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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B6C1><colcolor=#fff> 세르비아 대공 {{{#fff {{{+1 티호미르}}} }}} {{{#fff Тихоми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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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113년 이전 |
사망 | 1168년 (향년 54세 이상) |
재위 | 세르비아 대공 |
1165년 ~ 1166년 또는 1167년 | |
아버지 | 자비다 |
형제 | 스트라치미르, 미로슬라프, 스테판 네마냐, 바니카 보이슬라바 |
자녀 | 스테판 프르보슬라프 |
가문 | 부카노비치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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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대공국 6대 대공.2. 생애
세르비아 초대 대공 부칸 1세 또는 2대 대공 우로시 1세의 아들이라고 전해지는 자비다의 아들이다. 형제로 스트라치미르, 미로슬라프, 스테판 네마냐, 바니카 보이슬라바[1]가 있었다. 출생년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막내 동생 스테판 네마냐가 1113년에 출생했기 때문에 그보다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다. 자비다는 1113년경 세르비아 대공국에서 벌어진 분쟁을 피하기 위해 제타로 피신했다. 이후 자후믈례에서 리브니차의 주판이 되었다가, 나중에 세르비아 대공국의 수도 라스로 돌아갔다.1165년, 세르비아 대공 데사를 생포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한 뒤, 마누일 1세는 세르비아 대공국을 분할하기로 했다. 자비다의 장남 티호미르를 라쉬카 대공으로 삼고, 차남 스트라치미르를 서모라바 공작, 삼남 미로슬라프는 자후믈례와 트라부니아의 공작으로 삼았으며, 네마냐는 토플리차, 이바르, 라시나, 레케를 영지로 수여받았으며, 동로마 제국의 궁정 칭호를 받았다.
티호미르는 곧 스테판 네마냐와 갈등을 벌였다. 네마냐는 그의 동의를 받지 않고 쿠르슈믈리야의 성 니콜라오 수도원과 코사니카의 성모 수도원을 건설했다. 이에 자기 권위에 도전한다고 여긴 티호미르는 형제들을 시켜 네마냐를 유인해 체포한 뒤 영지를 몰수하고 라스 인근 동굴에 감금했다. 네마냐는 동굴 안에서 며칠간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네마냐의 지지자들은 티호미르가 교회 건축을 반대하기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 주장했고 성직자들이 이를 믿고 티호미르를 비난했다.
그러다 동굴을 탈출한 네마냐는 1166년 또는 1167년에 반란을 일으켜 티호미르를 폐위시키고 미로슬라프, 스트라치미르와 함께 추방했다. 마누일 1세는 라쉬카의 통합을 원하지 않았기에 티호미르에게 병력을 빌려줬고, 티호미르는 이에 힘입어 네마냐를 공격했지만 즈베찬 남쪽의 판티노 전투에서 패배하고 시트니카 강에서 익사했다. 다른 형제들은 네마냐에게 항복하여 이전의 영지를 돌려받았다. 마누일 1세는 어쩔 수 없이 네마냐를 세르비아 대공으로 인정했다.
티호미르는 생전에 스테판 프르보슬라프를 낳았다. 그는 몬테네그로의 베라네 인근에 두르제비 스투포비 수도원을 건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