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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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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방호산.jpg
이름 방호산 (본명: 이천부)
한자명 方虎山
출생년도 1913년 ~ 1916년으로 추정
사망년도 미상
최종 계급 중장[1]

1. 개요2. 상세3. 평가 및 여담

1. 개요

중국공산당 팔로군 출신 북한 군인. 본명은 이천부(李天夫 혹은 李天富). 최종 계급은 중장.

2. 상세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후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하였다. 소련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과 1939년에 중국 옌안으로 온 뒤 1940년 항일군정대학 동북간부훈련반에서 수료하였다. 이후 중국공산당 팔로군 일선부대에 파견되어 조선반에서 조선 문제를 연구하고 1945년 2월 연안에서 정식으로 개교한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제1구대 협리원이 되었다.

1945년 11월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동북지방으로 이동하여 동북조선의용군 제1지대 정치위원으로 남만주 일대에서 군대 증강과 조선인 보호 등에 활동하였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의 중국공산당의 소속의 장교로 국공내전에 참전하였다.
파일:방호산_정치위원시기.jpg
동북조선의용군 제1지대 정치위원 시절의 방호산

1949년 국공내전이 끝난 후, 1949년 7월 대부분이 조선족으로 구성되어 있던 중국공산당 인민해방군 제166사단 사단장으로 부대를 이끌고 북한으로 입북하였다. 166사단은 병력 충원 후 조선인민군 제6사단이 되었으며, 당연히 그가 초대 사단장(☆)이 되었다.

무정 등의 다른 팔로군 출신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군사학을 공부하였고 실전경험도 풍부했기 때문에 6.25 전쟁 당시 가장 유능한 북한군 지휘관이었다. 인민해방군 166사단에서 이름만 바뀐 6사단 또한 마찬가지로 정예 중의 정예였다. 곧이어 발발한 6.25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운 건 어찌보면 예상된 일이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6사단은 국군 1사단이 담당하던 서부전선 방면의 조공을 맡았다. 개전 당일 6사단은 옹진반도 해주 방면으로 1연대[2]를 투입하고, 주공(主攻) 방면으로 예상되던 곳에 집중되어 있던 국군 수비병력을 우회, 폐선 철도를 복구하여 병력과 장비들을 개성(전쟁 전에는 대한민국의 땅이었다)까지 열차 순식간에 진격시키는 비범한 기동을 선보였다. 다만 이 개성역 편승공격설에 대한 이견[3] 도 크다. 이쪽의 의견으로는 북한군 6사단은 오히려 송악산 방면에서 편의대 등을 활용해 개성 시내로 침입했고, 이어 본대가 공격하였다고 본다.

하루만에 개성 일대를 점령한 북한군 6사단은 26일 오후 늦게부터 한강을 도하하였는데, 모든 북한군 부대들 중 가장 먼저 한강을 도하한 것이다. 심지어 이들이 도하한 위치가 한강 하류라 강폭이 넓고, 유속도 빨랐는데 말이다. 만일 계획대로 흘러갔다면 김포 방면에 방어계획조차 세우지 않은 국군은 한강선 방어는 물론 한강 이북의 국군 병력의 후퇴조차 차단 당했을 수도 있었으나, 소련제 도하 장비를 지원받았음에도 북한군 6사단의 도하 일정이 꼬이고 또 꼬이면서 개전 사흘만인 28일에서야 김포를 점령하게 되었다. 급조편성된 국군 김포지구전투사령부[4] 의 혈투 역시 한 몫했다. 작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건 방호산에게 아쉽게 남았겠으나, 오류동과 경인 가도 방면에서 벌어진 공방전에서 북한군 6사단은 태극기를 단 T-34 전차를 투입해 국군 방어선 후방의 급식소를 타격하는 등 기상천외한 전술 능력을 보여주긴 했다.

이후에도 언제나 다른 북한군 부대들보다 진격속도가 빨랐다. 중부·동부전선에서는 춘천-홍천 전투, 동락리 전투, 대전 전투 등에서 국군과 미군이 북한군의 진격을 최대한 늦추고 있었으나, 그가 이끌던 서부전선의 6사단은 거의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던 충청남도 전라도 쪽으로 쾌진격해 내려갔다. 실제로 전쟁 초반 국군의 패주 이후 마산 전투 직전의 진주 전투까지 국군이 북한군 6사단과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거의 없다. 기껏해야 "한반도 서부에서 남하중인 대규모 적 부대를 포착하였다"는 유엔군 정찰기의 정보 뿐이었다. 다만 충남 경찰은 북한군 6사단에 대항해 전투를 시도하였는데, 강경 경찰서의 대한민국 경찰 병력들은 국군 특공대로 위장한 북한군 편의대에 의해 속아 포위당한 끝에 전멸하였으며 다른 지역의 충남 경찰들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전해진다. 이로 보아 방호산은 편의대를 적극 운용하여 충남과 호남 지역을 석권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부터 방호산은 사단에 새로운 연대들까지 배속받아 위협적인 전력을 이끌고 서남부 우회기동에 들어가게 된다.

이는 국군에게 심대한 위협이 되었는데, 최후의 보루였던 낙동강 전선 당시 한국군과 유엔군의 주력은 전선 북쪽과 서북쪽에 전개되어 있었으며 서남쪽에 대한 방어는 상대적으로 허술하였다. 방호산은 이 허점을 제대로 찔러 사단의 기동을 최대한 은폐한 채로 서남부 우회기동을 전개, 마산 방면을 급습했다. 만일 이들이 금강을 도하했다가 미군을 과대평가한 군단 사령부에 의해 조치원으로 역행군하지 않았더라면, 또는 방호산이 호남의 항구도시인 여수와 목포를 점령[5]하겠다고 이틀을 허비하지 않았더라면 낙동강 방어선은 형성과 동시에 치명적인 일격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의 두 이유로 방호산은 적기를 놓쳤으며, 7월 말 뒤늦게 이들을 포착한 미군이 북서쪽을 담당하던 미 육군 25사단을 부랴부랴 마산 방면으로 돌려 가까스로 전선을 틀어막게 된다. 마산 부산이 얼마나 가까운지 생각하면 북서쪽 전선의 전투들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마산 방면의 혈투가 급박하고 중대했을지 모른다. 자세한 내용은 마산 전투 문서 참조.

사실 당시 국군은 북한군 6사단의 서남부 우회기동을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를 통해 파악하고 미군에 통보하였으나 정작 미군은 이 정보를 신뢰하지 않았다. 또한 상술한 대로 미군은 정찰기를 통해 여러차례 6사단 병력을 포착하였음에도 이들을 4사단의 일부일 거라 착각하는 바람에 마산 앞까지 들이닥친 6사단을 보고서야 뒤집어지고 말았다. 어쨌건 방호산의 상대였던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조차 "북한군 제6사단의 기동은 이제까지의 6.25 전쟁을 통해 가장 훌륭한 기동이었다"고 평할 정도였으며, 그는 방호산이 날린 이틀(여수항, 목포항 점령)이 아니었다면 방어하기 어려웠을 거라 언급하기도 했다. 그만큼 방호산의 찌르기가 위협적이었다는 것.

그는 이 공로로 김일성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그가 지휘한 6사단 또한 근위 제6사단이라는 칭호와 함께 전 병력의 특진과 임금 50% 인상을 수여받았다. 다만 마산 전투에서 북한군이 패하자 상당한 타격을 받아 추가적인 공세는 하지 못했다.
파일:방호산_공화국영웅수여.jpg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았을 당시의 방호산

이후 인천 상륙작전을 위시한 유엔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북한군이 후퇴할 때에도, 부대편제가 와해되어 무질서하게 패주한 여타 부대들과 달리 부대편제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주변의 낙오/패잔 병력들을 수습해 후퇴 이전보다 오히려 사단 인원수를 늘려가며 질서정연하게 북으로 퇴각한 공로로 공화국영웅 칭호를 하나 더 받아 2중영웅이 되었다.[6]
파일:방호산1.png
공화국2중영웅 칭호를 수여받은 이후의 방호산.

6.25 전쟁 당시 공화국2중영웅 칭호를 받은 인물은 방호산을 제외하면 다섯 명 뿐이었다고 한다. 이때, 6사단에서만 공화국 2중영웅칭호를 받은 사람은 방호산을 포함해 3명이나 되었다.[7] 참고로 당시 편제를 유지하여 퇴각한 부대가 하나 더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팔로군 출신인 리권무 소장이 이끄는 4사단이었다. 사실 김일성은 6사단이 빠른 기동으로 마산을 급습한 것보다 이렇게 부대편제를 유지하며 퇴각한 것을 더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전쟁에서 진격보다 퇴각이 더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파일:방호산_5군단장시기.jpg
1951년 동부전선 5군단 전방지휘소에서의 방호산(가운데 인물)
이후 1950년 10월에는 방호산 휘하의 6사단이 확대 개편돼 5군단으로 승격되면서, 방호산도 북한군 5군단장(☆☆)으로 진급하였다. 북한군 5군단은 그의 지휘 하에 현리 전투에도 참가해 큰 공을 세웠으며, 정전협정이 가시화하자 그는 당시 창립된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의 초대 학장이 되었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1955년부터 김일성이 박일우를 비롯한 친중 군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하면서 정치적으로 몰락하게 된다. 1955년 1월, 군사과학원장에서 해임당했으며 빨치산파의 최용건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김일성은 방호산을 종파분자로 규정하여 김웅도 숙청하였다. 1955년 4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박일우, 김웅, 방호산을 '구 중공당원 소 그루빠'로 규정하여 이들을 친중반소파, 마오쩌둥의 졸개로 몰아서 모든 칭호와 공훈을 박탈했다. 일설에 따르면 함경남도 단천군 검덕광산의 후방부 지배인으로 좌천되었다고 한다. 이후 8월 전원회의 사건 이후 1959년, 장평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음해하여 숙청한 김일성은 방호산, 김웅, 장평산, 리광무, 노철갑, 최원 등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이후의 운명은 불분명한데 중국으로 망명한 김강의 증언에 따르면 박일우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3. 평가 및 여담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제6 사단장(☆), 제5 군단장(☆☆)을 역임하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측 최고의 전략가로 평가된다. 김무정, 남일 등과 함께 전쟁 당시 가장 유능한 북한군 장령 중 한 명이었으며, 특히 주요 전과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기동전의 대가였다.

그러나 북한에서 숙청당한 많은 인물들이 그렇듯, 그 또한 대한민국에서는 전쟁을 수행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숙청당했기 때문에 양쪽 모두에서 언급이 금기시되고 있다.

숙청당하기 전까지는 북한에서 어찌나 명성이 자자했던지, 아동용 그림책에조차 들어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숙청당해 언급이 금기시 된 이후 시간이 많이 지난 오늘날의 북한에서는, '6사단 출신 인민영웅' 이라 하면 방호산과 동일하게 공화국2중영웅 칭호를 받은 6사단 정찰과장 리학문이나, 320고지 전투 당시 '나의 고지 운동'을 주도한 6사단 15련대 3소대장 한계렬이 인지도가 훨씬 더 높고, 당시 참전한 6사단 출신 북한 전쟁노병들을 제외하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비록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적이었지만 북한군 입장에서는 뛰어난 지휘관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부하들에게 인망도 높았다고 한다. 그가 지휘하던 북한군 6사단과 5군단은 대부분 팔로군 시절부터 함께 싸운 사이라 전우애도 투철했다고. 그야말로 북한의 롬멜.

한편,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는데, 바로 6사단 점령지에서 수많은 인민재판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깐깐하고 만만치 않은 성격의 소유자같이 생각되겠지만, 6.25 전쟁 당시 북한군 중좌로 방호산의 6사단에서 정치 장교로 근무했던 최태환씨에 따르면, 무인이라기 보다 문인 스타일의, 점잖고 부드러운 성격이었다고 한다.

한편 그가 지휘했던 조선인민군 제6사단은 현재도 6.25 직전과 마찬가지로 서부전선의 개성시에 주둔 중이다. 비록 제1대 사단장은 숙청되어 방호산의 후임인 2대 사단장이 1대 사단장으로 기록되는 등의 기록말살형까지 당했지만 6사단은 여전히 '근위 제6사단'의 칭호를 유지하고 있다.


[1] 8월 종파사건까지는 김일성종합군사대학 초대 학장까지 올라왔다. [2] 본래 6사단은 창설 당시 13, 14, 15연대였으나 개전 직전 14연대를 1사단 1연대와 교환하였다. [3] 목격자인 주한미군사고문단 다리고(Joseph R. Darigo) 대위의 증언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면 당장 800미터 멀어진 개성역을, 그것도 기상 사정까지 불량한 가운데 적병의 군복색을 구분해 정체를 파악했다는 것이 된다. 그래서 목격의 신빙성이 제기된 것. 게다가 실제 개성역의 열차 운행도 바로 중단되지 않았다. [4] 이쪽은 비전투병력이나 간부 후보생들까지 긁어 모아 싸웠다. [5] 아마 해상 보급을 받으려고 한 것이지 않을까 하고 추측되는데 문제는 당시 북한 해군은 개전 초기 그 열악한 대한민국 해군한테도 밀릴 정도로 전력상에서 열세였고 그나마 있던 전력도 곧바로 참전한 미 해군과의 몇 차례 교전 후 거의 다 날려먹으면서 전쟁 내내 해군이란 조직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때문에 제해권은 전쟁 기간 내내 유엔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을 때에도 대한민국 해군이 서남해 일대에서 군경의 후퇴 지원과 해상 봉쇄 작전을 수행하고 미 해군 함재기들도 날아다니는 상황이었다. [6] 방호산은 평소 김일성 직계 북한군 지휘관들의 전투 역량을 멸시하는 말버릇을 갖고 있었고, 김일성을 우습게 보는듯한 건방진 태도도 갖고 있었으나, 김일성은 이를 못 본체 했다고 한다. [7] 각각 6사단장 방호산, 6사단 정찰과장 리학문, 6사단 507군부대 소속 김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