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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4A1/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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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um Tank, M4A1 "Tutle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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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중형전차이자 M4 셔먼 시리즈 중 맏이인 M4A1의 실전 일람 문서.

해당 셔먼은 셔먼 시리즈 중 첫째 답게 제2차 세계 대전 초반부부터 참전하여 세계 대전 종전 및 냉전 시기 까지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2. 대전기

2.1. 제2차 세계 대전

2.1.1. 북아프리카 전역

2.1.1.1. 엘 알라메인 전투
파일:elalameinshermanII.jpg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 당시의 영국 육군 제1기갑사단 소속 셔먼 II
M4A1이 최초로 실전 투입된 것은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였다.

당시 2파운더 포의 저화력에 시달리던 시달리던 영국군에게 공여되었는데, 무려 300대라는 압도적인 수량으로 화끈하게 공여되며 영국군은 이에 크게 만족하여 사용하기 시작했고,[1] 독일군의 포를 무자비하게 튕겨내며 거침없이 진격하며 전투가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가게 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2.1.1.2. 횃불 작전
파일:toachM4A1.jpg
횃불 작전 중 격파된 미국 육군 소속 M4A1
동년에 벌어진 횃불 작전에서도 다수가 참전했는데, 미군과 자유 프랑스군 소속으로는 처음 데뷔전을 치렀다.
2.1.1.3. 카세린 협곡 전투
파일:Early production M4A1 at Kasserine Pass, 1943..jpg
카세린 협곡 전투 중 격파된 미 육군 제1기갑사단 1기갑연대 3전차대대 소속 M4A1 네임드 차량 "홍키 통크"[2]
1943년 북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카세린 협곡 전투에도 다수가 투입되어 주력 전차로 사용되었다.

이 중 소수의 차량의 경우 독일군에게 노획되어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2.1.1.4. 엘 게타 전투
파일:M4A1-el-guetta.jpg
엘 게타 전투 당시의 미 육군 제1기갑사단 산하 13기갑연대 2대대 E중대 소속 M4A1
엘 게타 전투 당시에 다수의 차량들이 미군, 영국군, 프랑스군 소속으로 투입되어 활약하였다.

2.1.2. 서부전선

2.1.2.1. 시칠리아 침공
파일:sicilyM4A1sherman.jpg
시칠리아 침공 당시의 "레드 비치 2" 상륙지점에 도달한 미 육군 소속 M4A1 네임드 차량 "기적"[3]
북아프리카 전선이 종결된 이후, "추축국의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아랫배"인 이탈리아를 침공하기 위해 기획된 시칠리아 침공작전에도 다수가 투입되어 활약하였다.
2.1.2.2. 안치오 상륙작전
파일:m4a1 ShermanTank15.jpg
안치오 상륙작전 당시의 미국 육군 소속 M4A1
시칠리아 침공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이후, 치러진 안치오 상륙작전 당시에도 다수가 참전하였으며, 성공적으로 이탈리아 본토에 발을 딛는데에 성공하게 되었다.
2.1.2.3. 이탈리아 전선
파일:Palermo005.jpg
이탈리아 전선 당시의 미국 육군 소속 M4A1
안치오 상륙작전 직후 벌어진 이탈리아 전선에도 참전하여 대활약을 하며 스위스 방향으로 패퇴하는 독일군을 저지하였다.
파일:M4A1 (T40).jpg
이탈리아 전선 당시의 미 육군 제752전차대대 B중대 3소대 소속 M4A1 (T40)[4]
이 밖에도 소수의 M4A1 (T40)이 투입되어 북이탈리아에서 종전까지 사용되었다.
2.1.2.4. 오버로드 작전
파일:Damaged_M4,_Normandy_1944-06-09.jpg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격파된 미국 육군 소속 M4A1[5]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일부 차량이 손실되었지만 상륙작전이 성공하며 프랑스에 진입하게 되었으며, 이때 진행된 코브라 작전에서 M4A1 (76) W가 실전을 치르게 되었다.

또한, 이때 프랑스군에게 넘겨졌던 M4A1들도 가세하여 프랑스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데에 영향을 끼쳤다.
파일:M4A1_DD_during_Operation_Dragoon.jpg
용기병 작전 당시의 미 육군 소속 M4A1 DD, 1944년 8월 15일
미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진행된 코브라 작전에서 76mm 셔먼이 활약하며 미 군부에서도 적극적으로 76mm M1A1 대전차포로의 업건을 추진하며, 이전과 달리 M10 GMC 급으로 고화력을 지니게 된 M4A1들은 이전까지 전투력에 있어서는 상당 부분 우위에 있던 장포신 탑재 4호 전차(G, H, J형)와 비교하자면 전투력, 소프트스펙 모든 것을 상회하였으며, 5호 전차 판터나, 6호 전차 티거와도 비등비등하게 대결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져, 독일 기갑군단의 악명을 꺾는데 일조하게 되었다.
파일:in.mood.3ad.jpg
미 육군 제3기갑사단 제32기갑연대 제3대대 1중대 소속 M4A1 (76) W 네임드 차량 "기분대로 (IN THE MOOD)"[6]
그리고 이 시기, M4A1 에이스도 생기게 되는데, 그 이름하야 라파예드 G. 풀이며, M4A1 1대, M4A1 (76) W 2대를 사용하여[7] 전차 12대, 장갑차량 246대, 도합 258대의 독일 차량을 격파하였는데, 이는 2차 세계 대전 미군, 나아가서 연합군 소속 전차장 중 기갑장비 파괴수로는 1위일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하였다.

추가로 그는, 에이스가 된 원인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M4 셔먼 시리즈 전체에 장비된 "자이로 주포안정기"를 하나의 비결로 꼽았는데, 이에 대해서 그는, 적 전차는 사격 시 무조건 정지해야 했던 것에 반하여, M4A1은 주포안정기를 작동시켜 기동간 사격으로 적이 정지하고 포를 조정하는 사이 먼저 선타를 날려 격파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2.1.2.5. 아르덴 대공세
파일:BulgeSherman.jpg
벌지 전투 당시의 미국 육군 제3기갑사단 소속 M4A1 (76) W[8]
패튼 장군의 제3군 휘하의 차량들이 아르덴 대공세 와중 바스토뉴 공방전 당시에 포위망을 세운 독일군을 농락하는 등의 대활약을 세우게 되었다.
파일:1200px-British_Sherman_Firefly_Namur.jpg
벌지 전투 당시의 영국 육군 소속 셔먼 IC 하이브리드
비단 기본 M4A1 뿐만 아니라, 영국군 소속으로도 셔먼 IC 하이브리드가 사용되어 활약했다.
2.1.2.6. 독일 본토 진격전
파일:5Ba9hjM.jpg
쾰른 공방전 당시의 미국 육군 제3기갑사단 소속 M4A1 (76) W
독일 본토 진격전에서 M4A1의 교전 기록중 특이한 사례로는 셔먼 1개 중대와 반궤도 장갑차에 탑승한 보병 1개 중대, 3대의 M36 GMC 대전차 자주포로 구성된 웰본 기동부대가 제507중전차대대 산하 3중대 소속 티거 2 10대와 지근거리에서 조우해 전투를 치른 사례로, 이때 미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지만, 특이한 점은 이 전투에서 3대의 티거 2가 손실되었다는 것이다.[9]

나머지 격파된 한 량의 경우, M4A1 (76) W가 격파한 것이 확인되었는데, 티거 2들이 셔먼 중대를 유린하는 동안, M4A1 (76) W 한 량이 행렬에서 벗어나, 아군 행렬 가운데 지점의 도로에서 약간 벗어난 작은 회벽 농가 건물 뒤로 엄폐했다.

때 마침 한 량의 티거 2가 후면을 내주고 있던 것을 발견한 M4A1 (76) W의 전차장은 엔진룸 쪽으로 포를 회전 시키라고 명령한 후, 티거 2의 엔진룸을 강타하여 이를 격파하는데 성공했지만, 곧바로 다른 티거 2에 의하여 격파되고 말았다.

비록 활약을 한 이후 바로 격파되고 말았지만, 이 용감한 M4A1 (76) W가 격파한 티거 2는 놀랍게도 미 제3기갑사단장인 모리스 로즈 육군 소장을 전사하게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티거 2였다고 한다.[10]

이후에는 일명, "베를린 익스프레스"라고 불리우는 독일 본토 진격전에 참전, 쾰른 등의 대도시에서의 독일군의 발악을 뚫고 기어코 라인 강을 건넌 후 엘베강에서 소련군과 조우 후 나치 독일을 패망시키는 데에 큰 획을 그었다.

2.1.3. 태평양 전쟁

파일:1944태평양M4A1.jpg
포격 중인 미 육군 소속 M4A1 "15번차"
태평양 전쟁 당시에도 미 육군 소속으로 투입되어 사용됐다.
2.1.3.1. 제2차 괌 전투
파일:M4_tank_knock_down_in_guam.jpg
제2차 괌 전투 당시 격파된 미 육군 소속 M4 컴포지트 헐
제2차 괌 전투 당시 미 육군 소속으로 M4 컴포지트 헐이 투입되었다.

전투 자체는 미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종결되었지만, 몇몇 차량의 경우 일본군의 자폭 공격이나 혹은 은신해 있던 치하 하고 등의 전차에게 피격당하는 손실을 입기도 하였다.
2.1.3.2. 손재주 작전
파일:Medium_tank_crosses_Suicide_Creek.jpg
손재주 작전 당시의 미 육군 소속 M4A1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뉴브리튼 섬을 탈환하는 작전인 "손재주 작전 (Operation Dexterity)"에도 미군 소속으로 다수의 M4A1이 동원되어 사용되었다.
2.1.3.3. 사이판 전투
파일:Battle_of_Saipan_M4_Composite.jpg
사이판 전투 당시의 미 육군 소속 M4 컴포지트 헐
사이판 전투 당시 컴포지트 헐과 M4A1 모두 다수가 투입되어 활약했다.
2.1.3.4. 필리핀 탈환전
파일:M4A1 of 754th Tank Battalion in Manila, Luzon island, 9 January 1945.jpg
마닐라 전투 당시의 미 육군 제754전차대대 소속 M4A1
파일:A M4A1 Sherman goes through the historic gate of Fort Santiago, the walled city of Intramuros, during the Battle of Manila. 1945.png
마닐라 전투 당시 산티아고 요새에 진입한 미 육군 소속 M4A1
필리핀 탈환전 당시 벌어진 마닐라 전투에서도 미군 소속으로 활약하였다.
2.1.3.5. 오키나와 전투
파일:okinawam4a6.jpg
오키나와 전투 당시의 미 육군 제713전차대대 소속 M4A3 (105) W HVSS와 M4 컴포지트 헐
오키나와 전투 당시 소수의 M4 컴포지트 헐이 사용되었다.

3. 냉전

본국인 미국에서는 1957년도에 완전 퇴역하였으나, 형제격인 다른 셔먼들과 같이 여러 나라에 공여되어 각국에서 활약하였다.

3.1. 국공내전

3.1.1. 화이하이 전역

파일:Huaihai_M8_scrap.jpg
화이하이 전역 당시 격파된 국민혁명군 소속 M4A1의 잔해[11]
국민당군이 하이화이 전역 당시 극소수의 차량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해당 M4A1 셔먼의 출처가 불확실한데, 일설로는 극소수의 셔먼을 공여받을 당시에 미 해병대에게 같이 공여받은 개체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3.2. 6.25 전쟁

파일:제10전차대대소속M4A1.jpg
6.25 전쟁 당시의 필리핀 육군 제10전차대대 소속 M4A1[12]
1950년 7월 필리핀 육군 제10전차대대 소속으로 M4 컴포지트 헐과 함께 소수의 M4A1이 파견되었는데, 이는 M4 컴포지트와 더불어 6.25 전쟁 참전 셔먼들 중 단 둘뿐인 75mm M3 전차포를 장착한 차량이었다.
파일:Chaffee_With_M32B1.jpg
6.25 전쟁 당시 M24 채피를 구난 중인 미 육군 산하 A중대 소속 M32B1 "22번차"
비록 미 육군 소속으로는 M4A1이 투입되지 않았으나, 이를 베이스로 하여 제작된 구난전차인 M32B1 및 M32A1B1은 다수가 투입되어 종전 시기까지 전차 구난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3.2.1. 북진 작전

파일:M32-Hamhung-19501110.jpg
북진 작전 당시 함흥에서의 미 육군 산하 B중대 소속 M32A1B1 "45번차"[13]
북진 작전 당시, 미 육군 소속으로 소수의 M32A1B1이 투입되어 활약한 기록이 남아있다.

3.2.2. 리퍼 작전

파일:M32B1_Korean_war_Patton.jpg
리퍼 작전 당시 M46 패튼을 구난 중인 미 육군 산하 제24보병사단 소속 M32B1[14]
리퍼 작전 당시에도 M32B1이 투입되어 전차 회수의 임무를 맡았다.

3.2.3.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

파일:M32B1A1_with_Sherman.jpg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 당시 1032고지에서 구난 중인 미 육군 산하 제89경전차대대 소속 M32B1[15]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 당시에도 M32B1가 투입되어 전차 회수 임무를 맡았던 기록이 남아있다.

3.3. 베트남 전쟁

3.3.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파일:M4A1_at_Indochina.jpg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의 프랑스 극동 원정 군단 소속 M4A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 극동 원정 군단 소속으로 투입되어 사용되었다가 이후 M36B2로 대체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3.4. 이란 친위 쿠데타

파일:m-4.jpg
이란 친위 쿠데타 당시 테헤란의 이란 제국 육군 소속 M4A1 (76) W
파일:pahlavi_coup_tank_iran_radio_soldiers.jpg
이란 친위 쿠데타 당시의 라디오 방송국 앞의 이란 제국 육군 소속 M4A1 (76) W
1953년 벌어진 이란 친위 쿠데타 당시에도 이란 제국군 소속으로 친위 쿠데타에 사용되었다.

3.5. 알제리 전쟁

파일:French M4A1(76)W tanks patrol a North African road near Blida, Algeria, on November 4, 1954.jpg
알제리 전쟁 당시의 프랑스 원정 군단 소속 M4A1 (76) W[16]
알제리 전쟁 당시에도 다수의 M4A1들이 프랑스 원정 군단 소속으로 사용되었다.

3.6. 알제리 쿠데타

파일:M4A1(76)W Medium Tanks in front of the Grand Palais, Winston Churchill avenue, Paris.jpg
알제리 쿠데타 당시 파리 처칠 거리의 프랑스 쿠데타 진압군 소속 M4A1 (76) W[17]
1961년 일부 극우 프랑스 장군들이 알제리의 탈식민지화를 막기 위해 벌인 알제리 쿠데타 당시에 샤를 드골의 쿠데타 진압군 소속으로 투입되었다.

3.7. 인도-파키스탄 전쟁

3.7.1.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파일:15253478_1163152557097060_8552131311812815549_n.png
시알콧 방향으로 진격 중인 파키스탄 육군 소속 M4A1E6[18]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며 파키스탄군의 주력 전차로 사용되었으며, 인도군의 센추리온 전차에 맞서 싸웠다.

켐 카란 전투 당시, "마지 카딤 후산" 전차장이 지위하는 M4A1E6 공병전차 708호차 한 량이 인도군의 센추리온 3대와 맞닥뜨렸는데, 놀랍게도 그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전차를 지휘하며 센추리온 3대를 짧은 시간 내에 단신으로 격파하는 대활약을 해낸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다수의 M4A1E6들은 인도군에게 노획되거나 격파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3.7.2.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파일:Pakistani_M4A1E6_(76)_during_Bangladesh_Independence_War.jpg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의 파키스탄 육군 소속 M4A1E6
파일:4vfz2vbgllg31.jpg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의 인도 육군 소속 M4A1E6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통칭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에도 파키스탄군의 주력 전차로 등장했다.

이 때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 인도군에게 노획된 M4A1E6도 인도군 측으로 전쟁에 동원되었으며, 이밖에도 전시 중 몇몇 차량이 인도군에게 노획되어 방글라데시 육군에게 넘어가 방글라데시군과 인도군도 M4A1E6로 무장하여 모두 M4A1E6로 무장한 상태에서 같은 전차끼리 전투를 치르기도 하였다.

3.8. 중동전쟁

3.8.1. 수에즈 위기

파일:IsraelM4A1E8(2).jpg
정비 중인 이스라엘 방위군 산하 제37기갑여단 소속 M-1 셔먼[19]
파일:IsraelM4A1E8(3).jpg
비르기프가파 인근 교차로에서 전투 준비 중인 이스라엘 방위군 소속 M-1 셔먼
초창기 이스라엘 독립전쟁 이후, 불안정한 평화의 시기에, 소련은 SU-100, T-55, IS-3, T-34-85 등의 다수의 차량들을 이집트나 시리아 등에 공급하면서, 이스라엘을 서서히 압박하고 있었다. 이스라엘군의 상황은 매우 암담했는데,이스라엘 독립전쟁 당시 임시로 사용했던 야지 개조형 셔먼들은 30대 중 겨우 15대 남짓만 살아남았으며, 이 마저도 아랍 연맹군의 강력한 전투 차량들에게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 뻔하였다.

따라서 서방세계에서는 중동의 최전선인 이스라엘을 중무장하기 위하여, 프랑스와 벨기에 등의 나라에게 부탁하여 M4A1 (76) W HVSS와, M4A1 (76) W을 판매할 것을 요청했는데, 이를 프랑스, 벨기에 양국이 허락하며 M4A1 (76) W HVSS와 76mm 버전은 이스라엘이 소유한 최초의 진정한 전차가 되었다.

2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의 76mm M4A1들은 M-50과 함께 시리아군의 4호 전차와 이집트군의 T-34-85와의 싸움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며 대활약을 하였고, 이는 이스라엘이 M4A1을 주력 전차로 사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3.8.2. 6일 전쟁

파일:supersherman-28.jpg
이스라엘 방위군 제29전차대대 산하 B중대 소속 M-1 슈퍼셔먼 "1호차"[20]
파일:supersherman-29.jpg
이스라엘 방위군 제29전차대대 소속 M-1 슈퍼셔먼 "33번차"[21]
1965년 기존의 76mm 장착형 M4A1과 M4A1E8가 노후화되고, 슬슬 요르단 등의 나라에서는 미국제 MBT인 M47 패튼 M48 패튼으로 무장하며 군사력의 격차가 나기 시작하자, 이스라엘은 때마침 프랑스에서 부르주 조병창이 개조한 M4A1 (CN-105-F1)의 라이센스를 사들여 무장하기 시작했고, 이를 본격적으로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3차 중동전이 발발하며, 전장에 등장한 M-51은 당시 최신예 MBT인 T-55를 무자비하게 격파하면서 그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기존의 76mm M4A1, M4A1E8들도 매우 분전했는데, 특히 예루살렘 전투에서 스코푸스 산 인근과 예리코 인근에서 이스라엘 공수부대를 지원하며 큰 도움이 되었고, 끝내 공수부대원들이 예루살렘을 탈환하며 1,900년만에,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3.8.3. 욤 키푸르 전쟁

파일:yom_kippur_war_M-1_sherman.webp
욤 키푸르 전쟁 당시 눈물의 계곡의 이스라엘 방위군 B중대 소속 M-1 셔먼 "2호차"[22]
6일 전쟁 이후로 다수의 M-1 셔먼들은 M-50, M-51로 개수되었으나, 이 시기에도 소수의 개수되지 않은 M-1 셔먼들이 골란 고원에서 전차전을 치렀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로 가장 큰 전투가 벌어진 일명, "눈물의 계곡"에서 분전하였는데, 이들은 결국 골란 고원을 방어해내는데 성공하였으며, 욤 키푸르 전쟁 후로 M-1 셔먼들은 완전 퇴역하였다.

3.9. 아르헨티나 해군 반란

파일:Azules_y_colorados_-_Tanques_en_Defensa_y_Brasil_-_La_Razón_-_septiembre_1962.jpg
아르헨티나 해군 반란 당시의 아르헨티나 육군 소속 셔먼 IC 하이브리드[23]
아르헨티나 해군 반란 당시에 육군 소속으로 셔먼 IC 하이브리드가 투입되어 이를 진압하는데 동원되었다.

3.10. 우간다-탄자니아 전쟁

파일:UgSherman7.jpg
우간다-탄자니아 전쟁 당시 국경 지대로 이동 중인 우간다 육군 소속 M-1 슈퍼 셔먼
1978년, 이디 아민을 쿠데타로 축출하려는 세력이 있었으나, 일이 실패로 끝나자 탄자니아 남부쪽으로 도망쳐서 이디 아민의 신경을 거스르게 되었는데, 이 것 때문에 열이 받을대로 받은 아민은 정말 뜬금없게도 탄자니아를 침공하기로 결정한다.

아민은 국영 언론이 우간다의 영토 주장을 강조하기 시작하도록 지시했으며, 이후 작전명을 해방 작전으로 정하고서는 10월 10일, 선전포고도 없이 침공을 개시하게 된다.

작전은 처음에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싶었으나, 폭격을 맞고 놀란 탄자니아군이 즉각 중국에게서 사온 59식 전차를 타고 등장하자 결국 패주하게 된다. 당시 탄자니아군이 가진 59식 전차는 M-1 슈퍼 셔먼이나, T-34-85CZ보다 훨씬 우월한데다, 무엇보다도 수량이 겨우 한줌 남짓인 우간다군의 셔먼들보다도 많았기에 패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후 동년 11월 탄자니아에 대하여 반격을 했으나 오히려 안 그래도 부족한 애꿏은 M-1 슈퍼 셔먼 2대만 파괴되었으며, 계속 밀리는 전황속에 M-1 슈퍼 셔먼들은 파괴되기 일쑤였고 결국 1979년 6월 3일 탄자니아군이 우간다의 수도인 캄팔라를 점령하며 결국 패전하게 되었다.

3.11. 아르헨티나 쿠데타

파일:Sherman_Ic_during_1976_Argentine_Coup.jpg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 당시의 아르헨티나 육군 소속 셔먼 IC 하이브리드
1976년 일어난 아르헨티나 쿠데타 당시에도 정부군 및 반란군 소속으로 셔먼 IC 하이브리드가 사용되었다.

3.12. 비글 분쟁

파일:sherman repotensiado patrolling the border with Chile during the Beagle Conflict, 1978.jpg
비글 분쟁 당시 국경을 순찰하는 아르헨티나 육군 소속 셔먼 레포텐시아도 전차 소대
1978년 벌어진 비글 분쟁 당시에[24] 아르헨티나 육군 소속으로 셔먼 레포텐시아도가 사용되었으나, 큰 충돌 없이 1982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중재로 6년간의 분쟁 끝에 비글 제도가 칠레 영토로 넘어가면서 전투에 사용되지는 않았다.

3.13. 몬테 카세로스 반란

파일:Montecaseros_1988_1_15.jpg
몬테 카세로스 반란 당시의 아르헨티나 육군 소속 셔먼 하이브리드 레포텐시아도[25]
1988년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몬테 카세로스 반란 당시에도 소수가 정부군 소속으로 사용되었다.


[1] 반면 이에 맞서 싸우는 독일군의 상황은 매우 안좋았는데, 당시 셔먼을 안정적으로 격파 가능한 유일한 전차였던 4호 전차 F2 (장포신형)의 배치수량은 겨우 30대 남짓으로 셔먼과 무려 10배 차이가 날 정도였다. [2] 프레스드 스틸 자동차 제작소에서 생산된 초기형이다. [3] 1943년 7월 10일에 촬영된 사진이다. [4] 1944년 8월 경 촬영된 사진이다. [5] 1944년 6월 9일 오마하 해변에서 격파되었다고 한다. [6] 하술할 라파예드 G. 풀의 탑승 차량이다. [7] 원래 M4A1에 탑승하고 있었으나, 독일군의 공격에 격파되고 M4A1 (76) W에 탑승하였다가 아군 P-38 라이트닝의 오폭으로 또 격파되고(...) 다시 같은 사양을 탑승했던 기구한 일화가 있다. [8] 우측에 있는 차량은 M4A3E2 점보 셔먼이다. [9] 이 중 2대는 75mm 탑재 셔먼의 백린탄 공격으로 인해 손실되었다. [10] 여담으로, 이후 제507중전차대대 소속원들은 이로부터 약 1달 보름이 지난 5월 12일에 미군 측에 항복했지만, 전범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기에 잔존 장병 전부 소련으로 끌려가서 굴라그에 수용되어 사망하는 등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11] 해당 잔해들 중 가운데에 있는 2대의 셔먼이 바로 이것이다. 추가로, 이 폐차들은 1949년 화이하이 전역 당시 격파된 국민당군의 다른 기갑차량들과 함께 상하이 인근 부두로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12] 셔먼 왼편에 찍혀 있는 사람은 콘라도 D. 얍 대위로, 1951년 4월 23일 율동 전투 당시에 중공군의 기습을 막는데 성공하고 전사하였다. 그를 기리기 위해 국내에서는 태극 1등급 무공훈장을 수여했으며, 필리핀에서도 용맹훈장, 미국에서도 공로 십자훈장을 수여하였다. [13] 1950년 11월 10일 촬영된 사진이다. [14] 1951년 3월 3일 촬영된 사진이다. [15] 1952년 8월 16일 촬영된 사진이다. [16] 1954년 11월 4일에 촬영되었다. [17] 1961년 4월 23일에 촬영된 사진이다. [18] 1965년 9월 17일 촬영된 사진이다. [19] 왼쪽의 차량은 전시 생산분이다. [20] 예리코 방향으로 진격 중 촬영된 사진이다. [21] 예루살렘 전투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22] 1973년 10월 촬영된 사진이다. [23] 1962년 9월 21일에 촬영된 사진이다. [24] 다만 비글 분쟁 자체는 무려 80여년 가까이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런데 1978년에 들어서면서 칠레와 아르헨티나 모두 직접적인 무력 충돌까지 불사하는 분위기라 양국간의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어 있었기 때문에 셔먼 레포텐시아도가 투입된 것이다. [25] 1988년 1월 15일에 촬영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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