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프레데리카 그린힐
1. 개요
은하영웅전설의 등장인물 프레데리카 그린힐의 작중 행적을 정리한 문서.2. 유년기 ~ 사관학교
프레데리카 그린힐은 우주력 774년 드와이트 그린힐 제독의 딸로 태어났다.
|
|
양 웬리와의 첫 만남 |
아무튼 이때 양 웬리에 반해서, 조금이라도 더 양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16세에 사관학교에 지원했고(아버지 드와이트 그린힐은 자기 영향을 받아서 지원한 줄 알고 있지만[3]) 794년 6월에[4] 차석으로 졸업 후[5] 군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자유행성동맹군 통합작전본부 정보분석과에 있다가[6] 제13함대 창설 때 알렉스 카젤느와 드와이트 그린힐의 추천으로 양의 부관이 된다.
3. 양 웬리의 부관
|
양 웬리의 부관으로서 |
양 웬리의 부관으로 부임한 프레데리카는 제7차 이제르론 공방전, 제국령 침공작전에 참여했으며, 암릿처 회전 이후 대위로 승진하여 이제르론 요새&주둔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양 웬리의 부관이 되었다.[7]
동맹&제국 포로교환 이후 하이네센으로 잠시 돌아간 양 웬리의 수행원을 맡았으며, 양과 율리안이 이제르론 요새로 돌아간다고만 정하고 돌아갈 배조차 수배해두지 않자 대신 신조 구축함 칼데아 66호를 수배했다. 프레데리카는 하이네센으로 돌아가면서 오랜만에 아버지 드와이트 그린힐 대장을 만나고 싶었지만 스케줄 때문에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불과 1달 뒤, 드와이트 그린힐 대장이 구국군사회의라는 반정부 조직의 수장이 되어 동맹정부를 무너뜨리고 군사독재 정권을 세웠다. 프레데리카는 아버지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사람들은 방식만 다를 뿐 프레데리카가 더 이상 양 웬리의 부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8] 프레데리카도 부관에서 해임되는 걸 각오했지만 양은 "자네가 없으면 안 돼."라고 해임논란을 일축했고, 이 말을 들은 프레데리카는 재기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를 치기 위해 주둔함대 기함 히페리온에 동승했지만 정신적 피로 때문에 두통을 앓아 의무실에 입실했다. 그런데 정보부 소속 바그다슈 중령이 양 웬리를 암살할 목적으로 양 함대에 위장귀순했고, 프레데리카는 그가 5년 전 아버지의 서재에서 현 정치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점을 기억했다. 프레데리카의 증언을 토대로 바그다슈가 공작원임을 확신한 쇤코프는 강력한 수면제를 먹여 바그다슈를 재워버렸다.
넉 달에 걸려 쿠데타가 진압되고, 구국군사회의 의장 대행 에반스 대령은 드와이트 그린힐 대장이 자결했다고 거짓 발표했다. 프레데리카는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양에게 두 시간만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양은 프레데리카에게 시간을 주면서 서툴게 위로했고, 두 시간 동안 마음을 정리한 프레데리카는 개인실에서 나와 쌓인 업무를 막힘없이 처리했다.
이듬해 사문회가 열리자 프레데리카는 역시 부관 자격으로 양을 따라 하이네센으로 갔다. 그러나 국방위원장 네그로폰테의 지시를 받은 병사들은 동행을 불허했고, 프레데리카는 백방으로 전화를 걸어 양 웬리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베이 준장에게 막혔다. 그러자 프레데리카는 우주함대 사령장관 알렉산드르 뷰코크 제독과 조안 레벨로의 도움을 얻어 사문회가 열리는 위치까지 알아냈지만, 정-군 수뇌부는 국가기밀이라는 이유로 면회를 불허했다. 하지만 때마침 제국군이 가이에스부르크 요새을 이끌고 침공한 덕에 양은 석방되고 프레데리카는 양과 재회하며 이제르론으로 돌아갔다.
이후 제1차 라그나뢰크 작전에서도 양의 부관으로 헌신했으며, 버밀리온 성역 회전 직전 양으로부터 고백을 받았다. 매우 서툰 고백이었지만 프레데리카는 기꺼이 양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일부 팬들은 양의 프로포즈 신을 은하영웅전설 최고의 명장면이라고 손꼽기도 한다. 이 사건 이후 남몰래 프레데리카를 연모했던 율리안 민츠는 마음을 정리했다. 버밀리온 성역 회전 이후 '움직이는 셔우드 숲' 함대에 가지 않고 양 곁에 남았으며, 양과 함께 정식으로 퇴역했다.
4. 양 웬리의 아내
|
|
|
||
두 사람의 결혼 |
결혼식이 끝나고 두 사람은 신혼여행으로 수도 시가지로부터 200km 떨어진 콜다렌 산지 호반에서 산장을 빌려 열흘간 묵었고, 원래 살던 실버브리지 거리의 관사에서 나와 프레몬트 거리의 임대주택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신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는데, 정부는 국민들에게 정부의 재정개선 결의를 위해 공무원과 군인의 임금과 연금을 깎았고, 제국 고등판무관으로 부임한 헬무트 렌넨캄프 대장은 양을 불온분자로 의심하여 두 사람이 콜다렌 산지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부터 24시간 감시했다.[10]
양이 장기적으로 제국에 대항할 계획을 세우며 짧은 평화를 누리는 동안 프레데리카는 헌신적인 아내였지만 요리 실력은 매우 처참했다. 결국 프레데리카는 요리에 재능이 있는 오르탕스 밀베르 카젤느 여사에게 가서 요리를 배웠는데, 이는 제국군의 감시를 피해서 양과 카젤느가 연락하기 위한 방책이기도 했지만 프레데리카의 가사 능력을 기르기 위한 묘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행복한(?) 신혼생활은 렌넨캄프의 압력을 받은 동맹정부가 양을 반평화활동방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면서 끝났다. 양이 체포되자 프레데리카는 즉시 군복으로 갈아입고 블래스터를 챙긴 뒤 아텐보로와 쇤코프에게 연락하여 양 웬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웠다. 쇤코프는 조안 레벨로를 납치하고 통합작전본부장 록웰 대장에게 시간을 주는 척 여유를 부리더니 그 사이 중앙검찰청을 습격해 무력으로 양을 구출했다. 이때 양은 상부의 명령을 받고 양을 처형하려고 한 대위 계급의 장교와 옥신각신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 프레데리카가 난입해 그 장교를 사살하고 양을 구출했다. 이후 양과 함께 순항함 레다 II호를 타고 하이네센을 떠났다.
하이네센을 떠난 양 일당은 한동안 잠항하다가 엘 파실 독립정부에 합류했고, 프레데리카는 혁명군 사령관이 된 양 웬리를 보좌했다. 그녀는 항상 양의 곁에 있었으며, 마지막까지 양을 보좌했다. 그러나 회랑 전투 이후 카이저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과 협상하러 간 양이 제국군으로 위장한 지구교도에게 암살당하며 둘의 결혼생활은 불과 1년만에 끝나고 만다.
5. 이제르론 공화정부 주석
양이 죽고난 뒤, 요새로 돌아오는 율리안과 쇤코프는 누가 프레데리카에게 양 제독의 부고를 전하는지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결국 율리안이 부고를 전했는데, 프레데리카는 주변 사람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대강 눈치채고 있었다. 프레데리카는 몹시 슬퍼했지만 양 웬리가 쌓은 것에 먼지가 쌓이도록 두지 않겠다면서 다시 일어섰다. 양 웬리 함대 간부들은 죽은 양 웬리 대신 조직의 구심점이 될 사람으로 양의 아내였던 프레데리카를 정치지도자로 낙점했는데, 프레데리카는 정중하게 제안을 건넨 카젤느에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복종하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그리고 두 달 뒤 출범한 이제르론 공화정부의 초대 주석이 되었다.그렇게 공화정부의 수장에 오른 프레데리카였지만 별다른 행적은 없었다. 주요 군사 결정은 혁명군 사령관에 취임한 율리안 민츠를 비롯한 혁명군 간부들이 결정했으며, 실전지휘도 양 함대 간부들이 했다. 프레데리카는 주석에 오르면서 양 웬리의 시신을 언젠가 하이네센에 매장하기 위해 이제르론에 묻지 않고 시신을 저온보존했다.
그러다가 오베르슈타인의 풀베기 이후 공화정부 인사들의 출두를 요구한 군무상서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 원수의 말에 응해 하이네센으로 출발했다. 참모들은 말렸지만 프레데리카는 나는 공화정부의 주석이니 내가 출두하지 않는다면 오베르슈타인도 수긍하지 않을거라며 출두를 강행했다. 그러나 하이네센으로 가는 도중 라그풀 교도소 폭동사건에 터져서 출두는 무산되었고, 프레데리카는 율리안을 비롯한 혁명군 함대를 이제르론 회랑 출구에 남겨두고 먼저 이제르론으로 귀환했다.
이후 끝까지 이제르론에 남아 있다가 시바 성역 회전 이후 율리안의 외교전략에 대해 듣고 승인했다. 그리고 군사국장 알렉스 카젤느 중장에게 요새 반환에 앞서 군사 부문 처리에 대해 부탁했다. 그리고 양과 함께 쓰던 방에 들어가 죽은 양 웬리를 회상하며 "고마워요, 여보. 내 인생을 풍성하게 해 주어서."라고 양 웬리의 사진에 속삭이며 퇴장했다.
똑같이 남편을 빨리 잃은 힐데가르트 폰 마린도르프가 그나마 자식이라도 있고 신 은하제국의 섭정황태후로 권력의 정점에 선 데 비해 그녀는 자식도 없고 남은 가족도 없다는 데서,[11] 비극적인 소녀시절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과 단 한 순간도 연인으로 함께 할 수 없었던 안네로제 폰 그뤼네발트만큼은 아니더라도 양을 잃은 이후의 그녀의 운명이 안타깝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을 잃은 비극 속에서 슬픔에 머무르지 않고 그의 이상을 잇고자 한 점은 가히 높이 살 만하다. 줄곧 남편을 잃은 슬픔에도 직후의 잠시간을 제외하고 의연한 태도로 지내서 카테로제 폰 크로이처 같은 젊은 층에게 존경받기도 했다.
[1]
애초에 민간인들을 방기한 것부터가 변명의 여지가 없으나 아무리 정신줄을 놓았다고 하더라도 그 시점에서 이미 군부 고위직에 있었을 드와이트 그린힐의 아내와 딸을 내버리고 달아난다는 건 선을 한참 넘은 작태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을 태워서 도주해도 행성 바깥에서 제국군에게 잡혔을테니 더 나은 선택이라 할 수 없고 양 웬리가 수습할 수 있게 자기들끼리 사라지고 자폭해준게 결과적으로 잘됐다고 할 수 있다.
[2]
후일
제7차 이제르론 공방전때 이를 프레데리카가 언급하자 양 웬리가 그 때는 내가 실례했다며 사과한다.
[3]
DNT 설정집에서는 드와이트 그린힐 설정 부분에 딸이 양에게 연심을 품었다는 부분을 눈치 못챈 둔한 면모가 있다고 대놓고 써놓았다.(...)
[4]
이 해
반플리트 성역 회전과
제6차 이제르론 공방전이 벌어졌다.
[5]
이에 대해 카젤느 왈 "겨우 중턱이었던
누구와는 다르군."
[6]
어느 군대나 마찬가지로 위관급 장교로 최상위급 조직에서 근무하는 것은 말단 조직에 비해 다뤄야 할 업무량의 차이가 크고 보는 시야도 넓어야 한다. 그래서 프레데리카의 유능함을 알 수 있다.
[7]
이 배경은 '우수하고 젊은' 조건이라는, 카젤느 曰 '지극히 호화스러운' 조건을 내세운 양의 조건에다가 프레데리카의 아버지인 드와이트 그린힐의 추천이 있었다.
[8]
드와이트 그린힐조차 양이 자신의 딸을 구금했을 것이라 여겼다.
[9]
사실 양 웬리는 더 간소하게 하고 싶었는데 너무 지나치게 간소하면 또 의심을 산다고 해서 양 웬리가 생각한 것보다는 덜 간소했다.
[10]
다만 이는 양만 해당되는건 아니라서 카젤느도 감시가 붙었다.
[11]
모친은 일찍 사망, 부친은 쿠데타로 자살(사실은 아서 린치에게 살해당했다. 쿠데타를 벌인 입장상 자살로 다른 이들에게는 알려졌지만), 남편은 암살, 남편의 피후견인 율리안 민츠는 피 한방울 안 섞인 데다 이미 독립해 곁에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