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20 07:39:34

상우(후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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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일화

1. 개요

桑虞
생몰연도 불명

후조의 인물. 자는 자심(子深). 기주 위군(魏郡) 여양현(黎陽縣) 출신. 서진 혜제 시기 황문랑, 정서장군 사마를 역임했던 상충(桑沖)의 아들.

2. 생애

상우는 어렸을 때부터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상우의 모든 형들은 석륵 밑에서 벼슬을 지냈으나, 오직 상우만이 오랑캐에게 신하를 칭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강동으로 은밀히 도주하고자 했다. 그러나 하필 그 시기에 어머니가 사망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도주를 포기하고 모친상부터 치렀다. 상우는 상을 치르면서 몸을 상할 정도로 지나치게 슬퍼하였고, 상을 무사히 마친 뒤에도 부모의 묘소 근처에서 기거하였다.

5년이 지나고, 석륵이 상우를 무성(武城)의 현령으로 삼았다. 무성은 황하와 무척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에, 상우는 동진으로 쉽게 건너갈 수 있으리라 여기고 흔쾌히 명을 받들었다. 하지만 당시 석호에게 능력을 인정받고 청주자사로 승진한 유징(劉徵)은 상우가 미처 무성에 부임하기도 전에, 조정에 청해 그를 자신의 장사로 배속시켰다. 결국 상우의 도주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상우는 유징 휘하에서 축아군(祝阿郡)을 다스렸다. 이후 유징이 병에 들어 해직되고 업(鄴)으로 귀환하자, 상우는 청주자사를 대행하여 임시로 주의 업무를 보았다.

태녕 원년(349년) 4월 23일, 무황제 석호가 붕어하고 그 아들들이 제위를 다투면서 천하는 다시금 큰 혼란에 빠졌다. 이때 동진 측에서는 몰래 동완(東莞) 사람 화정(華挺)을 청주로 보내 상우를 회유하고, 그를 영삭장군, 청주자사에 임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상우는 화정에게
"공명(功名)은 나의 뜻이 아니오."
라며 관직을 사양하였다. 동진의 사신을 돌려보낸 후, 그는 우측으로는 바다에 의지한 채 청주 바깥 지역과의 모든 교류를 끊으니, 청주는 혼란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재직 중 세상을 떠났다.

3. 일화

  • 14세가 되었을 무렵에 아버지 상충이 사망하자 예법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고 매일 변변치 않은 음식을 먹으면서 애도하였다. 곁에서 보다못한 누나가 그를 타이르며 말했다.
    "너의 훼척함이 이와 같으면 필히 병을 얻어 죽고 말 것이다. 상 중에 병을 얻어 죽는 것 또한 효가 될 수 없으니 마땅히 스스로를 자제하도록 해라."

    이에 상우는
    "낟알로 된 변변치 않은 음식이어야 족히 애도할 수 있습니다."

    라며 그대로 상을 이어갔다.
  • 상우는 저택 북쪽으로 수 리 정도의 정원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곳에서 키우던 참외가 익자 도둑이 담을 뛰어넘어 정원 안으로 침입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상우는 도리어 자신의 정원 안에 심어놓은 가시나무가 그 도둑을 해할 것을 걱정하고, 노복에게 명해 정원 문을 열어 밖으로의 길을 트게 하였다. 참외를 들고 정원을 빠져나오려던 도둑은 밖으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상우가 눈치 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둑은 상우의 노복에게 훔친 참외를 모두 넘기고 상우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니, 상우는 기뻐하며 참외를 전부 도둑에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