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1 16:39:28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Νικηφόρος Βρυέννιος

1. 반란자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2. 대(大)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3. 소(小)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3.1. 생애와 활약3.2. 제1차 십자군 원정3.3. 필로밀리온 전투3.4. 충신 브리엔니오스3.5. 말년3.6. 여담

1. 반란자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반란자) 참조.

2. 대(大)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Νικηφόρος Βρυέννιος
Nikephoros Bryennios (the Elder)

소(小)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의 백부, 할아버지 혹은 아버지로 추측되는 인물. 로마노스 4세가 재위하던 시절에는 주요한 군 지휘관이었으며, 만지케르트 전투가 벌어졌던 로마노스 4세의 3차 동방원정에도 종군했었다.

만지케르트 전투 당시에는 좌익 지휘관이었는데, 전열이 붕괴되는 대혼란 속에서도 침착하게 대처하여 병력을 온존하는 등 지휘력을 입증하여 높은 지명도와 인기를 누렸고 이후에는 불가리와 테마와 디라히온 테마 등 요충지의 둑스(Doux)를 연달아 맡았다.

그리고 1077년 11월, 실정이 계속되고 중앙정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황제 미하일 7세는 환관 니키포리치스의 조언에 따라 통제하기 버거웠던 니키포로스를 암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시도가 실패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니키포로스는 반란을 일으킨다. 브리엔니오스 가문은 아드리아노폴리스과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성장하여 해당 지방을 비롯한 제국 서부에 영향력이 상당했고, 반란을 일으킬 즈음에는 비교적 전력이 온전한 디라히온 테마의 병력에 고향 아드리아노폴리스에 있던 제국 최후의 중앙군을 흡수했으므로 세력은 강력했다. 니키포로스 자신도 만지케르트 전투 등의 전장을 거친 역전의 장수였고 군문에 들었던 일가붙이들도 동참했으므로 지휘관들의 수준도 뛰어났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동부군 총사령관이던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가 두카스 가문과의 협상을 통해 한발 먼저 수도에 입성해 니키포로스 3세로 즉위했고, 이후 니키포로스 3세가 임명한 제국군 총사령관 알렉시오스 콤니노스가 이끄는 진압군에게 칼라브리 전투(Battle of Kalavrye)에서 패배해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는 몰락하고 눈이 뽑히게 된다.

이후 니키포로스는 가문의 미래를 위해 소(小)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를 자신을 패배시킨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에게 맡겼고, 패배한 니키포로스를 수도로 압송하는 와중에도 깍듯이 대하며[1] 그를 존중하였던 알렉시오스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게 된다. 이후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하자 맹인임에도 그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여 신황제의 세력을 뒷받침 해주었고, 이후 쿠만족이 로마노스 4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인물을 앞세워 침공하자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이를 방어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3. 소(小)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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Νικηφόρος Βρυέννιος
Nikephoros Bryennios (the Younger)

생몰년도: 1062년 ~ 1135년
출생지: 아드리아노폴리스

콤니노스 왕조시기에 활약한 동로마 제국의 장수이자 역사가이다. 알렉시오스 1세가 제위를 차지할 때부터 함께하여 여러 이민족의 공격과 반란, 십자군의 준동을 막아내고 다음 황제의 제위까지 안정시킨 2대에 걸친 충신이다. 그의 출중한 무공과 학식에 비해 동로마사에서 유명세를 타지는 못했는데, 그의 아내 안나 콤니니 알렉시아스를 완성한 지명도 있는 역사가라 그의 존재감이 묻히는 감이 있다.

3.1. 생애와 활약

브리엔니오스 가문의 가주였던 대(大)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는 제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1078년 칼라브리 전투에서 패배하여 몰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문의 미래를 위해 소(小) 니키포로스는 유망한 장군이던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에게 맡겨졌다.

막 11살이 된 니키포로스는 콤니노스 가문의 보호 아래 당시 동로마 귀족들의 필수적 교양이었던 신학, 역사학, 철학을 섭렵했고, 동로마 최고의 군사령관이었던 알렉시오스 본인에게 직접 무술과 전략을 배우게 된다.

사료에 따르면, 기골이 장대하고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영리하고 우직했던[2][3] 그는 금방 알렉시오스의 마음에 들었다. 그는 기병 장교로서 알렉시오스의 참모장 노릇을 하였으며, 훗날 알렉시오스가 반정을 일으켰을 때 기병 일익을 진두지휘하는 등, 그의 오른팔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렇다고 행정과 학문에서 부족하였던 것도 아니었다. 디라히온의 역병을 진정시키기도 했고, 막 제위에 오른 황제가 로베르 기스카르와 맞붙은 디라히온 전투 당시에는 후방에 남아 수도 근교의 행정업무를 충실히 수행하기도 하였다. 황제가 되기 전부터 콤니노스 가문을 수행하였던 그의 경험은 훗날 안나 콤니니가 알렉시아스를 쓰는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알렉시오스 1세는 그를 옹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반정 공신들에게 각각 요직을 수여한다. 여기서 니키포로스는 콤니노스 가문 종친들과 여러 황제를 배출해낸 외척 두카스 가문을 제치고 반정의 1등공신으로 올라섰다. 이는 사실상 알렉시오스를 제위에 앉힌 요안니스 두카스 부제가 요구한 그의 외손녀 이리니와의 결혼, 그리고 공동황제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정치적 안배와 충성스러우면서도 능력있지만 비교적 독자적인 세력 기반은 약화된 그를 정계의 중앙으로 만들고 싶었던 알렉시오스의 조치에서 비롯되었다.

니키포로스는 황제에게 카이사르(Caesar)[4]의 칭호를 하사받았으며, 1097년 당시 14세였던 황녀 안나 콤니니와 결혼하면서 황제 다음 가는 지위 중 하나인 판히페르세바스토스(panhypersebastos)[5] 칭호를 받았다.

3.2. 제1차 십자군 원정

1096년 크리스마스, 십자군의 첫 번째 본대라고 할 수 있는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병력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에 당도했다. 하 로렌의 공작이었던 그의 병력은 그동안 소규모로 당도했던 백작들의 군대와는 질적으로 차이가 났다.[6] 고드푸르아는 이미 헝가리와 세르비아를 행군해오면서 앞선 십자군의 약탈과 학살로 분개한 각지의 왕들과 부족들에게 공격당해서 신경이 곤두서있는 상태였는데다, 헝가리 땅을 건너기 위해 많은 재물과 동생 보두앵을 인질로 맡겨놓은 상태여서 식량난도 심각했다.

이미 십자군의 진군로 상의 소도시가 약탈당하고, 통제되지 않는 군대가 수도 근교에 있는것이 부담스러웠던 알렉시오스 1세는 고드푸르아 공작을 부콜레온 황궁으로 초대하고 극진하게 대접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위그와 미카엘이 동로마에게 충성서약을 해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고드프루아는 황제의 초대를 거부하고 수도 근교의 약탈을 지속했다. 자신은 하 로렌의 공작으로서 서방제국의 황제에게 이미 충성을 맹세하였다는것이 그 이유였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위그를 통해 십자군에게 식량과 재물을 전달하며 다시금 설득하려 했지만 고드프루아는 오히려 더욱 분노할 뿐이었다. 위그를 내쫒은 고드프루아는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3개월동안의 공성전이 시작된 것이다. 황제는 니키포로스에게 방어전을 일임하고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고드프루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식량이었다. 트라키아의 아드리아노폴리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같은 풍요로운 대도시는 요새화되어 있었고, 테살로니키와 같은 항구도시는 함대가 없으면 공략할 수 없었다. 십자군은 일단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트라키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외곽의 전원지대 전역으로 퍼졌고, 니키포로스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기병대는 약탈을 위해 산개된 십자군 분대를 요격하고 본대가 합류하여 반격을 시작되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퇴각하는 유격전을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황제의 외교공작은 계속되었다. 근교에서 약탈과 게릴라가 지속되는동안 알렉시오스는 십자군에게 식량을 지원하기도, 끊기도 하면서 당근과 채찍을 계속 내주었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봉쇄하여 충성맹세 전까진 이교도의 땅으로 전진할 수 없게 방책을 세워놓았다. 군수 지원도 끊기고 고립된 고드프루아는 약탈을 지속하던 십자군을 결집하여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면돌파한다는 악수를 선택한다.

니키포로스는 정예 궁병을 삼중성벽에 배치하여 손쉽게 십자군을 개박살냈다. 일설에 따르면 수백명의 십자군이 사망했음에도 제국 측의 피해는 겨우 3명이었다고 한다. [7]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수백년간 이민족과 무슬림들에게 그랬듯이 이번엔 십자군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거름더미로 만들어버렸다. 고드프루아는 결국 황제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충성서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그들은 1097년 2월에 동로마 해군의 도움으로 소아시아에 상륙하였다. 그해 5월에 나머지 십자군들이 도착할 때까지 고드푸르아는 집결지인 키보토스에 머무르면서 인근의 룸 술탄국의 소부족들과 요새들을 약탈하며 소일할 수밖에 없었다.

3.3. 필로밀리온 전투

십자군이 1098년에 성지를 수복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는 동안 동로마 제국은 룸 술탄국의 반격을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이코니온, 도릴레온(Dorylaion), 케사리아 등의 도시들은 십자군의 방기와 동로마의 여력 부족으로 룸 술탄국에게 다시 빼앗겼고, 1099년에는 룸 술탄국이 니케아를 공성하다 돌아가는 등, 수복한 지역의 방비는 부족했다.

서방에서도 외적들의 침공이 다시 시작되었다. 1109년 경, 제국의 숙적이었던 로베르 기스카르의 아들 안티오키아 공 보에몽 1세가 디라히온을 재침공했다. 황제가 신성 로마 제국,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고 보에몽을 격퇴하여 제국 서부와 안티오키아 접경의 안정을 지키기 전까지, 제국은 중부 아나톨리아로 진격할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서부 아나톨리아의 수복지를 포기할 수 없었다. 국력의 한계와 직접적인 군사적 원정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던 알렉시오스 1세는 일단 당시 아나톨리아 동부부터 서부 끝까지 그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은 채 촌락을 횡행하고 유린하던 튀르크멘 유목민들로부터 수복지를 수호하기 위해 주요 지역을 요새화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비티니아의 니케아와 니코미디아, 이오니아의 스미르니, 미시아의 아비도스 등지가 굳건하게 요새화되어 이 인근 지역이 크게 안정화되었다. 이 지역에는 만지케르트 전투 이래 아나톨리아 곳곳에서 피난해온 로마인 기독교도들이 정착하였다. 주요 지역을 요새화하는 과정에서 1090년대 초 스미르니의 튀르크인 토후 차카에 의해 파괴된 미시아의 항구 도시 아드라미티온(Adramyttion)을 재건하기도 하였다.[8]

1108년 보에몽이 항복하여 명목상 황제의 봉신으로 전락하자, 제국은 아나톨리아로 다시 눈을 돌렸다. 룸 술탄국도 십자군의 충격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제국은 군대을 재편성할 5년의 귀중한 시간이 생겼다.

레부니온 전투 이후 착실히 재건되던 동로마의 중앙군은 1110년대에 발칸 반도 북부의 보고밀파 반란을 선무하고 1111년엔 튀르크의 반격을 분쇄하며 아나톨리아로 진군할 준비를 하였다. 어느정도 대내외 사정을 정리한 룸 술탄국이 먼저 1113년에 5만 8천의 대군을 이끌고 니케아를 공성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후 튀르크의 공격 방식은 요새 라인에 병력을 들이미는 공성전 방식이 아닌, 자신들의 장점인 궁기병을 이용한 게릴라 약탈전으로 선회하였다. 이에 따라 1115년, 룸 술탄 말리크 샤는 아드라미티온부터 트라키아 인근까지 수십곳의 대도시 근교를 약탈하고 후퇴했다. 이에 황제는 1116년, 드디어 군대를 소집했다.

이후 필로밀리온 전투 문서 참조.

3.4. 충신 브리엔니오스

1117년 니키포로스와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금문으로 개선했고, 그에 대한 시민들과 군부의 지지는 매우 높았다. 황제 자신이 신학 논쟁과 불가리아 반란 등으로 인해 평가가 갈렸던 데에 비해 황제의 사위 니키포로스에게는 정적이 존재하지 않았다. 두카스 가문을 비롯한 대귀족들과 황실의 외척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대표하는 황녀 안나 콤니니와 그녀의 부군 니키포로스를 지지하였고, 황제의 사후 공동 황제로 삼기를 원했다. 실제로 알렉시오스 1세는 안나와 그 남편[9]을 공동황제로 삼기로 약속하기도 했으나, 장남 요안니스 2세가 장성하고 나서는 이 약속을 깨었다. 바실레우스의 칭호는 요안니스에게 넘어가고 일부 유력자들은 불만을 표출했다. 유력한 황위 계승자로 부상한 니키포로스였지만, 그는 침묵을 지켰다.

1118년, 재위 내내 니키포로스가 섬겨온 알렉시오스 1세가 죽고 그 아들 요안니스 2세가 황제가 되었다. 두카스 가문을 위시한 외척과 귀족세력들, 황제의 어머니인 이리니 태후, 황제의 누이인 안나는 제위 계승의 혼란을 틈타 쿠테타를 일으키고, 니키포로스를 황제로 세우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니키포로스는 아내와 장모의 음모에 미온적이었고, 이는 음모가 발각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음모에 미온적이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역사가들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인 안나 콤니니는, 자신의 남편이 우직하고 똑똑하긴 했지만 소심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며 한탄하는 내용을 기록하였고, 당시 역사가 니키타스 호니아티스는 어릴 적부터 콤니노스 일가와 자랐던 니키포로스가 황제의 은덕을 배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설명한다. 현대 역사가들도 니키포로스의 실권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을 수 있었기에 제위찬탈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두카스 가문의 꼭두각시가 될 것을 염려하여 신중했었다는 주장과, 겨우 안정시켜놓은 제국에 다시금 혼란을 가져올 수 없다는 충심에서 나온 결정이라는 주장이 혼재한다. 무엇이 사실이던 간에 그의 결정은 제국에 대한 큰 충성심이 없이는 나오기 힘든 결단이였다.[10]

어찌되었든 안나로서는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반란의 중심이 되어야 할 니키포로스가 쿠데타를 반대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시도는 무의미했다. 태후 이리니와 공주 안나는 부콜레온 황궁으로 끌려와 용서를 간청해야 했다. 니키포로스는 황제에게 눈물로 선처를 호소하였고, 황제의 온후한 성품과 더불어 반역자에 대한 처분으로는 관대하게도 이리니 태후와 안나는 수도 밖으로 추방당하는 데에 그쳤고, 그마저도 요안니스가 명을 거두어 수녀원과 저택에서 평생동안 근신할 뿐, 일신의 위해는 없이 평온하게 살게 된다.[11]

3.5. 말년

요안니스 2세는 매형의 충성심에 감명받았다. 50대의 그는 1119년부터 1121년까지 아나톨리아 남부 카리아의 튀르크 토후들에 대한 원정에 종군해 연전연승하였다. 하지만 이 원정 동안 시작된 지병이 심해져 그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요양하며 저서를 쓰는 시간이 늘어났다. 하지만 1136년, 안티오키아 공 레몽이 제국의 수위권에 반기를 들고,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공국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니키포로스는 다시 노구를 이끌고 종군해야 했다. 1137년, 황제와 니키포로스가 이끄는 4만 5천의 군대는 시스(Sis)와 아다나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축출하고, 안티오키아 공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시리아 지역으로 진격하는 동안 지금까지 앓았던 지병이 시리아 풍토병과 함께 심해져 다시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요양하러 진중을 떠나야 했다. 황제는 어의를 보내주는 등 그를 극진히 대했지만. 니키포로소는 그해 말 62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3.6. 여담

여러모로 아내 때문에 시달린 흔적이 보인다. 아내인 안나와 무려 21살 차이가 났지만 콤니노스 왕조 최초의 포르피로옌니타인 안나의 위상에 공처가로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니키포로스는 안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알려져 있다. 21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둘은 여섯 명의 아들 딸을 낳았으며, 안나의 모반 음모가 실패할 때 구명에 가장 적극적인 것도 니키포로스였다. 안나는 반란을 황제에게 고한 남편에게 투덜대긴 했지만, 그를 항상 사랑했던 마음은 그녀의 저서에 잘 나타나있다.

안나의 유명한 저서 알렉시아스는 원래 니키포로스가 초안을 쓰다가 먼저 죽으면서 그 저작과 각종 사료, 그리고 안나의 시각에 기반하여 완성한 것이다. 안나는 서장에서부터 이 사실을 적시하고 있으며, 니키포로스의 사망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아픔이었는지를 기록한 이후에 1권을 시작한다.


[1] 니키포로스는 제국 전역에서 인망높은 인물이었고 반란군이었지만 패배하기 전엔 사실상의 황제였던 데다 그만한 능력과 세력이 있었다. [2] 그의 아내인 안나가 쓴 알렉시아스에 의하면 대(大) 니키포로스 역시 기골이 장대하고 위엄있는 군인이며 뛰어난 무용과 지휘력을 갖췄다고 한다. 남편과 그의 가문을 띄워주기 위한 립서비스가 아니라면, 대체로 브리엔니오스 가문의 사람들은 대체로 체격이 크고 군재가 있는 천성 군인집안이었던 모양이다. [3] 정작 안나의 아버지인 알렉시오스와 남동생 요안니스는 외모나 체격적인 면에서 좋은 기록이 없다는 점이 대비 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알렉시오스는 키가 작고 장수로서의 위광에 비해 볼품없는 체격이었고, 요안니스는 풍채는 알렉시오스보다 좋았으되 피부가 어두운 편이어서 베네치아와의 분쟁 중 베네치아의 해군이 흑인을 세워놓고 너희 황제라고 조롱할 정도였다. [4] 고대 로마에서 카이사르는 황제 그 자신을 의미하는 칭호였지만, 중세 초기부터 카이사르는 '부제'를 상징하는 칭호로 격하되었다. [5] 고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단어 Sebastos에 Pan(모든)+Hyper(더한, 뛰어난)를 더한 것. 즉, '모든 이보다 존귀한 자'. [6] 알렉시아스에서 안나는 그 전에 선봉대로 도착하였던 베르망두아의 위그와 미카엘 백작등의 병력은 민중십자군과 별반 다를바 없는 수천명의 가난뱅이들이었다고 묘사했다. [7]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3권 쇠퇴와 멸망) [8] 이 요새지대는 훗날 니케아 제국 때에도 건재하여 룸 술탄국과 튀르크의 공격을 막아내다가, 14세기 경 오스만 튀르크에게 파괴당했다. [9] 미하일 7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10] 안나 콤니니도 그의 소심함과는 상관없이 충성심만은 흔들림이 없었다고 후대에 기록했다. [11] 이 이유에서인지 안나는 자신의 쿠테타를 진압한 남편을 자기 저서에서 계속 비판하면서도 진심으로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