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8:15:42

김재박/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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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치 경력2. 감독 경력
2.1. 현대 유니콘스 시절2.2. LG 트윈스 시절
2.2.1. 2007 시즌2.2.2. 2008 시즌2.2.3. 2009 시즌
3. 평가4. 스타일5.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6. 역대 감독 전적

1. 코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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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돌핀스로 건너가 1년을 더 뛴 김재박은 자신의 기량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인정하고 1992년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끝낸 뒤 1993년부터 전업 코치로[1] 변신했다.

애초에 몇년간 플레잉 코치로 일하면서 코치 경력이 그럭저럭 있었고 실업야구와 프로야구 초창기 시절부터 유명세를 떨친 슈퍼스타였기에 그에 대한 상징성을 고려해 수석코치 겸 3루 주루 코치라는 중책이 부여된다. 코치 재임 당시 그가 보좌했던 감독은 대구 출신 선배 야구인 정동진.

2. 감독 경력

2.1. 현대 유니콘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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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니콘스 No.70
김재박(金在博)

이후 현대 유니콘스가 창단되면서 새 구단에 어울리는 젊고 영리한 감독의 상에 부합한다는 현대그룹 고위층[2][3]의 판단에 따라 감독으로 취임한 후,[4] 11시즌 동안 4회 우승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역대 감독 최단기간 승수 기록을 차례차례 경신하며 한국 최고의 감독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페넌트레이스 전체 승률 6할이 넘어간 시즌이 총 3번(98년, 2000년, 2003년)이다.[5]

사실상 현대의 전성기는 김재박의 감독 커리어 전성기였으며 그의 재임 시기에 플레이오프를 못 나간 횟수가 1997년, 1999년, 2005년 단 3번[6]이고 5할이하는 97, 05년 단 2번이었다. 팀이 서울 이전 추진 및 재정난으로 기울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에 통합우승 2연패를 달성하였고, 해체/매각 기로에 서 있던 2006년에도 정규시즌 2위를 기록하면서 명장으로 이름값을 높였다. 다만 소위 선수빨,돈빨로 야구한다는 비난과 지나친 번트 작전 선호 및 개인 기록 관리와 국대 감독으로서의 도하 참사 삿포로 참사 때문에 안티들도 상당했다.

2017년 강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 당시 감독들은 1~2년하다 잘리는 파리목숨이라서 본인도 그렇게 될 줄 알았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이기는 야구로 팬을 야구장에 불러 모으고 싶었고, 그런 야구가 미국식 야구라 생각해 전지훈련을 미국 플로리다 브래던튼으로 1~1.5개월씩 갔으며, 미국인 인스트럭터, 트레이너를 고용해 효과를 보기도 했고, 코치들이 선진 코칭기법을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7]

김응용 감독의 해태 18년 다음으로 단일구단 최장 기간 감독재임(11년)을 기록하고 있다. 3위는 김인식 감독의 두산 9년.

2.2. LG 트윈스 시절

LG 트윈스 No.70
김재박(金在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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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06년 시즌이 끝나고 기울어져가는 현대와의 계약이 끝난 뒤 계약기간 3년, 계약금 5억에 연봉 3억 5천이라는 당시 역대 최고 대우를 받으며 LG 트윈스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8][9] 이순철 전 감독이 부임하던 기간에 온갖 악재에 시달려온 LG 팬들은 현대 왕조를 이끌었던 김재박이 온다는 소식에 환호했다.

부임 첫 해인 2007년에는 막장 전력에도 불구하고 아깝게 5위에 그치며 팬들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2008년과 2009년에는 연속으로 최악의 추락을 보이며 감독으로서의 역량마저 비판받는 처지에 올랐다.

이러한 막장이 된 행보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김재박이 LG에 공헌한 것이 2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2007년을 전후해 대거 돌아온 올드팬들, 두 번째는 스카우트진 개편을 통해 2010년대 LG의 핵심 전력이 될 유망주들을 발굴한 것이다.[10]

2.2.1. 2007 시즌

2007년 부임 때 팀의 간판 이병규가 일본프로야구로 진출했으나 해외파 봉중근이 국내 복귀를 했고, 두산의 토종에이스 박명환이 FA로 영입되었으며 외국인 투수로는 삼성 에이스로 활약했으나 재계약이 불발된 팀 하리칼라를 주워오며 기대감을 가지고 시작했다.

시즌 초 LG는 6연승으로 2위에 오르면서 롯데와 함께 프로야구 흥행을 주도했다. 4월 22일 삼성전에서 연장 12회 혈투 끝에 패배했는데 이대형의 땅볼 때 헤드퍼스트 슬라이딩 끝에 세이프처럼 보였던 장면에서 추평호 1루심으로부터 아웃 판정으로 경기가 끝나자 심판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6월 1일 두산전 승리로 지도자 경력 800승을 기록했다. 프로야구가 혼전 양상으로 진행되며 매 경기마다 순위가 바뀌는 가운데 선두권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 6월 22~24일 문학에서 SK에 피스윕을 당하면서 선두 추격은 어렵게 되었다. 그래도 전반기를 4위로 마감했고, 7월 31일 오승환을 공략해 3:1로 승리를 거두면서 2위 두산에 1경기차, 5위 삼성에도 1경기차인 3위로 두산, 한화, 삼성과 치열한 2~5위 싸움을 이어갔다.

8월까지 4연패를 7번 당했으나 5연패만은 당하지 않는 행보를 보였고 대신 중간에 5연승 2번, 4연승 두 번으로 5할에서 왔다갔다를 반복하며 포스트시즌 경쟁을 했다. 2002년 이후 5년 만에 LG를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는듯 했으나 9월 들어 불펜의 방화와 수비 실책[11] 등으로 이겨야 할 경기들을 자꾸 놓치면서 첫 5연패를 당했고, 한화 및 삼성과의 순위경쟁에서 밀려나며 5위로 아쉽게 마감했다.[12]

기대 이상의 선전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그 이면에는 허약한 팀 전력에 비해 운이 좋았다는 냉혹한 평가도 뒤따랐다.[13] 이대형이 주전 리드오프로 기용되며 3할 타율과 도루왕으로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으나 나머지 유망주[14]의 성장은 더뎠다. 최다 타점이 하위타순에 배치된 포수 조인성일 정도로 박용택 발데스가 있는 중심타선의 무게감이 떨어졌다. 조인성을 포함해 2할 후반대 타율을 기록한 이종열, 생애 첫 3할 타율을 달성한 최동수, 7월까지 2할 후반대 타율을 기록했던 '수비형 유격수' 권용관 등 몇몇 베테랑이 분전하여 겨우겨우 타선이 돌아가는 수준이었다.[15] 팀 타율은 3위고 팀 도루도 3위로 기동력도 준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출루율과 장타율이 아쉬워 득점은 5위로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투수진은 FA 첫 시즌을 치른 박명환이 3점대 초반의 ERA와 10승을 기록하며 중심을 잡았으나 나머지 선발진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고[16] 불펜에서는 류택현이 23홀드로 생애 첫 홀드왕에 오르고 전년도 마무리 투수로 자리잡은 우규민이 30세이브를 기록했으나 구위형 투수가 없어 위태로웠다. 이때문에 전년도 선발투수였던 심수창 정재복을 마당쇠로 굴렸다. 그리고 우규민은 전반기 세이브 선두를 기록하고 7월까지 ERA 1.30의 호성적을 기록했으나 타이트한 상황에서 멀티이닝을 자주 소화하다가 8월 이후 블론세이브를 남발하며 퍼져버렸다.

2.2.2. 2008 시즌

전문가들이나 골수 팬덤으로부터도 우려스러운 전력으로 평가받고 있어서 2008년을 앞두고 구단의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었으나 LG 구단은 최하위에서 5위로 뛰어오른 성적에 도취되었는지 팀 전력을 오판하며 외부영입 등 투자를 하지 않았다. 결국 2008년 좋지 않은 IF들이 대부분 터져버리면서 현대 유니콘스의 해체 문제로 스프링캠프조차 가지 못했던 우리 히어로즈에도 밀린 최하위로 마쳤다. 46승 80패, 승률 0.365라는 처참한 성적으로 마감하면서 LG가 2007년에 기록한 5위라는 성적이 앞으로의 희망이 아니라 그저 박명환의 영입, 베테랑들의 기대이상의 활약으로 인한 플루크였음을 보여주면서 단 2년 만에 최하위를 기록했다. 그나마 4월까지는 어렵게나마 버텼지만 5월을 9연패로 출발해 승패마진 -9로 마치며 꼴찌로 떨어지고 말았고, 6월에는 6연패와 시즌 두 번째 9연패를 당하면서 무려 4승 18패, 승패마진 -14라는 끔찍한 성적을 남기며 꼴찌에 쐐기를 박고 말았다. 올스타브레이크 후 후반기에 승패마진 -2로 비교적 선전했지만 뒷북에 불과했고 최하위 운명은 바뀌지 않았다.

봉중근 크리스 옥스프링이 나란히 두자릿수 승리를 거두며 원투펀치로 고군분투했지만 당초 에이스로 낙점했던 삼성 출신 제이미 브라운이 부진 후 퇴출되고, 박명환 최원호는 부상으로 드러누웠으며 지난해 30세이브에도 불구하고 13블론으로 흔들렸던 마무리 우규민은 시즌 초부터 불지르기 시작하면서 마무리에서 하차하고 정재복이 고군분투하다가 그 역시 7블론세이브와 10구원패를 당하면서 퍼졌다. 투수 뎁스가 너무 심각해 6월에는 두산에 이성열 최승환을 내주고 투수 이재영을 대졸신인 내야수 김용의와 함께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고졸 신인 듀오 정찬헌 이범준은 팀 이닝 3,4위에 오르면서 전혀 관리 받지 못했다.[17] 이해 무승부 없이 끝장승부 제도였던 것도 안그래도 안좋은 마운드 사정에 더욱 악재였다.

타선은 집단 난조에 빠졌으며 브라운의 퇴출 이후 중도합류한 로베르토 페타지니가 팀 타격 WAR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열악했다. 지난해 좋은 활약을 보여준 이종열, 최동수, 조인성, 권용관 등의 성적은 거짓말처럼 모두 떨어졌고, 박용택은 100안타도 채우지 못하고 0.258의 타율과 단 2홈런에 그치며 커리어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골든글러버 이대형은 도루왕 타이틀은 지켰으나 타격 스탯이 좋지 않았다. 김상현, 박경수, 정의윤 등 타자 유망주들은 어김없이 기대 이하의 모습만을 보여주었고[18] 30줄에 접어드는 안치용만 갑툭튀하여 사이클링 히트에 3할에 근접하는 타율로 예상을 뒤집는 활약을 했을 뿐이었다.

구단 역사상 최악의 성적으로 인해 빡친 LG그룹에서는 구단에 대해 강도높은 감사에 들어갔고 시즌 막판에는 단장과 스카우트팀장 등 수많은 프런트 인사들이 줄줄이 옷을 벗었다. 구단은 FA 시장에서 최대어로 꼽히던 정성훈 이진영을 영입하면서 선수 보강에 나섰다. 다만 가장 취약한 파트인 투수진에 대한 이렇다할 보강은 없었다.

2.2.3. 2009 시즌

홈경기에서 이동식 펜스 ‘X-존’을 도입해 장타력 향상을 시도하였다.

시즌 전 전력보강에 외국인타자 페타지니의 2년차 맹활약, 그리고 부상으로 인해 뒤늦게 시즌에 합류한 박용택의 대각성이 더해지면서 LG 타선은 리그에서 강한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봉중근과 원투펀치를 이루어야 할 옥스프링이 WBC 기간 도중 팔꿈치 부상을 입는 악재를 맞이했고 결국 5월에 웨이버 공시되어 릭 바우어가 새롭게 외국인 투수로 영입되었다.

4월을 10승 1무 12패로 마쳤으나 5월 들어 히어로즈와 두산을 차례로 스윕한 뒤 대구에서 삼성을 상대로 첫 두 경기를 잡으며 파죽의 8연승을 기록해 2위까지 치고올라갔다. 8연승을 기록한 5월 9일, LG 감독으로서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승리하여 최연소 통산 900승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투타밸런스가 잘 맞았던 8연승이 끝난 뒤 거짓말같이 허약한 마운드와의 심한 엇박자가 발생하면서 기껏 점수차를 따라잡고도 경기를 잡아내지 못하는 경기들이 속출했다. 3주 연속 주간 1승 등 극심한 하향세에 빠지며 순위도 7위까지 추락했다. 8연승 기간 새롭게 주전포수로 호평을 받았던 김정민은 광주 원정 도중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해 사실상 시즌아웃되었으며 박명환은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또다시 부상으로 이탈했고 새로 들어온 바우어는 극심한 부진으로 팀 마운드에 골칫거리만을 안겼다. 에이스 봉중근이 등판하는 날에는 타선이 이상하게 침묵하면서 봉중근은 승리보다 패배가 많았다.

6월 중순 들어 마무리투수로 우규민 대신 이재영이 자리잡으면서 SK와 한화에 위닝시리즈, 삼성에 스윕 시리즈를 거둬 잠시나마 5위에 올랐다. 그러나 곧바로 히어로즈와의 중요한 3연전에서 루징시리즈를 기록하여 7위로 내려간 뒤 시즌 끝까지 7위를 유지했다. 페타지니의 타격감이 여름을 거치며 점차 떨어지면서 타선의 화력은 점점 반감되어갔고, 투수진의 약점은 이어지며 치고 올라갈 동력을 잃었다. 결국 후반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목동에서 히어로즈에 3연전 피스윕, 잠실에서 KIA에 피스윕을 당해 7연패로 더 이상 순위싸움을 이어갈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심수창 조인성 배터리의 경기중 언쟁인 이른바 심논개 사건, 2군에서 서승화의 후배 이병규 폭행사건 등 사건사고까지 뒤따르면서 선수단 관리에 대한 책임 여론이 불거져 사실상 재계약 가능성은 제로가 되었다. 그리하여 7위가 확정적인 잔여 시즌은 레임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한화가 그동안의 문제점이 한꺼번에 곪아터지면서 압도적인 최하위를 기록해 2년 연속 최하위는 여유롭게 면했다.

4월에 KIA에 김상현 박기남을 내주고 강철민을 영입하는 김상현, 박기남 ↔ 강철민 트레이드를 했다. 정성훈의 영입으로 LG에서 자리가 사라진 김상현에게는 사실상 길터주기였다. 그런데 강철민은 부상으로 단 한경기도 나오지 못하며 사이버 투수 그 자체가 되며 전력에 1도 보탬이 안됐고, 반대급부로 KIA에 내준 김상현은 KIA에서 홈런왕이 되면서 포텐을 터뜨리면서 최악의 호구 트레이드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이해 LG는 KIA에 2승 1무 16패 승점자판기 노릇을 하며 완전히 조공을 바치면서 KIA 타이거즈 2009년 페넌트레이스 우승과 2009년 한국시리즈 통합우승의 1등공신이 되는 굴욕을 당했다. 거기에다가 중립구장 경기로 인해 홈구장인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마저도 축포의 장으로 넘겨준 건 덤. 여기에 두산 베어스 상대 상대전적 우위 및 SK에게 시즌 막판 부어버린 캡사이신은 또 덤. 자세한 내용은 추격쥐, LG 트윈스/2009년 등 참고할 것.

3. 평가

LG 트윈스 대표팀 감독으로 참담한 실적을 기록하였고, 현대 유니콘스 시절의 실적 또한 실은 모기업의 빵빵한 지원, 프런트의 뛰어난 역량[19]에서 비롯된 것이지 김재박의 지분은 그리 크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2000년 이후 현대는 부자 팀이 절대로 아니었다. 프런트의 능력이 아무리 좋더라도 돈이 없는 팀은 프런트의 능력만으로 예산 부족을 커버하기에는 한계가 오기 십상이고, FA 등으로 박경완, 심정수, 박진만을 비롯한 팀의 주축 선수들이 하나 둘씩 이탈하며 선수층은 매우 얇아져 있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해체를 목전에 두며 쓰러져가던 현대가 2006년 정규시즌 2위를 차지했던 것은 지금까지도 KBO 리그 역사에도 손에 꼽히는 기적이라며 회자될 정도다. 이는 분명히 김재박이 본인의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또한 현대 초기 태평양 돌핀스 시절의 약체 타선을 물려받고도 이명수를 중용해 내야와 타선을 강화한 점, 전성기가 지난 최창호를 팔아 당시 저평가돼 있던 박종호를 데려와 최고의 2루수로 키워낸 점[20], 신인 시절 물방망이질을 자랑했던 박진만을 한국을 대표하는 명유격수로 성장시킨 점[21], 박경완을 내준 이후 김동수를 과감히 중용해서 제2의 전성기를 맞게 하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끈 점, 포수였던 이택근의 포지션을 중견수로 바꿔주고 타격 재능을 끌어낸 점 등은 분명히 명감독의 소양이 있어야 가능한 부분들이다. 결국 현대 시절의 성적은 프런트와 감독의 시너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건데, 이제 와서 김재박의 현대 시절 업적을 일방적으로 평가절하하기는 힘들다.

LG 시절 팀 성적 추락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부임 첫 해였던 2007년 전임 이순철 감독이 역대 최악 수준으로 망쳐놓은 팀에서 우규민[22], 이대형, 최동수를 발굴하여 중용하고, 척박한 불펜진 속에서 김민기 마당쇠 노릇 시키며 시즌 막판까지 아슬아슬하게 4강 경쟁한 부분은 분명 김재박의 능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후임자 박종훈이 1998년 이래 역대 최강 전력을 구축했던 2011년 4강과 한참 동떨어진 성적을 기록한 것을 고려하면 김재박이 감독으로 무능했다고 보긴 힘들다.

오히려 감독 여하 현장 스태프들이 허약한 전력을 잘 활용하여 선전했음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해서 전력 보강에 임했어야 하는 LG 구단은 2008년 단 1명의 FA도 잡아주지 않았고[23], 박명환의 부상과 2007년의 주역이었던 우규민, 이대형, 최동수, 김민기, 조인성이 모두 전년도만 못한 성적을 냄에 따라 봉중근, 크리스 옥스프링의 대활약이 더해졌음에도 팀 전체 전력은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는 결과를 낳았고, 원투펀치를 제외하면 총체적으로 무너진 마운드는 2009년 두 명의 야수를 FA로 보강하면서 타선을 정상화시켰음에도 옥스프링의 부상으로 인한 전력 이탈을 버티지 못하면서[24]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못했다. LG 트윈스/2009년 참고.

그런 와중에서도 트레이드를 통해 잉여 자원들을 다 정리해서 손인호 대타 요원으로 활용하고, 조인성과는 현격한 기량차를 보였던 최승환 이재영으로 바꿔와서 2008 시즌에 중간 계투로 요긴하게 활용했다.[25] 무엇보다 최승환 트레이드로 생긴 백업 포수 공백을 은퇴한 김정민을 컴백시켜 메꾸고, 조인성의 주전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활용한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라 할 수 있다.[26]

결론적으로 LG 감독 시절 성적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는 어렵겠지만, 감독으로서의 능력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현대 시절에는 최고의 프런트와 함께하여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고, LG 시절에는 전임자의 삽질과 헬 수준의 프런트 때문에 본인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망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27]

선수 및 지도자는 커리어로 증명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김재박은 충분히 명장으로 불릴 좋은 커리어를 기록한 감독이다. 비록 감독 말년 LG에서 5-8-7을 기록하며 아쉬운 모습을 보였지만, 성적을 내지 못하면 바로 짤리기 쉬운 프로 스포츠 및 프로야구에서 현대 유니콘스의 초대 감독으로 무려 11년을 재임하여 KBO 한국시리즈 4회 우승을 달성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대업적이다. 김응용 감독의 해태 타이거즈 18년 다음으로 단일 구단 최장 기간 감독 재임(11년)을 기록했다는 것에서부터 이미 감독으로서 역량은 검증되었다.[28]

다만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삽질은 정말 커버치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가 감독을 맡은 대표팀은 즉즉 를 일으켰다. 김재박은 대표팀 감독으로서 선수 선발 및 관리, 팀 케미스트리 유지 면에서 문제를 보였다. 삿포로 참사 때 보였을 당시에 상대였던 일본 대표팀은 1군급 전력을 자랑했던 터라 그나마 쉴드의 여지가 있었으나, 도하 참사 당시 상대였던 일본 대표팀은 그보다 한참 떨어지는 수준이었는데도 같은 문제점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자연히 실드도 다 떨어질 수밖에 없다.[29]

또한 2007년의 5위 역시 이종열, 최동수, 조인성, 권용관 등 30대 베테랑들의 분전에 의한 회광반조에 불과했고, 기대 승률에 비해 높은 실질적 승률을 기록해 운이 좋아 얻어걸린 것일 뿐이었다. 실질적으로 유망주 발굴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이대형은 2007년 당해에는 3할 타율과 도루왕을 기록했으나 세부 스탯은 좋지 않았고, 이후 도루 이외의 타격 스탯이 완전히 망가지면서 한계를 드러냈다. 검증된 선수를 선호하는 김재박의 지도 성향 때문에 유망주들은 2007년 양아들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기회를 받은 김상현[30] 정도를 제외하고 조금만 성적이 나빠도 곧바로 계산이 서는 베테랑들이 우선적으로 중용을 받으면서 홀대를 받았다.[31] 더불어 은퇴가 머지않은 최원호를 임기 말까지 선발 투수로 과하게 기용하여 비판을 받았다. 그 결과 돌아온 것은 2007년에 커리어 하이를 찍은 선수들이 원래의 스탯으로 돌아간 2008년. 박명환, 최원호가 부상으로 개점 휴업하고 간판 타자였던 박용택마저 커리어 로우를 찍자 봉중근과 옥스프링이 원투펀치로 고군분투하고도 최하위였다. 그리고 정성훈 이진영이 가세하고 로베르토 페타지니가 풀 시즌을 치르고 박용택이 생애 첫 타격왕으로 커리어 하이를 세운 2009년조차도 시즌 초 2위 돌풍에도 불구하고 최종 7위에 그치면서 쓸쓸히 LG 감독에서 물러나야 했다. 부임 이전 2006년에 선발 투수로 가능성을 보이며 희망을 가져다주던 정재복 심수창을 당장의 성적을 위해 확실한 보직 없이 노예로 줄창 굴리다가 선수 커리어를 갉아먹고, 관리받아야 하는 정찬헌, 이범준, 최동환 등 젊은 투수들을 과하게 혹사시킨 것은 명백히 김재박의 잘못이다.

4. 스타일

현대시절부터 번트작전을 하도 시켜 김번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덕분에 야구판이 재미없어졌다면서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당시 현대 팬들은 김재박의 경기운영에 대해 그다지 비판적이지 않았고 우호적인 반응이 많았다. 다만 현대팬의 수가 적었다보니[32] 실드가 안 쳐진게 김재박의 불운이라면 불운.

위에 링크된 기사에서는 김재박이 06년 번트를 많이 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빈약한 타선과 투고타저의 시즌 흐름에서 찾고 있지만, 당시 번트 신기록을 세웠던 06년 현대는 경기당 득점은 물론이고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등등 주요 공격 지표에서 모두 1위를 한 팀이었다. 다시 말하면 김재박은 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력을 지닌 팀을 운영하면서도 누구보다도 많은 번트를 댔다는 의미이다.

원인을 투고타저에서 찾는 것도 역시나 말이 되지 않는데, 99년은 김재박이 감독으로 있던 시즌 중 가장 타고투저가 심했던 해이나 이 시즌의 번트 1위 팀은 127개로 2위인 99개의 롯데를 크게 앞서는 현대였다. 물론 이 시즌의 현대는 공격력이 하위권이긴 했지만, 김재박은 리그의 투타 흐름이나 본인이 맡은 팀의 득점력과는 관련 없이 언제나 번트를 선호하는 감독이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심재학의 회고에 의하면 팀의 최전성기였던 00년에도 자신을 4번으로 박아놓고 번트를 댈 상황이 아닌 거 같은데도 번트를 자주 지시했다고 한다.

도하에서의 실패가 비난받은 것은 물론 성적이 좋지 않았던 것이 일차적인 이유지만, 강력한 국대 타선을 운영하며 객관적으로 전력이 훨씬 떨어지는 팀을 상대로도 초반부터 번트 일변도로 나가다가 패했다는 점 때문에 더욱 더 많은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

특정 선수를 편애한다는 인상을 줄까봐 의도적으로 선수들과의 사적 교류를 피하고, 시즌 중 단체 미팅도 거의 소집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수들에게 전달 사항이 있으면 코치들을 통해 전달하였다고 한다.[33]

본인은 선수 시절 홈런을 잘치는 타자가 아니었는데, 감독이 된 후에는 홈런을 너무 좋아해서 인천 숭의야구장의 펜스 높이를 낮추고[34] 수원야구장의 외야 펜스 앞에 이중펜스를 쳐서 100-125-100 규모의 경기장을 95-120-95로 만들었으며 LG 감독 시절에는 전설의 X-존을 만들어 잠실 홈런난무에 일조하기도 했다.

기록 브레이커라는, 기록 관련 악명이 높았기로도 유명한데 이는 본문서를 참조 바란다.

5.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현대 감독 시절인 2005년, 시즌 초반에 전년 우승팀이면서 심정수, 박진만 등 주축이 이탈해 일시적으로 현대가 꼴찌를 하고, 전년도 꼴찌팀 롯데 자이언츠가 잠시 1위를 한다. 이에 대한 질문이 들어오자 "5월이 되면 내려가는 팀이 나온다"며 천천히 올라가면 된다는 긍정론을 폈다.

이 말이 와전되어 그 유명한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가 되었고, 널리 퍼졌다.

6. 역대 감독 전적

역대 감독 전적
년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96 현대 유니콘스 [35] 126 67 54 5 4위 [36] 준우승[37]
1997 126 51 71 4 6위 -
1998 126 81 45 0 1위 우승
1999 132 68 59 5 3위[38] -
2000 133 91 40 2 1위[39] 우승
2001 133 72 57 4 2위 3위[40]
2002 133 70 58 5 3위 4위[41]
2003 133 80 51 2 1위 우승
2004 133 75 53 5 1위 우승
2005 126 53 70 3 7위 -
2006 126 70 55 1 2위 3위[42]
통산 1427 778 613 36 ­
연도 소속팀 경기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07 LG 트윈스 126 58 62 6 5위 -
2008 126 46 80 0 8위 -
2009 133 54 75 4 7위 -
통산 385 158 217 10 ­
총계 1812 936 830 46 ­

[1] 사실 이미 LG 트윈스 말년부터 플레잉코치로 뛰었다. [2] 정확히는 초대 단장이었던 김용휘의 판단이었다. 원래 구단에선 김용휘의 고교 선배인 백인천의 영입을 검토했었다고. 물론 이 때까지만 해도 백인천 감독의 평은 LG를 우승시키고 삼성 감독으로 취임한 뒤에도 구단 내 파벌싸움을 뿌리뽑은 뒤 기존의 노장들을 정리해버리고 그 자리에 젊은 선수들을 파격적으로 기용해 대대적인 리빌딩에 성공하는등 나름 좋은 편이었다. [3] 참고로, 이 젊고 영리한 감독의 목록엔 허구연 해설위원도 있었다. 당시 허구연의 나이는 만 44세로, 넥센 히어로즈의 감독으로 취임한 염경엽의 나이와 같았다. 여담으로 허구연은 현대의 전신인 청보 핀토스의 감독을 35세의 나이에 역임했던 적도 있었다. [4] 96년 현대 감독 부임 당시 나이가 만 42세로, 부임 기준 나이로 치면 허구연(35세), 김용희(39세) 다음으로 빨랐다. [5] 김재박의 공도 컸지만 김용휘의 공도 무시할 수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김용휘 항목 참조. [6] 그러나 1999년은 5할 플러스를 찍었다. [7] 여담으로 조용훈 박명환야구TV에서 술회하기를 신인 김세현(당시 김영민)과 조용훈이 1군 전훈멤버에 포함됐는데 미국 출국 전 김재박 감독이 있는 공항 흡연실에서 태연하게 둘이서 담배를 피다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선배들한테 집합이 걸렸다고 한다. [8] 당시 구단 수뇌부는 김재박 영입을 반대했으나, 당시 LG스포츠 사장인 김영수가 강하게 밀어붙여 성사시켰다. [9] 당장에 LG는 프론트 야구 및 신바람 야구를 캐치프라이즈를 내세웠기 때문에 당시 이와 상반되게 스몰볼 야구, 쥐어짜내기식 야구를 하는 김성근이 2002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했음에도 경질을 한 사례가 있는 만큼 스몰볼 및 번트야구를 추구하는 김재박 역시 탐탁지 않게 여겼을 가능성 또한 높았을 것이다. [10] 물론 당시 하위 성적으로 인한 신인 드래프트 상위 순번을 얻은 것 또한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11] 대표적인 경기가 9월 7일 SK전 승리를 앞둔 9회 2사에 나온 김우석의 히드랍더볼 이후 역전패다. [12] LG 킬러 류현진을 LG전에 꼬박꼬박 등판시킨 한화에 후반기 6번의 맞대결을 모두 패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13] 기대 승률은 0.445에 불과해 최하위와 별 차이가 없었는데 실제 승률은 0.483이었다. [14] 김상현, 박경수, 정의윤, 이성열 등. 그나마 기회를 많이 준 김상현은 시즌 초 괜찮았으나 이후 극심한 부진에 빠졌고 나머지 유망주는 대타나 플래툰을 전전하면서 역할이 제한되었다. [15] 이종열과 최동수는 언제 은퇴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나이였다. 특히 최동수는 2006년도 1할대 타율에 그쳐 2007년 선수생활을 한 것조차 기적으로 평가받을 정도. [16] 봉중근은 4월 호투 이후 부진에 빠지며 5점대 ERA로 마쳤으며 하리칼라는 자주 난타당하면서 두산전 완봉에도 중도퇴출당했고, 베테랑 최원호는 전반기에만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나마 후반기에 대체 용병으로 온 크리스 옥스프링이 후반기 괜찮은 모습으로 재계약에 성공했다. [17] 정찬헌은 불펜에서 맞이한 시즌 초 신인왕을 충분히 할 수 있는 페이스였으나 박명환이 부상으로 드러눕고 브라운이 퇴출당하면서 무너진 선발을 메우기 위해 선발으로 보직을 변경시켜 풀로 로테이션을 돌렸다. 그 댓가로 돌아온 것은 선발승 이후 11연패와 함께 13패로 최다패 투수라는 멍에였다. [18] [19] 여기서 말하는 역량이란 선수단의 문제점을 정확히 집어내어 감독이 말하기 전에 알아서 지원해주는 능력을 말한다. 실제로 당시 현대 유니콘스 스태프들은 야구계에서 이구동성으로 으뜸이라 불리는 조직이었다. 비록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지만 김재박은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 성장하고 길들었기에 정작 그 시스템을 벗어났을 때 성적이 말이 아니었다는 것도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다. [20] 당연히 LG 팬 입장에서 생각하면 통탄할 만한 트레이드다. [21] 신인 시절 박진만은 포수 장비를 착용하고 펑고를 받는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 펑고를 김재박이 직접 쳐줬는데, 김재박 본인의 손에서 피가 날 정도로 쳤다고 한다. 박재홍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당시 일화를 술회하기를, 박진만이 한 단계 더 치고 올라가야 하는데 박진만의 성격이 느긋해서 안주하는 모습을 보이자 김재박이 맹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22] 다만 우규민은 김재박이 발굴했다고 보기엔 어렵다. 이미 김재박 부임 전인 2006 시즌부터 마무리로 1점대 방어율과 17세이브를 기록한 잘 나가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23] 당시 김재박은 차마 비싼 선수를 질러달라는 말은 못하고 하다못해 자신이 현대 시절 가장 요긴하게 써먹었던 불펜 요원 조웅천이라도 잡아주길 구단에 요청했었다. LG의 불펜 사정은 그만큼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물론 LG는 조웅천을 안 잡았다. [24] 그리고 LG 프런트에는 늘 그렇듯 대체 용병으로 최악의 선택을 했다. 제레미 존슨 릭 바우어. [25] 덕분에 LG의 포스트 조인성감이 사라졌다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최승환은 조인성과 3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1978년생. 다만 빠른 생일이어서 학번으로는 고작 두 학번 차이. 기량차는 현격하다. 그렇게까지 아쉬운 선수였다고 보기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백업으로 준수하게 해준 김태군도 있다. [26] 이듬해 김정민이 부상당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반쪽짜리 성공이 되어버렸다. [27] 그래서 후일 LG가 암흑기를 벗어나 중흥기를 맞이하여 우승 도전을 천명하고 류중일, 염경엽 등 능력이 검증된 감독들을 선임했을 때마다 '김재박도 우승 못 시킨 LG인데 과연 그들이 우승시킬 수 있을까?'라는 우려 섞인 반응이 나왔다. [28] 이후 김재박의 뒤를 이어 장기간 팀의 감독을 맡은 인물이 김인식이며, 두산 베어스의 감독을 맡아 9년의 임기 기간 동안 5번의 가을야구 및 한국시리즈 2회 우승을 기록하며 명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29] 한편 두 경기 모두 프로야구 시즌 직후에 치러져 선수들의 피로도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라는 쉴드가 있는데,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에 치러졌던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이나 2015 WBSC 프리미어 12에서의 호성적이 어떻게 설명되지 않는다. 즉 감독의 선수 피로도 관리에 문제가 있었다는 소리다. [30] 이 때문에 2009년 KIA 타이거즈로의 트레이드 이후 기회 드립을 친 김상현은 LG 빠들에게 금지어에 준하는 취급을 받는다. [31] 정의윤, 박병호, 이성열, 7번 이병규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32] 이는 원래 연고지인 인천을 버리고 서울로 튀려고 한 현대 유니콘스의 뻘짓이 결정타였다. [33] 주로 정진호 수석코치를 활용하였다. [34] 숭의야구장의 외야 펜스는 1.5m 높이의 콘크리트 펜스 위에 높은 철망을 덧대는 형태의 펜스였는데 김재박은 부임 전까지 5m였던 철망의 높이를 3.5m로 낮췄다. 김재박의 이같은 전략과 대척점에 있는 사람은 김성근으로 그의 부임 시 숭의야구장 펜스는 콘크리트 펜스 1.5m에 철망 높이만 7m로 전체 펜스 높이가 8.5m에 달했다. 그 시절만 해도 태평양 돌핀스가 타력은 물론 투수력도 영 좋지 않은 상태였기에 어렵사리 짜낸 묘안이었다. [35] 97, 99, 2005 세 시즌을 제외하면 모두 포스트시즌을 진출했다. [36] 전기시즌은 1위였다 [37] 3위 한화, 2위 쌍방울을 꺾고 코시진출. [38] 드림리그 [39] 드림리그 [40] 페넌트레이스 3위였던 두산에게 패배 [41] 페넌트레이스 4위였던 lg에게 패배 [42] 페넌트레이스 3위였던 한화에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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