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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봉학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빨치산 1세대 출신의 북한의 군인, 정치인. 본관은 양천(陽川).

1969년 1월, 군벌관료주의자로 몰려서 김창봉과 함께 숙청당했다.

2. 생애

생년도 초기 이력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소련 문서에 따르면 1917년, 만주에서 태어났다.

투옥된 독립운동가 허봉학이 있으나, 시기상 허봉학은 그 이전부터 빨치산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동명이인으로 보인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3영 제5련 제1배장으로 근무했다. 1938년, 제5사에 배속되어 김창봉과 함께 안길 밑에서 싸웠다.소련의 지도 하에 88여단에 편입되었으며, 리영호의 제3영 소속이 되었다. 소련군의 만주 진공 당시에는 소련 극동군 첩보부대에 배속되었다.

8.15 광복 후 1945년 9월, 항일 빨치산들을 중심으로 중앙지도부가 구성되면서 최현, 오진우, 최춘국과 함께 함경북도로 파견되어 당조직 장악 사업을 하였다. 서북5도당책임자급열성자대회에 대표로 참석은 했는데,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지는 못했다. 강원도 보안국 부부장으로 사업하다가 조선인민군 창건 이후 제2사단 3연대장에 임명되었다. 1949년 2월 7일, 강상호, 박금철, 전창철, 최종학, 김창봉, 리두찬, 서철, 안영, 전문섭 등과 함께 국기훈장 3급을 받았다.

6.25 전쟁에 리권무의 4사단 참모장으로 참전, 1951년 2월에 소장으로 진급하여 4군단장까지 맡았었고 휴전 이후 1956년 10월, 제1군관학교 교장을 맡았다. 1958년 1월 21일, 리권무, 최종학, 최현, 김봉률, 류경수, 김철우, 최용진, 리림, 리방남, 지병학, 김화천, 정병갑, 전우, 김창봉, 김대홍, 한일무, 유성철, 최광, 김창덕, 오진우, 정화준, 박창림, 전문섭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1958년 6월에 중장 진급이 확인, 1958년 12월 2일부터 10일 사이에 김일성을 따라 김광협, 김창덕, 지병학, 장서환, 장봉진과 함께 군사대표단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958년부터 1959년 사이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총장을 역임했으며, 1959년 6월 부터 1959년 10월 사이에 잠시 2집단군 사령관을 지냈다. 1959년 11월, 민족보위성 부상에 임명되었다가 1960년 3월, 상장으로 진급, 1960년 7월에 총정치국장에 임명되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3년 2월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위원회 후보위원로 승진, 비서국이 설치되면서 비서국 비서로 선거되었다. 1967년 3월, 리봉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7년 4기 15중전회에서 대남총국장 리효순이 숙청되면서 총정치국장 자리를 오진우에게 물려주고 후임 대남총국장에 임명되었으며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으로 재선되었다. 조직지도부장 김영주가 2인자로 부상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그가 성분도 의심스러운 철부지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김일성의 뒤를 이은 2인자 자리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대남 무력도발을 강경하게 이끌었다. 나중에 김일성은 방북한 이후락에게 1.21 사태 등이 다 이들의 잘못이라고 맹비난했다. 어쨌거나 1968년 2월 3일, 조국의 륭성발전과 인민무력의 창건 및 강화발전을 위해 헌신분투하고 6.25 전쟁 참전, 사회주의 혁명과 국방력 강화를 위한 투쟁에 특출난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창봉, 석산, 최광, 오진우, 오백룡과 함께 공화국영웅 칭호, 국기훈장 1급, 금별메달을 받았다. 1968년 3월, 홍명희 장의위원을 지냈다.

결국 총정치국 부국장 리용무 등이 허봉학, 김창봉에 대해 상부에 밀고하였고, 이들은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된다. 1968년 10월부터 당검열 그루빠가 집단군, 군단, 사단까지 모조리 검열하였고, 당 간부화 정책의 파괴, 전국 요새화의 반대, 낭비, 군벌주의, 관료주의 등이 고발되었다. 1968년 11월, 조선로동당 4기 18중전회와 1969년 1월, 조선인민군 당위원회 4기 4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김일성은 김창봉, 허봉학을 군벌관료주의자로 지목하여 혹독하게 비판하고 숙청하였다. 그와 함께 최광, 김정태, 김철만, 김양춘 등도 숙청되었다. 1969년 5월, 허봉학의 숙청 이유에 대해서 묻는 소련 측의 질문에 김일성은 흥분하여 허봉학은 개새끼이며, 정치도덕적으로 부패한 놈이고 마오쩌둥 린뱌오의 추종자라고 갖은 욕설을 퍼부었다. 지금까지도 군을 특수화하고 당군 분리의 원칙을 저버리고 군을 당 위에 올려놓으려 한 군벌주의자로 북한에서 공식적 역적 취급당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최광, 김철만, 김정태, 김양춘도 모조리 숙청당했으나 그나마 이들은 후일 복권되었으며 그 이후 김정태와 김양춘은 복권된 이후로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고 최광과 김철만은 다시 정권 수뇌부로 복귀한 이후 천수를 누리다가 죽은 뒤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었다. 후임 대남총국장에는 김중린이 임명되었다.

3. 참고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스즈키 마사유키 (2004), 북한 인민군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군벌관료주의자' 숙청과 비대칭전략 완성, 한일공동연구총서 7.
  • 와다 하루키,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서울: 창작과비평사, 1992)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 소장 북한 인물 자료 III(과천: 국사편찬위원회, 천안: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