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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시티 FC/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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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본문
2.1. 창단과 초창기2.2. 맨체스터 시티의 첫 중흥기2.3. 조 머서의 부임, 첫 번째 전성기2.4. 경영난으로 암흑기에 빠진 맨체스터 시티2.5. 탁신과 두번째 중흥기2.6. 만수르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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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285e> {{{-1 ▲ 맨체스터 시티 FC의 역대 순위 변화 }}}

1. 개요

잉글랜드 축구 클럽 맨체스터 시티 FC의 역사를 설명하는 문서.

2. 본문

맨체스터 시티는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다음으로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후 가장 성공적인 구단으로, 특히 1992년 잉글랜드 축구 1부 리그가 프리미어 리그(Premier League)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탄생한 이후에는 21년간 7회의 리그 우승컵을 비롯해 총 23개의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2.1. 창단과 초창기

파일:st-marks-gorton-fc-manchester-city-fc.jpg

1880년, 잉글랜드 맨체스터의 고튼 서부에 위치한 세인트 마크스 교회 (St. Mark's Church)의 교인들이 다분히 인도적인 목적으로 훗날 맨체스터 시티로 알려질 축구 클럽을 창단했다.

당시 많은 실업자와 범죄자들이 맨체스터 동부, 특히 고튼에 만연해있었는데 현지인들을 위한 새로운 활동을 도입함으로써 이것을 개선하고 사회적 병폐를 줄이라는 아서 코넬 (Arthur Connell) 목사의 독려에 따라 교회 관리인인 윌리엄 비스토우 (William Beastow)와 토마스 굿비히어 (Thomas Goodbehere), 그리고 아서 코넬 목사의 딸인 안나 코넬 (Anna Connell)이 세인트 마크스 웨스트 고튼 (St. Mark's West Gorton) 라는 교회 축구 팀을 창단한 것이다.

특히 안나 코넬은 '19세기에 창단된 프로 축구팀 가운데, 창단 멤버 중에 유일한 여성'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게다가 안나 코넬이 창단에 큰 기여를 했는데 원래는 크리켓이나 럭비 팀을 만들려고 했는데 당시 지방 음주 노숙자라든지 여러 사회 문제가 된 알코올 중독자를 위한 스포츠로 두 종목은 맞지 않는다며[1] 축구팀을 만들자고 건의한 게 그녀였다고 한다.[2]

1884년, 세인트 마크스는 고튼의 또 다른 축구 클럽인 고튼 애슬레틱과 합병되지만 불과 한 시즌 뒤에 세인트 마크스는 고튼 AFC로, 고튼 애슬레틱은 웨스트 고튼 애슬레틱으로 분리되었다. 1887년에 연고지를 맨체스터 시 동부에 위치한 아드윅이란 동네로 옮겨 클럽 이름을 아드윅 AFC로 바꾸고, 홈 구장도 하이드 로드로 옮기게 된다. 1889년에는 하이드 로드 근처의 탄광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 23명의 광부가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고, 아드윅 AFC와 뉴턴 히스(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가 지역 주민들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 자선 경기를 치르기도 하였다.

2.2. 맨체스터 시티의 첫 중흥기

1892년, 잉글랜드 축구 2부 리그가 설립되어 아드윅 AFC가 창립 멤버로 참가했다. 1894년에는 팀 이름을 맨체스터 시티 FC로 바꾸고, 1898-99 시즌에 1부 리그로 올라왔으나 2시즌 이후 강등당했다. 그러다가 1시즌 만에 승격함과 동시에 바로 다음 해인 1903-04 시즌 볼턴 원더러스를 꺾고 FA컵 우승과 리그 2위의 성적을 거두며 기적적이고 극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이 성과를 바탕으로 잉글랜드 전역에 이름을 알렸지만, 오래가지 않아 다시 강등과 승격을 거치며 중소 구단으로서 지내야 했다. 그 와중에 1923년 홈구장 하이드 로드가 불에 타버려서 메인 로드로 경기장을 옮기기도 했다.
파일:C-KnfRaXoAER5F.jpg

1925-26 시즌에는 감독 없이 FA컵 우승을 차지하였고, 맨유 원정에서 6-1로 역사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1928년에는 최고의 서포터즈를 가진 클럽으로 선정되기도 했고 1934년, FA컵 우승과 1936-37 시즌에 맨시티도 첫 리그 우승의 감격을 누린다.

하지만 1937-38 시즌, 리그 42경기에서 80골이나 넣는 공격력을 보유하고도 77실점이나 허용하는 수비진 탓에 강등을 경험한다. 결국 맨시티는 지금까지 다음 시즌에 강등된 유일한 디펜딩 챔피언이자 실점보다 높은 득점(+3)을 기록하고도 강등된 유일한 팀으로 남는다. 그래서 1951년에 전쟁포로 독일인 골키퍼 베르트 트라우트만을 전격 영입하고, 수비를 강화하면서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1955년에 FA컵 결승전에서 뉴캐슬에게 패해 우승컵을 내주지만, 1년 후 다시 결승에 진출해 우승한다. 1958년 뮌헨 참사에서 맨시티의 골키퍼였으며 기자로 활동하였던 프랭크 스위프트[3]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2.3. 조 머서의 부임, 첫 번째 전성기

파일:Manchester-Citys-Joe-Merc-009.webp

1965년에 조 머서가 감독으로, '빅 말(Big Mal)'이라는 닉네임을 막 달았던 말콤 앨리슨이 코치로 맨체스터 시티에 부임했다.

머서와 앨리슨의 부임 이후 맨시티는 큰 변혁을 맞았다. 조 머서 감독의 지휘 아래 말콤 앨리슨은 프랜시스 리, 콜린 벨, 마이크 서머비 삼총사를 중심으로 활력 넘치는 공격진을 만들었다. 간단하지 않은 전술과 투지 넘치고 정교한 축구를 3년 연속 이어간다. 이 시기에 디비전 2 우승을 차지하며 디비전 1 복귀, 1967-68 시즌 팀의 두 번째 풋볼 리그 디비전 1 우승, 1968-69 시즌 FA컵 우승, 그리고 1969-70 시즌 풋볼 리그 컵 우승, FA 채리티 실드와 함께 맨시티의 최초의 유럽 클럽 대항전 우승인 UEFA 컵위너스컵 우승까지 달성한다.

이 모든 것은 단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짧은 영광의 시대도 잠시 1971년, 피터 스웨일스 회장 취임 후 조 머서가 맨시티를 떠났고, 1972년, 구단 엠블럼을 변경한다. 이후 1973년, 맨시티 성공의 주역이었던 앨리슨 역시 팀을 떠났다. 이후 1975-76 시즌 풋볼 리그 컵 우승을 하지만, 1981년 FA컵 준우승 이후로 우승은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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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당시에도 맨시티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구장 중 하나를 가진 인기 클럽으로서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한 1980년대에도 꾸준히 관중 순위 3~4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 영광의 시간 뒤에 구단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 찾아오게 되는데..

2.4. 경영난으로 암흑기에 빠진 맨체스터 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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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시티는 프리미어 리그가 출범되는 시기인 1992년~2000년대 중후반까지 구단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보냈다. 100년 동안 리그에서 가장 입지가 탄탄한 터줏대감 중 하나로 중상위권 팀이었던 맨시티가, 이 시기에 하위권을 전전하며 강등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1994년, 팀을 방만하게 운영해 온 피터 스웨일스는 사임하고, 팀의 레전드인 프랜시스 리가 회장으로 부임한다. 그럼에도 팀의 경영은 갈수록 더 악화되어 1995-96 시즌 당시 퍼스트 디비전 (2부), 더 나아가 1997-98 시즌 세컨드 디비전, 즉 3부 리그까지 강등되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 이것은 유럽 대항전 우승팀 역사상 최초로( UEFA 컵 위너스컵 우승) 3부 리그 강등 기록이라는 불명예였다. 이는 2004-05 시즌에 챔피언스 리그 우승 경력을 가진 노팅엄 포레스트 FC가 리그 원으로 강등되기 전까지 유일한 기록이었다.[4] 맨체스터 시티가 과거의 영광에 비해 얼마나 암흑기를 크게 맞이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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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1시즌 만인 1998-99 시즌 도중에 데이비드 번스타인 회장과 조 로일 감독이 각각 취임하여 버뮤다 출신의 무명 공격수 숀 고터의 활약에 힘입어 1999년에 다시 2부 리그로 승격했고[5] 1999-00 시즌에 2부 리그 플레이오프에서 블랙번 로버스를 꺾고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하였으나, 한 시즌 만에 18위로 아쉽게 강등당했다.

그 사이 덴마크 같은 유럽 축구 변방과 제3세계 등지에서 젊은 선수들을 영입해 전력 보강에 주력한 후, 2001-02 시즌에 새로 부임한 케빈 키건의 지휘 하에 리그 1위를 차지해 프리미어 리그로 단숨에 올라왔다. 승격 첫 시즌인 2002-03 시즌에 상대 팀에 따라 기복이 심하고 수비가 약해 54점 실점을 기록했으나, 9위로 마감하여 다크 호스 역할을 했다. 해당 시즌 우승팀이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매치업에서 1승 1무로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 2003년에는 정든 메인 로드를 떠나 새 구장인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으로 둥지를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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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장 이전 후 수비를 보강하기 위해 아스날의 명수문장 데이비드 시먼을 영입하고, 공격수로는 니콜라 아넬카, 풋볼 리그 디비전 1으로 막 강등당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로부터 미드필더 트레버 싱클레어를 사들여 전력 안정을 꾀하고자 했으나, 뜻대로 안 되어 리그 성적은 연이어 2004-05 시즌 빼고 16위, 15위, 14위를 각각 기록했고, 하위 팀으로서 강등을 겨우 모면하는 신세인 팀이었다. 2006-07 시즌에는 리그 컵에서 3부 리그 팀 체스터필드에게 패하고, 리그 내내 홈에서 10골만을 넣고, 리그 후반기인 2007년 1월 1일 에버튼전에서 골 넣고 나선 홈에서 단 한 골도 못 넣는 미친 대활약을 벌이면서[6] 강등을 겨우 모면하고, 이때 감독 스튜어트 피어스는 맨시티의 흑역사가 되어 쫓겨난다.[7]

2.5. 탁신과 두번째 중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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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년 전 쿠데타로 태국에서 쫓겨난 전 타이 총리 탁신 친나왓이 자신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구단을 매입한다. 당시 맨시티 서포터들이나 영국 반응은 무덤덤했다. 탁신은 2004년에 리버풀 FC를 인수하려다 실패했었고 이 와중에 자신이 리버풀 팬이란 언론 홍보를 하는 바람에 맨시티 팬들은 "리버풀에서 거절하자 꿩 대신 닭이라고 맨시티를 샀다"라며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맨체스터 시티는 과거 잉글랜드 국대를 지휘한 바 있는 스벤예란 에릭손 감독과 프리미어 리그에서 통할 만한 몇몇 선수들을 영입했다. 일라누 마르틴 페트로프가 대표적이다. 그 외의 영입으로는 롤란도 비앙키, 발레리 보지노프, 베드란 촐루카, 지오반니, 젤손 페르난지스, 하비에르 가리도가 있다.

2007-08 시즌 맨시티는 초반 리그 3연승을 거두며 선두에 오르기도 했고, 맨유에 홈, 어웨이 모두 승리를 거두는 등[8] 좋은 성적을 내며 리그 2/3 정도 치른 시점까지 챔피언스 리그를 사정권에 두었다. 첼시 원정 0:6 패배, 마지막 경기인 미들즈브러 원정에서 1:8 대패라는 옥에 티도 있었지만 리처드 던 마이카 리차즈의 센터백 라인은 맨시티의 호성적에 큰 뒷받침이 되었다. 그리고 이적생인 엘라누와 마르틴 페트로프도 적응기 없이 맹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대부분의 돌풍 팀들이 그렇듯이 맨유 원정 승리 후 리그 12경기에서 3승 2무 7패에 그치며 최종 성적 9위로 리그를 마쳤다. 9위로 리그를 마쳤지만 그해 페어 플레이 팀으로 선정되며 1차 예선부터 UEFA 컵에 출전할 수 있는 진출권을 따내는 성과를 올렸다. 영국 언론 포포투에서는 9위도 잘한 것이라는 평을 내렸다.

하지만 탁신은 팀을 5년 만에 UEFA 컵에 진출시킨 감독을 경질하고[9][10], 호나우지뉴를 영입하겠다고 떠들면서 정작 팀의 주전 수비수 리처드 던의 주급을 올려주지 못해 잃을 뻔할 정도로 한심하고 답이 없는 운용을 거듭하다가 태국에 있던 그의 자금이 법으로 막혀버리자 구단을 냅다 알 파힘을 통해 만수르에게 팔아 버렸다. 탁신은 덕분에 2배 이상 이득을 보았고 탁신의 후광을 입고 맨시티에 입단했던 태국 선수 3명은 2008년 10월에 전원 방출되었다.

또한 이 당시의 맨체스터 시티에 대해 국내에서는 쑨지하이가 활약한 것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쑨지하이는 2001-02 시즌 겨울 이적시장에 이적했고, 다음 시즌 탁신이 구단주로 취임하기 전, 2007-08 시즌 이전까지 계속 주전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탁신이 구단주가 된 이후 선수 보강이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잃어 결국 2008년 셰필드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또한 프리미어 리그 역사상 최고의 악동 중 한 명인 조이 바튼이 여러 가지 사건 사고를 일으키면서 한국 언론에서 종종 이름이 언급되기도 했고,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마르크비비앙 푀의 소속 팀으로 알려져 있었다.[11] 페테르 슈마이켈 데이비드 시먼 등 특급 수문장들도 이곳에서 선수 말년을 보냈다.

2.6. 만수르의 등장


만수르의 인수 이후 맨체스터 시티의 시즌은 개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아닌 게 아니라 이전에 있던 다른 교회 크리켓 팀에서 크리켓 배트로 상대방을 두들겨 패고 패싸움이 벌어졌었고, 럭비팀에서도 공은 내팽개치고 사람을 들이받아 싸우기 일쑤였다고... [2] 2016년 9월호 베스트 일레븐 지 출처. [3] 20세기 맨시티 역대 키퍼 중 베르트 트라우트만 다음으로 뛰어났다고 꼽히는 레전드 키퍼이다. [4] 2019년에는 UEFA컵 우승경력의 입스위치 타운 FC가 3부 리그로 떨어지며 또 하나의 사례가 추가되었다. [5] 과정이 굉장히 드라마틱했다. 3부 리그 3위로 승격 플레이오프를 치렀는데, 맨시티는 6위였던 위건 애슬레틱을 제압하고 결승에서 프레스턴 노스 엔드를 제압한 질링엄 FC와 상대해야 했다. 당시 질링엄 감독은 토니 퓰리스. 맨시티는 질링엄을 상대로 후반 36분과 후반 41분에 실점하며 승격은 물건너가는 듯했는데, 추가 시간에만 2골을 득점하며 승부를 극적으로 연장으로 끌고 갔고, 결국 승부차기에서 3-1 승리를 거두며 2부 리그 승격에 성공했다. [6] 마지막 홈경기 2경기에서 모두 PK를 얻고도 득점에 실패했다. 홈 최종전이 라이벌 맨유전이었는데 여기서 0-1로 패하면서 맨유는 리그 우승 초읽기에 들어갔고 다음날 첼시의 무승부로 우승에 성공했다. [7] 참고로 이 당시 피어스는 잉글랜드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겸임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소속 팀에 집중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이 더욱 거셌다. 물론 맨시티에서 경질된 이후에도 청소년 대표팀 자리는 유지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몇년간 키워온 선수들을 이끌고 2012 런던 올림픽에 나섰지만 8강에서 한국에게 져 탈락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었다. [8] 2008년 2월 10일에 올드 트래포드에서 뮌헨 참사 50주년을 추모하는 기념식이 있었는데 맨시티가 맨유를 2:1로 꺾으며 맨유 팬들을 더더욱 슬픔에 잠기게 만들었다. [9] 이때 맨시티 팬들은 에릭손을 지킨다며 Save Our Sven, 줄여서 SOS 캠페인을 벌이지만 실패한다. [10] 에릭손 감독의 후임으로 마크 휴즈가 맨시티의 감독이 되었다. 맨유 레전드가 맨시티의 감독이 되어 논란이 있었다. [11] 임대 신분으로 맨체스터 시티에 합류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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