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대한민국의 제3지대 정당
대한민국의 정당 분류 | |
▲ 정부수립 이전 | |
민주당계 정당 |
보수정당 (초기, 군정기, 민자당계) |
극좌 | 진보 | 중도 | 중도보수 | 극우 | 민족주의 | 대중주의 |
충청권 보수정당 | ||
주요 정당 | ||
과거 |
<colbgcolor=#fff,#1f2023>
자유민주연합 (1995~2006) 국민중심당 (2006~2008) 자유선진당 (2008~2012) |
|
집권 정부 | ||
국민의 정부 ( 자유민주연합[1]) |
[clearfix]
1. 개요
한국 정치사에서 성공적으로 제3지대를 구축한 정당으로, 대한민국 보수정당의 분파인 이들은 초창기 자신들의 정치적 명분의 근거로 제3공화국의 집권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의 정통적인 후신임을 자처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민주화 이후 TK가 주류인 보수정당 vs 호남이 주류인 민주당 양당 체제에 반감을 가진 충청도의 유권자들의 지역정서를 기반으로 하는 정당이 2000년대까지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세를 구축했다.이에 따라 양당체제에 반대하고 충청도를 기반으로 하는 정당들은 초창기부터 보수적인 색채를 띠었으나 (성향이 유사한) 거대 보수정당과는 다른 노선을 걸으면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으로는 충청권 지역정당이라고 불렸지만 하위 문서의 신민주공화당이나 희망의한국신당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80~90년대까지는 단순히 지역주의에 기대었던 정당 계열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당시 보수성향의 국민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박정희의 후광과 민주공화당의 위세에 더 기대었다. 특히 충청권 지역정당을 이끌어온 정치인이 박정희와 혈족으로 이어진[2] 측근 출신이자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나고 자란 김종필이었기에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지지자들이나 충청 출신 시민들이 김종필을 지지하면서 이 정당을 밀어줬다.
이 시기 이들의 정치적 목표는 거대한 보수정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한 이래로 보수층의 정치적 신뢰를 독점하는 민자당계 보수정당의 타도였다. 결론만 놓고 보면 DJP연합으로 한나라당의 집권을 저지하고 연립 정부에 참여한 자유민주연합의 전성기 시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로는 충청권에 기반한 지역주의 보수정당으로 한나라당을 대체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덕분에 충청권 보수정당이라는 고유한 카테고리를 얻게 되었다. 여기에다가 민주당계 정당인 새정치국민회의와 연립여당으로서 연립정권을 형성하는 과정 등을 거치며 초창기 민자당계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을 뛰어넘는 강성보수적인 이미지와 색채는 탈색되어갔고 자유선진당- 선진통일당 때는 오히려 중도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에 흡수된 이후론 사실상 사라진 분류법이다.[3] 이후 충청도의 정치 구도는 보촌민도 성향의 경합지역이 되었다.
2. 정당 목록
대한민국의 역대 충청보수 정당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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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bgcolor=#ffffff,#191919><rowcolor=#fff> 정당 | 존속 기간 | 비고 |
[[신민주공화당| |
1987 ~ 1990 | ||
[[자유민주연합| |
1995 ~ 2006 | ||
|
2000 ~ 2001 | ||
[[국민중심당| |
2006 ~ 2008 | ||
[[자유선진당| |
2008 ~ 2012 | ||
[[선진통일당| |
당명 변경 | ||
[[국민중심연합| |
2010 ~ 2011 | ||
[[대국민중심당|]] |
2011 ~ 2012 | ||
[[가자!대국민중심당| |
당명 변경 | ||
[[충청의미래당|]] |
2020 ~ 2023 | ||
|
당명 변경 | ||
[[충청의미래당|]] |
당명 변경[4] |
2.1. 과거의 정당
2.1.1. 신민주공화당
1987년 10월 30일 ~ 1990년 1월 22일 ( 3당 합당)
1987년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정치 규제에서 해금된 후 구 민주공화당/ 유신정우회 출신 인물들을 규합하여 창당한 정당. 신군부가 유신정권 출신 인물들로 구성한 관제야당인 한국국민당을 사실상 흡수하며 충청권 거주민과 유신정권에 호의적인 유권자들을 기반으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8.1%[5],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5석을 획득하며 캐스팅보트로 떠올랐다. 이후 1990년 3당 합당으로 해산됐다. 2012년 선진통일당이 해산될 때까지 충청권 보수정당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공화계의 유래이기도 하다.
2.1.2. 자유민주연합
1995년 3월 30일 ~ 2006년 3월 10일 (자진해산 후 한나라당으로 일괄 합류)
1995년 민주자유당에서 민주계가 당권을 차지하자 김종필 당시 의원을 중심으로 공화계와 일부 민정계가 탈당하여 창당한 정당이자 3당 합당 이후 처음으로 나온 3당. 15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석권하고 경기, 대구, 강원 지역에서 선전해 총합 50석을 차지했고[6],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DJP연합을 통해 정권교체,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과 함께 연립 정부를 구성한 바 있다.[7] 하지만 16대 총선에서 교섭단체 조건[8]을 충족하지 못한 뒤 하락세를 타다가 17대 총선에서 탄핵 역풍을 맞고 겨우 4석에 그치게 된다. 결국 대부분의 당원은 2005년 심대평 충남지사가 창당한 중부권 신당 국민중심당으로, 마지막까지 당을 지키던 김학원 대표와 당원들은 2006년 자진 해산 뒤 한나라당으로 일괄 합류했다. 충청권 보수정당의 강렬한 전성기를 상징하는 동시에 지역정당의 한계 역시 보였고, 이러한 특성 탓에 2000년대 이후엔 지역정당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2.1.3. 희망의한국신당
2000년 2월 15일 ~ 2001년 1월 21일 (자진해산 후 한나라당으로 일괄 합류)
16대 총선을 앞두고 자유민주연합을 탈당한 김용환 당시 의원이 창당한 정당. DJP연합으로 집권에 성공했지만 근본적인 성향 차이[9]와 내각제 개헌 무산으로 내홍을 겪던 자유민주연합 내부에선 연립을 중단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이러한 상황에서 내각제 개헌에 큰 기대를 걸던 김용환[10]을 중심으로 일부 반발세력이 창당했다. 충청권 신당을 외치며 야심차게 출범을 했으나 김용환 혼자만 당선되었고, 2001년 자진 해산 뒤 한나라당으로 일괄 합류했다.
2.1.4. 국민중심당
2006년 1월 17일 ~ 2008년 2월 11일 ( 자유선진당으로 흡수 합당)
2006년 심대평 당시 충남지사를 비롯해 17대 총선 참패로 위기감을 느낀 자민련 인사들이 창당한 정당. 소멸 위기에 처한 자민련 대신 새로운 충청권 지역정당 창당을 선언하며 정식 창당 전인 2005년 재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 1명을 당선시키는 등 경쟁에서 앞서갔으나, 양당이 합의했던 합당이 파기되며 자민련을 완벽하게 흡수하지 못했다. 창당 후 독자적으로 치른 4회 지선에서 광역자치단제장 0석, 기초자치단체장 7석 당선에 그치고 만다. 17대 대선에서도 대권주자가 마땅히 없었지만 원내정당이 후보를 안 낼 수 없다는 이유로 심대평 당시 대표가 출마했으나,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와중에 이회창 전 국무총리가 출마하자 지지 및 후보사퇴 후 자유선진당에 흡수된다.
2.1.5. 자유선진당
2008년 2월 4일 ~ 2012년 5월 29일 ( 선진통일당으로 당명 변경)
17대 대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15.07%를 득표하며 유의미한 성적을 기록한 이회창 전 국무총리와 그를 지지한 국민중심당이 창당한 정당. 18대 총선에서 대전충남권을 중심으로 18석을 얻었으나, 충청권 외에선 1개의 지역구 의석도 확보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대선에서 이회창을 지지한 유권자들을 완벽하게 흡수하는데 실패했다. 또한, 세종시, 충청권 총리 등 기반 지역과 밀접한 현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며 지역정당으로의 입지 역시 애매해져 갔고, 그 결과 5회 지선에서 광역자치단체장 1석, 기초자치단체장 13석으로 텃밭 석권조차 이루지 못했다. 결국 19대 총선에서 지역구 3석, 비례대표 2석으로 17대 총선 자민련에 버금가는 참패를 기록하며 18대 국회 임기 만료 전 선진통일당으로 당명이 변경됐다.
2.1.6. 국민중심연합
2010년 4월 1일 ~ 2011년 10월 17일 ( 자유선진당으로 신설 합당)
2010년 5회 지선을 앞두고 이회창 총재와의 갈등으로 심대평 당시 의원이 창당한 정당. 심대평의 지역구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1년만에 다시 자유선진당과 합당했다.
2.1.7. 가자!대국민중심당
2012년 3월 8일 ~ 2012년 4월 12일 (정당 득표율 저조로 해산)
구천서 전 의원이 2011년 창당된 새희망노인권익연대를 개편하여 총선에 출마하였으나 충북[11]에서도 0.7%를 기록하며 정당이 해산됐다. 새희망노인권익연대의 원 구성 세력은 대국민중심당의 초대 대표를 지낸 윤영오를 중심으로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
2.1.8. 선진통일당
2012년 5월 29일 ~ 2012년 11월 29일 ( 새누리당으로 흡수 합당)
자유선진당의 총선 참패 후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게 된 이인제가 자유선진당의 당명을 변경한 정당. 그러나 당명 변경만으로 기울어가는 당세를 회복할 순 없었고,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를 내려 했으나 무산되기도 했다. 결국 대선 1달 전 새누리당에 합당됐다. 사실상 마지막 충청권 보수정당으로 분류된다.
2.1.9. 충청의미래당
2020년 3월 6일 ~ 2023년 9월 21일 ( 내일로미래로로 당명 변경)
2020년 자유민주연합 - 국민중심당- 자유선진당( 선진통일당)으로 이어졌던 충청권 보수정당을 잇기 위해 박석우 대표가 창당한 정당. 그러나 제21대 총선 결과 전국 0.03%, 충청권 평균 0.17%로 원내 입성에 실패했고, 3년 뒤 신한반도평화체제당, 직능자영업당과 합당 후 내일로미래로로 개편됐다.
3. 소속인물
3.1. 국회의원
3.1.1. 13대 국회
제13대 총선 당선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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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15대 국회
제15대 총선 당선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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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총선 당선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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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환 |
3.1.4. 17대 국회
제17대 총선 당선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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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18대 국회
제18대 총선 당선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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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19대 국회
제19대 총선 당선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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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광역자치단체장
3.2.1. 인천광역시장
대수 | 이름 | 임기 | 정당 |
10대 | 최기선 (崔箕善) |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 자유민주연합[12] |
3.2.2. 대전광역시장
대수 | 이름 | 임기 | 정당 |
6대 | 홍선기 (洪善基) | 1995년 7월 1일 ~ 1998년 6월 30일 | 자유민주연합 |
7대 |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 ||
10대 | 염홍철 (廉弘喆) | 2010년 7월 1일 ~ 2014년 6월 30일 | 자유선진당 |
3.2.3. 세종특별자치시장
대수 | 이름 | 임기 | 정당 |
초대 | 유한식 (兪漢植) | 2012년 7월 1일 ~ 2014년 6월 30일 | 자유선진당 |
3.2.4. 강원도지사
대수 | 이름 | 임기 | 정당 |
31대 | 최각규 (崔珏圭) | 1995년 7월 1일 ~ 1998년 6월 30일 | 자유민주연합 |
3.2.5. 충청북도지사
대수 | 이름 | 임기 | 정당 |
29대 | 주병덕 (朱炳德) | 1995년 7월 1일 ~ 1998년 6월 30일 | 자유민주연합 |
30대 | 이원종 (李元鐘) |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
3.2.6. 충청남도지사
대수 | 이름 | 임기 | 정당 |
32대 | 심대평 (沈大平) | 1995년 7월 1일 ~ 1998년 6월 30일 | 자유민주연합 |
33대 |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 ||
34대 | 2002년 7월 1일 ~ 2006년 3월 24일[13] |
3.3. 당대표
총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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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59955e> 초대 김종필 |
◀
한국국민당 총재
|
}}}}}}}}}}}} |
총재 및 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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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재 | |||
<rowcolor=#289020> 제1·2대 김종필 |
권한대행 김복동 |
제3대 박태준 |
권한대행·제4대 이한동 |
|
<rowcolor=#289020> 제5대 김종필 |
권한대행 이인제 |
비대위 조부영 |
||
대표최고위원 | ||||
<rowcolor=#289020> 제6·7대 김학원 |
||||
한나라당 대표 ▶
국민중심당 대표 ▶ 희망의한국신당 대표 ▶ 하나로국민연합 대표 ▶ |
}}}}}}}}}}}}}}} |
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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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용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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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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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e85298> 초대 심대평 신국환 |
}}}}}}}}}}}} |
총재 및 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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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재 | ||||
초대 이회창 |
|||||
대표최고위원 | |||||
초대 심대평 |
제2대 이회창 |
제3대 변웅전 |
제4대 심대평 |
비대위 이인제 |
|
◀
국민중심당 대표
선진통일당 대표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width: 10%; text-align: lef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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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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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심대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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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word-break: keep-all"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373A3C,#DDD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초대 이인제 |
새누리당 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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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박석우 |
제2대 박석우 최창원 |
|||
}}}}}}}}}}}} |
4. 선거 결과
4.1. 대통령 선거
후보자 | 연도 | 대수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결과 |
김종필 | 1987년 | 13대 |
[[신민주공화당| |
1,823,067표 | 8.06% | 4위 |
심대평 | 2007년 | 17대 |
[[국민중심당| |
사퇴[14] |
4.2. 국회의원 선거
연도 | 국회 | 정당 | 전체 의석수 | 지역구 | 비례 | 결과 |
1988년 | 13대 |
[[신민주공화당| |
35 / 299 | 27 / 244 | 8 / 75 (15.8%) | 원내 4당 |
1996년 | 15대 |
[[자유민주연합| |
50 / 299 | 41 / 253 | 9 / 46 (16.2%) | 원내 3당 |
2000년 | 16대 | 17 / 273 | 12 / 227 | 5 / 46 (9.8%) | ||
|
1 / 273 | 1 / 227 | 0 / 46 (0.4%) | 원내 5당 | ||
2004년 | 17대 |
[[자유민주연합| |
4 / 273 | 4 / 227 | 0 / 46 (2.82%) | |
2008년 | 18대 |
[[자유선진당| |
18 / 299 | 14 / 245 | 4 / 54 (6.85%) | 원내 3당 |
2012년 | 19대 | 5 / 300 | 3 / 246 | 2 / 54 (3.23%) | 원내 4당 | |
[[가자!대국민중심당| |
0 / 300 | 0 / 246 | 0 / 54 (0.28%) | 원외정당 | ||
2020년 | 21대 |
[[충청의미래당|]] |
0 / 253 | 0 / 47 (0.03%) | 원외정당 |
4.3. 지방선거
연도 | 횟수 | 정당 | 광역자치단체장 | 기초자치단체장 | 광역자치단체의회의원 | 기초자치단체의회의원 |
1995년 | 1회 |
[[자유민주연합| |
4 / 15 | 24 / 230 | 94 / 970 | -[15] |
1998년 | 2회 | 4 / 16 | 29 / 232 | 95 / 690 | ||
2002년 | 3회 | 1 / 16 | 16 / 232 | 33 / 682 | ||
2006년 | 4회 |
[[국민중심당| |
0 / 16 | 7 / 230 | 15 / 733 | 67 / 2888 |
2010년 | 5회 |
[[자유선진당| |
1 / 16 | 13 / 228 | 41 / 761 | 117 / 2888 |
[[국민중심연합| |
0 / 16 | 1 / 228 | 0 / 761 | 2 / 2888 |
4.4. 재보궐선거
연도 | 정당 | 국회의원 | 광역자치단체장 | 기초자치단체장 | 광역자치단체의회의원 | 기초자치단체의회의원 |
1989년 재보궐선거 |
[[신민주공화당| |
0 / 2 | - | - | - | -[16] |
1996년 재보궐선거 |
[[자유민주연합| |
- | 2 / 4 | 0 / 3 | ||
1997년 재보궐선거 | 2 / 6 | - | - | |||
1998년 재보궐선거 | 1 / 11 | 0 / 1 | ||||
1999년 재보궐선거 | 1 / 3 | 0 / 9 | ||||
2000년 재보궐선거 | - | 3 / 11 | 1 / 41 | |||
2001년 재보궐선거 | 0 / 3 | 1 / 7 | 0 / 6 | |||
2002년 재보궐선거 | 0 / 14 | 0 / 1 | 0 / 1 | |||
2003년 재보궐선거 | 0 / 3 | 2 / 6 | 1 / 13 | |||
2004년 재보궐선거 | - | 0 / 4 | 0 / 24 | 1 / 45 | ||
2005년 재보궐선거 | 0 / 10 | - | 0 / 7 | 0 / 10 | ||
2006년 재보궐선거 |
[[국민중심당| |
0 / 6 | 0 / 4 | 0 / 1 | 0 / 2 | |
2007년 재보궐선거 | 2 / 13 | 1 / 19 | 0 / 21 | 2 / 63 | ||
2008년 재보궐선거 |
[[자유선진당| |
0 / 10 | 1 / 11 | 2 / 32 | 4 / 23 | |
2009년 재보궐선거 | 1 / 11 | 2 / 32 | 4 / 23 | |||
2010년 재보궐선거 | 0 / 8 | 0 / 2 | 0 / 1 | 0 / 3 | ||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 0 / 3 | 0 / 1 | 1 / 6 | 0 / 5 | 3 / 23 | |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 - | 0 / 11 | 0 / 11 | 1 / 19 | ||
2012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 1 / 1 | 0 / 5 | 0 / 37 | 0 / 19 |
[1]
DJP연합으로 1998년 2월 25일부터 2001년 9월 3일까지
연정 참여.
[2]
김종필은 박정희의 조카사위다.
[3]
이후 군소 정당인
충청의미래당이 미약하게마나 잇고 있었으나 원외 보수정당의 연합정당인
내일로미래로로 재창당되면서 충청권 지역주의 정당으로써의 성격이 옅어졌다.
[4]
이후
내일로미래로로 개편
[5]
충청권 보수정당의 텃밭이었던 충남 지역에서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6]
3당합당 이후 제3지대 정당이 세운 기록 중 가장 많은 의석이다. 2위는
20대 총선의 국민의당이 기록한 38석이다.
[7]
1998년 2월 25일부터 2001년 9월 3일까지 3년 6개월간 지속되었다.
[8]
교섭단체가 되려면 20석이 필요한데 자민련이 16대 총선에서 얻은 의석 수는 15대 총선에서 1/3 토막난 17석이었다. 이러한 몰락에는 복합적인 요소가 있는데, 자민련과 국민회의가 각각 주장했던 내각제 개헌과 총선 1인 2표제가 서로의 반대에 무산됨에 따라 연합공천이 진행되지 않았고,
국민의 정부를 반대하던 TK에선 연립여당인 자민련 대신
한나라당 지지로 선회해 수도권과 TK 지역을 모두 잃고 만다. 여기에 당시만 해도 유력 대권주자였던
이인제를 중심으로 민주당에서 적극적인 충청권 공략 정책을 펼치며 (자민련 입장에선) 팀킬을 하기도 했다.
[9]
새정치국민회의는 민주화의 두 축 중 하나인
김대중 대통령이
동교동계와 재야 인사를 중심으로 창당한
중도개혁주의 정당이었고,
자유민주연합은 그 민주화 세력과 적대관계였던 유신정권과 일부 신군부 인사들이
김종필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뭉친 정당이었다. 자민련 창당 초기에는 자민련이 성향상 신한국당의 오른쪽에 있다고 평가될 정도로 강경보수 성향이었다.
[10]
DJP연합 성사의 큰 공을 세운 실무자로 알려져있다.
[11]
자신의 지역구인 청주 상당이 있는 지역.
[12]
원래
새정치국민회의 당적으로 출마할 계획이었으나 당시
연립여당이었던 자민련에서 최기선이 필요하다는 요구를 하면서 자민련 당적으로 출마하게 된다.
[13]
결과적으로 관선, 민선 합해 14년 반을 재임한 셈이다.
[14]
무소속
이회창 후보 지지.
[15]
기초자치단체의회 정당공천제 존재하지 않음
[16]
기초자치단체의회 정당공천제 존재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