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9:13:11

김창덕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한국 독립운동가, 북한 군인, 정치인.

2. 생애

1903년 6월 6일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났다. 일명 리덕산으로도 알려져 있다. 중국 동녕현 석고촌에서 농사를 지었다.

1929년 10월, 중국 혁명에 투신하였으며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흑룡강성 밀산에서 반일유격대에 가담, 동북항일연군 산하 4군에 참여하여 북만주에서 싸웠다. 1934년 중국공산당의 추천을 받아 소련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 1937년 졸업하고 1938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방호산, 진반수, 림해, 박훈일, 리림, 전우, 장복, 리권무와 함께 연안으로 파견되어 중일전쟁에 참가하였다. 1940년에 연안 항일군정대학 동북간부훈련반을 졸업하고 중공중앙 경호연대 분대장으로 배치되어 마오쩌둥 경호하였다. 중일전쟁 종료 이후에는 국공내전에 참여, 1945년 11월 조선의용군 3지대 부지대장이 되었다.

1946년 4월 28일, 소련군이 철수한 이후 하얼빈 점령에 참여하였으며 하얼빈에서 3지대 병력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1946년 가을에 기존 지대장 리상조 등이 북한으로 귀국하면서 신임 조선의용군 3지대장에 임명되었고 장춘 전투에서 국부군과 교전하였다. 1948년 11월, 3지대가 장춘 점령을 위해 독립 11사단에 편입되면서 독립 11사단 부사단장이 되었다. 장춘 점령 이후 1949년 초 중공중앙의 명령에 따라 독립 11사단은 중국인민해방군 동북군구 164사단으로 개편되면서 부사단장에 유임되었다.

1949년 8월 23일, 164사단 산하의 조선인 부대 1만명을 이끌고 회령을 통해서 귀국, 나남에 주둔하여 그대로 조선인민군 5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조선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낸 고려인 유성철은 원래 김창덕이 무능하다는 평이 많았으나 자신이 추천해준 덕분에 5사단장이 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6.25 전쟁 발발 이후 동부전선에서 싸웠으며 유엔군의 반격으로 강계까지 후퇴한 이후 김일성으로부터 후퇴를 조직적으로 잘했다고 치하받았다 카더라. 1950년 11월, 8군단장으로 승진하였으며 최고사령부 경무국장, 서해방어사령관 등으로 재직했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5년에 연안계 동료인 방호산, 박일우 등이 숙청당했지만 김창덕은 무사히 살아남았다. 김일성은 김창덕은 반동 박일우에 맞서 잘 투쟁했다고 오히려 칭찬하며 그를 보호해주었고 김창덕은 동료들 사냥에 참여했다. 덕분에 총참모부 간부국장, 총정치국 규율위원장을 지냈다고 한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민족보위성 국장에 임명되었다.민족보위성 국장 시절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경험이 조선인민군의 혁명전통이라고 김일성 숭배 활동을 벌였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8년 1월 21일, 리권무, 최종학, 최현, 김봉률, 류경수, 김철우, 최용진, 리림, 리방남, 지병학, 김화천, 정병갑, 전우, 김창봉, 김대홍, 한일무, 유성철, 최광, 허봉학, 오진우, 정화준, 박창림, 전문섭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1958년 11월과 12월에 있었던 김일성의 중국 방문 때 김광협, 허봉학, 지병학, 장서환, 장봉진과 함께 군사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1959년 1월에 검열위원회 위원에 보선되었으며 검열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및 검열위원회 부위원장에 재선되었고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하지만 김일성이 연안계를 토사구팽하는 과정에서 1964년 4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서 소환되었고 1967년 4월에 국가검열성 부상을 거쳐 황해남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좌천되었다가 그나마도 1969년 5월에 해임되었다. 북한에서는 '휴식하였다'라고 하는데 토사구팽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 싶다. 김영순은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에서 김창덕이 평성 인민위원회 지도원으로 쫓겨났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래도 중국에 잔존한 연안계 생존자들은 제일 무능하고 늙은 놈이 유일하게 제명에 죽었다고 씹었다.

이후 조용히 살다가 1988년 5월 24일 사망했다. 그래도 김일성 편을 계속 들은 것이 참작되었는지 복권되어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항일혁명렬사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3. 참고문헌

  • 김중생, 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 전쟁(서울: 명지출판사, 2000).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안문석, 무정평전(서울: 일조각, 2019).
  • 한국일보 편, 증언 김일성을 말한다: 유성철, 이상조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체(서울: 한국일보사, 1991).
  • 조선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