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7 14:49:46

조세웅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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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1927년 4월 7일, 평안북도 용천군 학흥리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1941년 3월, 용천군 국민학교 졸업 이후 신의주에서 2년간 직업학교를 다녔다. 이후 북중기계공장 선반공으로 일하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이후 한동안은 선반공으로 일하다가 1946년 4월, 용천군 동하면 민청위원회 조직부장에 발탁되었다. 이후 용천군 동하인민학교 교원, 진신인민학교 훈육주임으로 일하다가 6.25 전쟁 발발 이후 서울로 파견되어 당사업을 했다. 유엔군의 반격 이후 1950년 10월, 조선민주청년동맹 룡천군위원회 조직부장에 임명, 운전군위원회, 평양시 서구역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일했다.

1950년대 말, 김책공업대학을 거쳐 소련으로 유학했다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딱히 언급을 안하고 있다. 1958년 8월, 평양시위원회, 중구역위원회 지도원 및 조직부장으로 일했고 1963년 6월, 구성광산기계공장 당위원장이 되었다. 이때 김일성이 현지지도를 가서 유일사상체계가 확고히 선 동무라고 조세웅을 치하하면서 고속승진하게 된다. 1967년, 갑산파 사건 리봉길과 함께 지방당에서 갑산파 숙청에 적극 참여하였고 김정일은 아래당조직에서 반당수정주의자들과 가장 잘 싸운 것은 한영옥, 조세웅, 리봉길이라고 칭찬하였다.

1971년 12월, 중앙위원회 부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72년 8월, 기양뜨락또르공장 책임비서가 되어 농촌기계화사업을 적극 선도하였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공장의 확장 및 현대화 작업에서 매우 뛰어난 성과를 거두어 상부의 신임을 얻었으며 1973년 7월 26일, 계형순, 리자방과 함께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73년 9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1974년 2월, 조직지도부 부부장에 임명되어 70일 전투를 독려하였다. 1976년 3월, 정무원 제3기계공업부장으로 발탁되었고, 1977년 12월, 비서국 비서, 1979년 11월,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80년 3월,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었으며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유임되었다. 1980년 1월, 로태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1년 8월에 평안남도 책임비서에 임명되면서 지방에 내려갔으며 1982년 4월, 7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자격심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아 이중수훈자가 되었다. 1982년 12월, 함경북도 책임비서에 임명되었으며 1984년 1월, 7기 3차 최고인민회의에서 강성산 내각이 출범함에 따라 다시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1982년 3월, 최현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5년 5월, 강희원의 후임으로 청진시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에 임명이 확인된다. 1985년 7월, 청진시가 직할시에서 취소되면서 강희원의 후임으로 함경북도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에 임명된다. 함경북도당 대표단장으로 1986년 9월 중국, 1987년 11월에 소련을 방문했다. 1986년 12월, 8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황장엽, 현성일 등의 증언에 따르면 조세웅은 함경북도 책임비서 재임 시절에 함경북도의 인민경제를 크게 개선하고 당조직의 기강을 확립하여 인민들이 조세웅 만세를 외칠 정도로 절대적으로 그를 지지했다고 한다. 이에 놀란 김정일은 1988년 2월에 그를 함경북도 책임비서에서 소환하여 2월 12일, 김윤혁의 후임으로 정무원 부총리 겸 건설건재공업위원장에 임명하였다. 1988년 6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건설건재공업위원장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건설건재공업위원회는 건설부와 건재공업위원회로 분리되었으며, 주영훈이 건설공업위원장, 조철준이 건설부장에 임명되었다.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9년 7월,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앙골라, 콩고, 르완다, 몽골을 방문했다. 1989년 10월 정무원에서 물러나 평안북도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에 임명되어 다시 지방으로 내려갔고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도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하지만 평안북도에서도 조세웅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김정일은 1990년 11월에 그를 다시 해임시키고 중앙으로 불러들여 당중앙위원회 부장에 임명하였는데 무슨 부서인지는 불분명이다. 이후 1992년 12월, 정무국 사무국 당위원회 책임비서에 임명하였다. 당시 중앙인민위원회가 정말로 인민위원장들의 친목모임으로 전락한 상태인지라 더 이상 인민위원장이 아닌 조세웅은 1991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 2차회의에서 역시 책임비서에서 해임된 홍시학과 함께 해임되었다. 평북비서 해임 이후 정치국 후보위원에서도 해임된 것으로 보이는데 북한에서도 1991년에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해임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김정일이 조세웅의 인기를 시기했을지언정 그의 일처리 솜씨는 높이 산 것으로 보이는데 대부분의 부총리들이 1998년을 기점으로 실종된 반면 조세웅은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1] 정무원 책임비서직이 내각 사무국 책임비서직으로 개편된 후에도 유임되어서 계속 일을 하였다. 하지만 도당 책임비서와 내각 사무국 책임비서를 비교하면 후자의 직위가 훨씬 낮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갑자기 사망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병이 있었기 때문에 일 쉬엄쉬엄하라고 좀 조용한 곳에 보낸 것일 수도 있다.

이후 김정일 체제에서 뭔가 크게 해볼 틈도 없이 1998년 12월 15일 14시 30분, 불치병으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와 내각은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다년간 도당책임비서 겸 도인민위원회 위원장,정무원 부총리,내각 사무국 당위원회 책임비서의 중책을 지니고 당대렬을 조직사상적으로 튼튼히 꾸리고 인민정권을 강화하며 사회주의건설을 다그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다."라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

이후 1999년 1월, 애국렬사릉에 시신이 안장되었다.

3. 여담

한국 인터넷에 북한의 마지막 진정한 당간부라고 그의 일화가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주 출처는 탈북자 커뮤니티에서 나온 증언들로 보인다.

4. 참고문헌

  • 조선대백과사전 19권.
  • 현성일, 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서울: 선인, 2007)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1] 퇴갤하지 않은 부총리들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으로 이동한 김윤혁,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으로 이동한 장철이 있다. 이외에 김복신도 여러 공개활동을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