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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B001C> 제3대 일본공산당 서기장[1] 초대 중앙위원회 간부회 위원장[2] 미야모토 켄지 宮本 顕治 | Kenji Miyamo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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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colbgcolor=#ffffff,#191919> 1908년 10월 17일 |
일본 제국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 |
사망 | 2007년 7월 18일 (향년 98세) |
일본 도쿄도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도쿄제국대학 경제학과(졸업) |
정당 | |
지역구 | 비례대표(참의원)[3] |
의원 대수 | 11-12, 1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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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일본공산당의 제3대 서기장, 초대 위원장을 지냈다.[4]2. 생애
1908년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에서 태어났다. 구제 마쓰야마고등학교(현 에히메대학)을 졸업하고 도쿄제국대학에 진학, 1931년에 동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도쿄제국대 재학 중, 유명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문학 세계를 분석한 "패배의 문학"이라는 논문이 당대 유명 잡지인 "개조"의 현상논문 분야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하기도 했다.도쿄대 졸업 직후인 1931년 5월에 일본공산당에 입당, 본격적인 정치 참여를 시작한다. 정당 활동과 동시에 문학 평론도 병행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작가 동맹에도 가입했다. 하지만 2년만인 1933년 12월, "붉은색 린치 사건"에 연루되며 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이 사건은 공산당원들이 두 명의 일반인을 경찰의 프락치로 오인, 감금 뒤 프락치임을 시인하라고 협박하는 과정에서 가혹행위를 당한 둘 중 하나가 끝내 폭행으로 인해 사망한 사건인데, 가혹행위에 가담한 죄목으로 체포된 것이다. 본인의 질병등으로 인해 재판이 계속 연기되면서 10년넘게 미결수로 있었는데, 결국 11년 뒤인 1944년 12월 도쿄지방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5월에서는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5]
일본의 패망 이후인 1945년 10월, 20년형으로 감형을 받는다. 1947년 5월에는 GHQ에 의해 석방 및 복권까지 된다. 복권은 패망 이전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던 정치인들이 대상이었다. 물론 유죄 판결을 받은 죄목 중에는 치안유지법 위반도 있었으나, 동시에 감금치사죄등도 포함되어 있기에 모든 범죄에 대해 사면하는게 옳은지에 대한 논란은 있었다. 물론 공산당 측은 치안유지법을 포함한 모든 죄목이 당시 공산당에 대한 억지 수사 및 판결에 의한 결과이며, 미야모토는 관련이 없었다고 반박 중이다.
석방 이후에는 공산당 활동을 재개했는데, 코민테른 노선에 충실한 주류파인 "소감파"의 대척점에 있는 "국제파"의 리더로 활동했다. 그래서 1950년대 중반까지 내내 비주류에 머무렀으며, 따라서 문학 평론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3.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 지역구 | 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락 | 비고 |
1977 | 제1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비례대표 | 4,260,050 (8.4%) | 당선(39번) | 초선 | |
1983 | 제1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4,163,877 (8.9%) | 당선(6번) | 재선 |
4. 여담
- 첫번째 아내는, 9살 연상인 유며 소설가 미야모토 유리코(1899-1951)다. 평론가 답게, 아내의 사후에 아내의 작품에 대한 평론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이후 같은 문학 평론가이자 첫 아내의 비서로도 근무했던 오모리 스에코(1920-2010)와 재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