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1 20:57:05

블라스티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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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스티미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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Властимир}}}
파일:블라스티미르.png
출생 미상
사망 850년
재위 세르비아 크냐지
830년 ~ 850년
아버지 프로시고이
아들 무티미르, 스트로지미르, 고이니크
가문 블라스티미로비치 가문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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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록상에 등장하는 세르비아 공국 4대 크냐지(Knyaz). 불가리아 제1제국의 침략을 격퇴하고 세르비아의 독립을 유지했다.

2. 행적

제3대 크냐지 프로시고이의 아들로, 830년경 세르비아의 크냐지가 되었다. 당시 불가리아 제1제국 오무르타그 통치 기간(814 ~ 831) 동안 판노니아에 거주하는 슬라브족을 공격하고 정복한 뒤 드라바 강 위로 배를 보냈고, 828년에는 드라바 북쪽에 있는 상부 판노니아를 황폐화시키는 등, 주변의 슬라브족을 잇따라 공략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세르비아인들은 자기들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단결하고 그를 우두머리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의 <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De Administrando Imperio)에 따르면, 세르비아인들은 비셰슬라프, 라도슬라프, 프로시고이 통치 기간 동안 불기리아와 평화롭게 지냈다. 하지만 불가리아인들은 서쪽을오 정복을 계속하고 세르비아인들을 강제로 복종시키고 싶어했다고 한다. 현대의 여러 학자는 당시 불가리아와 전쟁을 벌이던 동로마 황제 테오필로스가 세르비아인들에게 자기들과 손잡고 불가리아를 견제하는 대가로 독립국을 세우는 걸 인정했을 것이며, 불가리아 측은 이에 위협을 느끼고 세르비아를 치기로 결의했을 거라 추정한다.

839년, 불가리아 칸 프레시안 1세는 세르비아를 침공했다. 그 후 3년간 전쟁을 치렀지만 블라스티미르의 유격전에 휘말려 많은 병력을 잃고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퇴각했다. 그 후 842년, 양자는 별다른 영토 변경 없이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불가리아군의 침공을 물리친 뒤, 블라스티미르는 현재의 보스니아와 자후믈례를 점거하고, 847/848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을 트레비네의 벨로예 지방 주판(župan)의 아들인 크라이나에게 시집 보냈고, 크라이나의 지위를 아르콘으로 격상했다. 크라이나는 블라스티미르의 딸과의 사이에서 아들 흐발리미르를 두었고, 흐발리미르는 트라부니야의 주판 직을 계승했다. 그 후 흐발리미르의 후손은 '벨로예비치 가문'이라 칭해졌고, 대대로 트라부니야의 통치권을 이어갔다. 일부 학자들은 트라부니야의 지배층이 세르비아로부터 독립할 움직임을 보이자, 블라스티미르가 이들을 달래기 위해 이 결혼을 단행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블라스티미르에게는 세 아들 무티미르, 스트로지미르, 고이니크가 있었다. 그가 850년경에 사망한 후 세 아들이 공동 크냐지를 맡아 영역을 분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