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8 17:19:44

마르크 샤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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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샤갈
Марк Шагал[1]
Marc Chagall
파일:external/www.openlettersmonthly.com/Chagall_France_1921.jpg
출생명 모이세이 하치켈레비치 샤갈[2]
(Моисей Хацкелевич Шагал)
본명 마르크 자하로비치 샤갈
(Марк Захарович Шагал)
국적
[[러시아 제국|]][[틀:국기|]][[틀:국기|]] (1887 ~ 1917)
무국적 (1922 ~ 1937)

[[소련|]][[틀:국기|]][[틀:국기|]]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1937 ~ 1985)
출생 1887년 7월 7일
러시아 제국 비텝스크현 리오즈노 (Лиозно)[3]
사망 1985년 3월 28일 (향년 97세)

[[프랑스|]][[틀:국기|]][[틀:국기|]] 프랑스 제5공화국 생폴드방스

1. 개요2. 생애3. 기타

[clearfix]

1. 개요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화가. 밝고 몽환적인 초현실주의 그림들로 유명하다.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술은 내적 존재에서 외부로 나온 것이며, 보이는 사물에서 육체적 결과물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해 실제 사물을 표현하는 입체파와는 거리를 두었다.

판화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특히 성서 이야기를 소재로 한 걸작 동판화를 남겼다. 그의 작품은 러시아계 유대인의 혈통에 흐르는, 대지의 소박한 시정을 담은 동화적이고 자유로우며 환상적인 특색을 보이고 있다. 특히, 농부·산양·닭과 같은 제재를 많이 취급하고 있다.

2. 생애

1887년 7월 7일에 러시아 제국 리오즈노[4]에서 가난한 유대인 집안에서 9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어상인 밑에서 일을 했고, 그의 어머니는 집에서 야채를 파는 형편이라 이후 샤갈은 "존경받지 못하는 그의 아버지" 생선을 등장시켜 표현한다.

1906년에 당시 러시아 제국의 수도이자 예술의 중심지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를 갔으며, 그곳에는 많은 유명한 예술학교들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통행증이 없으면 출입이 허가되지 않았으므로, 그는 가까스로 친구에게서 임시통행증을 얻어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샤갈은 2년 동안 공부하며 자연주의적 초상화와 풍경화를 그렸다.

1908년에서 1910년까지 샤갈은 짜반체바 미술학교에서 레온 박스트에게서 공부를 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실험극장과 폴 고갱의 작품들을 접하게 되었다. 박스트도 유대인이었으며, 또한 장식예술 디자이너였고, 유명한 발레 무대배경과 의상 디자이너였다. 샤갈은 박스트를 성공한 유대인의 롤모델로 삼았다. 1년 후 박스트는 파리로 이사를 갔다.

샤갈도 1910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는데, 종종 고향 근처의 비텝스크를 갔다가 벨라 로젠벨트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샤갈은 "나의 삶"이라는 글에서 그녀와의 첫만남을 다음과 같이 썼다. "그녀의 침묵은 내 것이었고, 그녀의 눈동자도 내 것이었다. 그녀는 마치 내 어린 시절과 부모님, 내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나를 관통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1910년에 샤갈은 미술을 배우러 파리로 갔다. 당시 파리에는 입체파가 지배적이었으며, 여전히 19세기풍의 그림이 유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샤갈은 이미 러시아에서 잘 익은 색채 재능과 신선하고 대담한 반응, 시에 대한 느낌, 그리고 유머를 갖춘 채였다. 입체파와는 상반되는 예술 철학에, 그는 주류에서 벗어나 다른 예술가들이 아닌 당대의 시인들에 비추어 평가받았고, 다른 아방가르드 유명 인사들과 교류했다.

파리에서 우수한 화가들이 가르치는 <라 팔레트>에 등록을 했으며, 또한 다른 아카데미에서도 작품들을 찾기도 했다. 그는 여유 시간이 있으면 갤러리나 살롱, 그리고 특히 루브르 박물관에서 렘브란트, 르넹 형제, 샤르댕, 반 고흐, 르노와르, 피사로, 마티스, 폴 고갱, 쿠르베, 밀레, 마네, 모네, 들라크루와 그리고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공부했다. 그는 종종 몽마르뜨를 방문했고, 파리지앵으로 숨쉬는 것을 행복해 했다. 샤갈은 파리에서 예술가로서의 꿈을 이룰 수 있었지만 도시의 외로움과 언어의 장벽에 괴로워했다. 얼마간은 다시 러시아로 돌아갈 고민도 했으며, 그림을 그리면서도 러시아 민속과 유대인으로서의 삶, 가족 그리고 특히 벨라를 그리워했다.

벨라를 계속 그리워하던 그는 마침내 그는 베를린에 있는 유명한 예술 딜러의 작품 전시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1913년 9월 베를린에서 개인전시회를 열어 《내 약혼녀에게》, 《골고다》, 《러시아, 암소 그리고 다른 것들에게》를 전시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고, 1914년 6월 허바스 발덴 슈트름 갤러리에서 작품을 선보이고 이곳에서 화가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된다. 이 전시회는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독일 평론가들은 그를 호평했다.

전시회가 끝난 후 1914년 러시아로 가서 벨라와 결혼을 위해 비텝스크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몇 주 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러시아의 국경이 봉쇄되어 버린다. 1915년 벨라와 결혼을 하고, 그해 첫 딸 이다를 가진다.

파일:external/41.media.tumblr.com/tumblr_mawe3zLNhl1rw3fqbo1_1280.png
샤갈과 벨라.

결혼 전 샤갈은 부유한 유대인인 그녀의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애를 먹었다. 그녀의 부모는 가난뱅이 출신의 화가가 그들의 딸을 부양할 수 있을 지를 염려하였다. 하지만 결혼으로 인해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샤갈의 정신은 대단히 안정되었다. 이 당시의 그림에는 몽환적인 젊은 연인들을 화폭에 담고 있다.

1917년 10월 혁명은 역시 예술가로서 위험한 시기였다. 샤갈은 소련이 세워진 1922년, 고향을 포기하고 벨라와 함께 베를린을 통해 파리로 돌아온다.

이어 그는 야수파의 색채를 자기 나름대로 이용하여 아름답고 아담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선명한 색채로 사람과 동물을 섞어 환상적이며 신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39년, 샤갈은 카네기 상을 수상했지만,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의 탄압을 피하여 미국으로 가게 된다.

1944년 9월 2일, 그의 아내 벨라가 갑작스런 감염으로 죽게 된다.[5] 그 후 몇 달 동안 그는 작품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그가 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을 때, 그는 아내를 회고하는 작품을 가장 먼저 시작하게 된다.

1947년, 샤갈은 프랑스로 돌아와 사랑과 기쁨에 넘치는 명작을 계속 그렸다. 1952년, 60세의 샤갈은 딸에게 소개받은(!) 유대인 여성 발렌티나 바바 브로드스키와 결혼을 하게 된다. 샤갈은 그와 그리스 여행을 다니면서 다시 활력을 찾는다.

1960년, 샤갈은 에라스무스 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당시 프랑스 정부 내에서 샤갈도 친분이 있었던 앙드레 말로는 가르니에 궁의 천장화를 샤갈에게 요청한다. 이것은 1964년에 완성되었다.

1966년, 샤갈은 17점 연작 《성경의 메시지》를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1973년, 샤갈의 86살 생일에 니스 시는 〈샤갈미술관〉을 개관하였으며, 1985년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은 이후 주변 생 폴의 유대인 묘지에 묻혔다.

3. 기타

  • 그의 작품에서 히브리 자음과 라틴 모음을 섞어서 שAגAל로 적은 서명을 볼 수 있다.
  • 흑백의 세로 줄무늬가 들어간 마치 죄수복처럼 생긴 옷을 즐겨 입었다. 바로 수용소나 유대인 구역에서 강제로 입히던 옷의 패턴이다.[6]
  • 유대 혈통이라고 다 유대교는 아니나, 샤갈은 열성적인 유대교 신자였다. 만년에는 더욱 유대교를 마음의 고향으로 삼아 생전 수많은 구약의 인물과 사건을 그림으로 남겼으며, 이스라엘 정부의 주문을 받아 관공서나 유대교당에 대규모의 태피스트리(걸개그림),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남겼다.
  • 회화 작품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판화 작품도 그 못지않게 많다. 볼록판(릴리프)은 드물고 대부분이 요판화인 드라이포인트와 평판화인 리소그래프 작품이다. 원판이 살아 있으면 얼마든지 다시 찍어낼수 있다는 판화 작품의 특성상, 사후에 찍어낸 샤갈 재단 공인 판화의 경우에는 매우 저렴하게 구입할수 있다. A1 크기의 판화가 액자 포함 70만 원 선.
  • 노년에는 도자기를 만들기도 했다.
  • 벨라루스 태생의 러시아계 유대인 출신 프랑스 화가였던 점 때문에, 벨라루스·러시아·프랑스 3국에서 서로 자기 나라 위인이라고 주장하며 심지어 이스라엘의 몇몇 극우들조차 샤갈을 자기네 위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후자는 진지하게 받아들일 가치도 없는 극단적 유대인 민족주의의 한 예이지만 전자의 경우는 정말로 복잡한 문제다. 다른 나라로 치면 독일· 스위스· 미국에서 서로 자기 나라 위인이라고 주장하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도 비슷한데 공교롭게도 이쪽 또한 유대인이다.
  • AMD 스레드리퍼 4세대의 코드네임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 그의 그림에는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음악가의 이미지가 종종 보인다. 1971년 영화로도 나온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7]은 그 제목과 작중 등장하는 관념적 존재 '피들러(바이올린 연주자)'의 이미지를 여기서 따 왔다고.
  • 이전 세대 대부분의 화가들이 요절하면서 단명한 것과 다르게, 거진 100살 가깝게 장수한 사람이다. 심지어 장수한 대표적인 미술가인 파블로 피카소보다도 오래 살았다.
  •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비텝스크는 벨라루스의 도시인데, 당시 시기가 시기인 만큼 샤갈은 죽을 때까지 고향을 방문하지 못하고 그 곳을 그리워하며 고향의 풍경을 작품에 담았다.

[1] 이디시어: מאַרק שאַגאַל‏‎ [2] 발음은 '모이시'에 가깝다. [3] 벨라루스 비텝스크주 리오즈노(료즈나 (Лёзна)) [4] 벨라루스. 그래서 벨라루스인들은 샤갈을 모국 예술가로 여기기도 한다. 예술가 활동은 러시아 본토에서 시작했고 프랑스로 이민 갔지만. [5] 발병 후 고작 3일만에 죽었다고 한다 [6] 2018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샤갈 전시회에서 행사 진행 스탭들이 이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있다. [7] 정확히는 Fiddler on the roof라 '지붕 위의 바이올린 연주자'라는 뜻의 제목이지만 한국에는 이렇게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