로마노스 3세가 급사하여 제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1035년 또는 1036년 진압군에게 붙들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졌고, 두클랴는 스트라테고스 테오필로스 에로티코스의 관할에 들어갔다.

1037년 말 또는 1038년 초, 보이슬라프는 탈옥에 성공하여 두클랴로 돌아갔다. 이후 반란군을 극비리에 끌어모았고, 동로마 제국에 우호적이던 자후믈례와 트라부니야 공국에 대한 유격전을 전개했다. 1040년경, 그의 영역은 북쪽의 스톤에서 남쪽의 스카다르까지 해안지대에 펼쳐졌고, 트레비네, 코토르, 바르에 독자적인 통치기관이 세워졌다. 동로마 제국은 두클랴를 제압하려고 수 차례 원정군을 파견했지만, 보이슬라프는 모조리 격파하고 독립을 쟁취했다. 그의 아들 미하일로 보이슬라블례비치는 1077년 교황으로부터 왕위를 인정받고 두클랴를 공국에서 왕국으로 승격시켰다. 미하일로의 아들 콘스탄틴 보딘은 왕자 시절 불가리아 제국의 부활을 꿈꾼 반란군의 추대를 받고 '페터르 3세'를 칭하기도 했으며, 1081년 즉위한 뒤 세르비아계 공국을 모두 통합했다. 그러나 콘스탄틴 보딘이 사망한 뒤 내부 분열이 일어나면서, 두클랴 왕국은 쇠락하였다.

이 무렵, 콘스탄틴 보딘에 의해 라쉬카의 영주로 임명되었던 부칸 1세(Вукан, 재위 1091~1112)가 라쉬카 왕국을 재건했다. 부칸은 동로마 제국이 페체네그족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는 틈을 타 1091년 완전히 독립하여 벨리키 추판(Veliki Zupan: 대공)을 자처했다. 하지만 알렉시오스 1세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동로마 제국에 충성을 맹세할 테니 자치권을 인정해달라고 청했다. 쿠만족이 하드리아노폴리스 인근까지 쳐들어와 약탈을 벌이는 상황이었기에, 황제는 이를 받아들이고 돌아갔다. 부칸은 동로마 제국군이 떠나자 즉시 휴전 조약을 파기하고 다시 전쟁을 일으켜 브라녜, 스코페, 테토보 등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1094년 알렉시오스 1세가 쳐들어오자 조카인 우로시 1세와 스테판 부칸을 포함한 20명의 볼모를 제공했다. 부칸은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다가 제국군이 반격을 가해오면 새로운 볼모를 제공하는 식으로 위기를 빠져나가곤 했다. 동로마 제국 입장에서는 아예 밟아버리고 싶었겠지만, 워낙 험준한 지형에 숨어서 유격전을 벌이는 그들을 단시일에 토벌하기 힘든 데다가, 투르크, 쿠만, 프랑크 등 다른 적들도 신경써야 했던 터라 부칸에게 집중하기 어려웠다.

부칸의 조카 우로시 1세(Урош I, 재위 1112~1145)는 헝가리 왕국의 군주 벨러 2세와 자기 딸 엘레나를 결혼시킴으로써 헝가리와 결혼 동맹을 맺었다. 이를 토대로 두클랴를 놓고 무력 충돌을 벌이는 동로마 제국을 견제했다. 뒤를 이은 우로시 2세는 동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한 두클랴를 남서부의 코토르로 몰아냈다. 그러나 우로시 2세 데사의 분쟁으로 인해 라쉬카는 분열되었고, 동로마 제국은 이 갈등을 부추키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점점 강화하다가 우로시 2세의 뒤를 이어 공작이 된 데사를 1165년 폐위하였다. 마누일 1세 티호미르 자비도비치를 공작에 임명하고 꼭두각시로 삼았다. 1168년, 티호미르의 동생이자 라쉬카 동부를 다스리고 있던 스테판 네마냐가 정변을 일으켜 티호미르를 축출했다. 마누일 1세는 티호미르를 지원하여 네마냐를 치게 했지만, 즈베찬 남쪽의 판티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네마냐가 대승을 거뒀고, 티호미르는 시트니차 강에 익사했다. 이리하여 네마냐는 명실상부한 라쉬카의 대공이 되었고, 향후 200여 년간 세르비아를 통치할 네마니치 왕조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2.2. 1168 ~ 1196 스테판 네마냐: 세르비아 통합

스테판 네마냐는 형 티호미르를 물리친 뒤 마누일 1세로부터 세르비아 대공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동로마 제국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하길 희망했다. 1171년 아드리아 해안 일대를 장악한 동로마 제국에 위협을 느낀 베네치아 공화국이 접근하자, 그는 이들과 모의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반기를 들기로 하였다. 또한 일전의 패배에 이를 갈고 있던 헝가리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었다. 1172년, 네마냐는 모라바 계곡에 군대를 파견하여 니시와 베오그라드 사이의 교통로를 차단하고, 작센의 지배를 받는 라브노의 세르비아인들을 선동했다. 그 결과, 라브노 시민들은 작센 공작 하인리히 사자공의 지배를 더 이상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신성 로마 제국 프리드리히 1세까지 끌여들어 반 동로마 전선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베네치아 함대가 전염병에 시달리다 작센 함대에 의해 라구사에서 축출되었고, 헝가리에서 친 동로마 성향의 벨러 3세가 즉위하는 바람에 동맹이 무너졌다. 마누일 1세는 이 틈을 타 세르비아로 진격하여 네마냐의 군대를 격파하고 니슈를 포위했다. 네마냐는 어쩔 수 없이 황제를 찾아가 그의 발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의 검을 바치며 항복했다. 마누일 1세는 그를 수레에 실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하였다. 네마냐가 다시는 동로마 제국을 적대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자, 마누일은 그를 용서하고 세르비아의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한 뒤 돌려보냈다. 제국의 위력을 실감한 네마냐는 군사 활동을 중단하고 이단으로 정죄된 보고밀파 탄압에 몰두했다. 그는 보고밀 지도자들의 혀를 자르고 추방해 다시는 "해로운 가르침"을 퍼트리지 못하도록 했고, 재산을 몰수하고 교리서를 소각하였다. 하지만 학살을 자행하지는 않았고, 몰수한 재산은 나병 환자와 빈민들에게 분배했다. 이리하여 보고밀파는 세르비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1180년 9월 24일 마누일 1세가 사망한 뒤 동로마 제국이 혼란에 휩싸이자, 헝가리의 벨러 3세는 친 동로마 정책을 접고 1181년 아드리아 해 연안의 북동쪽 도시인 스렘과 제문을 탈환했다. 뒤이어 1182년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포를 공격했다. 알렉시오스 브라나스 안드로니코스 람파르다스는 이에 맞섰지만, 안드로니코스 1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황후를 교살하고 알렉시오스 2세를 실명시킨 뒤 단독 황제로 집권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향후 거취를 놓고 의견 대립이 심해지는 바람에 헝가리군을 상대로 더 이상 통합된 군사 활동을 하지 못했다. 결국 동로마군은 트라야누스 성문으로 후퇴했고, 헝가리군은 약탈을 자행한 뒤 본국으로 돌아갔다.

네마냐는 지금이야말로 독립을 쟁취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1183년 벨러 3세와 동맹을 맺은 뒤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침공했다. 그는 별 어려움 없이 동로마군을 모라바 계곡에서 몰아내고, 베오그라드, 브라니체보, 라브노, 니시, 소피아를 연이어 공략했다. 그러나 헝가리군이 곧 본국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불가리아 서부 일대를 가로질러 돌아가야 했다. 1184년, 미로슬라프는 네마냐의 지시에 따라 코룰라와 비스 섬을 공략하러 함대를 출격했다. 그러나 그해 8월 18일 콜레셰프 인근의 폴지체에서 라구사 해군에게 격파당했고, 라구사 공화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한편 스트라치미르 대공 역시 미로슬라프를 돕기 위해 출격했지만, 미로슬라프가 이미 평화 협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가야 했다.

1185년, 이사키오스 2세 황제는 세르비아를 응징하고자 군대를 파견했지만, 도중에 페터르 4세 이반 아센 1세 불가리아 제1제국의 부활을 이루기 위해 봉기하는 바람에 회군해야 했다. 네마냐는 동로마 제국이 불가리아 반란에 정신없는 틈을 타 스브르히, 라브노, 코첼지를 약탈하고 니시를 정복했다. 이후 1186년 자신이 태어난 지역인 리브니차를 공략하였고, 장남 부칸을 제타의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제타의 가톨릭 포교를 중단하고 정교회를 도입했으며, 이 지역의 그리스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한 뒤 국외로 추방했다. 이후 1186년 9월 27일 라구사와 영구적인 평화 협약을 체결해, 라구사 상인들이 세르비아 영토를 자유롭게 통행하면서 물건을 팔 수 있게 해줬다. 그 대신 라구사 공화국은 라쉬카에 세금을 지불해야 했다.

1187년 살라흐 앗 딘이 예루살렘을 공략했다는 소식이 전 유럽에 전해지자, 그는 십자군에 가담하기로 마음먹었다. 1188년 뉘른베르크에 사절을 보내 프리드리히 1세의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1189년 7월 27일 프리드리히 1세가 대군을 이끌고 니시에 도착했고, 네마냐는 형제 스트라치미르와 함께 황제를 맞이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1세가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게 하려 애썼지만, 황제는 얼른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기에 거부했다. 한달 후 십자군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 통행로를 놓고 갈등이 빚어졌다. 십자군이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자, 네마냐는 이 때를 틈타 동로마 제국의 도시인 스코페 프리즈렌을 공격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1190년 2월 헬레스폰트 해협 대신 다르다네스 해협을 건너는 것으로 이사키오스 2세와 합의를 맺고 소아시아로 건너갔다.

1191년, 이사키오스 2세는 군대를 일으켜 세르비아로 쳐들어갔다. 네마냐는 남모라바 전투에서 동로마군에게 패배하였고, 제국군은 쿠르둠리야에 있는 스테판 궁전을 불태웠다. 하지만 네마냐가 동로마군의 보급선을 유격전을 통해 유린하면서 협상을 요구하자, 동로마 제국 역시 불가리아와의 전쟁이 급했기에 협상을 받아들였다. 양국은 네마냐의 차남인 스테판 네마니치와 이사키오스 2세의 조카인 에우도키아 앙겔리나를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또한 빼앗아갔던 영토 대부분은 세르비아에게 돌려줬지만,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를 분리하고 싶었던 이사키오스 2세의 의향 때문에 니시와 라브노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 되었다. 1193년 헝가리의 벨러 3세가 세르비아를 침략하자, 네마냐는 즉시 출격하여 그들을 격파했다.

1196년 3월 25일 둘째 아들 스테판 네마니치에게 세르비아 대공 직을 물려주고 아내 안나와 함께 은퇴하여 수도자로서 말년을 보내다 1199년 2월 13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3. 1196 ~ 1228 스테판 네마니치: 세르비아 왕국의 성립

스테판 네마니치는 1196년 부친 스테판 네마냐로부터 세르비아 대공 직을 넘겨받았지만, 제타에 군림하던 형 부칸 2세 네마니치의 도전에 직면했다. 1199년 수도자로서 여생을 보내던 스테판 네마냐가 사망하자, 부칸은 동생을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그는 헝가리 국왕 임레와 연합하였고, 교황에게 세르비아를 가톨릭에 봉헌하고자 하니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두클라에 사절 2명을 보냈지만, 네마니치에게도 사절을 보냈다. 네마니치는 형과 교황의 동맹을 두려워해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세르비아에 왕관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1201년 아내 에우도키아가 반역을 꾸몄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버림으로써, 동로마 제국을 이단으로 여기던 교황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였다.

1202년, 부칸은 임레 왕의 지원에 힘입어 정변을 일으켰다. 네마니치는 불가리아로 도주하였고, 부칸이 세르비아 대공이 되었다. 부칸은 헝가리의 봉신을 자처하였고, 임레는 모라바 동쪽 지역을 헝가리 영토로 삼고, 칭호에 "세르비아의 왕"을 추가했다. 그러나 1203년 불가리아 군주 칼로얀의 사주를 받은 쿠만족이 세르비아를 침략하였고, 이로 인해 세르비아는 혼란에 휩싸였다. 칼로얀은 이틈을 타 그해 여름 세르비아를 침공해 니시를 점령했다. 1204년 네마니치는 불가리아군의 지원에 힘입어 라쉬카에서 부칸을 축출하고 세르비아 대공으로 복위하였고, 부칸은 제타로 밀려났다.

1205-06년 겨울 또는 1206-07년 겨울, 네마냐의 셋째 아들이며 이 당시엔 수도자가 되어 '사바' 주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라스트코가 아토스 산에서 포교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와서 두 형을 중재해 화해시키고, 아버지의 유해를 스투데니카 수도원으로 옮겼다. 네마니치는 라스트코에게 세르비아에 남아서 백성들을 가르치게 하였고, 라스트코는 이에 따라 여러 교회와 수도원을 세우고 백성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목회 활동을 수행하였다. 1208년 부칸이 제타의 왕으로 등극했지만 인정받지 못했고, 1209년 또는 그 직후에 사망하고 도르제가 그 뒤를 이었다.

1207년 10월 불가리아 차르 칼로얀이 테살로니카 공성전을 벌이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보릴이 새 차르가 되었다. 보릴의 친동생 스테츠는 이에 불복하여 세르비아로 피신했다. 보릴은 스테츠를 불가리아로 인도하라고 요구했지만, 네마니치는 거부하고 스테츠에게 프로세크 요새 수비를 맡겼다. 1208년 7월 8일 보릴이 플로브디프 전투에서 라틴 제국 황제 앙리에게 참패하자,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가서 ㅡ트루마와 바르다르 강 사이의 땅을 점령한 뒤 스테츠에게 점령지를 다스릴 권한을 넘겨주면서도, 세르비아군을 그곳에 남겨뒀다.

이 무렵, 스테판 네마냐의 셋째 형이자 훔의 영주였던 미로슬라프가 사망했다. 안드레아 마로사블예비치가 뒤이어 통치자가 되었지만, 훔 귀족들은 그의 형제 페타르를 훔의 공작으로 추대하여 안드레아를 추방하였다. 안드레아는 네마니치의 궁정에서 숨어지냈고, 네마니치는 전쟁을 일으켜 페터르를 격파하고 훔과 포포브를 공략했다. 페터르는 헝가리로 달아난 뒤, 안드라시 2세가 점령한 네레트바의 서북부를 통치했다. 네마니치는 아들 스테판 라도슬라프를 훔 공작으로 삼았고, 안드레아에게는 스토네를 포함한 훔의 해안지대와 포포보 지역을 줬다.

1208년, 부칸의 아들 도르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봉신을 자처하였고, 그들의 힘을 빌러 네마니치를 물리치려 했다. 그는 베네치아의 또 다른 봉신인 디미트리가 반란을 일으킬 경우 베네치아에 군사적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네마니치는 이에 대항하고자 딸 콤네나를 디미트리와 결혼하였다. 1214년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초대 데스포티스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크루자를 공략하고 디미트리가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지만, 콤네나는 미하일을 대신하여 크루자를 다스린 그레고리오스 카모나스와 결혼했다. 1216년 도르제가 사망하면서 제타는 다시 네마니치의 수중에 들어갔다.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는 제타를 공략하려 시도했지만 격파되었고, 네마니치는 아들 스테판 라도슬라프에게 제타를 영지로 넘겨줬다.

1214년 말 또는 1215년 초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암살당했고,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가 이피로스의 새 데스포티스가 되었다. 네마니치는 아들 라도슬라프와 테오도로스의 딸 안나 두케나 앙겔리나의 결혼을 성사시켜서, 세르비아와 이피로스의 전쟁을 종식했다. 1217년 로마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왕관을 받고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리하여 세르비아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고, 그는 왕관을 첫번째로 쓴 자라는 뜻의 '프르보벤차니(Prvovenčani)'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호노리오 3세는 세르비아를 가톨릭화 하려고 왕관을 보냈고, 네마니치 역시 가톨릭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동생 사바 주교의 포교로 정교회를 신봉하게 된 백성들이 워낙 많아서, 교황의 의도와는 달리 정교회를 끝까지 거부하지 않았다.

1219년, 사바 주교가 세르비아의 첫 헌법인 '성 사바의 노모카논'을 발표했다. 이 법은 로마법에 기초한 민법과 세계 공의회에 기초한 교회법의 모음집이었다. 세르비아 왕국의 첫 성문법으로, 교회와 정부의 역할과 규례를 다루었다. 또한 이 시기에 세르비아 교회가 불가리아의 오흐리드 대주교구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적인 대교구로 격상되었고, 사바가 초대 세르비아 대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는 세례를 받지 않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미혼자들의 결혼을 장려했으며, 세르비아 각지를 계속 여행하며 백성에게 글을 가르쳤고, 이단으로 정죄된 보고밀파를 축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한편,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헝가리 왕 언드라시 2세는 네마니치가 세르비아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분노했다. 헝가리 왕이 지금껏 세르비아의 왕을 자처했고, 세르비아 대공은 헝가리의 봉신 노릇을 하였는데, 이제는 자신과 대등하다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전쟁 준비를 시작했지만, 곧 십자군 원정으로 병력을 소진했기에 가까운 시일에 전쟁을 벌일 여력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이때 네마니치가 사절을 보내 협상을 제의하자, 언드라시 2세는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세르비아가 헝가리로부터 빼앗긴 영역을 요구하지 않는 조건으로 국왕 등극을 인정하였다.

네마니치는 말년에 중병에 걸리자 부친이 그랬던 것처럼 수도원에 들어가 '시메온'이라는 이름으로 수도자가 되었고, 아들 스테판 라도슬라프에게 나라를 맡겼다. 1228년 9월 24일 성 베드로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2.4. 1228 ~ 1243 스테판 라도슬라프, 스테판 블라디슬라프: 혼란기

스테판 라도슬라프는 무척 유약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아내 안나와 장인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에게 많이 의존했고, 국가의 정책을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집행했다. 귀족들은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당시 이피로스의 위세가 대단했기에 감히 반기를 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1230년 4월, 테오도로스가 8만 대군을 일으켜 불가리아 제2제국으로 쳐들어갔다가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이반 아센 2세의 수천 기병대에게 대패하고 사로잡혀 실명형헤 처해진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이피로스는 급격히 쇠락하였고, 장인에게 의존하던 라도슬라프의 입지 역시 약화되었다.

1233년 가을, 불가리아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 귀족들은 스테판 블라디슬라프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라도슬라프는 급히 세르비아를 탈출하여 라구사 공화국으로 피신하였다. 블라디슬라프는 형이 라구사와 손잡고 복위를 꾀하는 정황을 포착하자 라구사를 징벌하겠다고 위협했고, 결국 라구사는 라도슬라프와 손을 잡지 않기로 했다. 당시 세르비아 대주교이자 라도슬라프의 삼촌인 사바 대주교가 직접 나서 중재하였고, 그 결과 블라디슬라프가 이반 아센 2세의 딸 벨로슬라바와 결혼하고, 라도슬라프는 복위를 다시는 노리지 않고 수도자로 여생을 보내는 조건으로 세르비아에 돌아오는 걸 허락받았다. 사바는 돌아온 라도슬라프의 머리를 직접 잘라주고 그에게 요반이라는 수도명을 부여했다. 이후 사바는 성지 순례를 떠난 뒤 1235년 귀국하던 중 불가리아 영내에서 사망했다. 불가리아는 유해를 세르비아로 보내줬고, 블라디슬라프는 밀레셰바 수도원에 안장하고 삼촌을 성인으로 시성했다.

그는 자신의 즉위에 도움을 준 불가리아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던 1230년대 후반, 헝가리 왕국이 불가리아로부터 브라니체포와 베오그라드를 공략했다. 이후 세르비아 쪽으로 공격 방향을 돌린 그들은 1237년 세르비아 북부의 훔을 공격했다. 블라디슬라프의 친척 톨옌은 이들에 맞섰지만 연전연패했고, 북부 일대의 많은 영토가 헝가리의 영토로 들어갔다. 블라디슬라프는 헝가리의 국교인 가톨릭과의 관계를 끊고, 훔을 자신의 작위에 추가하며 그곳의 권리를 주장했다. 123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보스니아에서 세력을 굳힌 보고밀파를 정벌하기 위해 십자군을 선포했다. 보스니아 십자군을 이끈 칼로만[1]은 보스니아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였고, 보스니아 외곽 지대를 장악하였다. 하지만 보스니아 중심부를 공략하지는 못했고, 보스니아 공작 마테이 니노슬라프는 라구사로 피신한 뒤 블라디슬라프의 공세에 대비해 라구사를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이로 인해 라구사에 대한 세르비아의 영향력은 사라졌다.

1241년 5월 또는 6월, 블라디슬라프의 든든한 동맹이었던 불가리아 차르 이반 아센 2세가 사망했다. 뒤를 이어 칼리만 아센 1세가 즉위했지만, 고작 7살밖에 안 된 어린 아이였다. 게다가 1242년 바투 칸의 몽골군 별동대가 불가리아 북부 일대를 유린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타르노보, 프레슬라프, 이사체아 등 적어도 12개의 불가리아 요새가 파괴되었다. 이후 불가리아는 킵차크 칸국에 공물을 바쳐야 했다. 한편 몽골군 본대는 헝가리에 쳐들어갔고, 헝가리 왕 벨러 4세는 친히 맞서 싸웠지만 모히 전투에서 참패하고 랍 섬으로 도주했다. 몽골군은 여세를 몰아 독일로 쳐들어가려 했지만, 모종의 이유로 귀국하기로 했다. 다만 그들은 다뉴브 강 하류를 따라가면서 세르비아, 보스니아, 불가리아를 횡단했고, 지나가는 곳마다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 이때 세르비아의 도시들 중 코토르, 드리바스트, 스바치가 파괴되었다.

든든한 동맹이었던 불가리아가 쇠락한데다 몽골군이 회군길에 세르비아를 들리면서 심각한 파괴를 자행했기 때문에, 블라디슬라프의 입지는 매우 취약해졌고 민심은 등을 돌렸다. 1243년 봄, 귀족들은 정변을 일으켜 블라디슬라프를 몰아내고 블라디슬라프의 이복동생인 스테판 우로시 1세를 왕위에 올렸다. 블라디슬라프는 감옥에 갇혔지만, 아내 벨로슬라바는 제타 일대에서 항전했다. 그해 여름, 두 형제는 더 이상의 내전은 이롭지 않다고 판단하고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블라디슬라프는 스테판 우로시 1세가 세르비아의 왕이 되는 걸 인정하는 대신 제타를 통치하며 '제타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 후 제타에서 조용히 지내다 1269년에 사망했다.

2.5. 1243 ~ 1276 스테판 우로시 1세: 경제 부흥과 대외 확장, 중앙집권화

스테판 우로시 1세는 왕위에 오른 뒤 몽골의 침략으로 황폐화된 나라를 재건하고 경제를 발전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우선 트란실바니아에서 거주하다가 세르비아로 도망친 작센 광부들을 받아들였다. '사시(Sasi)'라고 불린 이들은 우수한 광산 기술을 가졌다. 우로시는 이들이 가톨릭 신앙을 갖는 걸 용인해주는 대신 노보 브르도, 브르스코보, 루드니크 등지에 정착하여 광산을 개발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광산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광산 주변에 새로운 도시들이 세워졌다. 광산업의 발전은 무역의 성장을 촉진하였으며, 우로시가 자신의 은화를 주조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우로시는 광부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특별 무장 부대를 배치하였고, 상인들의 이익을 무역 협정으로 보장하고 강도에게 습격당해서 생긴 손실을 보상해줬다.

한편, 우로시는 대외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국제 무대에서 세르비아의 위상을 강화하려 하였다. 우선 서쪽의 자훔을 정복하고 헝가리 왕국과의 국경 지대를 강화하였고, 1252년 아드리아 해안 지역에 거주하는 가톨릭 신자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권한을 놓고 마찰을 빚은 라구사로 쳐들어가 도시 주변을 황폐화시켰다. 라구사는 이에 맞서고자 1253년 불가리아의 차르 미하일 아센 1세와 동맹을 맺었으며, 1254년 헝가리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불가리아군은 세르비아 동부로 쳐들어가서 람 강 일대까지 영토를 강탈하고 비엘로-폴을 황폐화시킨 후 후퇴했다. 스테판 우로시 1세는 1254년 가을에 불가리아와 평화 협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식하였고, 같은 해에 라구사와 화해하여 라구사가 국제 무역을 수행하는 권리를 넘기는 대가로 연간 2,000 두란트를 받기로 하였다. 또한 가톨릭 신자로부터 거둬들인 세금은 세르비아 국왕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우로시는 뒤이어 제타의 주판인 라도슬라프를 타도하고 그의 영역을 몰수했다.

1246년 니케아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3세가 불가리아로부터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빼앗고 테살로니키를 탈환하였으며, 1252년 서부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까지 확장했다. 이에 시칠리아 왕 만프레드가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아카이아 공국을 지원하며 니케아 제국을 견제했고, 우로시 역시 니케아 제국이 너무 강해지는 걸 경계해 이들을 지원하였다. 1254년 요안니스 3세가 죽고 이피로스와 시칠리아군이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가면서 니케아 제국의 시선이 그쪽에 쏠린 틈을 타, 우로시는 1258년 스코페, 프릴레프, 키세보를 접령했다. 그러나 1259년 9월 미하일 8세가 이끄는 니케아군이 아카이아 공국, 아테네 공국, 테살리아, 시칠리아 왕국 등의 연합군을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격파하고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선포하자, 그는 점령한 도시를 비우고 세르비아로 철수했다.

우로시는 세르비아 정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자신의 통제하에 놓으려 노력했다. 1263년 세르비아 대주교 아르세니예 스레마크가 사망하자, 이복 형인 훔의 주교 프레디슬라브를 신임 대주교 사바 2세로 임명하였다. 또한 라구사 대주교구와 바르 대주교구 사이에 알력이 발생하자, 바르 대주교구가 가톨릭임에도 이들의 손을 들어줘서 종교적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소포차니 수도원을 설립하고 왕실의 구성원을 묘사한 프레스코화를 그리도록 하였으며, 힐란다르의 아토스 수도원에 예배당을 짓고 수도사 도멘티안에게 성 사바 1세의 생애와 성 시메온( 스테판 네마냐)의 생애를 다룬 전기를 쓰도록 하였다.

우로시는 헝가리 왕 벨러 4세의 딸 카트리네와 자기 아들 스테판 드라구틴을 결혼시킴으로써 헝가리와 동맹 관계를 맺었다. 그러던 1268년 벨러 4세와 아들 이슈트반 5세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자, 우로시는 이 틈을 타 헝가리에 속한 마흐바를 침공하였다. 초기엔 성공적이었지만, 벨러 로스티슬라비치의 역공으로 패배하고 생포되고 말았다. 벨러 4세는 헝가리 공주 카트리네와 결혼한 드라구틴이 세르비아에서 더 많은 권력을 얻고 국정에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한다는 조건 아래 그를 풀어줬다. 이후 드라구틴은 '하위 왕'으로 언급되었다. 하지만 우로시는 헝가리의 간섭을 떨치기 위해 동로마 제국과 손을 잡기로 하고, 미하일 8세와 접촉하여 미하일의 딸 안나 팔레올로고스와 차남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의 결혼에 관한 협상을 시작했다.

1269년 동로마 제국 사절이 찾아왔을 때, 그는 장남 드라구틴은 병약하기 때문에 이 나라를 통치할 수 없다면서 밀루틴이 세르비아를 통치할 거라고 약속했다. 이에 동로마 제국은 안나 공주 일행을 보냈지만, 도중에 강도떼에게 습격당하여 많은 재물을 빼앗겼고, 세르비아 궁정이 초라한 것에 실망한 데다, 드라구틴 왕자가 궁정에서 영향력이 여전한 것을 보고 우로시가 자신들을 속였다고 여기고 결혼을 무효화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 그 후 우로시는 동로마 제국과 등을 돌리고 시칠리아 왕 카롤로 1세와 손을 잡았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과 전쟁까지 벌이지는 않았다.

1275년, 우로시는 라구사를 다시 침공했다. 라구사의 통치자 페터르 세폴로는 처음에는 세르비아의 공세를 격파하고 함대를 파견해 세르비아 해안 도시들을 약탈했다. 그러나 세르비아군의 매복에 걸리는 바람에 대패했고, 40명 가량의 라구사 귀족들이 포로로 잡혔다. 그중 함대 사령관 베네딕트 군둘리치와 베네치아인 한 명은 우로시의 명령으로 실명형에 처해졌다. 이후 양측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중재 아래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렇듯 세르비아의 경제를 육성하고 대외 확장 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중앙 집권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더욱이, 그는 아들들에게 영지를 할당하지 않고 가능한 한 모든 국토를 자신의 수중에 두었다. 1268년 헝가리에 포로로 잡힌 뒤 드라구틴에게 더 많은 권력을 주고 왕국 일부를 그에게 넘기겠다고 약속한 뒤 풀려났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드라구틴은 1275년 라구사와의 전쟁 직후 새로 확보한 영지를 자신에게 양도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우로시는 또 다시 거부했다. 결국 1276년, 드라구틴은 헝가리의 지원을 받고 반란을 일으켰고, 가트스코 전투에서 진압군을 물리쳤다. 우로시는 결국 퇴위하였고, 소포차니 수도원에서 수도자 서약을 하고 1년간 은거하다 1277년 5월 1일에 사망했다.

2.6. 1276 ~ 1321 스테판 드라구틴,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 내전기

스테판 드라구틴은 부친 스테판 우로시 1세를 몰아내고 국왕에 오른 뒤, 귀족들의 종용에 따라 어머니 엘레나에게 광대한 영토를 할당했다. 남동생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은 테살리아의 데스포티스 요안니스 두카스 앙겔로스의 딸과 결혼하여 어머니의 궁정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세르비아 궁정은 2개로 나뉜 꼴이 되었고, 그동안 스테판 우로시 1세의 중앙집권정책에 억눌러 있던 지방 귀족들은 이 틈을 타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드라구틴은 헝가리에 의지해 왕위를 유지하려 애썼으며, 라구사 공화국과의 조약을 갱신하고 베네치아 공화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동로마 제국을 대적하는 시칠리아 왕국과도 동맹을 유지하였지만, 미하일 8세가 헝가리와 관계를 개선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과 직접적인 무력 충돌을 벌이지도 않았다. 단지 1281년 시칠리아군이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였을 때 소규모 세르비아 부대가 동로마 제국의 변경 지대를 습격했다가 시칠리아군이 패배하자 본국으로 철수했을 뿐이다. 하지만 미하일 8세는 소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세르비아로 쳐들어가 리플리얀 일대를 파괴했다. 드라구틴은 이 일로 귀족들의 신망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1282년, 그는 낙마하여 다리가 부러졌다. 부상이 심각해 생명을 잃을 뻔했다고 한다. 대주교 다니엘 2세의 전기 <성 스테판 드라구틴의 생애>에 따르면, 그는 데제프에서 평의회를 소집한 뒤, 건강상의 이유로 동생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는 드라구틴이 치료 결과를 기다리지도 않고 즉각 양위를 선포했다는데 의문을 제기하며, 데제프 평의회는 세르비아 귀족들의 주도로 소집되었고, 동로마 제국에게 수모를 당한 데 불만이 있던 그들은 왕의 중상을 핑계로 양위를 단행했다고 추정한다. 이후 드라구틴은 세르비아 북부 일대를 영지로 받았다.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은 왕위에 오른 직후 시칠리아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 불가리아 제2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연합하여 반 동로마 제국 동맹의 일원이 되었다. 그들은 세르비아와 이피로스가 마케도니아를 공격할 때, 시칠리아, 베네치아, 불가리아는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로 합의했다. 밀루틴은 합의에 따라 형 드라구틴과 함께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갔다. 그는 스코페, 오브제 폴레, 즐레토보, 피야네크를 점령했고, 드라구틴은 마케도니아를 통과하여 에게 해 연안에 도달했고, 여러 도시와 요새를 점령했다. 그런데 1282년 3월 30일, 시칠리아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칠리아 국왕 카롤로 1세는 나폴리로 달아났고, 동로마 제국과 손을 잡은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를 확보하였다. 시칠리아 왕국군은 공세를 중단하고 돌아갔고, 베네치아와 불가리아 공세 역시 흐지부지되었다.

미하일 8세는 용병을 대거 고용하여 세르비아를 응징하고자 했으나, 도중에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안드로니코스 2세는 원정을 취소했지만, 타타르 용병대를 세르비아로 파견하여 약탈을 자행하게 하였다. 약탈 부대는 프리즈렌까지 침투하며 약탈을 자행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 밀루틴은 드라구틴과 함께 보복 공세에 착수해, 1283년 흐리스토폴레 인근의 스투루마 일대의 세르지 일대를 관통하여 에게 해 연안으로 진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동로마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요새에 틀어박혔고, 그들은 포로와 재물을 실컷 받아낸 뒤 마케도니아 중부로 후퇴하여 겨울을 보냈다.

1284년, 밀루틴은 데바로, 키체포, 포레시를 점령하여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 북부를 공략하였으며, 뒤이어 동로마 제국의 요충지인 스트루미카, 프릴레프, 오흐리드, 크로야를 공략했다. 한편, 그는 테살리아와의 결혼 동맹을 파기하고 엘레나를 돌려보낸 뒤, 테살리아로 쳐들어가 주변 일대를 약탈하였다. 이후 헝가리 왕 스테판 5세의 딸 엘리자베타와 결혼했다가 얼마 안가 이혼했고, 1284년 불가리아 차르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의 딸 안나와 결혼해, 불가리아와 손을 잡았다.

밀루틴이 이렇듯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공세를 펼칠 무렵, 드라구틴은 영지로 돌아간 뒤 북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1284년 헝가리를 압박하여 마흐바, 베오그라드, 우소라와 솔리를 확보했다. 당대 사람들은 베오그라드를 근거지로 두고 통치하는 그를 '슬렘의 왕'으로 불렀다. 또한 1284년 장남 블라디슬라프가 헝가리 왕족인 콘스탄차 모로시니와 결혼했다. 이렇듯 세력이 강성해지자, 그는 나폴리, 베네치아, 로마 교황청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자신을 밀어낸 밀루틴에게 칼을 갈기 시작했다.

한편, 불가리아의 브라니체보를 공동으로 통치하던 보야르 다르만과 쿠델린은 마흐바 일대를 주기적으로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헝가리는 이들을 상대로 여러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를 거듭하기만 했다. 드라구틴은 마흐바를 받아낸 뒤 두 보야르를 상대로 대규모 원정을 일으켰다. 브라니체보를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일으킨 원정이었지만, 오히려 패배하고 말았다. 세르비아군이 브라니체보에서 철수한 뒤, 다르만과 쿠델린은 타타르 용병대를 고용하여 드라구틴의 영역으로 쳐들어가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드라구틴은 밀루틴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밀루틴은 이에 응해 드라구틴과 함께 브라니체보로 쳐들어갔다. 1290년 브라니체보가 함락되었고, 드라구틴은 이 지역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1292년, 불가리아 비딘의 데스포티스 시슈만 1세는 브라니체보를 되찾겠다는 명목으로 세르비아로 쳐들어가 페슈를 습격했다. 밀루틴과 드라구틴은 즉각 반격에 나서 비딘을 포위했다. 시슈만 1세는 다뉴브 강으로 달아난 뒤 후원자인 킵차크 칸국의 노가이 칸에게 의지했다. 밀루틴은 노가이 칸의 개입을 두려워해 빼앗아간 불가리아 영역을 모두 돌려주고 아들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를 인질로 보냈다. 1299년 노가이 칸이 토그타 칸과의 전쟁 도중 살해되자,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는 아버지에게 돌아왔다. 밀루틴은 아들에게 제타를 영지로 하사했다. 제타는 전통적으로 왕의 후계자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으므로, 데찬스키가 새 왕으로 예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드라구틴은 동생의 이같은 조치에 분노했다. 이보다 앞서, 드라구틴은 세르비아 왕위를 넘길 때 차기 후계자는 자신의 아들인 블라디슬라프가 맡기로 했다. 그러나 밀루틴은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드러냈고, 그는 아들 블라디슬라프의 미래를 위해 반란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밀루틴은 드라구틴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자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안드로니코스 2세 황제의 딸인 시모니다를 다섯번째 왕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오히려 그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세르비아 귀족들은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지속하여 마케도니아 일대를 정복하고 싶었기에, 드라구틴을 지지하기로 하였다.

1301년, 밀루틴은 라구사 공화국 상인들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라구사 공화국은 이에 대응하여 믈제트를 점령하고, 보야나 강 하구의 해상을 봉쇄하고 코토르 항구를 습격했다. 양자는 1302년 9월 14일 베네치아 공화국의 중재하에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식했다. 1302년 밀루틴이 루드릭의 은광을 점유한 뒤, 밀루틴과 드라구틴 형제는 휴전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1303년 협약은 파기되었고, 전쟁은 10여 년간 지속되면서 세르비아 전역을 혼란에 빠뜨렸다. 두 사람의 내전이 이렇듯 장기화된 이유는 상대방을 압도할 만한 세력을 갖추지 못 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 귀족들은 대부분 드라구틴을 지지했지만, 때마침 헝가리에서 보헤미아의 바츨라프 3세를 지지하는 세력과 카로이 로베르트를 지지하는 앙주 세력과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여기에 가담하는 바람에 동생과 싸우는 동시에 헝가리에도 병력을 보내야 했다. 한편 밀루틴은 귀족들에게 버림받았지만 은광을 통제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용병을 고용하여 전쟁을 이어갔다.

기나긴 내전으로 세르비아 전역이 황폐해졌고, 외세는 이 때를 틈타 침략했다. 1304년경 보스니아 공작 팔 1세 수비치는 훔 지역으로 쳐들어가 오노고스트까지 침투했다. 그는 아들 믈라덴 2세 수비치를 훔 일대 전체의 통치자로 추대했다. 하지만 이어진 전투에서 밀루틴의 군대는 믈라덴 2세를 포로로 잡았고, 팔 1세는 아들을 석방하는 대가로 더 이상 쳐들어오지 말라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1307~1309년에는 카탈루냐 용병들이 야토스 산과 주변 지역을 약탈하였다.

1308년 카로이 로베르트가 최종적으로 헝가리 왕위에 올랐다. 드라구틴은 로베르트에게 아들 블라디슬라프를 후계자로 삼아달라고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자, 이번에는 그를 실각시킬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로베르트는 이 음모를 간파하고 정적들을 모조리 숙청하였고, 이로 인해 헝가리와 적대관계가 되어버렸다. 밀루틴이 1311년 말 또는 1312년 초에 드라구틴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고위 성직자들이 나서서 평화 협상을 중재했다. 두 통치자는 전쟁 이전의 관계로 되돌아가기로 했고, 드라구틴은 데찬스키의 세르비아 왕위 승계를 인정했다. 그 대신, 드라구틴의 아들 블라디슬라프는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기로 했다. 1314년 2월, 그는 스렘스카 미트로비차에서 카로이 로베르트와 평화 협약을 맺어 헝가리와의 전쟁도 종식하였다.

1314년, 제타의 통치자였던 아들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가 밀루틴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밀루틴이 격노하여 제타를 침공하자, 데찬스키를 돕겠다고 약속했던 귀족들은 대거 밀루틴에게 귀순했다. 밀루틴은 아들에게 용서해줄 테니 순순히 항복하라고 권했고, 데찬스키는 이를 믿고 귀순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없던 일로 만들고 스코페로 압송한 뒤 실명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집행인들은 뇌물을 받고 눈을 건드리지 않았고, 데찬스키는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추방되었다. 아들의 반란을 진압한 뒤, 그는 어머니의 무덤에 참배하러 온 형 드라구틴과 만나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대화를 나누었고, 서로에 대한 오랜 앙금을 풀었다. 1316년 3월 12일 드라구틴이 사망하였고, 아들 블라디슬라프가 뒤를 이어 스렘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밀루틴이 형이 사망한 직후 협약을 파기하였고, 1319년 블라디슬라프를 몰아내고 스렘 일대를 회복했다. 다만 베오그라드와 마츠바 등지는 헝가리가 도로 탈취했다.

밀루틴은 데찬스키를 쫓아낸 뒤 데찬스키의 이복동생인 콘스탄틴에게 제타를 맡겼다. 하지만 데찬스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의 호감을 얻어냈고, 이를 발판삼아 힐란다르 수도승 다닐로와 세르비아 대주교 니코데무스를 포섭했다. 두 사람은 여러 성직자들과 함께 밀루틴에게 데찬스키를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 결국 밀루틴은 데찬스키 가족이 귀국하는 걸 허용했다. 1년 후인 1321년, 밀루틴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침대에 누운 채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국왕의 상태는 곧 전국에 알려졌고, 백성들이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강도가 들끓었다.

그해 10월 29일 밀루틴은 사망하였고, 제타의 통치자 콘스탄틴은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라스로 가서 왕위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가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라스에서 반란을 일으켜 삽시간에 수도를 장악하고, 1322년 1월 세르비아 대주교 니코데무스의 집전하에 대관식을 치르고 왕위에 올랐다. 콘스탄틴은 제타에서 대항했지만 데찬스키의 공세에 제타가 함락되면서 살해당했다.

2.7. 1321 ~ 1331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 불가리아 제2제국과의 대결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는 1322년 1월 왕위에 오른 뒤 이복 동생 콘스탄틴을 가볍게 물리쳤지만, 스테판 드라구틴의 아들 블라디슬라프의 도전은 그리 쉽게 꺾지 못했다. 블라디슬라프는 감옥에서 빠져나온 뒤 스렘으로 돌아가서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세르비아의 왕이라고 선언하고 주화를 주조하였다. 헝가리 왕 카로이 로베르트와 보스니아의 스테판 2세 코트로마니치가 그를 지원했고, 미하일 아센 3세 역시 블라디슬라프를 지원했다. 이 내전은 1324년 봄까지 이어지다가, 오스트로비차 인근의 전투에서 데찬스키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블라디슬라프는 헝가리로 망명한 뒤 그곳에서 죽었다.

1322년 10월 아내 테오도라가 죽자, 타렌툼의 필리포의 딸과 재혼해 앙주 왕조와 동맹을 맺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에 의해 쫓겨난 블라디슬라프가 어머니를 통해 앙주 왕조와 혈연이 닿았기 때문에,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차선책으로 동로마 제국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의 조카인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의 딸인 마리아 팔레올로기나와 1324년 결혼했다.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는 테살로니키의 데스포티스로, 독립국을 세우려는 야망을 품었다. 1326년, 그는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데찬스키에게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라고 설득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요안니스에게 복종하면 카이사르(부황제)의 칭호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하다가 스코페에서 돌연사했다.

1325년. 스톤을 다스리던 세르비아의 영주 브라니보예비치는 라구사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것이 데찬스키의 주도인지, 입지를 강화하여 장차 세르비아로부터 독립하려는 브라니보예비치의 독단 행동인지는 알 수 없다. 라구사는 즉시 반격하여 브라니보예비치를 격파하고 스톤을 점령했다. 그러자 데찬스키는 1327년 하반기에 라구사를 공격하여 도시 주변을 약탈했다. 라구사 함대는 이에 대응하여 코토로 섬 인근 해안가에서 세르비아 상인의 배를 공격했다. 1328년 양자는 평화 협약을 체결하였고, 라구사 공화국은 브라니보예비치로부터 빼앗은 땅을 반환하기로 했다.

이 무렵, 동로마 제국에서 제1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세르비아에 도움을 요청했고, 안드로니코스 3세는 불가리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1328년 데찬스키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세르비아-동로마 국경지대에 도착했지만, 안드로니코스 3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물러났다. 대신 안드로니코스 3세에게 충성을 바치길 거부한 프로세크 시를 자기 영역에 포섭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이를 빌미삼아 세르비아를 공격하기로 하고, 불가리아에 세르비아를 함께 손봐주자고 제의했다. 안 그래도 세르비아의 성장세를 두려운 눈길로 바라보던 미하일 아센 3세는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1324년 데찬시키의 누이인 안나 네다를 내쫓고 안드로니코스 3세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세르비아는 이에 분노를 터트리며 불가리아와의 국교를 단절했다.

1328-1329년, 세르비아 유격대가 마케도니아의 동로마 관할 지역에 침입하여 오흐리드를 포위했다. 그러다 안드로니코스 3세의 군대가 도시에 접근하자 후퇴했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전쟁을 단행하기로 결심하고, 1130년 여름 마케도니아의 세르비아 영토를 침공했다. 하지만 내륙으로 멀리 진격하지 않고 국경지대를 공략하는 데 그쳤다. 황제는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의 대결을 지켜보고, 결과가 나오는 대로 행동에 나설 작정이었다. 한편 미하일 아센 3세는 1330년 7월 19일 수도 터르노보에서 출진하여 비딘으로 진격해 타타르와 왈라키아 용병들과 합세한 뒤, 남쪽으로 진군하여 세르비아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젬린 마을에 이르렀다.

데찬스키는 도브리치코 폴제(현재 세르비아 야블라니차주의 레스코바츠시 인근)에 주둔하여 적군의 움직임을 관측했다. 그는 곧 동로마 제국군이 국경 지대에서 얼쩡거릴 뿐이고, 불가리아군이 남쪽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그는 불가리아군부터 상대하기로 하고, 전군을 이끌고 카메네카 강 서안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불가리아군과 조우했을 때, 세르비아군의 선봉 만이 간신히 현장에 도착한 상태였다. 이에 스테판 우로슈 3세는 시간을 끌기 위해 협상을 제의한 끝에 잠깐 동안 휴전을 맺기로 했다. 불가리아군은 적을 얕잡아보고 있었기에 스테판이 시간을 질질 끄는 걸 방치했다. 또한 장병들은 보급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농촌 약탈에 매진할 뿐 군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아서, 군대의 기강이 형편없어졌다. 이리하여 7월 28일 새벽까지 시간을 끄는 데 성공한 스테판은 전 병력이 집결하자 벨버즈드 마을 근방에 진을 치고 있는 불가리아군을 새벽에 기습하기로 했다.( 벨버즈드 전투)

7월 28일 새벽, 데찬스키는 휴전 약속만 믿고 방심하고 있던 불가리아군 진영으로 몰래 접근했다. 이윽고 적진이 눈앞에 이르자, 아들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이끄는 중기병 2,000명이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불가리아군은 여러 곳에 흩어져서 기습에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르비아군의 갑작스런 기습을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은 불가리아 제국군 깃발을 탈취하는 등 종횡무진하였고, 불가리아군은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중기병대에게 살육당했다. 외지에 있던 불가리아군은 본진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모였으나, 워낙 다급한 상황인 터라 전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이때 데찬스키가 이끄는 본대가 그들을 덮쳤고, 불가리아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사방으로 도주했다.

미하일 아센 3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세르비아군에 맞서려 했지만, 병사들이 말을 듣지 않자 자기도 도주하다가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낙마하였고, 세르비아군에게 체포된 뒤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7월 31일 낙마로 인한 중상이 악화되면서 사망했다.[2] 세르비아군은 여세를 몰아 불가리아 잔여 병력이 모인 코냐브스카 산을 향해 진격했지만, 미하일 아센 3세의 동생인 베나르가 병사들을 성공적으로 수습하여 진입로를 차단했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불가리아 보야르들이 라도미르 마을 근처에서 스테판 우로슈 3세와 만나 평화를 요구했다. 그들은 데찬스키의 조카인 이반 스테판이 차기 불가리아 차르로 즉위하게 하겠다고 밝혔고, 니시를 세르비아에 할양하겠다고 약속했다. 데찬스키는 이 조건을 받아들여 불가리아군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걸 막지 않았다. 이후 보야르들은 약속대로 이반 스테판을 새 차르로 옹립했다.

데찬스키가 불가리아의 영토 일부를 탈취하지도 않고 전쟁을 이대로 끝내기로 하자, 이번 기회에 막대한 수익을 챙기려 했던 귀족들은 격분했고, 아들 스테판 두샨 역시 반발했다. 데찬스키는 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게 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불가리아가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했지만, 그가 점령한 도시에는 수비대가 남았다. 두샨은 이 도시들을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다. 그 후 데찬스키는 두샨을 제타의 지배자로 임명하면서, 사실상 왕위 계승자로 선언했다. 그러나 두샨은 내심 부친이 마리아 팔레올로기나에게서 낳은 어린 아들 시메온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두려워했다. 여기에 귀족들도 반란을 일으키라고 꼬드기면서 부자의 갈등은 갈수록 깊어졌다.

아들의 낌새가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데찬스키는 1330년 가을 제타에 군대를 보내 스카다르를 약탈했다. 이후 부자는 보야나 강을 두고 대치했다가, 극적으로 화해하여 이전의 관계로 돌아오기로 했다. 그러나 3개월 뒤 스테판 우로시 3세가 소환령을 내리자, 스테판 우로슈 4세 두샨은 부친이 자기를 불러다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판단하고, 자기가 선수를 치기로 결심해 소규모 기병대를 이끌고 부친이 머물고 있던 네로디믈례를 습격했다. 스테판 우로시 3세는 가까스로 도피했으나, 추격대가 따라붙으면서 페트리치에서 사로잡힌 뒤 투옥되었다. 이리하여 1331년 9월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새 국왕으로 즉위했다. 데찬스키는 그해 9월 11일 사망했다. 아들의 명령으로 목이 졸려 죽었다는 설과 병사했다는 설이 병립하지만, 어느 쪽이 사실과 가까운지는 확실하지 않다.

2.8. 1331 ~ 1346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 발칸 반도의 패자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은 부친을 제압하고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을 후원한 귀족들에게 보상하기를 거부하였고, 귀족들이 격분하여 제타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단번에 진압했다. 이후 마케도니아 지역에 기병대를 파견해 수시로 약탈하며 동로마 제국을 괴롭혔다. 그러던 1333년, 테살로니카 총독 시르얀니스 팔레올로고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를 음해하는 공작을 폈다가 발각되자 세르비아로 망명했다. 마침 동로마 제국을 침략할 준비를 하던 두샨은 환대했고, 선봉대 지휘권을 맡겼다. 그는 1334년 봄에 카스토리아와 그 일대의 요새 여러 곳을 점령해 은혜에 보답했지만, 얼마 후 스프란체스 팔레올로고스의 유인에 걸려들어 살해되었다. 여기에 헝가리가 북쪽에서 쳐들어와서 골루바츠를 점령하자, 두샨은 안드로니코스 3세와 세르비아와 헝가리와의 싸움을 제국이 지원해주는 대가로 시르얀니스가 점령했던 영토를 제국이 반환받는 협약을 체결하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1336년 헝가리 왕 카로이 로베르트가 8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세르비아군을 격파한 뒤 수마디야를 포위했다. 이에 두샨이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반격을 가했고, 헝가리군은 참패하여 다뉴브 강 이북으로 달아났다. 두샨은 여세를 몰아 마치바와 베오그라드를 공략하였고, 뒤이어 보스니아 동부 절반을 점거하고 코토르에서 자신의 주화를 주조하게 하였다. 다만 1342년 러요시 1세가 반격을 가하여 마치바를 탈환했다. 이 무렵, 동로마 제국에서 제2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했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망명해오자, 그는 제국의 내분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칸타쿠지노스를 보호해주겠다고 나섰다. 또한 선의의 표시로 칸타쿠지노스가 디디모티쿰으로 돌아가는 길에 용병 부대를 붙여줬다.그러나 중도에 세레스에서 가로막히자 포위 공격했으나 전염병이 돌아 정예병 1,500명이 몇 주 만에 죽는 바람에 세르비아로 도망쳤다. 이후 칸타쿠지노스는 세르비아에서 지지 세력을 끌어모아 1343년부터 동로마 제국으로 쳐들어갔다.

두샨은 칸타쿠지노스를 후원하는 한편 제국의 영역을 야금야금 공략하였다. 그 결과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테살로니카를 제외한 발칸 서부 일대의 동로마 제국 영역을 정복했다. 여기에 에게 해의 섬 지역도 공략하고자 강력한 해군을 갖춘 베네치아 공화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동로마 제국은 그의 침략에 맞서 투르크 용병 3,100명을 고용하였고, 스테파이나에서 두샨의 지휘관 프렐류프를 물리쳤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대세를 바꿀 수 없었고, 세르비아는 발칸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두샨은 1343년 "세르비아, 알바니아, 해안가의 왕"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또한 요새화된 도시 크루이치에 헌장을 보내며, 자신을 "불가리아의 왕"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1345년 9월 25일, 세레스를 공략한 뒤 이곳에서 회의를 열어 자신을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차르"라고 선언했다.

파일:스테판 두샨의 대관식.jpg

이윽고 1346년 4월 16일 부활절, 두샨은 스코페에서 공의회를 소집한 뒤 세르비아 총대주교 요니아키예의 주관하에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차르로 즉위하였다. 또한 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를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왕"으로 임명해,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으며, 이복 형제인 시메온 우로시와 처남 요반 아센을 데스포티스로 삼았고, 뎨얀 드라가스와 브란코 말데노비치를 세바스토크라토르에 선임했고, 군 지휘관 프렐류프와 보히나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내렸다. 이리하여 세르비아 제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2.9. 1346 ~ 1371 세르비아 제국: 짧은 영광과 붕괴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은 차르를 칭한 직후 이피로스, 아이톨리아, 아카르나니아를 정복하고, 이복형제 시메온 우로시를 이들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1348년 테살리아를 정복하고 프렐류프를 총독으로 임명했으며, 보이나를 드라마 총독으로 선임했다. 그 후 전유럽이 자신을 황제로 인정하도록 하려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베네치아와 군사 동맹을 맺고 수륙 양면에서 도시를 협공하려 하였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두샨의 거듭된 설득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군사 동맹을 끝내 거절했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칼리스토스 1세는 두샨과 요아니키예 2세를 파문했다.

1350년, 두샨은 친히 8만 대군을 일으켜 보스니아로 쳐들어가 1329년에 빼앗겼던 자후믈례 일대를 탈환한 뒤 보스니아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보스니아 공작 스테판 2세 코트로마니치가 숲과 산악 지형에 의지하여 유격전을 벌이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었다. 두샨은 포기하지 않고 많은 요새를 함락하였지만, 보스니아의 중심지인 보보바크는 공략하지 못했다. 게다가 요안니스 6세가 소규모 병력을 일으켜 칼키데스 반도를 점령한 뒤 베리아와 보덴을 공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두샨은 본국으로 철수했다. 스테판 2세는 빼앗겼던 영역을 되찾은 뒤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의했고, 두샨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두샨의 후계자 스테판 우로시 5세와 스트예판 2세의 딸 엘리자베타가 결혼하기로 했고, 자후믈례 일대는 지참금으로서 세르비아에 넘어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스테판 2세는 약속을 깨고 1353년 6월 엘리자베타를 헝가리 왕 러요시 1세와 결혼시켰다.

이후 동로마 제국의 법전을 기본으로 삼고 서유럽의 봉건제와 세르비아 관습법을 묶어서 집대성한 <두샨 법전>을 반포하며 내정을 닦던 그는 1352년 동로마 제국에서 제3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하자 요안니스 5세를 지원했다. 요안니스 5세는 2년간의 전쟁 끝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고 요안니스 6세를 퇴위시켰지만, 요안니스 6세의 아들인 마테오스가 트라키아에서 할거하며 황제를 칭하고 있던 터라, 내전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1355년, 두샨은 이제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기로 작심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문인 아드리아노폴리스를 공략하였다. 뒤이어 그동안 육성한 해군까지 동원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할 태세를 갖췄다. 그러나 1355년 12월 20일, 그는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숨을 거두었고, 프리즈렌 인근의 대천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뒤이어 차르에 오른 스테판 우로시 5세는 당시 18세로, "강인한 황제"이라는 평판을 받으며 만인의 존경과 두려움을 샀던 부친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는 외모가 훤칠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나, 좋은 군인이 아니었고, 현명한 정치가도 아니었으며, 아버지가 애써 일궈낸 제국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도 없었다. 한편 일찍이 두샨에 의해 각지의 데스포티스로 세워졌던 신하들은 유약한 차르의 등극을 틈타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데스포티스 시메온 우로시가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스테판 우로시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자신을 세르비아와 로마의 황제로 칭했다. 그러나 1356년 봄 이전의 이피로스 데스포티스였던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가 스테판 두샨의 지휘관이었던 프렐류프 총독이 사망한 후 무정부 상태가 된 테살리아를 공략한 뒤 여세를 몰아 이피로스로 진격하여 시메온 우로시를 축출하고 이피로스의 데스포티스에 복귀했다.

시메온 우로시는 이피로스 북부의 카스토리아로 밀려난 뒤, 아예 스테판 우로시 5세를 축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차르를 자칭하고 제타로 북상하면서, 귀족들에게 호응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귀족들은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게 옳고, 그의 어머니가 미하일 8세의 손녀 마리아 팔레올로기나이니 '반 그리스인'이라고 여겨서 거의 호응하지 않았다. 시메온 우로시는 1358년 제타를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차르가 되는 걸 포기했다. 1359년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가 알바니아군을 상대로 아이톨리아의 아켈로오스 전투를 치르다 전사하자, 그는 재빨리 테살리아로 진격하여 그곳의 귀족들로부터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이후 이피로스로 진격해 알바니아군의 침략에 직면한 몇몇 도시로부터 데스포티스로 인정받았다.

스테판 우로시 5세는 이 일련의 상황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냥 손을 떼고만 있는 건 아니었다. 1356년, 트라키아에서 할거하며 동로마 황제를 칭하고 있던 마테오스가 5,000명의 투르크 용병대를 고용하여 세르비아가 장악하고 있던 세레스로 쳐들어갔다. 당시 그곳엔 우로시 5세의 어머니 엘레나가 있었다. 우로시는 모후를 지키기로 하고, 드라마 총독 보이나 휘하의 세르비아군을 파견했다. 1357년 투르크군은 패배하였고, 마테오스는 체포되었다. 세르비아는 마테오스에게 거액의 몸값을 붙였고, 동로마 제국 황제 요안니스 5세가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갔다. 하지만 이외에는 이렇다할 활동을 하지 않았고, 우로시의 모후이며 당시 수녀 신분이었던 엘레나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편, 세르비아 북서부에서는 헝가리의 침공을 저지하는 역할을 하던 보이슬라프 보이노비치의 권세가 강해졌다. 그는 1359년경 드리나 강과 아드리아 해 사이 일대를 점유했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삼아 정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부카신 므르냐브체비치는 동생 우글레샤 므르냐브체비치와 함께 엘레나 황후의 총애를 토대로 프릴레프를 중심으로 마케도니아 서부와 스코페, 프리즈렌 등을 통치했고, 제타 일대는 발시치 가문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리고 스테판 두샨의 궁중 의전을 담당하는 관리였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고향인 노보 브르도로 돌아간 뒤 보이슬라프 보이노비치와 협력하며 노보 브로도와 프리슈티냐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외에도 스테판 두샨 시절 데스포티스로 임명되었던 요반 아센, 요반 올리베르, 스테판 우로시 5세에 의해 데스포티스로 임명된 데얀 드라가슈 등은 겉으로는 차르에게 충성했지만 실제로는 독립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렇듯 세르비아 각지의 데스포티스들이 제각기 세력을 구축하고 떨어져나가는 상황이었지만, 스테판 우로시 5세는 이들을 저지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1365년, 부카신 므르냐브체비치를 공동 통치자로 세우고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1369년에는 부카신의 장남 마르코 왕자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들의 영향력은 수도 라스, 마케도니아 서부, 스코페, 프리즈렌 등지에서나 통할 뿐이었고, 다른 지역의 통치자들은 중앙 정부의 어떠한 간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만 술탄국의 침략이 임박했다. 1362년, 술탄 무라트 1세는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에디르네로 개명하여 서방 영토의 수도로 삼은 뒤, 발칸 반도로의 영역 확대를 계속 추진했다.

우로시 5세와 부카신의 공동 통치는 오래 가지 않았다. 마르보 오르빈에 따르면 1369년 라스 주판 니콜라 알토마노비치와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광산이 풍부한 코소보로 확장하려는 부카신에게 반감을 품고 연합군을 결성한 뒤 우로시 5세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여 맞서 싸웠다. 므르냐체비치 가문과 연합군의 결정적인 충돌은 코소보에서 벌어졌다. 라자르는 전투가 시작될 무렵에 이미 철수했고, 니콜라 알토마노비치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우로시 5세는 여러 궁정 영주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 후 우로시 5세는 정계에서 사실상 사라졌고, 부카신은 독립된 통치자로 군림했다. 라구사 공화국은 우로시 5세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이름으로 공물을 바쳤지만, 1370년 4월 우로시 5세를 배제하고 부카신에게 자기들이 누리는 특권을 확인받았다.

이후 니콜라 알토마노비치가 헝가리 왕국의 지원에 힘입어 세력을 재건하자, 부카신은 발사치, 라구사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그를 도모하려 했다. 1371년 6월, 부카신은 아들 마르코와 함께 슈코더르로 진군해, 니콜라의 영토에 속한 니식치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던 1371년 투르크군이 주라지 발시치를 물리치고 트라키아와 로도피 산맥 일대까지 공략하자, 부카신과 우글레샤는 위협을 느끼고 군대를 소집하여 로도피 산맥에서 투르크군을 몰아내기로 했다. 그러나 1371년 9월 26일에 벌어진 마리차강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은 처참한 패배를 당했고, 부카신과 우글레샤 형제 모두 전사했다. 부카신의 아들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는 뒤이어 세르비아 왕이 되었지만, 투르크군에게 맞설 병력이 없었기에 그들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많은 영토를 헌납했다.

1371년 12월 4일, 스테판 우로시 5세는 마리차 강 전투 패전 2달여 만에 사망했다. 향년 35세. 세르비아 영주들은 명목상으로나마 스테판 우로시 5세를 군주로 인정했지만, 그가 사망하고 난 뒤 후계자를 자처한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를 아예 인정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스테판 두샨이 세웠던 세르비아 제국은 25년만에 무너졌고, 기존의 세르비아 왕국마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세르비아 전역은 여러 공국으로 완전히 분열되어, 공작들간의 패권 경쟁으로 혼란에 휩싸였다.

3. 역대 군주



[1] 헝가리 왕 언드라시 2세의 아들이자 슬라보니아 공작이다. [2] 어떤 기록에는 스테판 두샨이 포로로 잡힌 미하일 아센 3세를 끌어내 손수 쳐 죽였다고 하고, 또다른 기록에는 낙마한 직후 세르비아군의 창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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