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3CA324> 일본국 제32-35, 37-39대 중의원 의원 하마다 고이치 浜田幸一 | Hamada Kōich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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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8년 9월 5일 |
치바현 기사라즈군 아오호리정 (현 치바현 훗츠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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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12년 8월 5일 (향년 83세) |
치바현 훗츠시 | |
학력 |
아오호리 소학교 (졸업) 치바현립 기사라즈 중학교 (졸업) 니혼대학 농학부 (타식학 / 중퇴)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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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 선수 | 7 (중) |
의원 대수 | 32, 33, 34, 35, 37, 38, 39 |
지역구 | 舊 치바 3구 |
가족 | 장남 하마다 야스카즈 |
악력 |
자민당 청년당원 7선 중의원 의원 (제32-35, 37-39대 / 舊 치바현 제3구) 치바현 현의회 의원 중의원 예산위원회 위원장 자민당 홍보위원장 자유민주당 부간사장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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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직 정치인. 자신의 이름을 딴 하마코 (ハマコー)란 애칭이 있었고, 국회(정계)의 망나니 장군(政界の暴れん坊)이란 별명으로 불렸다.2. 생애
1928년 9월 5일 치바현 기사라즈군 아오호리정(현 훗츠시)에서 대지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오호리 소학교 시절 현지사 표창상을 수여 받았을만큼 우등생이었고, 1941년 장학생으로 치바 현립 기사라즈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년전 일본 군부가 미국을 향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하마다는 군수 항공창에서 비행기 날개를 조립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중학교 3학년 시절인 1942년 츠치우라 해군 항공대에 가서 해군 비행예과 연습생 입학을 희망했지만 나이가 이르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1] 1945년 조선 출신 동급생과 함께 남만주철도에 입사하는것이 확정되었지만, 출발 직전 종전 선포와 함께 회사가 해체되었고, 동원처인 제2항공창에서 히로히토의 옥음방송을 듣게 된다. 이때 전쟁에 참전했던 형의 병사 소식과 함께 대지주이자 대정익찬회 임원이었던 아버지가 공직추방을 당하며 도박에 빠져 모든 재산을 탕진하는 일이 벌어졌고, 하마다의 집안은 크게 몰락했다.
1946년 하마다는 니혼대학 농학부를 중퇴하고 날마다 술가게와 게이샤 업소를 출입했고, 야쿠자들과 패싸움을 벌이며 방탕한 나날을 보냈다. 후술할 이와나카이 산하 야쿠자 경력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다. 몇년 후 하마다는 방탕한 자신의 모습을 추스르고 청년단 활동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했다.[2]
1959년 기사라즈군 훗츠정 의회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중의원을 목표로 1960년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치바 3구에 무소속 후보로 입후보했지만 낙선, 1963년 치바현 의회 선거에서 현의원 선거에 당선되었고, 1969년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 공인을 받아 국회의원 첫 당선에 성공한다.[3]
1973년 이시하라 신타로, 나카가와 이치로를 중심으로 결성된 강성 우파 파벌 세이란카이(청람회)의 결성에 참가, 사무국장을 맡았다. 이 무렵부터 강경파 의원으로 언론에 다뤄지며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고, 수많은 어록과 일화들을 남겼다.
1979년 자민당 일부 파벌들이 (후쿠다파, 나카소네파, 미키파, 나카가와 그룹) 당시 총재였던 오히라 마사요시의 총선 패배 책임을 지고 사임을 촉구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주류파인 다나카 가쿠에이파 (목요회)와 오히라파( 굉지회)는 아예중도 야당인 공명당, 민사당, 신자유클럽과 함께 신당 결성의 움직임을 보였고, 이것이 자민당 최대 위기 중 하나였던 40일 항쟁(四十日抗争)이다.
하마다는 이 당시 군소파벌인 나카가와 그룹에 속해 있었고, 이해 11월 2일 오히라와의 면담에서 이날 열릴 예정인 양원 의회 총회를 저지하려는 반주류파의 농성을 저지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4] 그는 양원총회가 열리는 자민당 본부로 달려갔고, 비주류파들이 총회를 저지하기 위해 의자나 책상 등으로 바리케이드 당 홀에 설치해 입구를 단단히 봉쇄하고 있던 상태였다. 이를 본 하마다는 분노가 폭발했고, 비주류파가 설치했던 바리케이드를 일일히 철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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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파가 설치한 바리케이드를 철거하는 하마다 |
(いいか断っとくけどな、かわいい子供達の時代のために自民党があるっちゅう事を忘れるな!お前らの為にだけ自民党があるんじゃないぞ!?) 좋은가, 어리석을지도 모르겠지만, 귀여운 아이들의 시대를 위해 자민당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너희만을 위해 자민당이 있는 게 아니라고!? |
1980년 록히드 사건 수사 중 피고인 오사노 겐지가 록히드 마틴사로부터 받은 20만 달러는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에서 Kㆍ하마다라는 인물이 딴 450만 달러의 할부에 충당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 Kㆍ하마다라는 인물이 하마다 고이치라는게 아니냐는 주장이 언론을 통해 제기되며 순식간에 논란의 중심에 섰다. 또 언론의 추가 보도를 통해 여당 국회의원이 불법으로 해외에서 도박을 했다는 사실과 국세청의 신고 없이 일본 엔을 미국 달러로 환전한 사실도 폭로되며 국회의원직을 사직하라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하마다는 그해 4월 국회의원직과 모든 당직에서 사퇴했고, 그해 6월 열릴 예정인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불출마를 선언했다.[5]
1983년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국정에 복귀했다. 1984년 일본 중핵파의 방화로 인해 자민당 본부가 불길에 휩싸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하마다는 당 실무 직원 및 비서들과 함께 진화에 앞장서고 있었다. 바로 그때 당시 법무대신이었던 스미 에이사쿠 (住栄作, 1920-1986)가 술에 취한 상태로 나타나 이거 매치 펌프 아님? ㅎㅎ라 비아냥 대자 분노한 하마다는 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1987년, 중의원 예산위원장에 취임하면서 처음으로 중량감 있는 요직에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 2월 6일 예산위원회 본회의에서, 일본공산당 마사모리 세이지 (正森成二, 1927-2006) 의원이 과격 좌파에 대한 정부의 수용방식이 문제라는 질의를 하던 중 자민당 방화사건 당시 하마다가 와이드 쇼에서 "자민당 방화사건의 책임은 신좌파를 적절히 수용치 못한 우리(자민당)의 잘못이 크다" 라는 발언 한 내용을 인용했다. 그러나 하마다는 "그때 당시의 발언에 현재 상황을 대입하는건 옳지 못하다" 라며 마사모리의 발언을 불쾌하게 여겼고, 이윽고 당시 일본공산당 의장이었던 미야모토 켄지의 린치 살인 의혹 사건[6]을 꺼내며 질의는 두 사람의 신경전으로 까지 이어졌다. 이후 하마다가 상기한 과거 발언을 인정하며 두 의원간의 마찰은 잠잠해지는듯 했다.
하지만 위원회 종료 직전, 마사모리의 일방적인 질의 방식에 불만을 품고있던 하마다는 아까전 린치 사건 관련 내용을 다시 꺼내며 이런 말을 했다. #
1933년
12월 24일, 미야모토 켄지 외 몇 명에 의해, 당시의 재정부장 오바타 타츠오를
사타구니에……
철사로 조여
린치하며 죽였다. 이 일만은 정확하게 말씀드릴 테니까요. (중략) 내가 말하는 것은 미야자와 켄지군(미야모토 켄지의 오타)이 사람을 죽였다고 말한 것 뿐이잖습니까. |
이 발언을 들은 공산당 의원들은 격분하며 단체로 항의했고, 특히 싸움의 당사자인 마사모리 세이지는 예산위원회 종료 후 기자기회견에서 하마다를 향해 "너(하마다 고이치) 야쿠자가 아닌가, 까불지마!" 라고 직접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그는 의사록 삭제 시도 및 위원장 사퇴를 거부했지만, 결국 논란 끝에 위원장직을 사퇴했다. #
1993년 자민당 분당 사태 당시 분당파( 오자와 이치로, 하타 쓰토무 등이 소속된 개혁포럼21)의 회담을 저지하려고 시도중 혼란스러운 인파 속에 섞여 바닥에 깔리기도 했다(...) 그해 7월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를 은퇴, 지반을 장남 하마다 야스카즈에게 승계했다.
정계 은퇴 이후에는 특유의 쇼맨십과 입담을 살려 TV 탤런트로 전직했고, 여러 프로그램과 광고에 출연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특히 TV 아사히의 시사 프로그램인 " 비트 타케시의 TV 태클"에 보수 논객으로 출연하며 자신을 " 악당당 간사장"으로 칭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TV 및 대외 활동을 활발히 해오다가 2012년 8월 5일, 노환으로 인한 심부전으로 치바현 훗츠시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83세.[7]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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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 1964 | 정계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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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 2012 |
입당 정계은퇴 사망 |
4. 선거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5 | 치바현 현의회 선거 | 기사라즈군 훗츠정 |
[[무소속(정치)| 무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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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당선 | 초선[8]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치바 3구 | 5,783 (1.65%) | 낙선 (5위) | ||
1963 | 치바현 현의원 선거 | 기사라즈군 선거구 | 12,242 (19.46%) | 당선 (1위) | 초선 | |
1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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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56 (39.82%) | 재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치바 3구 | 78,128 (20.50%) | 초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2,421 (19.36%) | 재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2,450 (14.17%) | 당선 (4위) | 3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0,098 (16.70%) | 당선 (1위) | 4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5,327 (18.25%) | 당선 (1위) | 5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5,908 (23.07%) | 6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5,120 (16.68%) | 당선 (3위) | 7선 |
5. 일화
6. 여담
[1]
하마다는 "만약 이때 합격했다면
전후까지 살지 못했을것이다."라고 회고하고 있었다.
[2]
이 시기 청년단 활동을 하며
다케시타 노보루,
노나카 히로무 등과 서로 교류하며 지냈다.
[3]
이 당시 하마다의 당선동기로
오자와 이치로,
하타 쓰토무,
모리 요시로,
와타나베 고조,
후와 테츠조,
도이 다카코 등 일본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거물 의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하여, 이해 총선에서 첫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꽃의 쇼와44년(1969년)조(花の昭和44年組)라는 별칭이 붙었다.
[4]
하마다는 파벌은 달랐지만 오히라와 개인적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이 부탁을 승낙할 수 있었다.
[5]
총선 불출마로 수입이 없어진 하마다는, 4억 6천만엔의 돈을 자신이 소유하던 치바의 토지를 팔아 수년동안 걸쳐 오사노에게 전액 상환했다.
[6]
자세한 내용은 미야모토 켄지 항목 참조.
[7]
그의 말년인 2010년 빚의 담보로 내놓은 전기회사의 주식 800주를 횡령한 혐의로 재판이 진행중이었으나, 치매 등으로 인한 기억상실로 인해 공판이 정지상태에 있다가 하마다의 사망으로 인해
공소기각 판정이 내려졌다.
[8]
1960.10 사퇴 (중의원 선거 출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