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5 20:12:00

하요 헤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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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요아힘 "하요" 헤르만(Hans-Joachim "Hajo" Herrmann: 1913년 8월 1일~2010년 11월 5일)

1. 개요2. 서훈3. 초기 경력4. 빌데자우 전술을 창안5. 독일판 카미카제 작전6. 전후의 활동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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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출생: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사망: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뒤셀도르프
출격: 320회
격추: 7~9기
격침: 12척 (7만톤 이상)
소속: KG 4, KG 30, JG 300
최종 계급: 대령

2. 서훈

스페인 검십자훈장 동장
2급 철십자 훈장 (1939년 10월)
1급 철십자 훈장 (1940년 5월 27일)
공군 명예컵 (1940년 9월 28일)
기사철십자 훈장 (1940년 10월 13일)
독일 황금십자장 (1942년 6월 5일)
공군 최전선비행 금장
조종사 겸 관측수 다이아몬드 금장(Flugzeugführer- und Beobachterabzeichen mit Brillanten)
백엽 기사철십자훈장 제269호 (1943년 8월 2일)
백엽검 기사철십자훈장 제43호 (1944년 1월 23일)

3. 초기 경력

독일 제국 시대인 1913년 8월 1일 항구도시 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이 되던 1933년 독일 국방군 육군 보병으로 입대했으나, 2년 후인 1935년에는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으로부터 직접 권유를 받고 새로 창설된 루프트바페로 이적했다. 1936년부터 1937년까지 콘도르 군단 폭격기 조종사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폴란드 침공 작전을 시작으로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는 KG 4 예하의 제7비행중대장으로 폭격기 부대를 지휘하며 런던 동부 템스강 어귀에 있는 항만을 폭격해 분쇄하는 공을 세웠다. 1940년 10월에 영본항 전투의 무공을 인정받아 기사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고, 1941년부터는 지중해 전역으로 옮겨가 시칠리아에서 발진해 영국군의 전략 거점인 몰타를 폭격하는 작전에 종사했다. 같은 해 4월, 독일 공군은 그리스 아테네의 피레우스 해군항에 정박해 있던 영국 해군에 대한 봉쇄 전략을 수립하고 6일 자정부터 7일 새벽에 걸쳐 폭격을 실시했다. 이 작전은 단순히 융단 폭격을 퍼부어 항구를 봉쇄하는 것을 주임무로 시도되었으나, 공명심이 앞선 하요 헤르만은 명령을 무시하고 Ju 88 폭격기에 탑재된 250 kg 폭탄 2발을 영국 해군이 새로 취역시킨 8천톤급 탄약수송선인 글랜 프레이저(SS Clan Fraser)에 투하했다.

하요 헤르만이 떨군 폭탄은 정확히 수송선의 탄약고를 때렸고, 수 천톤의 폭약을 가득 싣고 있던 이 배는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함께 정박되어 있던 크고 작은 배 10여척도 가라앉아버렸다. 이 회심의 폭격은 항만 시설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혀 피레우스 항구는 기능을 거의 잃고 한동안 수리를 받아야만 했는데, 이 피해 때문에 당분간 북아프리카 전선 영국군에게 보급선이 끊어져 버렸다. 대단한 전공을 세웠지만 이것은 분명 명령 위반이어서 하요 헤르만 대위는 항공단 사령관인 마르틴 피에비크(Martin Fiebig: 1891~1947) 대령에게 처벌받을 상황에 처했으나, 공군 수뇌부는 적함 11척 격침이라는 전공에 기뻐하며 헤르만 대위와 함께 임무를 수행한 폭격기 승무원 4명에게 훈장을 수여하면서 무마되었다.

그 후, 독소전에 참전한 그는 KG 30의 제3비행단장으로 취임해 소련에 식량과 무기, 탄약, 연료 같은 전쟁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무르만스크 항구로 향하는 연합국의 수송선단을 노르웨이에서 출격해 공격하면서 수많은 함선을 수장시켰다.

4. 빌데자우 전술을 창안

1943년 5월에는 하요 헤르만 중령의 건의에 따라 새로운 야간전투기 부대인 제300전투항공단(Jagdgeschwader 300)가 창설되고 자신이 직접 그 지휘관이 되었다. 이 부대는 단좌 전투기인 Fw 190으로 야간에 연합군 중폭격기를 요격하는 임무를 골자로 삼아 그가 빌데자우(Wildesau)라고 이름 붙인 야간 방공 작전에 임하며 영국 폭격기 승무원들의 피를 흘리게 했다. 이 전술은 지상을 등화관제시킨 상태에서 상공을 비추는 탐조등으로 폭격기의 실루엣을 부각시키면, 미리 상공에서 초계하면서 대기하고 있던 빌데자우 전투기 편대가 습격하는 전술이었다. 그 해 8월 23일 밤부터 24일 새벽에 걸쳐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 공습을 받을 때, 빌데자우 전술에 의해 더 많은 아브로 랭커스터 폭격기가 격추되었다. 헤르만도 지휘관으로 이 요격전에 직접 참가해 중폭격기 9대를 격추시키는 활약을 펼쳐 그 무공을 인정받아 백엽 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제국 원수 헤르만 괴링은 이처럼 가려운 곳을 적재적소에 잘 긁어주는 하요 헤르만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다만, 폭격기 조종사 출신인 그가 전투기 조종사 출신으로 밑바닥부터 진급해 장군에 오른 아돌프 갈란트 보다 더 총애를 받는 상황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1944년 1월에 괴링은 그의 목에 백엽검 기사철십자훈장을 걸어주면서 항공성 야간전투 감찰관(Inspekteur der Nachtjagd in the Reichsluftfahrtministerium)이라는 요직에 임명했다. 명색은 야간전투기 부대에 한정해 임명된 감찰관이었으나, 대령으로 승진한 헤르만은 갈란트 중장 휘하의 주간 단좌 전투기 부대의 활동과 장비 배치 같은 시시콜콜한 일에도 간섭하기 시작한다. 특히 헤르만 대령은 신병기로 기대받던 Me 262를 폭격기로 활용해야만 한다는 견해가 아돌프 히틀러와 일치하고 있었던 탓에, 갈란트 중장이나 귄터 뤼초 같은 전투기파 장교들과 갈등은 점점 깊어만 갔다. 괴링은 유능하지만 공군 상층부와 충돌이 잦던 아돌프 갈란트 중장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 하요 헤르만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5. 독일판 카미카제 작전

1944년 10월에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 카미카제 공격에 관한 소식을 전해 받은 하요 헤르만 대령은 독일에 상주하고 있던 일본 대사 오시마 히로시(大島浩: 1886~1975)를 통해 필요한 정보를 모은 후에, 연합군 중폭격기 부대를 전투기로 직접 부딛혀 공격하는 엘베 특별공격대(Sonderkommando Elbe)의 창설을 논의도 없이 밀고나갔다. 이 부대는 1945년 4월 7일의 대공습 때 실제로 출격해 몇 대의 폭격기를 추락시기긴 했으나, 그 대가로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138대가 이 임무에 동원되어 그중에서 무사히 돌아온 전투기는 50대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이 무모한 작전은 안 그래도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루프트바페의 목을 스스로 조르는 어리석은 소행 이상은 아니었다.

헤르만은 빌데자우 작전 이후에는 지상근무만 했던 탓에 스페인 내전부터 실전을 경험한 베테랑이면서도 출격횟수는 370회 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공대공 전과는 야간 전투에서 Fw 190을 몰고 격추한 9대가 전부였지만, 함선 격침으로 따지면 12척 / 7만톤을 수장시키는 실로 엄청난 무공을 세웠다.

6. 전후의 활동

독일이 패전을 맞은 후 소련 포로로 끌려가 수감되어 간수들의 구타와 협박을 받았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끝까지 소련에 협조하지 않았다. 헤르만은 전쟁이 끝나고 10년이 더 지난 1955년 10월에야 비로소 동독 국경을 통해 서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59년에 소프라노와 결혼한 그는 슬하에 자녀 둘을 낳고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1965년에 그는 뒤셀도르프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

잘 알려진대로, 하요 헤르만은 철저히 나치즘을 신봉했던 극우 사상의 소유자였다. 그는 변호사 활동의 대부분을 나치 네오나치 관련 범죄에 대한 변호를 맡았고 독일의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사회 활동을 줄곧 일관되게 해나갔다. 그의 변호를 받은 유명한 고객으로는 히틀러 암살 시도를 막아내 2계급 특진된 오토 에른스트 레머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데이비드 어빙(David Irving: 1938~), 미국에서 나치의 만행을 부정하면서 자칭 가스실 전문가로 일컫는 프레드 루처(Fred A. Leuchter: 1943~) 등, 한 마디로 휘황찬란하다.

2010년 11월 5일에 9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7.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