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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B6C1><colcolor=#fff> 세르비아 제9대 대공 {{{#fff {{{+1 부칸 2세 네마니치}}} }}} {{{#fff Вукан II Немањи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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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165년 이전 |
사망 | 1208년 이후 (향년 42세 이상) |
재위 | 제타 공작 |
1190년 ~ 1208년 이후 | |
세르비아 대공 | |
1202년 ~ 1204년 | |
아버지 | 스테판 네마냐 |
어머니 | 안나 |
형제 | 스테판 네마니치, 성 사바, 제피미야 네마니치 |
자녀 | 도르제, 스테판, 드미타르 |
가문 | 네마니치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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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대공국 제9대 대공.2. 생애
세르비아 대공국 제7대 대공 스테판 네마냐와 안나의 장남이다. 형제로 스테판 네마니치, 성 사바, 제피미야 네마니치가 있었다. 1190년, 스테판 네마냐는 세르비아 대공으로서 부칸을 두클랴, 트라부니야, 흐보스노, 토플리카 등을 포함한 제타 공국의 공작으로 선임했다. 코토르의 성 루카스 교회에 있는 1195년 비문에는 부칸이 두클랴, 달마티아, 트라부니야, 토플리카, 흐보스노의 왕이라는 칭호를 행사한 것으로 기재되었다.1196년, 스테판 네마냐는 라스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은퇴 후 수도자가 되겠다고 선언하면서, 대공 직위를 차남 네마니치에게 넘기겠다고 밝혔다. 네마냐는 성 베드로 교회에서 수도원 서약을 한 뒤 '시메온'이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그가 큰아들 부칸이 아닌 차남 네마니치를 선택한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부칸이 가톨릭 신자였던 점이 걸림돌로 작용했고, 네마니치가 동로마 제국 황제의 딸과 결혼한 게 중요하게 적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부칸은 아버지의 결정에 반발했고, 자신을 두클라의 왕으로 자칭했다.
1199년 네마냐가 사망하자, 부칸은 동생을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그는 헝가리 국왕 임레와 연합하였고, 교황에게 세르비아를 가톨릭에 봉헌하고자 하니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두클라에 사절 2명을 보냈지만, 네마니치에게도 사절을 보냈다. 네마니치는 형과 교황의 동맹을 두려워해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세르비아에 왕관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1201년 아내 에우도키아가 반역을 꾸몄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버림으로써, 동로마 제국을 이단으로 여기던 교황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였다.
1202년, 부칸은 임레 왕의 지원에 힘입어 정변을 일으켰다. 네마니치는 불가리아로 도주하였고, 부칸이 세르비아 대공이 되었다. 부칸은 헝가리의 봉신을 자처하였고, 임레는 모라바 동쪽 지역을 헝가리 영토로 삼고, 칭호에 "세르비아의 왕"을 추가했다. 그러나 1203년 불가리아 군주 칼로얀의 사주를 받은 쿠만족이 세르비아를 침략하였고, 이로 인해 세르비아는 혼란에 휩싸였다. 칼로얀은 이틈을 타 그해 여름 세르비아를 침공해 니시를 점령했다. 1204년 네마니치는 불가리아군의 지원에 힘입어 라쉬카에서 부칸을 축출하고 세르비아 대공으로 복위하였고, 부칸은 제타로 밀려났다.
1205-06년 겨울 또는 1206-07년 겨울, 네마냐의 셋째 아들이며 이 당시엔 수도자가 되어 '사바' 주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라스트코가 아토스 산에서 포교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와서 두 형을 중재해 화해시키고, 아버지의 유해를 스투데니카 수도원으로 옮겼다. 네마니치는 라스트코에게 세르비아에 남아서 백성들을 가르치게 하였고, 라스트코는 이에 따라 여러 교회와 수도원을 세우고 백성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목회 활동을 수행하였다. 부칸은 1208년 기록에 제타의 왕으로 언급되었지만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생전에 성명 미상의 아내[1]에게서 세 아들을 낳았다. 장남 도르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타의 왕을 칭했지만, 역시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했다. 차남 스테판은 1252년 모라차 수도원을 창건했으며, 삼남 드미타르는 1286년 다비도비차 수도원을 창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