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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少昊)
금천씨 金天氏 |
||
|
||
시호 | 소호 금천씨(少昊 金天氏) | |
제호 | 소호(少昊) | |
성 | '기'(己)' | |
씨 | 금천씨(金天氏), 청양씨(青陽氏), 궁상씨(窮桑氏), 운양씨(雲陽氏) | |
휘 | 지(摯) / 질(質) / 현효(玄囂) | |
외조부 | 유교씨(有嬌氏) | |
아버지 | 황제(黃帝)[1] | |
생몰 기간 | 기원전 ?년 ~ 기원전 ?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년 ~ 기원전 ?년(84년) |
[clearfix]
1. 개요
소호(少皞)나 소호(少顥)로도 쓰며 발음은 같지만, 현재에는 대개 소호(少昊)로 쓴다. 궁상(窮桑, 산둥성 곡부로 추정)에 거주했기 때문에 궁상씨(窮桑氏)[2]로도 불린다. 그가 금천씨(金天氏)로 불리는 것은 오행의 으뜸인 금(金) 자로 자신의 정치와 덕을 나타내고, 금덕(金德)으로 천하의 왕 노릇을 하는 설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는 황제 공손헌원의 사위(혹은 아들)이자, 동이의 수령이며 오행 중에서도 금(金)을 관장하는 신이다.《여씨춘추》, 《제왕세기》에서 언급되길, 아버지인 황제 공손헌원의 뒤를 이어 민독 공동체를 형성해내고, 덕치를 펼쳐낸 성군으로 묘사가 된다. 그리고, 그는 황제 공손헌원의 부족과 동이족을 연결하고, 고대 중국 문명의 기초를 다진 왕이다.
왕가가 지은 소설집 《습유기》에 묘사되는 탄생신화에서는, 그의 어머니는 황아(黃娥)라고 불렸는데, 그녀는 선궁에 거처하며 밤에는 베를 짜고 낮에는 똇목을 띄우며 놀았다고 나왔다. 어느 날, 황아는 평소처럼 똇목을 타고 노닐다가 서쪽 바닷가의 거대한 뽕나무인 '궁상'[3]에서 스스로 '백제(白帝)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빼어난 용모를 한 신동(神童)을 만났는데[4], 두 사람은 뽕나무 아래에서 노래를 부르며 즐거움에 빠져 집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잊었다. 그러다가 항아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이 문서의 주인공인 소호 금천이었다. 소호는 장성하여 동쪽 바다 바깥에 소호지국(少昊之國)이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그의 부족은 새를 숭상하여 이를 관직명으로 삼았다. 《춘추좌씨전》 <소공>에 의하길, 소공 17년 가을에 담자가 조회하니 소공이 소호가 관직의 명칭을 새의 이름으로 삼은 유래를 묻자, 담자가 답하길
"(자신의) 선조인 소호가 즉위하자 봉황이 날아들었다. 이로 인해 소호는 새로써 법도를 정하고, 이를 관직명으로 삼았다. 봉조씨는 역을 주관했고, 현조씨는 춘분과 추분의 시기를 구별하는 일을 담당했으며 백조씨는 하지와 동지를 구별하는 일을 관장했다. 청조씨는 양기가 만물의 힘을 열어주는 일을 관장했고, 저구씨는 사마를, 축구씨는 사도를 담당했다. 시구씨는 사공을 맡았고, 상조씨는 사구를 관장했으며, 골구씨는 사사를 담당했다."
라고 말했다.[5]오랜 세월이 흐른 뒤, 소호는 자신이 태어났던 서방의 고향으로 또 다른 아들인 욕수를 데리고 돌아갔는데, 《회남자》 <시칙훈>에 의하면, 소호가 고향으로 돌아갈 당시 자신의 아들 중 하나인 구망을 동방에 남겨두어 삼황 중에 한 명인 복희의 보좌신이 되게 했다.
소호는 100세까지 장수하며 84년 동안 제위에 있었으며, 소호가 엄(奄)에서 붕어할 당시, 운양산(산동성 곡부시 서남부)에 장사지냈다. 소호릉은 산동성 곡부시 구현촌 동북에 위치하는데, 소호는 중국인의 공동 시조로 추앙받아 후대에 그에 대한 제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서방을 지배하는 상제[6]이며, 새들의 왕이었다.
이것 말고도 음악을 좋아하여 다양한 악기도 만들었다.
보다 원형에 가까워 보이는 신화에서는 금성의 신과 황아(皇娥)라는 공주의 자식으로 나오지만(위에 서술한 《습유기》에 묘사되는 탄생신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후 황제 헌원 중심의 중국 신화에 편입되면서 헌원의 아들이나 사위로 여겨졌다. 헌원의 아들로 보는 경우에는 전욱 바로 이전의 천자가 소호이며, 전욱이 어릴 적 삼촌인 소호의 밑에서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헌원 이후 즉위한 삼황오제 중 하나지만 《 사기》에서는 오제로 취급되지 않는다.
옛 기록 중에 신농 열산씨의 아들이라는 기록도 있다.
2. 신라와의 연관성
신라 시대의 각종 금석문 기록에 의하면 신라 왕실인 경주 김씨는 소호 금천씨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긴 듯 하다.신라 고사(新羅 古事)에
금궤(金櫃)가 하늘에서 내려와 김씨로 성을 삼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少昊 金天氏)의 후손(後孫)이라고 했다.
《삼국사기》
《삼국사기》
소호(少皥)는 ▨허(▨墟)하여 별빛을 나누고 시퍼런 바다를 뛰어 넘었으며, 금천(金天)은 …
태조(太祖) 한왕(漢王)은 1,000년의 ▨을 열고, ▨성(▨聖)은 백곡(百谷)의 ▨에 임하셨다.
< 김인문묘비>
< 김인문묘비>
다만 이는 중대 신라인들이 소급한 것이지 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로 보는 현대 학자는 거의 없다. 애초에 신라만 이런 게 아니라 금관 가야에서는 허황옥이 인도에서 왔다고 했고, 후백제의 견훤에게는 백제의 의자왕 후손설과 신라 진흥왕 후손설이 존재하며, 고려의 왕씨 왕가는 당나라 제7대 황제인 숙종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고려 당대에도 무리수로 여겨졌다.[7] 즉 이미 유명한 신적 존재/더 과거의 유명인을 왕가의 근원으로 삼는 현상은 역사 내내 존재했던 것이다. 이는 전세계적인 특징으로 왕가는 자신의 권위를 위해서 가능하면 유명인을 자신의 근원이라 주장했다.
《 규원사화》 등 진서 여부가 논쟁적인 일부 문헌에서 치우와 맞붙은 장수의 이름 중에서도 소호(少顥)가 있어 신을 모티프로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엉뚱하게 유망[8]의 부하로 나온다. 《 치우천왕기》의 금천도 여기서 따온 것이다.
[1]
염제 신농 열산씨라는 설도 있지만 대부분의 기록은 황제를 소호의 아버지로 보고 있다.
[2]
달리 청양씨, 운양시, 주선으로도 불린다.
[3]
높이만 해도 무려 10,000장이나 달했다. 그러면서 꽃과 가지는 무성했고, 그 잎은 붉은색을 띠었으며 열매는 자줏빛을 띠고 있었다. 궁상에서 열리는 자줏빛의
열매는 10,000년에 한 번씩 열리는데, 이걸 먹으면 장수했다.
[4]
이 신동(神童)의 정체는 새벽녘 동쪽 하늘에서 빛나는 계명성, 즉 오늘날의
금성이었다.
[5]
이것 말고도 소호 금천은 농정 및 공정과 같은 농업 및 수공업과 관련된 관직을 설치함으로써 고대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도모했다.
[6]
서방을 다스릴 당시에는 곤륜에서 삼위지국에 이르는 12,000리의 땅을 다스렸으며, 장류산에 살면서 서쪽으로 지는
해의 운행상태를 살피는 일을 했다. 또한 서방으로 같이 데리고 갔던 아들인 욕수는 태양과 노을의 빛깔을 살피는 일을 맡았다. 《
산해경》 <서차심경>에서는 저녁놀을 관장하는 신인 원신외씨가 언급이 되는데, 이 원신외씨가 바로 소호 금천이다. 그러면서 소호 금천은 천문을 관측하여 역법을 제정했다.
[7]
원나라 사신이 이를 지적한 바 있는데 당시 고려왕인 충선왕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는지 옆에 있던 민지라는 이가 사실 선종인데 숙종이라 잘못 기록된 것이라고 둘러댔고 이에 원나라 사신도 나름대로 납득했다.
[8]
유망은
신농의 8대손인데 신농과 동일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