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린샤의 수상 이력
|
||||
{{{#!folding ▼ |
둘러보기 틀 모음 | |||
개인 수상 | ||||
[1] |
||||
베스트팀 | ||||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
가린샤의 기타 정보
|
|||||||||||||||||||||||||||||||||||||||||||||||||||||||||||||||||||||||||||||||||||||||||||||||||||||||||||||||||||||||||||||||||||||||||||||||||||||||||||||||||||||||||||||||||||||||||||||||||||||||||||||||||||||||||||||||||||
|
[[가힝샤| |
||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이름 |
가린샤[2] Garrincha |
|
본명 |
마누에우 프란시스쿠 두스산투스 Manuel Francisco dos Santos |
|
출생 | 1933년 10월 28일 | |
브라질 합중 공화국 리우데자네이루 주 마제 파우그란지 | ||
사망 | 1983년 1월 20일 ( 향년 49세) | |
브라질 연방 공화국 리우데자네이루 주 리우데자네이루 | ||
국적 |
[[브라질|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169cm[3] | |
포지션 | 아웃사이드 라이트 | |
클럽 |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유스 | SC 파우그란지 (1948~1952) |
프로 |
보타포구 FR (1953~1965) SC 코린치안스 (1966) 포르투게자 카리올라 (1967) 아틀레티코 후니오르 (1968) CR 플라멩구 (1968~1969) 올라리아 AC (1972) |
|
국가대표 | 50경기 12골( 브라질 / 1955~1966) |
[clearfix]
1. 개요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본명은 마누에우 프란시스쿠 두스 산투스(Manuel Francisco dos Santos). 가린샤(Garrincha)는 별명이다.[4] 펠레, 디디 등과 함께 브라질 대표팀의 월드컵 2연패를 주도했고 특히 1962 월드컵에서는 대회 최고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2. 유년기
리우데자네이루 슬럼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알코올 중독자였고 가린샤는 교육을 못 받아 당시 브라질 사람 상당수처럼 문맹이었다.
|
가린샤의 다리[5] |
가린샤가 축구를 시작하고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악마의 드리블을 하는 절름발이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이를 들은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3. 선수 경력
자세한 내용은 가린샤/선수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3.1. 플레이 스타일
|
소아마비로 인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당대 최고의 드리블 실력을 자랑한 윙어로, 옆나라의 리오넬 메시, 디에고 마라도나와 함께 역사상 최고의 드리블러로 불린다.[7] 또한 드리블 실력 뿐만 아니라 다른 방면에서도 매우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이는 그를 종합적으로 브라질 축구 역사를 상징하는 공격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가린샤의 피지컬은 좋지 않았다. 170cm도 되지 않는 단신이었고, 양쪽 다리의 길이가 다른 기형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비쩍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피드 역시 돋보이는 수준은 아니었다.[8] 축구선수로서 갖춰야 할 피지컬적인 장점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린샤가 이런 부분들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그냥 장애가 있음에도 축구를 하는것이 대단할 뿐인 축구선수 A 정도로 평가받으며 선수 생활을 마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엄청난 재능과 노력을 바탕으로 단점을 극복했다.
신체적인 면에서는 장점이 없었으나, 기술적인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였다. 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독보적이라 할 만한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민첩한 몸놀림이다. 이 민첩성을 기반으로 다양한 속임 동작을 사용했는데, 가린샤의 크고 작은 속임 동작들은 상대 수비수의 균형을 깨기에 그만이었다. 때문에 가린샤는 수비수와 1:1로 마주 본 상태에서 돌파해 내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수비수 몇 명을 계속해서 제쳐내는 플레이에도 능했다. 가린샤의 한쪽 다리가 짧다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 다리 길이의 차이가 상대 선수들에게 있어서는 가린샤를 상대하기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선수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리듬을 타면서도 양발을 무리 없이 사용하며 드리블하니 수비수 입장에서는 그 패턴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한쪽 다리가 짧았기 때문에 몸 전체가 휜 특유의 자세가 나올 수밖에 없으며 키도 작은데 몸을 낮추고 있으니 무게중심이 낮아서 밸런스가 좋았고, 그 자세 덕분에 뱡향을 바꿔도 불안정하지 않았다.
가린샤는 수비수를 '농락'하는 데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가진 선수였다. 가린샤의 별명인 'Alegria do povo'는 포르투갈어로 '사람들의 즐거움'이라는 뜻인데, 이는 가린샤가 매번 보여주는 트릭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상대 선수를 제치며 느끼는 희열'은 브라질 축구계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 중 하나이다. 브라질 축구를 다룬 여러 자료에서 볼 수 있는 ' 징가'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이를 누구보다도 잘 보여준 선수가 다름 아닌 가린샤였다.
|
역사상 최고로도 거론되는 드리블 능력이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패스에도 아주 능했다. 가린샤는 측면에서 중앙의 선수들과 연계하여 플레이메이킹을 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크로스와 패스 등으로 센터 포워드에게 찬스 제공'이라는 아웃사이드 라이트의 전통적 임무에도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상대 선수를 제치고 필요한 공간만 딱 만들어서 간결하게 크로스를 제공하는 플레이야말로 가린샤의 전매특허이다.
킥 능력 또한 뛰어났다. 측면에서 뛰는 클래식한 스타일의 윙어라서 중앙에서 슈팅을 때릴 찬스가 많지는 않았지만, 혹여 잠시 중앙에 머무르다 찬스가 찾아오면 지체 없이 냅다 슛을 때려갈겨 골망을 갈랐다. 골대와의 거리는 상관없었다. 가린샤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발목 힘의 소유자라서 슈팅의 세기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즉, 박스 안에서나 박스 밖에서나 위협적인 슈팅을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골을 이런 상황에서만 넣었는데, 보타포구 FR에서만 200골이 넘는 골을 득점했다. 놀라운 기록이다. 코너킥을 주로 본인이 처리했으며 프리킥도 잘 찼다.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중반까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프리킥은 주로 가린샤, 펠레, 지지 이 3명이 도맡았다. 셋 다 월드컵에서 프리킥 골을 득점한 바 있다.
뛰어난 활동량과 수비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가린샤의 플레이 모습을 보면 풀백과 협력 수비하는 장면, 상대 수비수들을 압박해서 공을 빼앗아내는 장면 등 당시의 윙어들에게서 보기 힘든 수비적인 재능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 크로스를 헤딩으로 처리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어서 꽤 많은 헤딩 득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 당시 축구의 수준과 천부적인 축구 재능이 합쳐져서 덕에 못하는 게 없는 선수였다.
경기 중 여러 가지 기행을 저지르기도 했던 선수였다. 수비진과 골키퍼를 제치고 빈 골대 앞에서 가만히 기다리다 수비진이 달려오자 그를 다시 제치고 골을 넣기도 했고, 1962 칠레 월드컵 4강전 경기에서 2골이나 넣으며 상대 수비진을 부수다가도 상대 수비수가 알짱거리는 게 짜증 나서 그를 발로 찼다가 퇴장당하는 일도 있었다. 1958 스웨덴 월드컵을 제패한 후 가린샤에게 우승 소감을 묻자 "여섯 경기만 이기고도 우승이라니, 이상해요."라고 말했다.[9][10]
4. 평가
장애를 극복한 인간승리의 산증인이자 역대 최고의 드리블러, 윙어 중 한 명으로, 현재까지도 '가린샤의 재림'으로 불리는 선수가 없다는 사실이 그 위상을 대변한다. 동시에 브라질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호나우두와 더불어 펠레 다음가는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다.현재는 역대 축구선수 Top 10 내에 간간이 랭크되고 Top 20 내에는 무조건 랭크되는데, 과거에는 펠레 못지않은 위상을 보유하고 있었고 현재도 브라질에서는 펠레의 경지에 이른 선수로 추앙받는다. 사실 그가 이룬 주요 업적인 월드컵 2연패와 1962 월드컵에서 선보인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단일대회 퍼포먼스 중 하나[12]를 생각하면 이 정도 평가도 저평가로 볼 수 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보타포구 FR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1957, 1961, 1962
- 토르네이우 리우- 상파울루: 1962, 1964
5.2. 개인 수상
- FIFA 월드컵 골든슈: 1962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2
- 발롱도르 드림팀[13]: 2020
- IFFHS 올타임 남아메리카 드림팀[14]: 2021
- IFFHS 올타임 브라질 드림팀: 2021
- IFFHS 레전드: 2016
-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6. 사생활
그라운드에서의 화려한 모습과 비슷하게 사생활 역시 다른 의미로 화려했다.절제 없는 성 생활을 즐겨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고, 아내가 6명에 자녀가 최소 14명이었다 한다. 펠레의 자서전에서 24살 당시 이미 자녀가 6명이라 언급되고, 은퇴 후 불과 49세의 나이에 알콜 의존증으로 인한 간경화로 사망했다.
가린샤의 전국적 인기 때문에 가린샤는 순수한 축구 영웅, 아내들은 팜 파탈 이미지가 있으나 꼭 그렇지는 않다. 아내들 중 대표적 악녀로 꼽히는 2번째 부인 엘자가 가린샤와 이혼한 이유는 가린샤가 그녀를 마구 발로 찬 것. 지적장애인 중 이러한 케이스는 상당히 많다. 교육을 해도 폭력이 나쁘다는 걸 이해하기 어렵고 이해해도 인내심이 부족해 분노를 못 참는 경우가 많기 때문. 일반 가정폭력범은 힘 조절을 하지만 지적장애인은 자제력이 부족해 전력을 다해 폭행하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가린샤는 축구선수였으니..
7. 가린샤에 대한 언사
많은 형제 중 누군가가,
쓸모없고 흉하게 생긴 새의 이름인 '가린샤'라는 이름을 그에게 지어줬다.
그가 축구를 시작했을 때, 의사들은 그에게 X표를 그었다. 소아마비에, 허기에 굶주리고, 유아 수준의 지능에, 척추는 S자로 휘고, 두 다리는 한쪽으로 휘었고, 절름발이 노새를 닮은 이 불쌍하고 비정상적인 젊은이는 절대 운동선수가 될 수 없다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만한 라이트윙은 없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그가 축구를 시작했을 때, 의사들은 그에게 X표를 그었다. 소아마비에, 허기에 굶주리고, 유아 수준의 지능에, 척추는 S자로 휘고, 두 다리는 한쪽으로 휘었고, 절름발이 노새를 닮은 이 불쌍하고 비정상적인 젊은이는 절대 운동선수가 될 수 없다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만한 라이트윙은 없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8. 기타
- 1958 월드컵 당시 가린샤는 스웨덴에서 100달러[16]로 라디오를 구매했다. 문제는 스웨덴에서 있었던 일이라 스웨덴어 방송만 나온 것. 당황한 가린샤는 마사지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라디오가 탐났던 마사지사는 사기를 당했다고 반응하며 자신에게 라디오를 넘기면 이 일을 묻어두겠다고 했다. 비싼 가격 때문에 라디오를 넘기는 것을 머뭇거리던 가린샤에게 마사지사는 대표팀 선수가 외국에서 사기를 당한 소식이 퍼지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라 했고, 결국 가린샤는 라디오를 넘기고 말았다.
|
- 이스타지우 마네 가힌샤는 가린샤를 기리는 의미로 명명된 스타디움이다.
- 에데르송 모라에스와 닮았다.
- 대한민국에서는 20세기만 해도 인지도가 많이 낮았고 기껏해야 펠레의 오른팔 정도 인상이었으나 21세기 들어 넷상에서 회자되며 인지도가 꽤 올라갔다. 물론 가린샤 클럽처럼 애매한 용어의 주인공으로 더 유명한 게 함정이지만.
[1]
플로리안 알베르트,
바바,
발렌틴 이바노프,
드라잔 예르코비치,
레오넬 산체스와 공동 수상.
골든슈, 실버슈, 브론즈슈는
1982 월드컵부터 증정했으므로 비공식 수상.
[2]
/ɡaˈʁĩʃɐ/. 실제 발음은 '가힝샤'에 가깝다.
[3]
프로필 신장이나 양
다리 길이 차이가 심해 정확한 측정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4]
뜻은 '작은
새' 혹은
가린샤라는 새.
[5]
좌측(사진에선 우측) 다리가 짧아서 들려 있다.
[6]
보험회사는 '한 다리가 5cm 이상 짧아진 때'를 30%
장애로 본다.
[7]
그의 기량이 정점에 달했던 1962 월드컵에선 드리블 횟수 6경기 62회라는 엄청난 드리블 실력을 보여주었다.
[8]
다만 순간 가속력이 뛰어났기에 드리블에 별 문제는 없었다.
[9]
실제로 32국이 출전하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이후의 월드컵도 한 팀이 우승까지 겪어야 할 경기 수는 고작 7경기(조별리그 3경기, 토너먼트 4경기) 뿐이다. 물론 본선에 출전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예선경기들은 논외다.
[10]
이 발언이 그의 지능 수준이 낮아서 한 말 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 모든 축구선수들의 꿈이자 세계 최고 위상의 대회인 것 치고 허무할 정도로 경기수가 너무 적은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11]
Pelé and Garrincha -
Gods of
Brazil
[12]
1986 마라도나 다음가는 퍼포먼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에 비견되는 퍼포먼스는
2022 메시,
1974 크루이프 정도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것.
[13]
RW 2위
세컨드팀
[14]
B팀
[15]
Pelé and Garrincha -
Gods of
Brazil
[16]
현재 가치로 약 900불.
분류
- 브라질의 남자 축구 선수
- 보타포구 FR/은퇴, 이적
- SC 코린치안스/은퇴, 이적
- CR 플라멩구/은퇴, 이적
- 아틀레티코 후니오르/은퇴, 이적
- 1957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페루 참가 선수
- 1959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아르헨티나 참가 선수
-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참가 선수
- 1962 FIFA 월드컵 칠레 참가 선수
-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참가 선수
- 브라질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FIFA 월드컵 다회 우승 선수
- FIFA 월드컵 득점왕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명예의 전당 헌액자
- 라이트윙
- 가린샤 클럽 회원
- 1933년 출생
- 1953년 데뷔
- 1972년 은퇴
- 1983년 사망
- 리우데자네이루주 출신 인물
-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 간경변으로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