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0:59:56

김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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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로동당 마크.png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colcolor=#FED11E> 상무위원 <colbgcolor=#fff,#222>1980년 10월 6기 1차 전원회의 김일성· 김일· 오진우· 김정일· 리종옥
가나 1980년 10월 6기 1차 전원회의 박성철· 최현· 림춘추· 서철· 오백룡· 김중린· 김영남· 전문섭· 김환· 연형묵· 오극렬· 계응태· 강성산· 백학림
1982년 8월 6기 6차 전원회의 최영림(승진)· 서윤석(승진)[1]
[1] 북한의 공식 약력에 따르면 이 시점에서 김만금도 정치국 위원을 지냈으나 언론보도상으론 확인할 수 없음.
1983년 3월 리종옥(강등)
1986년 12월 6기 8차 전원회의 허담(승진)
1986년 12월 6기 8차 전원회의 리근모(승진)· 홍성남(승진)
1988년 3월 6기 13차 전원회의 계응태(재승진)
1988년 11월 6기 14차 전원회의 전병호(승진)
1990년 5월 6기 18차 전원회의 최광(승진)· 한성룡(승진)
1993년 12월 6기 21차 전원회의 김영주(복귀)
후보위원 1980년 10월 6기 1차 전원회의 허담· 윤기복· 최광· 조세웅· 최재우· 공진태· 정준기· 김철만· 정경희· 최영림· 서윤석· 리근모· 현무광· 김강환· 리선실
1981년 4월 6기 3차 전원회의 강희원
1981년 10월 6기 4차 전원회의 계응태(강등)
1982년 4월 6기 5차 전원회의 홍성남
1982년 8월 6기 6차 전원회의 전병호· 김두남
1983년 6월 6기 7차 전원회의 안승학· 홍성룡· 김복신
1983년 12월 6기 8차 전원회의 김중린(강등)
1986년 2월 6기 11차 전원회의 홍시학· 홍성남(복귀)
1988년 11월 6기 14차 전원회의 한성룡· 홍성남(강등)
1990년 5월 6기 18차 전원회의 최태복· 김철만(복귀)· 최영림(강등, 복귀)
1992년 12월 6기 20차 전원회의 연형묵(강등)· 김달현· 김용순
1993년 12월 6기 21차 전원회의 양형섭(강등, 복귀)· 홍석형[2]
[2] 이후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가 보선되었으며 그가 송두율이라는 주장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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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제2경제위원장
김철만
金鐵萬 | Kim Chol Man
파일:김철만.jpg
출생 1920년 11월 2일
함경남도 갑산군
(現 량강도 운흥군)
사망 2018년 12월 3일 (향년 98세)
평양시
국적
[[북한|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직업 군인, 정치가
정당


1. 개요2. 생애3. 수훈4. 여담5. 매체에서6. 장의위원회 구성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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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빨치산 1세대의 일원으로 군수공업의 전문가였다.

2. 생애

1920년 11월 2일, 함경남도 갑산군의 가난한 화전민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조국광복회 회원이었다고 한다. 이후 리동백의 추천으로 17세의 나이로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에 입대하였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1936년 7월, 조국광복회에 가입, 1937년 7월 장백현 19도구 자양개에서 빨치산에 참가하여 소년중대를 거쳐 오중흡 7연대에서 활동했다. 이때 김일성이 김철만의 키가 너무 작아서 받아주기 어렵다고 하자 김철만이 고된 농사일로 굵어진 팔뚝을 보이면서 받아달라고 떼를 썼고, 이에 김일성이 김철만의 입대를 허락해주었다고 하고 빠른 움직임 덕분에 오중흡의 전령병이 되었다.

8.15 광복 이후 조선인민군 창건 사업에 투신, 중대장, 대대장을 거쳐 1948년 7월, 군 대좌로 진급, 10사단 산하 25연대장으로 승진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연대장으로 참전, 군사 부사단장으로 승진하였다.

전후 1955년 4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 37사단장에 임명되었으며 1958년 2월 5일,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기념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62년 7월에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1964년 민족보위성 작전국장을 거쳐 1965년에 2군단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집단군 참모장을 거쳐 1968년 2월에 상장으로 진급,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 1970년 7월 군 제1부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68년 9월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정치적으로 잘나가기 시작하여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보선된 것으로 시작으로 1967년에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1969년 1월, 허봉학, 김창봉이 숙청될 때 비판을 좀 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후방사업을 담당하면서 호화 터널을 짓는 등 쓸데없는 짓을 하다 걸려서 그랬다. 그래도 최광이 혁명화를 십년 가까이 당한 것과 달리 큰 타격 없이 1969년부터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고,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및 군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72년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 1976년 4월,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 1977년 3월, 지병학 장의위원, 1978년 9월, 한익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 및 군사위원회 위원에 재선출되었으나 1981년 10월, 6기 4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소환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커리어는 계속 이어져 1982년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86년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89년에 대장으로 진급, 군수동원총국장에 임명되었다가 이후 제2경제위원장을 지냈다.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 1986년 4월, 김좌혁 장의위원, 1987년 8월, 리진수 박영순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 9기 대의원에 재선되는 한편 국방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90년 5월 23일, 조선로동당 6기 18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재선되었다.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2년 4월 2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오진우, 최광, 전문섭, 백학림, 리을설, 주도일, 리두익, 최인덕, 황순희, 태병렬, 김룡연, 최용진, 리종산과 함께 공화국 2중영웅이 되었다.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 1998년 12월, 전문섭 장의위원,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9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국방위원회 위원에 유임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나이인지 2003년부턴 슬슬 은퇴 단계에 접어들어 2003년 11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에는 재선되었지만 국방위원회 위원에는 해임되고 백세봉에게 국방위원 및 제2경제위원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2005년 4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항일 빨치산이라고 기념메달을 받았으며 2010년 5월에도 러시아 정부가 대조국전쟁 승리 65주년 기념메달을 수여하였다. 2008년 10월, 박성철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12년 2월에 김정일훈장을 받았다.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해임되었으나 중앙위원회 위원에는 유임되었으며 2010년 11월, 조명록 장의위원, 2011년 12월, 김정일 장의위원, 2015년 11월, 리을설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중앙위원회 위원 직책은 죽을때까지 유지했다.

이렇게 북한의 최고 원로 중 한명으로 잘 대접받았으며 2018년 2월 8일, 최영림, 리용무, 오극렬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 70주년 주석단 특별석에 초대받기도 했다. 그리고 10개월 후인 12월 3일, 방광암으로 투병하다가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무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공동 명의의 부고를 발표, "김철만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령도따라 한생을 혁명의 군복을 입고 조국의 해방과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인민군대와 국방공업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여온 항일혁명투사이며 견실한 로혁명가이다. (...) 김철만동지는 당과 혁명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정신,투철한 혁명적원칙성과 겸손하고 소탈한 품성으로 하여 인민들과 인민군군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김철만동지의 생애는 혁명의 수령을 신념과 의리로 받들고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멸사복무한 참다운 혁명가의 한생이였다. 김철만동지의 서거는 사회주의위업의 최후승리를 앞당기기 위하여 힘차게 투쟁하고있는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커다란 슬픔으로 된다."라고 그야말로 찬사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12월 5일, 장의식이 거행되었으며 시신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수훈

4. 여담

김치국물에 말아먹는 메밀국수를 너무 좋아하여 없으면 밥을 먹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안길이 동지들이 만들어준 소중한 음식을 가지고 반찬투정을 하는게 말이 되냐고 한번 그를 털었지만 식성은 끝내 고치지 못하였다고.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김철만이 김치메밀국수에 중독된 것이 해방 이후에 김정숙이 그에게 대접한 김치국수 맛이 너무 좋아서 잊지 못해서 그렇게 됐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또 다른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1976년, 8.18 도끼만행사건으로 북한이 발칵 뒤집힌 상황에서 8월 22일, 김일성이 김철만에게 난데없이 가족휴가를 주었다고 한다. 이에 김철만이 상황상 도무지 휴가를 가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김일성에게 명령을 철회해달라고 했지만 김일성이 총정치국장 명의로 휴가를 강행했다고 하는데, 6.25 이후로 한번도 제대로 쉬지 못한 김철만에 대한 배려였다고 북한은 주장하지만 내막은 모를 일이다.

5. 매체에서

  • 지금 평양에선에서는 문오장이 김철만 역을 맡았다. 한때 문오장이 김일성 역을 맡았다고 잘못 알려졌지만 유튜브에 업로드된 자료화면을 보면 김일성이 아니라 김철만 역으로 나왔다.

6. 장의위원회 구성

7. 참고문헌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21 북한 주요인사 인물정보』(서울: 통일부,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