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rgba(150,150,150,.2) 0%, transparent 30%, transparent 70%, rgba(150,150,150,.2))" {{{#!wiki style="min-height: 28px;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2px -12px" |
1회 | 2회 | 3회 | 4회 | 5회 |
[[우루과이| 1930 우루과이 |
[[이탈리아 왕국| 1934 이탈리아 |
[[프랑스 제3공화국| 1938 프랑스 |
[[브라질 제4공화국| 1950 브라질 |
[[스위스| 1954 스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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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 | 7회 | 8회 | 9회 | 10회 | |
[[스웨덴| 1958 스웨덴 |
[[칠레| 1962 칠레 |
[[잉글랜드| 1966 잉글랜드 |
[[멕시코| 1970 멕시코 |
[[서독| 1974 서독 |
|
11회 | 12회 | 13회 | 14회 | 15회 | |
[[스페인| 1982 스페인 |
[[멕시코| 1986 멕시코 |
[[이탈리아| 1990 이탈리아 |
[[미국| 1994 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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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회 | 17회 | 18회 | 19회 | 20회 | |
[[프랑스| 1998 프랑스 |
[[독일| 2006 독일 |
[[브라질| 2014 브라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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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회 | 22회 | 23회 | 24회 | 25회 | |
[[러시아| 2018 러시아 |
[[카타르| 2022 카타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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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
1946년 월드컵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취소 [1]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에서도 일부 경기 개최 |
}}}}}}}}}}}} |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
||||
<colbgcolor=#004f9f> 대회 이전 | 지역예선 | |||
조별 리그 | 1조 | 2조 | 3조 | 4조 |
결선 토너먼트 | 8강 | 4강 | 3·4위전 | 결승 |
대회 이후 | 팀별 리뷰 |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 ||
World Championship England 1966 1966 FIFA World Cup England™ |
||
대회 기간 | 1966년 7월 11일 ~ 1966년 7월 30일 | |
개최국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
마스코트 | 월드컵 윌리 (World Cup Willie)[1] | |
주제가 | Where in this World are We Going | |
공인구 | 챌린지 포스타 (Challenge 4-Star) | |
본선 진출팀 | 16개팀 | |
대회 결과 | ||
우승 |
잉글랜드 (첫 번째 우승) |
|
준우승 | 서독 | |
3위 | 포르투갈 | |
4위 | 소련 | |
수상 | ||
신인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프란츠 베켄바워 |
|
득점왕 |
[[포르투갈| ]][[틀:국기| ]][[틀:국기| ]] 에우제비우 |
|
이전·이후 대회 | ||
1962년 칠레 |
1966년 잉글랜드 |
1970년 멕시코 |
[clearfix]
1. 개요
1966년 영국 잉글랜드에서 개최된 8번째 FIFA 월드컵. 1966년 7월 11일부터 1966년 7월 30일까지 16개 국가가 잉글랜드의 8개 경기장에서 32경기를 치렀다.
1960년 6월 이탈리아 로마 총회에서 개최지가 결정되었는데, 잉글랜드는 서독을 7표차로 제치고 월드컵 개최권을 획득했다. 초기 월드컵 때 참가를 거부하며 월드컵의 권위를 낮잡아 보던 게 누구였는지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 1950년부터 계속된 월드컵 본선 부진+1953년 헝가리전 대패 등의 치욕스러운 일을 겪은 후 더 이상 과거의 아집에 얽매이지 않고 있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자국에서 개최를 해서라도 자존심을 세우겠다는 뜻이었다.
이 대회에서 유명한 것으로는 이탈리아의 조별리그 탈락과 북한의 돌풍, 또 그런 북한을 상대로 원맨쇼를 펼친 포르투갈의 흑표범, 그리고 8강전 안토니오 라틴의 퇴장과 결승전 제프 허스트의 유령골, 그리고 결승전 종료 직전 BBC 해설위원 케네스 월스텐홈이 내뱉은 명대사 "They think it's all over" 등이 있다. 그밖에 펠레의 저주가 시작된 대회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이 조별리그[2] 탈락(11등)이라는 굴욕을 겪기도 했는데, 펠레가 역사상 최악의 반칙이라는 더블 백태클을 당해 부상당한 것의 영향이 컸다. 이에 펠레는 "유럽 선수들은 풋볼이 아니라 풋복싱을 한다. 두 번 다시 월드컵에 출전하는 일은 없을 것"[3]이라고 분통을 터뜨리며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전세계적으로도 월드컵의 의미가 높아지면서 지역예선 참가국이 크게 늘었다. 때문에 유럽에서는 지역예선 조편성에서 최초로 4팀 1개조를 편성해야 했다.[4] 또 개최국 잉글랜드를 제외한 나머지 영국 홈네이션 3개 축구협회는 모조리 지역예선에서 조 2위로 탈락했다.
또한 모든 경기의 풀경기 중계가 남아있는 최초의 월드컵이기도 하다. 풋볼리아, 유튜브 등 여러 사이트에서 직접 볼 수 있다.
역대 최초로 전세계 위성 중계가 실시된 대회이기도 하다. 또한 주요 장면을 느리게 보는 슬로우 비디오기술도 월드컵에서는 이때 처음 도입되었다.
마지막으로 흑백 중계된 월드컵이다. 1970 멕시코 월드컵부터는 전경기 컬러로 중계되었다. 이유는 당시 컬러 방송 자체는 이미 기술적으로 가능했지만 주관 방송사인 BBC가 당시에는 컬러방송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5][6]
2. 인트로
https://www.youtube.com/watch?v=RRbmQciM4-k00:00에서00:32
3. 지역예선
자세한 내용은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지역예선 문서 참고하십시오.4. 경기장
월드컵이 열린 구장이 있는 도시와 구장 이름은 다음과 같다. 총 7개의 도시와 8개의 구장에서 열렸다.- 런던 - 웸블리 스타디움 (Wembley Stadium) (98,600명) - 개막전, 결승전 개최
- 런던 - 화이트시티 스타디움[7] (White City Stadium) (76,567명)
- 맨체스터 - 올드 트래포드 (Old Trafford) (58,000명)
- 버밍엄 - 빌라 파크 (Villa Park) (52,000명)
- 리버풀 - 구디슨 파크 (Goodison Park) (50,151명)
- 셰필드 - 힐스버러 스타디움 (Hillsbrough Stadium) (42,730명)
- 선덜랜드 - 로커 파크[8] (Roker Park) (40,310명)
- 미들즈브러 - 에어섬 파크[9] (Ayresome Park) (40,000명)
5. 조 추첨
- 1번 포트(남미): 브라질(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 2번 포트(유럽): 잉글랜드(개최국), 헝가리, 소련, 서독
- 3번 포트(라틴 유럽):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 4번 포트(나머지): 불가리아, 북한, 멕시코, 스위스
6. 참가 감독
{{{#!wiki style="color:white; 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or:#181818" |
<colbgcolor=#004f9f,black> 1조 |
알프 램지 ★ |
앙리 게랭 |
이그나시오 트레예스 |
온디노 비에라 |
2조 |
후안 카를로스 로렌조 |
호세 비야롱아 |
알프레도 포니 |
헬무트 쇤 ☆ |
|
3조 |
비센치 페올라 |
루돌프 비틀라칠 |
버로티 러요시 |
오투 글로히아 |
|
4조 |
루이스 알라모스 |
에드몬도 파브리 |
명례현 |
니콜라이 모로조프 |
|
역대 대회의 참가 감독 1930 | 1934 | 1938 | 1950 | 1954 | 1958 1962 | 1966 | 1970 | 1974 | 1978 | 1982 1986 | 1990 | 1994 | 1998 | 2002 | 2006 2010 | 2014 | 2018 | 2022 |
}}}}}}}}} |
7. 참가 선수
8. 대회 진행
8.1. 조별 리그[16강]
조별 리그 | ||||
1조 | 잉글랜드 | 우루과이 | 멕시코 | 프랑스 |
2조 | 서독 | 아르헨티나 | 스페인 | 스위스 |
3조 | 포르투갈 | 헝가리 | 브라질 | 불가리아 |
4조 | 소련 | 북한 | 이탈리아 | 칠레 |
1조에서는 홈팀 잉글랜드가 우루과이에게만 0:0으로 비기고 멕시코와 프랑스에 2:0 완승을 거두며 2승 1무 조 1위로 8강에 진출, 월드컵을 개최한 보람을 맛보았다.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도 프랑스에 2:1로 승리하고 멕시코에 비기며 1승 2무 조 2위로 8강에 합류했다. 조 최약체였던 멕시코는 우루과이, 프랑스와 비기고 잉글랜드에 석패하며 선전했지만, 2무 1패 조 3위로 첫 2라운드 진출은 또 다시 실패했다. 프랑스는 예선에서 유고슬라비아를 완파한 강력함은 온데간데 없었고, 약체였던 멕시코와 비겼을 뿐 잉글랜드, 우루과이에 연이어 패배하면서 승점 1점 1무 2패 조 최하위 칠레와 공동 13위로 8강 진출 실패했다. 훗날 프랑스는 2002 월드컵, 2010 월드컵에서도 비슷하게 탈락했는데 어째 우루과이와 같은 조에 속할 때마다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조에서는 서독과 아르헨티나가 사이좋게 2승 1무를 거두었고, 골득실에서 앞선 서독이 조 1위로, 아르헨티나가 조 2위로 8강에 진출했다. 첫 경기에서 서독이 스위스를 5:0으로 관광보낸게 조 1위를 결정지은 계기였다. 마지막 서독과의 경기를 남겨두고 1승1패였던 스페인은 서독에 이기면 막판 역전 8강이 가능했고 실제로 전반 23분 선취골을 넣었으나 금방 동점골을 허용하며 가능성의 희박해지는가 싶더니 후반 39분 역전골까지 얻어맞으며 탈락했다. 디 스테파노, 푸스카스 등의 레알 마드리드의 유러피언컵 5연패 주역이 은퇴한 후 호세 비야롱아가 취임하여 2년 전 유로 1964 우승을 거두었고, 앞서 몇 달 전에는 아만시오 아마로 등의 자국 선수들로 구성된 예-예 군단을 주역으로 앞세운 레알 마드리드가 빅이어를 들어올리는 등 낭보가 계속 들어온 스페인이었으나, 전 대회에 이어 이번에도 1승 2패, 조 3위 월드컵 최종 10위로 8강 진출에 실패하여 쓸쓸히 짐을 싸야했다. 마찬가지로 스위스도 3연패 16위로 2연속 대회 꼴찌 기록을 세웠고 이 대회를 끝으로 94년 미국 대회에 다시 출전하기까지 무려 28년간 월드컵 무대에서 사라졌다.
3조는 이번 대회 최고의 이변이 일어난 조였다. 지난 대회 부상으로 1경기 출장에 그쳤지만 여전히 골 넣는 기계였고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던 펠레, 그리고 펠레를 뒷받침하는 가린샤가 버티는 브라질은 월드컵 3연패를 목표로 왔고, 첫 경기 불가리아전에서 펠레의 골로 2:0 승리를 거두었으나 불가리아 수비수들의 거친 수비로 펠레가 부상을 입어 다음 경기에 결장했다. 결국 그게 원인이 되어 2차전 헝가리전에서 충격적인 1:3 패배를 당한 브라질은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은 펠레까지 출전시키며 포르투갈을 상대했으나 펠레는 부상에서 회복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포르투갈 수비수의 태클로 다시 부상을 입어 활약하지 못했고, 오히려 포르투갈의 에우제비오가 날아다니며 두 골을 기록, 브라질은 1:3으로 패하며 디펜딩 챔피언 1라운드 탈락이자, 월드컵 최종 11위로 8강 진출 실패의 굴욕을 맛보았다. 결국 3조에서는 3승의 포르투갈(조 1위), 2승 1패의 헝가리(조 2위)가 8강에 진출했다. 특히 포르투갈의 경우 월드컵 첫 진출에 3전전승 8강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아무리 에우제비오라는 전설의 선수가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고, 역시나 8강에서 이변의 팀이었던 북한을 누르고 4강에 오르는 기적을 발휘한다. 다만 이 때를 반짝으로 다음 대회 지역예선에서는 최하위로 광탈했고, 이후 1989/1991 세계청소년대회 2연패와 유로2000 4강에 진출하기 전까지 포르투갈은 심각한 침체기를 겪는다.
4조에선 대회 강력한 우승후보 중 하나로 손꼽히던 소련이 3전 전승으로 손쉽게 8강에 진출했다. 전설의 골키퍼로 불리는 레프 야신은 월드컵 본선에서 지난 대회의 굴욕을 씻으려는 듯 놀라운 선방을 연달아 보여주며 3경기 1실점을 기록, 상대팀 공격수들을 좌절시켰다. 한편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은 1차전 소련과의 경기에서 0:3으로 대패한데 이어 2차전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전반 페널티 킥 실점으로 패색이 짙었다가 박승진이 후반 43분 극적인 동점골을 넣으며 죽다 살아났고, 칠레는 승점자판기로 생각한 북한에 비기면서 8강행에 적신호가 켜졌다. 그리고 3차전 이탈리아전,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시작부터 북한을 가둬놓고 패기 시작했는데 이탈리아의 슈팅은 모조리 골문을 벗어나거나 선방에 걸리면서 판세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그러다 전반 34분, 주장 지아코모 불가렐리가 박승진에게 태클을 걸다 도리어 태클을 건 자신이 부상을 당하며 퇴장해 10명으로 플레이를 하게 되는 악조건에 놓였다. 이 대회까지 선수 교체 제도가 없어서 출장한 선수는 무조건 90분 풀타임을 다 뛰어야 했고 부상을 당해서 경기를 뛸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그 선수가 빠진 상태로 계속 치러야 했기 때문. 결국, 전반 42분에 박두익이 선제골을 넣은 후 후반전에 북한 수비진이 죽을 힘까지 다해 실점 없이 버텼고 결국 이탈리아는 0:1로 패배하며 1승 2패 월드컵 최종 9위로 8강 진출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훗날 FIFA 랭킹 57위이던 대한민국이 카잔에서 피파랭킹 1위 & 디펜딩챔피언 독일을 2:0으로 꺾은 사건과 상당히 유사하다.[11] 당시 이탈리아 선수단은 라커룸에서 대성통곡을 했고, 이 패배로 인한 8강 진출 실패 때문에 분노한 자국 팬들의 보복이 두려워 일부러 늦은 새벽시간을 이용해, 공항까지 바꿔가며 귀국했으나, 그 때까지 잠 안 자고 피곤을 무릅쓰며(!) 기다리고 있었던 성난 축구팬들에게 썩은 토마토 및 날 계란 세례를 맞는 굴욕을 맛보고 말았다. 게다가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이었던 에드몬도 파브리는 즉각 경질은 물론 1년간 근신 처분까지 받는 굴욕도 당했으며, 이후 이보다 훨씬 더 형편없는 그 감독이 올 때까지 오랫동안 최악의 이탈리아 감독이라는 오명도 붙었다. 또, 마리노 페라니를 비롯한 3명의 이탈리아 선수들은 북한전에서 결정적인 기회를 놓쳐 결국 패배 및 그로 인한 조별리그 탈락으로 이어지게 만든 죄로 아예 대표팀에서 퇴출당하는 처벌도 받았다. 그로부터 5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이탈리아 노인들이 박두익의 석자를 여전히 기억한다는 것을 비추어 볼 때 이탈리아 노인들은 이 굴욕을 단단히 기억하고 있는 모양새다. 또, 해당 시합이 있기 전인 동년 6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거행한 복싱 미들급 챔피언 결정전에서 니노 벤베누티가 한국측 김기수 선수에게 판정패 당하는 상황도 있었던 터라 결과적으로 남북한에 모두 얻어맞은 격이 되었다.
북한-이탈리아전 다음날 열린 소련과 칠레의 마지막 경기에서 칠레도 이기기만 하면 북한과 GAv를 비교해볼 여지가 있었으나 소련의 벽은 높아 결국 패배. 4조에서는 소련과 북한이 8강에 진출했는데 특히 북한의 8강은 단순히 아시아 최초의 2라운드 진출이 아닌, 유럽/남미가 독식하던 본선 2라운드에 최초로 비유럽/미주팀이 올라가는 사건이었다.[12][13]
8.2. 결선 토너먼트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8강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준결승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결승
8강 | 4강 | 결승 | 3·4위전 |
잉글랜드 1 : 0 아르헨티나 |
잉글랜드 2 : 1 포르투갈
|
잉글랜드 4 : 2 서독 |
포르투갈 5 : 3 북한 | ||
서독 4 : 0 우루과이 | 서독 2 : 1 소련 | 포르투갈 2 : 1 소련 |
소련 2 : 1 헝가리 |
8.3. 우승
1966 FIFA 월드컵 우승 |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000000 잉글랜드}}}]] |
첫 번째 우승 ★ |
9. 최종 순위
순위 | 국가 | 경기 | 승 | 무 | 패 | 득 | 실 | 득실 | 승점 | 비고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잉글랜드 |
6 | 5 | 1 | 0 | 11 | 3 | +8 | 11 | 우승 |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서독 |
6 | 4 | 1 | 1 | 15 | 6 | +9 | 9 | 준우승 | |
[[포르투갈| ]][[틀:국기| ]][[틀:국기| ]] 포르투갈 |
6 | 5 | 0 | 1 | 17 | 8 | +9 | 10 | 3위 | |
4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소련 |
6 | 4 | 0 | 2 | 10 | 6 | +4 | 8 | 4위 |
5 | [[틀:깃발| 아르헨티나 | ]][[틀:깃발| ]][[아르헨티나| ]]4 | 2 | 1 | 1 | 4 | 2 | +2 | 5 | 8강 |
6 | [[틀:깃발| 헝가리 | ]][[틀:깃발| ]][[헝가리 인민공화국| ]]4 | 2 | 0 | 2 | 8 | 7 | +1 | 4 | |
7 |
[[우루과이| ]][[틀:국기| ]][[틀:국기| ]] 우루과이 |
4 | 1 | 2 | 1 | 2 | 5 | -3 | 4 | |
8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북한 |
4 | 1 | 1 | 2 | 5 | 9 | -4 | 3 | |
9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이탈리아 |
3 | 1 | 0 | 2 | 2 | 2 | 0 | 2 | 조별리그 |
10 | [[틀:깃발| 스페인 | ]][[틀:깃발| ]][[프랑코 정권| ]]3 | 1 | 0 | 2 | 4 | 5 | -1 | 2 | |
11 | [[틀:깃발| 브라질 | ]][[틀:깃발| ]][[브라질 군사정권| ]]3 | 1 | 0 | 2 | 4 | 6 | -2 | 2 | |
12 | [[틀:깃발| 멕시코 | ]][[틀:깃발| ]][[멕시코| ]]3 | 0 | 2 | 1 | 1 | 3 | -2 | 1 | |
13 |
[[칠레| ]][[틀:국기| ]][[틀:국기| ]] 칠레 |
3 | 0 | 1 | 2 | 2 | 5 | -3 | 1 | |
13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프랑스 |
3 | 0 | 1 | 2 | 2 | 5 | -3 | 1 | |
15 | [[틀:깃발| 불가리아 | ]][[틀:깃발|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3 | 0 | 0 | 3 | 1 | 8 | -7 | 0 | |
16 |
[[스위스| ]][[틀:국기| ]][[틀:국기| ]] 스위스 |
3 | 0 | 0 | 3 | 1 | 9 | -8 | 0 |
9.1. 수상
- 득점왕
10. 팀별 리뷰
자세한 내용은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팀별 리뷰 문서 참고하십시오.11. 오심 논란
잉글랜드가 처음부터 편파판정으로 올라간 것 아니냐고 오해할 수 있는데, 16강 조별리그는 반박할수 없이 압도적인 실력으로 순조롭게 통과했다. 16강 조별리그에서는 오히려 우루과이나 프랑스, 멕시코 선수들이 고의적으로 강팀 잉글랜드를 어떻게든 막아 보겠다고 에이스들을 향한 파울을 일삼았다. 대표적인 피해자가 지미 그리브스와 앨런 볼. 특히 지미 그리브스의 경우에는 16강 조별리그 3경기 내내 심한 견제를 받은 것이 부상에 악영향을 미쳐 그대로 대회를 마감했고, 토너먼트부터는 제프 허스트가 빈자리를 채우게 된다. 여튼 이런 심한 플레이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를 상대한 팀들의 선수 중에는 주심의 제제를 받은 선수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전에서는 바비 찰튼의 정당한 골이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아 취소되기도 했다. 즉, 잉글랜드가 16강 조별리그를 1위로 통과하는 과정에서는 편파판정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잉글랜드가 불이익을 봤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3조 브라질 탈락의 경우 잉글랜드 월드컵 조직위원회에서 주심을 유럽인들로만 구성하여 고의적으로 브라질을 떨어뜨리기 위해 편파판정을 했다는 소문이 있다. 이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경기들을 맡았던 주심들을 살펴보면 불가리아전은 쿠르트 첸셔(Kurt Tschenscher:서독), 헝가리전은 켄 다그날(Ken Dagnall:잉글랜드), 포르투갈전은 조지 맥케이브(George McCabe:잉글랜드)로 잉글랜드인 2명, 서독인 1명으로 분명 유럽 심판들을 많이 기용했다. 그러나 편파판정을 했다는 추측만 있을 뿐 근거가 없으므로 루머에 불과하다. 주심이 편파판정을 일삼았다고 하는 이야기는 당시 축구판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거나 당시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풀경기 영상을 보지 않고 하는 이야기이다. 브라질은 파울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헝가리나 포르투갈을 상대로 좋은 경기를 보여주지 못했으며, 자신들도 비슷한 강도의 파울들과 비매너 행동을 저질렀다. 특히 포르투갈전에서 먼저 거칠게 플레이한 쪽은 포르투갈이 맞으나, 먼저 감정적으로 시비를 건 쪽은 엄연히 브라질이었다. 전반전부터 공과 관련없는 상황에 포르투갈 골키퍼에게 차징을 가하는 등 매우 악질적인 플레이를 일삼았다. 또 당시에는 카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고, 태클로 인한 파울에 의한 퇴장보다는 정도가 지나친 말싸움 혹은 주먹질 등의 폭력에 의한 퇴장이 많았다. 파울 좀 심하게 했다고 퇴장당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일례로 펠레를 부상 입힌 주앙 모라이스의 더블 백태클은 현대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명백한 퇴장감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파울조차도 선수에게 구두주의를 주는 수준에서 그치는 경우가 절대다수였다.
진정으로 논란이 되는 것은 8강전이다.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8강전 전반 35분 즈음에 주심이 안토니오 라틴의 깊은 태클에 파울을 선언했고, 안토니오 라틴과 주변에 있던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이에 대해 거칠게 항의하자 주심은 자신에게 욕을 한 것으로 오인하여 퇴장시켜 버렸다. 라틴은 당연히 제대로 화가 났고 경기장을 빠져나가지 않은 채 항의를 계속했다. 이 사태로 인해 경기는 7분 가까이 지연되었고 주최 측은 라틴을 설득하느라 통역사까지 불러와야 했다. 라틴은 씁쓸하게 경기장을 빠져나갔고,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이자 팀 주장인 라틴을 잃은 아르헨티나는 완벽한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에는 조별리그에서 그랬듯 바비 찰튼과 바비 무어가 경기를 완벽하게 지배하며 잉글랜드가 승리를 거둔다. 루돌프 크라이틀라인은 안토니오 라틴의 퇴장 사유를 '폭력적인 언행'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루돌프 크라이틀라인은 서독 사람이었고, 잉글랜드 선수와 아르헨티나 선수들 모두 크라이틀라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크라이틀라인 역시 영어와 스페인어를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잉글랜드의 잭 찰튼과 바비 찰튼에게도 구두주의를 주었다는데, 잭 찰튼은 그 사실을 다음 날 경기 리포트를 보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즉, 루돌프 크라이틀라인 주심은 양 팀 선수들 모두와 말이 안 통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근거를 들어 퇴장을 선언했으니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인터뷰에서 크라이틀라인 심판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그 모든 끔찍한 기억들을 잊고 싶다. 그 경기는 내가 주관한 모든 경기 중 가장 거칠었다. 끔찍했다. 수치스러웠다. 나는 라틴이 나를 따라오며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퇴장시켰다.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은 없었다. 그는 스스로 심판이 되려고 했다."[14]
루돌프 크라이틀라인
루돌프 크라이틀라인
이 경기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주심과 선수 간에 확실한 경고 표시 수단이 없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래서 1970년 월드컵부터는 확실한 경고 표시를 주된 목적으로 하여 옐로/레드 카드 제도가 도입되기에 이른다. 즉, 옐로/레드카드의 도입은 말이 통하지 않는 선수와 주심 간에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며, 선수 보호는 딸려 온 개념에 불과했다. 참고로 이 옐로/레드카드 제도는 켄 애스턴이라는 잉글랜드인 심판의 아이디어이다.
4강 포르투갈전에서는 편파판정 논란이 전혀 없었고, 결승전은 양 팀 모두 판정에 울고 웃었는데, 먼저 서독의 동점골 상황에서 슈넬링어의 팔에 공이 맞는 상황이 발생했다. 무어와 뱅크스가 항의했으나 소용없었다. 연장전에서는 연장전 제프 허스트가 슈팅한 공이 크로스바를 맞고 골 라인 위에 불분명하게 떨어진 뒤 다시 튕겨 나왔는데, 이것이 골로 선언되며 우승을 차지했다. 2010년 월드컵때는 독일과 16강에서 다시 맞붙었는데 이 상황이 오히려 역전되어 프랭크 램파드가 정당하게 넣은 골이 노골로 판정되었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그때의 한을 확실하게 풀어버린 셈.
잉글랜드의 홈 어드밴티지를 비판할 때 '웸블리 6연전'등을 근거로 비판하는 것은 옳은 비판이지만, '편파판정'은 루머에 불과하다.
사실 이 대회의 문제점은 다른 부분에서 시작했다. 대회 준비 기간에 남미 기자들에게 별로 좋지 않은 대우를 해 주었고, 유럽 기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훨씬 좋은 대우를 해 주었다. 이렇게 했으니 남미 기자들이 이 월드컵에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경기를 보러 온 타국 팬들의 숙소마저 제대로 준비해 두지 않는 등 경기 외적인 부분에서 미흡함이 드러났고, 애시당초 이런 분위기에서 대회가 시작했기에 다들 뭐 하나만 걸려봐라 하고 이를 갈고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석연찮은 판정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왔고, 이는 고국에서 중계방송을 통해 경기를 접할 팬들에게 전해 줄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잉글랜드와 유럽 심판들에 대한 반감이 잔뜩 담긴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남미 국가들에 있는 영국 대사관이 공격받는 일까지 있었으니, 이 월드컵에 대한 불만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월드컵은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낸 친남미 성향 언론들, 그리고 브라질의 탈락이 마음에 들지 않났던 주앙 아벨란제 등 거물급 인사들에게마저 비판을 받았고, 월드컵과 관련도 없었던 볼리비아에서도 이 월드컵의 판정들, 그리고 부조리함에 대해 비판하고 나섰다. 단순 미흡한 대회 준비에서 나온 불만이 나비효과에 의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판정 피해를 본 안토니오 라틴 같은 선수들은 당연히 이 월드컵을 달갑게 보지 않았다.
"심판[15]은 잉글랜드 유니폼을 입고 뛴 것이 분명했다."
안토니오 라틴
안토니오 라틴
16강 조별리그에서 탈락의 쓴맛을 본 펠레 또한 잉글랜드와 유럽 축구계를 디스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잉글랜드가 월드컵에서 우승하긴 했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가장 강한 팀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16]
"축구는 예술이 되어 기술로 관중을 끌어모으는 일을 스스로 포기했고, 이제 진짜 전쟁이 되어버렸다."
펠레
"축구는 예술이 되어 기술로 관중을 끌어모으는 일을 스스로 포기했고, 이제 진짜 전쟁이 되어버렸다."
펠레
에우제비우는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경기를 보고 "주심이 잉글랜드 선수들의 결점은 보지 못하는 것 같다"라고 언급했다.
잉글랜드 선수들이라고 화가 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바비 무어는 아르헨티나전에서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에 분노하여 평소와는 다르게 매우 화가 난 모습을 보였고, 이런 말까지 남겼다.
"더러운 짓을 했습니다. 그들은 공이 멀리 떨어져 있고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우리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침을 뱉고, 눈을 찌르고 발로 찼습니다. 놈들을 상대할 유일한 방법은 놈들을 이기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승리가 그들에게 상처가 될 테니까요."[17]
바비 무어
감독 알프 램지도 비슷한 말을 남기며 아르헨티나를 비난했지만, 이미 분노가 폭발한 남미에서는 알프 램지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바비 무어
잉글랜드 측에서는 시간이 흐르면 이런 사태가 자연스레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남미 언론들에 의해 퍼진 '일방적인 편파판정으로 점철된 월드컵이다!'와 같은 뉘앙스의 과도한 비난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고, 남미 쪽에서는 시간이 흐른 후에도 계속해서 이 월드컵의 안 좋은 면만을 부각했다. 그 결과 현재까지도 이 월드컵의 판정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잉글랜드 월드컵 비판론 관련 내용의 출처
12. 이야깃거리
- 현존하는 월드컵 인트로중 가장 오래된 인트로를 보유한 월드컵으로 BBC에서 송출한 인트로 영상이 남아있다. #
- 잉글랜드는 홈 어드밴티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예선 전 경기는 물론 자국이 치른 8강, 4강, 결승전을 모두 같은 경기장(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치렀다. 웸블리 스타디움은 잉글랜드 월드컵 당시 경기장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수용인원도 10만 명에 달하는 구장이었다. 근데 이건 1930년 우루과이의 경우에도 똑같다. 당시 홈팀이었던 우루과이도 우루과이 축구의 '성지'나 다름없는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에서 4경기를 모두 진행했다.
- 2022년 대회까지 마친 현재도 빨간 유니폼을 입은 팀이 우승을 거둔 유일한 대회이다. 이후 빨간색을 팀컬러로 쓰는 스페인이 우승했으나, 당시 스페인이 입었던 유니폼은 남색 세컨드 유니폼이다.
- 펠레는 잉글랜드에 입국하면서 "우리는 우승을 하기 위해 왔으며, 줄 리메는 브라질의 영광을 지켜줄 것이다"라 하였으나 현실은 1라운드 광탈. 물론 상대팀의 거친 수비로 인한 펠레의 부상이 있긴 했지만…. 사람들은 이를 펠레의 저주의 시초라고 한다. 참고로 이 시기가 바로 다름아닌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였으며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으로부터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에 이르기까지 12년동안 브라질이 우승은 커녕 1라운드조차도 통과못한 월드컵은 이 대회가 유일했다.
- 북한이 무서워서 지역예선에서 기권한 한국은 타도 북한을 외치며 중앙정보부가 직접 양지라는 축구팀을 창단하여 관리, 운영하였으나 북한과는 한 번도 경기를 치르지 못하고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실각하면서 해체되었다.
- 결승전에 쓰인 공은 바로 서독 선수가 슬쩍 가져갔고 지금도 독일 축구 기념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나중에 잉글랜드가 우승을 결정지은 공이라 부랴부랴 찾았지만 독일에 가 있었고 팔 생각도 없다고 하여 그저 사진으로나 찍어가며 안타깝게 여길 뿐.
- 비유럽/미주팀 최초로 본선 2라운드 진출의 쾌거를 올린 북한도 이후 내부사정으로 축구 국가대표팀을 후원한 당 간부가 숙청되는 것을 계기로 수십년동안 해외무대에서 모습을 감추었고, 이 기간동안 북한 축구는 세계축구와의 격차가 크게 벌어져 버렸다.
-
북한은 체격조건이 월등한 유럽팀들을 상대하기 위해
사다리 전법을 고안했다고 잘못 알려져 있다. 흔히 아래 사진이 '사다리 전법'을 이용한 헤딩 사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사실 사다리 전법은 일반적인 공격, 미드필더, 수비진 삼선을 기준으로 4-4-2 같은 포메이션이 아니라, 선을 단 두개만 둔 5-5 혹은 4-6 같은 극단적인 포메이션 전술을 뜻하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운 좋게도 동료 선수들을 이용하여 시간차 점프하는 것처럼 사진이 찍혔을 뿐, 이것이 사다리 전법은 아니다.
- 당시 프란츠 베켄바워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이적이 거의 확정상태였지만 이탈리아 대표팀이 북한 대표팀에게 패배하자 이탈리아 축구협회에서 외국인 선수 영입 금지 조항을 만들면서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 논란이 있는 우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은 이 대회 이후 몇 년 동안은 세계 최강의 팀으로 인식되었다. 월드컵이 끝난 후에도 바비 무어, 바비 찰튼, 앨런 볼, 고든 뱅크스 등 우승 멤버들이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66년부터 1969년까지 A매치 51경기 34승 12무 5패를 기록하여 Elo 레이팅 세계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으며, 1970년에도 그 '역대 최강' 브라질에 이어 세계 2위였다.[18]
- 잉글랜드는 이 대회 이후 2022년 현재까지 우승은 커녕 결승전에 진출하지도 못했다. 24년 뒤인 1990년 월드컵과 그로부터 28년 뒤인 2018년 월드컵에 4강에 진출하였는데 최종 결과는 모두 4위다. 앙숙인 프랑스하고 독일이 각각 1998년, 1974년과 1990년과 2014년 이렇게 우승을 하는 동안에도 말이다. 한 술 더 떠서 잉글랜드는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조차도 우승한 적이 없다.
- 영국은 6.25 전쟁때 UN군의 일원이었기에 북한은 당연히 영국의 적성국가였다. 소련, 헝가리 등 다른 공산권 국가야 공식적으로는 일반 수교국에 불과했으니 이들이 참여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였던 것. 더군다나 남북한의 정통성 문제 때문에 영국은 아예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고 있지도 않았다. 때문에 영국은 한국 정부에 미리 비정치적 국제 스포츠 행사에 북한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며, 절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사전 양해를 구했다. 한국 정부는 ' 북괴' 축구 입국 허용에 유감의 뜻을 표했다. # 다만 본선진출 16개국의 국기로 만들기로 한 기념우표는 북한 국기 문제로 다른 도안으로 바꿨다. 사실 대회의 특성상 영국 자국 국기도 없긴 했지만[19]. 북한 국가가 연주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인지 개막전과 결승전을 제외한 경기에서 국가 연주를 하지 않았다.
- 훌리건의 선배격에 해당하는 영국 관중들이었지만 당시에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선보이며 잉글랜드가 출전하지 않는 경기도 대부분 매진을 기록시키며 열렬한 성원을 보냈다. 특히 북한의 플레이에 열광한 영국팬들이 많았는데, 영국 국가 차원에서는 북한의 출전이 껄끄러웠겠지만 시민들 사이에서는 유럽, 미주를 제외한 유일한 국가인 북한이 대회 내내 좋은 경기를 선보인데다가 콧대 높은 이탈리아마저 꺾자 많은 팬들이 북한 경기를 보기 위해 몰려 들었고, 지금도 영국에서는 당시 북한팀에 대한 향수를 가진 팬들(지금은 70대~80대가 되어버린)이 많이 있다. 이런 배경에서 후술하는 천리마축구단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될 수 있었다.
- 대회 기간 중 런던 국회의사당에 전시중이던 쥘리메컵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국제적 망신을 당한 영국 경찰은 즉시 이잡듯이 쥘리메 컵 수색에 나섰는데, 엉뚱하게도 '피클즈'(Pickles)라는 이름의 개가 쥘리메 컵을 들고 왔다. 이 개는 주인이 훔쳐 집 뒷마당에 묻어놓은 쥘리메 컵을 도로 파서 들고 다니다가 발견된 것. 리버스: 1999라는 게임에서 언급된다. 직접적이진 않지만 초반 배경이 1966년이며 신문배달부가 ‘승리의 여신이 잉글랜드의 손을 들어줬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 빼박이다. 쥘리메 컵 도난 사건 역시 독자적인 설정을 창작하여 등장시켰으며 실제로 활약한 개인 피클즈 역시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한다. #
- 펠레, 에우제비우 등 세계 최고의 스타들이 나온 대회였으나 이들에 대한 거친 수비와 파올, 그리고 이에 대한 불복 등 많은 문제가 지적되었다. 결국 다음 대회에서부터 카드 개념이 생겨나기에 이른다.
-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하기 전까지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이 국제 대회에서 우승한 유일한 대회이기도 하다.
[1]
FIFA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마스코트.
[2]
16강 조별리그
[3]
다만 실제로 이런 발언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푸스카스가 1962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긴 한데, 펠레의 경우에는 출처가 확실하지 않다.
[4]
기존 유럽예선에도 4팀 1개조가 없던 것은 아니나, 그 유이한 경우는 모두 1950, 54년 대회의 영국 홈네이션만 따로 모아둔 조다.
[5]
BBC는 1967년부터 컬러로 방송했다. 유튜브 등에서 볼 수 있는 컬러 영상은 당시 중계화면이 아니라 FIFA가 기록영화 제작용으로 영화필름으로 찍어둔 화면이거나 나중에 컴퓨터로 컬러를 입힌 영상이다.
[6]
컬러영상 촬영은 이전부터 가능했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와
디즈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도 이보다 훨씬전인 1930년대 작품이었다. 최초의 컬러 방송은 1950년
CBS였다. 이미 올림픽의 경우
1964 도쿄 올림픽에서 컬러 중계방송을 했었다.
[7]
1908년에 개장하여 1985년에 철거된
1908 런던 올림픽의 주경기장이였다. 현재는
BBC 화이트시티가 이 자리에 들어서 있다.
[8]
1898년에 개장하여 1997년까지
선덜랜드 AFC가 사용하고 1998년에 철거된 옛 축구장.
[9]
1903년에 개장하여 1995년까지
미들즈브러 FC가 사용하고 1997년에 철거된 옛 축구장.
[16강]
[11]
단, 이탈리아전에서는 북한의 결승골이 전반전에 나왔던 반면, 독일전에서는 대한민국의 두 골이 후반전 그것도 추가시간에 집중적으로 나왔다는 차이점이 있다.
[12]
비유럽/남미팀 중 가장 꾸준히 월드컵을 밟은 멕시코도 이때까지 본선 2라운드는 꿈도 못꾸고 있었다. 초대 대회에서 미국이 4강에 진출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선수가 스코틀랜드 프로리그에서 뛰어서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팀이라는 비아냥을 받았었다. 사실상 비유럽/비남미 팀에서는 38년 쿠바 이후 두번째라 봐도 무방하다.
[13]
대한민국을 비롯한 그 어떤 아시아팀도 지금까지 해외 월드컵에서 8강 이상 올라가본 적이 없기에 북한의 8강 진출은 굉장히 의미가 크다.
[14]
기사 원문: I just want to forget the whole dreadful experience, The match was the roughest I have ever refereed. It was terrible. A disgrace. I sent Rattín off because he was following me and shouting at me. I had no option. He was trying to be the referee. 기사 출처:
https://www.google.com/amp/s/amp.theguardian.com/football/blog/2016/jul/24/1966-world-cup-final-conspiracy-refereeing-50-years
[15]
여기에서는 루돌프 크라이틀라인 심판을 의미한다.
[16]
이런 비판적 태도와는 별개로 무어, 뱅크스와 같은 잉글랜드 선수들의 활약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낸바 있다. 사실 잉글랜드는 펠레의 말과는 달리 객관적인 수치 면에서 이 시기 세계 최강팀이 맞다. Elo 레이팅 1위 자리에서 1966년 7월부터 1970년 6월까지 1위 자리를 유지했는데, Elo 레이팅에서 이렇게까지 길게 1위 자리를 지킨 사례는 정말 드물다.
[17]
원문:did do nasty things. They did tug your hair, spit at you, poke you in the eyes and kick you when the ball was miles away and nobody was looking. I just said the only way to deal with them was to beat the bastards. That’s what would hurt them.
[18]
Elo 레이팅으로 보면 1960년대 후반 세계 최강팀 4팀은 잉글랜드, 서독, 브라질, 이탈리아였고, 실제로도 당시 축구계에서는 이 네 팀이 최고의 국가대표팀으로 인식되었다.
[19]
이 대회에서 잉글랜드 팀이 국기로 잉글랜드 기를 썼는지, 유니언 잭을 썼는지는 당시의 사진 자료들을 찾아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 각종 기념품에 나온 참가국 국기에 영국 국기를 사용한 사례는 적지 않게 나왔고, 대회 포스터도 잉글랜드가 아닌 영국 기를 기본으로 디자인하여 만든 것이어서 영국 국기를 사용하였을 개연성도 있었지만 실제 대회 개회식의 입장식(실제 참가 선수는 아니고 영국 청소년들이 참가국의 유니폼을 입은 가상 행진)에서 잉글랜드 기를 사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9분 50초
[20]
1929년생, 37세.
[21]
1949년생, 16세.
[22]
1947년생, 19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