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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적명 | 권준호(權俊豪) |
호 | 현오(玄悟)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924년 2월 1일[2] |
경상북도 안동군 일직면 광연리[3] | |
사망 | 2017년 12월 17일 (향년 93세) |
대구광역시 달서구 도원동 대구보훈병원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6묘역-11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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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경찰공무원· 행정공무원.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1924년 2월 1일 경상북도 안동군(현 안동시) 일직면 광연리에서 아버지 권난상(權蘭相, 1894. 10. 15 ~ 1979. 6. 24)과 어머니 이천 서씨(1903. 11. 24 ~ 1979. 5. 2)[4]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직면 광연리 입향조 권건(權健, 1576. 10. 7 ~ 1611. 2. 18)의 11대손이다.1942년 흥남공립공업학교 분석화학과를 졸업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입사하여 광업부 직원으로 근무했다. 1943년 공주경찰서에 사상범으로 검거되어 구금되었다가, 단식투쟁 끝에 2개월 만에 풀려났다. 1944년 9월 일본제국 육군에 강제로 징집되어 이등병 계급의 보병으로 복무하다가, 1945년 1월 11일 탈출해 호남성 장향현의 국민혁명군 중앙군 제9전구 지구의 유격대에 합류하였고, 전재덕의 인솔하에 설악 장군의 사령부로 이동해 그곳에서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그 뒤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원으로 광동성 낙창(樂昌)[5] 전선에 배치되어 후방공작 임무를 수행했다.
1945년 중국에서 8.15 광복을 맞아 1946년 귀국한 그는 그해 경찰공무원으로 입직했다가 1949년 국립경찰전문학교 간부후보생 3기를 졸업하고, 경위로 임관하였다. 그 뒤 풍기지서장을 시작으로 영양경찰서, 경주경찰서에서 근무하면서 계급이 경감에까지 올랐으며, 그 사이 6.25 전쟁에 참전하여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1956년 고등고시 행정과 예비고시(1차) 합격했으며, 1960년 경찰공무원을 퇴직하고, 1964년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해 서울특별시청에서 감사과 제2계장, 서부수도사업소장 등으로 근무하였다. 1967년에는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했고, 1971년 대전문화방송 총무국장, 1978년 한국 동경전자 총무이사 등을 역임했다.
그 뒤 1981년 문상명, 김국주 등과 함께 광복회 독립정신홍보위원으로 광복회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어 광복군 전사 편찬위원을 맡아 광복군 역사를 연구했다. 1991년에는 윤봉길의사 60주년 기념사업회 상임위원을 맡았다. 1992년에는 자서전 "미리 써두는 비명"을 출간했고, 1997년 광복회 대구경북지부장에 취임해 2009년까지 재직하면서 대구·경북 지역 내 독립유공자 및 그 유족들을 예우하는데 힘썼다. 2007년에는 대구광역시 원로자문위원을 맡는 등 지역원로로서 지역발전에 힘썼다.
그 뒤 한때 서울특별시 은평구 녹번동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다시 대구광역시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2017년 12월 17일 대구광역시 달서구 도원동 대구보훈병원에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권구원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17년 12월 19일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6묘역에 안장했다.[6]
3. 여담
- 테니스에 능했다고 한다.
4. 참고자료
- 독립유공자 공훈록
- 독립운동사 제6권, 449쪽
- 안동넷 뉴스, 고향 안동을 사랑한 독립지사 권준호, 2010년 3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