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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항길

파일:한항길.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한흥리(韓興履)
이명 한정봉(韓丁鳳)[1]
자 / 호 항길(恒吉) / 몽당(夢堂)
본관 청주 한씨[2]
출생 1897년[3] 음력 7월 18일[4]
경기도 인천부 먼우금면 동막리
(현 인천광역시 연수구 동춘동)
사망 1979년 5월 8일 (향년 81세)
경기도 부천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840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3.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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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교육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부천대학교의 설립자이자 초대 학장이기도 하다.

2. 생애

1900년 7월 18일 경기도 인천부 먼우금면 동막리(현 인천광역시 연수구 동춘동)의 평민 집안에서 아버지 한용익(韓用翼, 1866. 3. 4 ~ 1956. 11. 21)과 어머니 연일 정씨 정필택(鄭弼澤, 1876. 3. 29 ~ 1957. 3. 16)[5]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초명은 '한민족의 복을 일으켜 세우라'는 뜻인 '흥리'(興履)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

5살 때부터 조부 한진유(韓稹裕, 1849 ~ 1915. 6. 13)[6]에게서 천자문 동몽선습·유년필독· 소학 등을 배웠으며, 1906년 과천군 하서면 호계동(현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289번지로 이주하여 이곳에 본적을 두었으며, 이후 서당을 다니면서 맹자 사서(四書)를 배웠다.

1909년 호계동에 구한 말 참의를 지낸 조용하(趙用夏)가 낙영학교(樂英學校)를 설립하자[7] 서당교육과 병행하여 이 학교를 다녔으며 1912년 재정난으로 폐교되자 수원군의 사립학교인 장화의숙(長華義塾)으로 옮겨 학업을 지속하였다. # 이후 시흥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1918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경성부 파고다공원에서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귀갓길 종로에서 독립선언서를 보고 손병희 등이 독립선언을 하고 3.1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3월 4일, 종로에서 선린상업학교에 다니는 모 학생으로부터 3월 5일 만세운동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그러다 3월 5일 오전 8시경 남대문역에 하차하고 등교하던 도중, 숭례문에서 경성고등보통학교 상급생으로부터 휴교령이 떨어졌으며 당일 그곳에서 만세운동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에 한항길은 남대문역 앞에 모인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합류하여 함께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휘날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세브란스병원 부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신문조서
파일:한항길(3.1운동).png
1919년 체포되었을 당시 촬영된 사진.

체포된 직후인 3월 17일, 경성고등보통학교 자체에서 3.1 운동에 연루된 학생들의 평소 성품과 행실을 조사하여 경성지방법원에 보냈는데 이때 조사내용을 기록한 '학생성행조사서'에 의하면, 한항길은 '기차 통학생으로서, 제법 근면하게 보이는 외에는 별로 주의를 끄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3.1 운동 이전에는 학교에서 그냥 평범하게 학교생활에 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

어쨌든 한항길은 그해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9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공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미결 구류일수 중 60일이 본형에 산입되었을 뿐 공소가 기각되어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때 수감된 기간은 미결기간을 포함하여 총 11개월 1일이었다.

1920년 3월 30일 만기 출옥한 후에는 교원양성소 시험에 합격하여 경성부 보인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1923년에는 경성법정학교[8]에 입학하여 야학을 수학하였고 1926년 9월 29일에는 조선총독부의 특전으로 사면·복권되었다. # 그후 1929년 보인학교 교사직에서 사퇴한 후 줄곧 포천 연초영업소 제조원으로 일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1948년에 '대민국이 하라'는 뜻으로서 '한항길(韓恒吉)'로 개명하였으며 정부로부터 효자상을 수상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국제신보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1953년 정전 협정이 체결되자 부천군 계남면 심곡리(현 부천시 원미구 심곡동)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했다. 1958년 3월에는 부천군 소사읍에 ' 소사공업기술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이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부천대학교의 시초이다.

1978년에는 한길학원을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가 이듬해인 1979년 5월 8일 경기도 부천시에서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으며, 그의 유해는 2008년 5월 1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부천대학교 광고에 늘 나오는, 수염이 덥수룩해보이는 백발의 인물이 바로 이 사람이다. 슬하에 7남 7녀를 두었으며 그 중 셋째 아들 한방교(韓方敎, 1929. 10. 22 ~ )[9]가 명예총장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한방교의 장남 한정석(韓政錫, 1972. 1. 5 ~ )이 현재 부천대학교 총장으로 있다.

3. 논란

그러나 3.1 운동 참가로 옥살이를 하다 출옥한 이후 별다른 독립운동 행적이 없던 데다 부천대학교 정심관 내의 연표에도 1928년부터 1945년까지의 내용이 없고, 한항길이 나온 학교가 조선총독부에서 운영했던 공립학교이자 학도병들이 징집된 학교라는 사실을 민족문제연구소 측이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뉴스타운에서도 이 사실을 보도하며, 더 나아가 한항길의 공적 심사 기록을 청구해 17년간 공백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 뉴스타운 기사에 의하면 본지가 부천대 관계자들에게 '이 17년동안 한항길은 무엇을 했는가?' 라는 질문을 했는데, 이에 관계자들이 필요이상 흥분을 보이며 덮고자 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극우 수꼴 인터넷 언론이라는 뉴스타운이 그 17년동안 친일 의혹이 있는 거 아니냐는 의혹까지 보도했다.[10]

이에 아들 한방교 당시 부천대학교 총장은 "사실 1945년까지는 부친이 조선연초판매주식회사와 보험회사 등에서 평범하게 일했기 때문에 뚜렷한 행적이 없어 적지 않았다."라고 해명했다.


[1] 아명으로 추정되며, 정유년(, 1897년)에 태어나서 이름자에 丁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예로 LG그룹 초대 회장인 구인회의 아명은 구정득(具丁得)인데, 정미년(, 1907년)에 얻은() 자식이라 해서 이런 아명이 붙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 장도공파(章悼公派) 28세 리(履) 항렬. [3] 디지털부천문화대전, 청주한씨제7교대동족보 29권 236쪽, 경성고등보통학교 3.1 운동 관련 학생성행조사서 참조.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900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4] 양력 8월 15일. 191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9월 15일생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1919년 8월 30일 예심 판결문에는 7월 17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5] 정운회(鄭雲會)의 딸이다. [6] 1909년 낙영학교가 설립되었을 때 이 학교 학감(學監)을 지냈다. [7] 인천 영화학교 교사를 지낸 첫째 작은아버지 한용구(韓用球, 1871. 10. 13 ~ 1975. 2. 18)는 이 학교 교사로 있었다. [8] 1910년 설립되어 1946년 미군정에 의해 폐교되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와는 다른 학교다. [9] 이명 한대(韓大). [10] 그러나, 뉴스 기사 내용을 잠깐 읽어보기라도 하면 알겠지만, 주장만 있을 뿐 그에 대한 근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