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00:12:23

구인회(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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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구인회
(1947~1969)
제2대
구자경
(1970~1995)
제3대
구본무
(1995~2018)
제4대
구광모
(2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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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LG그룹 초대 회장
구인회
具仁會|Koo In-hoe
파일:Koo,In-hoe.jpg
<colbgcolor=#a50034> 아명 구정득(具丁得)[1]
출생 1907년 8월 27일
경상남도 함안군 하봉면 승산리
(現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2]
사망 1969년 12월 31일 (향년 62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본관 능성 구씨[3]
연암(蓮庵)[4]
직업 기업인
학력 지수공립보통학교 (졸업)
중앙고등보통학교 (중퇴)
부모 아버지 구재서, 어머니 하근
형제자매 남동생 구철회[5] (1911 ~ 1975)
남동생 구정회 (1918 ~ 1978)
남동생 구태회 (1923 ~ 2016)
남동생 구평회 (1926 ~ 2012)
남동생 구두회 (1928 ~ 2011)
배우자 허을수
자녀 장녀 구자숙 (1924 ~ )
장남 구자경 (1925 ~ 2019)
차남 구자승 (1929 ~ 1974)
삼남 구자학 (1930 ~ 2022)
사남 구자두 (1932 ~ )
오남 구자일 (1935 ~ 2023)
차녀 구자혜
삼녀 구자영
사녀 구순자
육남 구자극 (1946 ~ )
신체 171cm, 65kg, O형
종교 유교

1. 개요2. 생애3. 경영이념4. 가족관계5. 수상 경력6. 여담7. 대중매체에서8. 관련 문헌

[clearfix]

1. 개요


캡션


대한민국 기업인. 허만정과 함께 LG그룹의 공동창업주이자 범LG가의 창립자이다.

2. 생애

1907년 8월 27일, 경상남도 함안군 하봉면 승산리(현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에서 아버지 구재서(具再書)[6]와 어머니 진양 하씨 하정식(河廷植)의 딸[7] 하근(河近)[8]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구인회의 집안은 본래 경기도 양주, 파주 등지에서 세거하는 문인 집안이었다. 12대조 구사민(具思閔)은 좌찬성을 지낸 인조의 외할아버지 구사맹의 동생으로, 종4품 군수를 지냈으며 # 9대조 구음(具崟)도 진사시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이 승정원 좌승지에 이르렀다. 8대조 구문유(具文游)는 진사시에 급제한 후 고령현감을 지냈는데, 7대조 구반(具槃) 때부터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경상도 진주목으로 내려와 세거하게 되었으며, 구인회의 조부 구연호(具然鎬, 1861~1940)가 고종 문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대대로 벼슬에 진출하지 않았다.

구인회의 조부 구연호는 문과 급제 후 사간원 정언, 1895년에 폐지되었다가 익년에 부활한 홍문관의 시독(구 홍문관 교리 상당)을 지냈다. 따라서 강한 유교가풍 때문에 사업을 시작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오히려 이러한 가풍 덕에 가업을 쌓아나간다는 일념으로 할아버지의 지지를 받고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같이 창업한데다 동향인 GS 허씨 가문도 LG처럼 유교적 기풍이 대단하여 단적으로 삼성, 롯데의 경우에는 딸들이 경영일선에 나서서 진두지휘하지만 LG가나 GS가의 딸들은 최근까지는 경영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재벌가로 출가해서 전업주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유교적 가풍에 대해 덧붙이자면 손자 구본무의 경우, 장자 승계 전통의 경영의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그의 동생 구본능의 친자 구광모를 양자로 입적하였다.

1920년 같은 마을 김해 허씨 허만식(許萬寔)의 딸[9] 허을수(許乙壽)[10]와 결혼해 6남 4녀를 슬하에 두었다. 이후에 그가 사업을 시작할 때 허만식 일가가 동업하는 형식으로 허씨 집안이 LG의 창업 및 경영에 참여했다. 이후 2005년에 허씨 집안은 LG그룹에 갖고 있던 지분을 떼어내어 GS그룹으로 분가하였다.

1921년 지수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했고, 1924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 3학년 재학 중이던 1926년 중퇴하고 중앙고 동문회인 중앙교우회에서는 18회 졸업생으로 대우하고 있다. 귀향해 지수협동조합의 이사로 취임하였는데, 이것이 사업가로서의 첫 출발이었다.

1931년 진주에서 동생 구철회(具哲會)와 함께 구인회상점이라는 포목상을 했다. 1941년에는 구인상회로 이름을 변경했다.

1944년 트럭 30대로 운수업을 시작했다.

1945년 부산에서 조선흥업사를 설립했다. 이는 당시 미군정청에서 허가받은 무역업 1호업체이다. 그가 부산에서 사업활동을 하고 있을 때 장인 허만식의 6촌 형제 허만정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아들 허준구[11] 를 대동하고 찾아왔다. 허만정은 구인회에게 "사돈의 역량을 익히 알고 찾아온 것이니 내 아들 준구를 밑에 두고 사람을 만들어 주소. 나도 사돈 사업에 출자 좀 할 생각이오."라고 부탁했다.

때마침 동생 구정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화장품 판매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판매대리만 하던 조선흥업사는 화장품 생산에까지 사업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생산을 시작하면서 당시 부산 서대신동에 있던 자택은 생산공장으로 바뀌었다. 첫 제품은 럭키크림이었다. 70~80대 어르신들에게 속칭 '동동구리무'로 잘 알려진 크림로션이다.

화장품을 만들다가 플라스틱에 대한 이해만 높이면 칫솔, 빗 등의 일상 생활용품을 만들 수 있음을 깨닫고 좀 더 본격적인 제조업으로의 진출을 위해 1947년 1월 5일자로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하였다. 락희는 즐거운 락, 기쁠 희 한자에 영어로는 Lucky를 의미하며, 구정회의 아이디어로 상호로 채택했다.

1952년 부산 범일동 공장에서 빗과 비누갑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무빗만 쓰던 사람들은 합성수지 빗에 열광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합성수지 빗을 보고 한국에서 이런 제품이 나온 것에 감격했다고 한다.

1955년 럭키치약을 출시했다. 1956년에 창경원에서 열린 산업박람회장에서 럭키치약을 10만 개 무료증정하는 이벤트를 열었다. 결국 출시 3년 만에 당시 시장을 장악했던 미국제 콜게이트 치약을 물리치고 국내 시장을 석권했다.

1950년대 해외 원조 등으로 전후복구사업이 진행되면서 50년대 후반에는 전기통신이 대부분 복구되었다. 이 시기에 구인회는 민간방송의 출현과 라디오에 관심을 두었다. 라디오의 수요는 늘어나고 있었지만 전부 외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59년 한국 최초의 전자공업회사인 금성사가 설립되었다. 그해 11월 국산 라디오 1호 A-501, 부품 국산화율 60%을 출시했다.

1960년대 군사정부 출범 이후 정부는 기존 대기업들에게 비료, 정유, 제철, 화섬, 시멘트 등의 기간산업 진출을 타진했다. 이에 구인회는 화섬공장을 짓겠다고 신청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정부는 LG에게 전선공장 건설을 허가했다. 이를 놓고 재계에서는 기업의 로비라는 억측이 나돌기도 했다.

1963년 사돈 이병철[12]에게서 방송사업참여에 대한 제안을 받았다. 방송사업에 참여하면 자사의 TV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을 예상하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동양방송을 운영하던 중 경영에 대하여 삼성과 LG 간의 의견 대립이 있어서 이병철과의 토론 끝에 방송사업에서 철수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때 방송에서 손 떼는 대신 삼성측으로 부터 삼성은 전자산업에 진출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받았다고 한다. 이후 1968/69년경 삼성측이 약속을 깨고 전자사업에 진출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고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가 증언했다. 삼성이 전자산업에 진출할 당시 금성 측이 격렬한 반발을 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13] 이후에도 금성과 삼성은 서로가 소유하고 있는 신문을 통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려 애썼다고 한다.
68년 봄의 일이다. 안양 골프장은 원래 설립 취지가 삼성 직원들이나 삼성 관련 인사들에게 개방하고자 지어진 것이었는데 당시는 금성사의 중역들도 전부 자동으로 안양 골프장의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었다. 사돈이 운영하는 회사에 대한 아버지의 배려였다. 그날 야외 테이블에서 아버지와 구회장님, 그리고 내가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아버지가 전자 산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구사장, 우리도 앞으로 전자 산업을 하려고 하네."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만 아버지는 꼭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나가는 투로 이야기를 던졌는데 반응은 예상치 못하게 터져나왔다. 구회장은 벌컥 화를 내면서 '남으니까 하려고 하지' 라고 느닷없이 쏘아붙였다. 즉, 이익이 보이니까 사돈이 하고 있는 사업에 끼어들려 고 하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나와 아버지로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반응이었다. 아직 전자 산업을 시작한 것도 아닌 시기에 설마 불만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화를 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때까지는 퍽 친하게 지내셨던 두 분은 이 일로 아주 서먹서먹해졌다.
부산의 지방 신문과 중앙일보 사이에 이를 두고 공방전을 벌인 것도 이 직후의 일이다. 부산의 K신문은 금성사에서 인수하여 운영하던 것인데 그 신문에서 '전자 산업 업계의 주장' 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서 '삼성의 전자 산업 진출은 부당하다'는 기사를 연속해서 내보냈다. 중앙일보의 부사장을 맡고 있던 나는 K신문이 너덧번 그런 기사를 보낼 때마다, 그렇지 않다는 요지의 기사를 중앙일보를 통해 싣도록 했다.

1964년 국내 최초의 합성 세제인 하이타이를 출시했다. 여긴 허씨 일가의 공도 컸는데, 허만정의 4남이자 허준구의 동생인 허신구가 태국 출장 도중 주민들이 흰색 가루를 빨래에 뿌려 물에 불렸더니 하얗게 변하는 걸 보고 상품화를 회사에서 제안했으나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허신구는 끝까지 밀어붙여 결국 구인회의 승낙을 받아냈고 이게 대박을 친 것. 하여튼 합성세제의 유행은 세탁기의 보급과 함께 한국 의생활에 새로운 문화가 자리잡는 계기를 불렀다. 같은 해에는 국제신보까지 인수하였다.

1965년에는 정유사업 진출을 위해 정부에 사업신청서를 제출했으나 정부는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1966년 제2 정유공장 사업희망자를 모집했고 LG, 롯데, 한화 등 6개 기업이 신청서를 제출했는데, 최종적으론 기술력이 좋았던 LG가 낙점되었다.

1967년 주방용 액체세제와 두발용 샴푸를 출시했고, 1968년 회갑 기념으로 연암문화재단을 세웠으나 1970년대를 불과 하루 앞둔 1969년 12월 31일 밤 12시 15분,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뇌종양으로 향년 62세로 세상을 떠났다.[14] 그리고 50년 뒤 장손인 구본무도 뇌종양으로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그의 자택에서 간소히 치러져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하갈리 선영에 시신이 안장되었으나 나중에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3동 산 190-7번지로 이장하였다.[15][16]

3. 경영이념

  • 인화단결, 개척정신, 연구개발

4.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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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 수상 경력

  • 대통령 표창 (1970)

6. 여담

  • 구인회(지수초 1기)가 수학한 지수초등학교 이병철[17], 허정구( GS, 지수초 4회 졸업), 조홍제( 효성)가 다녔던 학교이다. 현재는 학생이 없어서 2009년에 인근에 있는 초등학교와 통폐합해서 위치를 이전했다. 그 전까지 LG에서 모교이므로 금전적으로 지원을 했다.
  • 삼성 창업주이자 사돈 관계인 이병철과 골프도 같이 칠 만큼 친한 사이였으나 1968~69년 이병철 전자사업을 하려고 한다고 말한 뒤부터 사이가 멀어졌다고 한다. 이병철이 전자사업 진출 선언을 한 그날도 골프를 치던 중이었는데, 이 폭탄선언으로 두 사람은 그날 골프장에서 대판 싸우고 그 자리에서 박차고 나가버렸다고.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가 아버지를 모신다고 동행했다가 이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고 회고록에 밝힌 바가 있다.
  • 조선 세종의 8남 영응대군의 사위 구수영이 그의 직계 15대 선조이다. 문제는 그 구수영이 연산군~중종 조 최악의 간신배로 세종대왕의 손녀사위인 데다 연산군의 딸 휘신공주를 며느리로 들인 배경으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쌓고, 연산군의 폭정에 동조하거나 최대한 좋게 봐도 묵인까지 했음에도, 막상 중종반정이 벌어지자 자신의 며느리 휘신공주를 강제 이혼시키고 반정 세력에 빌붙어 반정 공신으로서 보상금과 대접을 받고, 중종 시절 강력한 신권을 바탕으로 중종을 필요 이상으로 압박했던 인물이기 때문.
  • 장손인 구본무가 태어남으로서 38세, 세는나이 39살에 할아버지가 되었다. 애초에 부유한 유력 양반가의 자손인 만큼 본인도 불과 13세에 결혼하였고 장남 구자경도 20세가 되기 전에 결혼해서 가능한 일이다.

7. 대중매체에서

8. 관련 문헌

  • 총수의 결단: 구인회 일대기 - 한운사 저. 동광출판사. 1984.
  • 실록기업소설 구인회: 럭키금성 창업비화 - 전범성 저. 서문당. 1984.
  • 연암 구인회·상남 구자경 연구 - 이건희[18] 등 공저. 수서원. 2000.
  • 한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 LG 창업회장 연암 구인회의 삶 - LG.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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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미년(, 1907년)에 얻은() 자식이라 해서 이런 아명이 붙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슷한 예로 부천대학교 설립자 한항길의 아명은 한정봉(韓丁鳳)인데, 정유년(, 1897년)에 태어나 이름에 '丁'이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2] 능성 구씨 집성촌이다. # [3] 도원수파(都元帥派)-호양공계(胡襄公系) 26세손 ○회(○會), ○선(○善) 항렬.( 족보(1-1) 족보(1-2) 족보(2)) [4] LG연암학원과 그 산하의 연암대학교, 연암공과대학교의 교명이 바로 여기서 유래됐다. [5] ( 족보) [6] 아내의 족보에는 이름의 한자가 具再瑞라고 써져 있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파일:구재서 처 족보.png [7] 출처: 《능성구씨족보》 구재서편. [8] 출처: 구재서 묘비. [9] 출처: 《능성구씨족보》 구인회편. [10] 출처: 구인회 묘비. 1905년 1월 18일에 태어나서 1986년 6월 13일에 죽었다. 구인회는 결혼한 후에 아명을 버리고 구인회라는 이름을 썼다. [11] 구인회의 조카사위. 구인회의 동생 구철회의 장녀 구위숙과 결혼 [12] 구인회의 3남(구자학 아워홈 대표)이 이병철의 2녀(이숙희 씨)와 결혼. [13] 두 사람이 아무리 사돈관계라 해도 기업가다. 기업가는 그 무엇보다 사업이 우선이기에 삼성이 전자산업에 진출하는 게 못마땅한 것이 당연하다는 평가가 있다. # [14] 그 시절 기준으로 평균은 산 것이며 후계자가 어려 진통을 겪던 쌍용의 김성곤, 한화의 김종희, 삼미의 김두식, 아예 요절해버린 선경(SK)의 최종건보다도 오래 살았다. 이 무렵 장남 구자경이 44세, 장손 구본무가 24세였기에 후계도 안정적으로 흘러갔다. [15] 바로 뒤편에 구인회의 양친 묘소가 있으며 그 윗대로는 진주시 사봉면에 선영이 조성되어 있다. [16] 지도앱에서 스카이뷰로 찾아보면 인접 지하에 제2만덕터널이 지나간다. [17] 물론 삼성 이병철이다. 구인회가 1907년생, 이병철이 1910년생이라서 약간의 나이 차가 나지만 구인회와 한 교실에서 수학하여 동기로 졸업했다. [18] 이화여대 경영대학 명예교수로, 2대 삼성 회장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