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10:19:53

토미 플래너건

<colbgcolor=#B82647><colcolor=#fff> 토미 플래너건
Tommy Flanagan
파일:tommy flanagan piano.jpg
본명 토마스 리 플래너건
Thomas Lee Flanagan
출생 1930년 3월 16일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사망 2001년 11월 16일 (향년 71세)
미국 뉴욕주 뉴욕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직업 피아니스트
악기 피아노
장르 재즈, 하드밥
활동 1940년대 ~ 2000년대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국방부 퀘스트와 이후 뉴욕 활동 시절2.3. 엘라 피츠제럴드의 피아니스트2.4. 말년과 죽음
3. 토미 플래너건에 대한 말, 말, 말4. 여담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재즈 피아니스트로, 존 콜트레인 Giant Steps, 소니 롤린스 Saxophone Colossus등의 명반에 참여했으며 6~70년대 엘라 피츠제럴드의 전속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한, 아름다운 멜로디의 서정적인 연주로 '재즈 피아노의 시인'( #[1])이라 불렸던 하드밥 피아노의 거장.

파일:Jazz_Poet.jpg

2. 생애

2.1. 유년기

1930년 디트로이트 미시건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우편배달부였고 어머니는 의류산업 종사자였던지라, 얼핏 음악쪽과는 관련이 없어보였어도 아버지는 4중주에서 노래를 불렀고 어머니는 악보 읽는 방법을 독학했었다고 하니 집안이 음악과 아주 관련이 없진 않았다[2].

6살에 부모님으로부터 클라리넷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게 되며 음악에 눈을 뜨게 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집에 있던 피아노를 더 선호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미 피아노를 치고 있던 형에게서 피아노를 배운다. 이후 실력이 일취월장하며 글레디스 딜라드라는 피아니스트[3]에게도 레슨을 받기도 하며 본격적인 피아니스트로 성장한다. 재즈를 좋아하는 형들이 팻츠 월러 테디 윌슨, 냇 킹 콜, 아트 테이텀, 버드 파웰의 음반을 사온것을 들으며 재즈쪽으로 관심이 생겼던 그는 부모님 몰래 밤무대에서 형들이 색소폰, 트럼펫으로 연주할때 컴핑을 해주었다고 한다[4]. 토미의 첫 밤무대 연주는 1945년에 트롬본 연주자 프랭크 로솔리노와의 공연이었는데, 당시 달랑 15살밖에 안되었던지라 쉬는 시간에 술집 관람석에 앉아있을 수 없었어서 옆방으로 가 학교 숙제(..)를 했다고 한다.

학교는 디트로이트의 Northern High School을 졸업하는데, 이 학교는 공립학교였지만 음악 교육이 활성화되어 있고 재능있는 학생들을 키워주었다고 하는데 동문으로 색소포니스트 소니 레드와 피아니스트 롤랜드 한나가 있다. 이후 대학으로 가지 않은 그는 디트로이트의 재즈 프로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연주를 시작한다.1947년, 여기서 기타리스트 케니 버렐을 만나게 된 토미 플래너건은 베이시스트 앨빈 잭슨과 트리오를 구성, 많은 무대 경험을 쌓게된다.

이후 1940년대 후반에는 비밥이 떠오르고 있던 때였던지라, 그 역시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를 피해갈 수 없었는데 그들이 가끔 디트로이트에 올때마다 거의 종교적 숭배 수준으로 연주를 반드시 찾아가서 듣고 그들의 스타일을 카피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디트로이트에선 이미 인정받는 젊은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찰리 파커가 공연할때면 사이드맨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1949년에는 이후 그의 시그니처 장소가 될 디트로이트의 Blue Bird Inn에서 첫 연주를 한다[5].

2.2. 국방부 퀘스트와 이후 뉴욕 활동 시절

1951년에는 군대에 징집되는데... 딱 당시가 6.25 전쟁때라 위험했던 한국에는 가급적 가고 싶지 않아 군악대 피아니스트로 지원했는데, 뛰어난 실력을 가졌던만큼 피아니스트 자리에 합격은 했으나 결국 1년 후 한참 전쟁중이었던 한국의 군산에 얄짤없이 파병 오게된다(..) 유승준보다 낫다 다만 병과는 motion-picture projectionist[6]로 '영사기 병' 정도인, 비전투병과로 배치 받았던듯. 어쨌든 2년 꽉 채워 병역의 의무를 마친 토미는 다시 디트로이트의 Blue Bird에서 연주를 하며 케니 버렐과도 재회하고, 작곡을 잘하는 트럼펫터 태드 존스나 화려한 기교의 트럼펫터 도날드 버드등과도 협연한다.

하지만 디트로이트 무대보다 넓고 높은 무대에 서고 싶었던 그는 1956년, 먼저 뉴욕에 진출한 케니 버렐의 초청을 받아 뉴욕으로 간다. 처음엔 특별히 갈데가 없어 케니 버렐의 이모 집에서 같이 얹혀살았던(..) 그였지만, 뛰어난 실력을 가진 덕에 오래지 않아 각종 클럽과 스튜디오에서 러브콜을 받는다. 마일스 데이비스도 그를 찾아 Collector's Items에 들어갈 음원들을 녹음하기도 했지만, 마일스는 결국 이리저리 돌아 레드 갈랜드를 선택하게 되고, 토미 플래너건의 경력에 확실하게 물꼬를 터준 것은 소니 롤린스였다. 바로 인기곡 St.Thomas가 수록된 명반 Saxophone Colossus를 함께 녹음한 것.

직후 그에게 관심을 가졌던 재즈 여보컬 황제 엘라 피츠제럴드의 연락을 받고 맞춰봤는데, 토미 플래너건이 오죽 맘에 들었는지(..) 기존에 있던 피아니스트 돈 앱니는 바로 잘리고 자리를 토미가 대체하게 된다. 이 시기 토미 플래너건에게 관심을 보인것은 사실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트롬본 연주자 J.J.존슨의 요청을 받아 음반을 녹음하고 유럽 투어도 갔고, 첫 리더작 Overseas도 이때 유럽 투어 중 스웨덴에서 녹음하고 발매한다. 빠른 템포의 찰리 파커 블루스 Relaxin' at Camarillo를 인상적인 인트로로 시작하는 이 음반은 당시 그(와 이후에 엄청난 거장이 될 드러머 엘빈 존스)의 화려한 기교를 유려하고 서정적인 선율로 풀어내 성공적인 리더 데뷔작으로 평가받는다. 이렇게 바빴던지라 엘라 피츠제럴드와도 같이 오래하지는 못하는데, 이들은 이후 1963년에 재회한다.

1959년에는 또 한번 그의 커리어에 중요한 일이 일어나는데, 바로 존 콜트레인 Giant Steps를 녹음한 것. 당대에 상당히 촉망받던, '믿고 맡길 수 있는' 젊은 피아니스트였지만 안타깝게도 Giant Steps는 당시 기준으로 시대를 많이 앞서간 곡이었던지라 지혼자 열심히 연습해와서 지금 기준으로도 아주 잘했던 콜트레인과는 달리 컴핑까지는 좋았으나 솔로를 할 때 쉽사리 손을 못대고 쩔쩔매는 느낌의 연주를 하게 된다. 그리고 하필 이 쩔쩔맨 연주의 콜트레인 솔로가 너무 기가 막히게 좋았던지라 이 음원으로 그대로 발매를 하게 되는데, 커리어 내내 잘했다가 이 한번 굴욕을 겪은 탓에 그는 평생, 아니 사후 지금까지도 이걸로 각종 재즈 커뮤니티에서 잊힐만 하면 놀림받고 있다(..). 이후 여담쪽에서 보다 상세히 후술하겠지만, 대략 이런 식으로.

파일:giant steps burn1.jpg
(당대로썬 괴랄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던 Giant Steps 진행에서 버벅거렸던 토미 플래너건.)

토미 플래너건 본인도 오죽 속상했으면 1982년에는 이 음반의 곡들로 구성된 동명의 음반 Giant Steps를 자신의 트리오로 23년간 열심히 연습해서 연주해 내기에 이른다. 이렇게 새로 낸 음반은 Penguin Guide to Jazz 별점 만점, Allmusic 4.5/5점으로 굉장히 좋은 평가를 받는 음반이다[7]. 사실 1959년 Giant Steps 음반의 피아니스트 관련된 비화가 있는데, 이 음반의 피아니스트는 처음엔 세다 월튼이 낙점되었으나 지금 남은 토미의 버전보다 더 쩔쩔매었으며(..), 그래서 불려온 토미 플래너건마저도 어찌저찌 Giant Steps는 넘겼으나 모달 발라드 곡 Naima 같은 경우 이 토미마저도 힘들어해서 결국엔 당대 재즈 피아노 1타 윈튼 켈리를 불러오고서야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절했던 윈튼 켈리와는 달리 다른 두 피아니스트들은 오래 살며 이 굴욕들을 만회할 기회가 있었다는 것. 그래도 토미는 여전히 놀림당한다

이런 다소 불미스러운(?)일도 있었지만, 바로 다음해 기타리스트 웨스 몽고메리의 역작인 The Incredible Jazz Guitar of Wes Montgomery에 피아니스트로 참여하고, 콜맨 호킨스와도 성공적으로 음반을 녹음하며 당대 재즈 피아니스트들 중 최고의 커리어를 이어간다.

2.3. 엘라 피츠제럴드의 피아니스트

파일:ella and tommy.jpg
(1965년, 엘라 피츠제럴드와 함께)

콜맨 호킨스는 물론 거장이었지만 60년대 들어 전자음악, 락 음악이 주목받으며 재즈씬이 줄자 토미도 무대에 설 기회가 줄고 있었다. 이때, 프로모터 노먼 그랜츠가 엘라의 전속 피아니스트 자리를 제안하고 마침 무대에 더 많이 서고 싶었던 토미 플래너건은 이를 수락한다. 1963년 ~ 1965년동안 함께한 그는 아트 파머, 소니 롤린스와도 가끔씩 함께하다가, 엘라를 두번째로 떠난 1966년에는 남자 보컬 황제라고 할 수 있는 토니 베넷과도 함께 한다.

1968년에 다시 엘라에게로 돌아온(..) 토미는 이번에는 피아니스트기도 했지만 음악 감독직을 함께하는데, 엘라 후기 녹음의 어레인지는 토미 플래너건의 영향이 컸다.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꽤 오래 엘라 피츠제럴드와 함께 했는데, 재즈씬이 아무리 죽었다지만 본좌급들은 여전히 인기가 많아 1년에 40~45주는 공연을 했다고 하며, 매년 유럽 투어도 적어도 한번씩은 다녔다고 한다.

1975년에는 1960년의 'The Tommy Flanagan Trio' 이후 실로 오랜만에 리더로써 녹음하게 되고, 이 무렵부터 솔로 피아노를 종종 연주한다. 토미의 솔로 피아노는 화려하거나 리듬이 빈틈없이 채워지거나 하진 않지만, 특유의 아름다운 멜로디와 곡 전반에서 드러나는 서정성, 그리고 섬세한 터치 조절로 그만의 개성이 분명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열었다. 토미 스스로는 자신이 솔로 연주를 하기에는 기교가 부족했다고 생각했다지만, 실제로는 솔로로만 공연도 종종 했으며 들어보면 괜히 '재즈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던게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연주를 했다.

이번에는 엘라와 오래 함께 했던 토미 플래너건이었지만, 1978년에 그가 누적된 엄청난 투어량, 과로 등이 원인이 되어 심근 경색을 겪는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그는 마지막으로 엘라 곁을 떠나고 이때부터 담배를 끊고 음주량을 줄이고 운동을 늘려 건강 관리를 시작했다고 한다.

2.4. 말년과 죽음

Moose the Mooche, 토미 플래너건 트리오 1983년. 한 세대 후의 연주자들이지만 거장의 반열에 오른 론 카터 토니 윌리엄스와 함께 했다.

엘라 곁을 떠난 그는 주로 뉴욕에서 솔로 피아노 공연들을 하며, 베이시스트 조지 므라즈, 드러머 알 포스터와 함께 자신을 리더로 한 트리오 녹음들을 남긴다. 앞서 언급한 Giant Steps 만회도 이 때였고, 시대가 다시금 재즈를 듣는 시대가 되자 서정적인 하드밥 재즈 피아노 트리오의 정수를 간직하고 있던 토미 플래너건 트리오는 주목을 받아 그래미나 빌보드에서도 종종 지명된다. 1982년에 남긴 델로니어스 몽크의 곡 Thelonica를 타이틀로 한 앨범은 Village Voice 지명 그 해의 최고의 앨범들 중 하나로 뽑혔고, 앞서 언급했듯 Giant Steps 만회 앨범은 그래미 최우수 재즈 연주 부문에 지명되었다(다만 수상은 못했다).

1990년에 그의 별명을 따서 지은 앨범 Jazz Poet은 1990년 빌보드 10대 음반에 들어갔고, 다운비트지와 Jazz Times지의 독자 인기부문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디트로이트 Blue Bird에서 함께했던 케니 버렐과도 오랜만에 함께 Beyond the Blue Bird라는 음반을 냈는데(다만 녹음을 Blue Bird에서 한건 아니고 네덜란드에서 했고, Bluebird라는 헌정곡으로부터 시작해 여러 곡들의 제목에 Blue Bird가 들어간 일종의 기념 앨범이다), 역시나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90년대에는 덴마크, 일본 등지에서 여러 상을 타기도 하며 말년에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건강은 이때 이미 좋지 못해 여러번 병원 신세를 져야 했으며 동맥류를 포함한 여러 합병증으로 결국 2001년 11월 16일 사망했다.

그는 2번의 결혼을 했으며, 세 명의 자식을 낳았고 여섯 명의 손자/손녀를 보았다고 하는데 유튜브에 그의 라이브 영상을 보다보면 댓글에 그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생전 성격이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따뜻한 젠틀맨이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가족과의 관계도 아주 좋았던 듯.

3. 토미 플래너건에 대한 말, 말, 말

Tommy Flanagan swings so deeply, and he’s so compassionate. You can always hear the lyrics when he plays. The only pianist I could compare him with is my brother Hank.

토미 플래너건은 매우 깊게 스윙하는 연주자이고, 아주 인정이 많은 사람이죠. 그가 연주할때면 언제든 가사를 들을 수 있어요. 그와 유일하게 비교할 수 있을만한 피아니스트는 제 형인 행크뿐이죠.
엘빈 존스[8] #
He became an influence and continued to be an influence till the day he died - and he still is

그는 영향력 있는 연주자가 되었고 죽을때까지 (다른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연주자였죠. 그리고 심지어 아직도 영향을 줘요.
피아니스트 케니 바론 #, 그는 중학생 때 황혼기를 보내던 토미 플래너건의 연주를 듣고 그를 자신의 영웅으로 여기며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Here is a pianist who has played with Hawk, Roy, Pres, Dizzy, Bird, Rollins, to cite just a few, and yet has accompanied Ella for more than 15 years. It is probably because of this long stretch with her that people have forgotten just how brilliant a soloist he is.

토미 플래너건이 함께한 사람들을 몇 보면 호크, 로이, 프레즈, 디지, 버드, 롤린스가 있죠. 그리고 엘라와 15년이나 함께하기도 했구요. 사람들이 토미 플래너건이 얼마나 훌륭한 솔로이스트인지 잊은건, 아마도 엘라와 그렇게 오래 함께했기 때문일거에요.
노먼 그랜츠 #

4. 여담

(2:55부터 토미 플래너건의 솔로가 나온다.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지만 갈수록 연주하는 음이 적어진다...)
  • 커리어 내내 꾸준하게, 기복없이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준 그였지만 하필이면 그 유명한 Giant Steps에서 좀 못했는데(..) 이 음반이 워낙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인 음반이다보니 사람들이 '와 콜트레인 정말 잘했네... 음 그런데 피아니스트 분이 긴장을 좀 했나보네? 누구였을까? 아 토미 플래너건이 연주했네?' 식으로 토미 플래너건을 인지하게 되었다. 토미 플래너건을 위해 변호하자면, 하필이면 존 콜트레인이 작심하고 새로운 작법으로 써놓고 자기 혼자 열심히 연습해와서 멋지게 솔로해버리고 바로 다음에 하라고 던져주는데 당시로써는 아예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코드 진행에서, 그것도 엄청난 템포로 연주했어야 했다보니 누구라도 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위의 녹음에서 들리듯 이후에 멋지게 만회하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토미 플래너건은 1959년에 녹음한 저 버전으로 심지어 지금까지도(..) 놀림받곤 한다. 각종 재즈 커뮤니티에선 잊혀질 새도 없이 꾸준히 재생산되는 밈이다. 아래는 그 몇몇 예시들.

파일:giant steps burn2.png
절대 반지(Giant Steps 첫 테이크)를 파괴하라고 하는 엘론드(토미 플래너건)와 No라고 쿨하게 거절하는 이실두르(존 콜트레인)

파일:giant steps burn3.jpg
장난감에 불과한 줄 알았던 Sax-a-boom을 수준급으로 연주하는 잭 블랙(3개의 키 센터를 옮겨다니며 300BPM에서 연주하는 존 콜트레인)과 깜짝 놀란 지미 팰런(토미 플래너건) 사실 버튼을 누르면 지정된 음원이 나오는 장난감 맞다

파일:giant steps burn4.png
탱크(자이언트 스텝스) 앞의 일개 인간(토미 플래너건)...

파일:giant steps burn5.jpg
즐기는 콜트레인과 고통받는 토미

파일:giant steps burn6.jpg
불지르고 여유 가득한 콜트레인과 불타는(..) 토미

... 등등 파도 파도 괴담만 나온다.


[1] 기자이자 작가인 Whitney Balliett이 붙인 별명으로, 이 별명이 맘에 들었는지 본인도 Jazz Poet(재즈의 시인)을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음반도 냈다. [2] # [3] 잘 알려지지 않은 피아니스트지만 이사람, 무려 또다른 하드밥 피아노의 거장 배리 해리스의 스승이기도 했다! 그런데 거장 하드밥 재즈 피아니스트들을 둘이나 탄생시킨 이 사람은 의외로 재즈를 가르쳤던게 아니라 바흐 쇼팽을 가르쳤었다고. [4] # [5] 이후 1990년이 되어, 초창기에 열심히 합을 맞췄던 케니 버렐과 이 장소에 바치는 Beyond the Blue Bird 음반을 낸다. [6] # [7] 1983년 그래미 재즈 연주부문에 지명되기도 했을 정도다! [8] 엘빈 존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유려하고 서정적인 하드밥 피아니스트를 얘기할 때 투톱으로 토미 플래너건과 행크 존스를 꼽아 비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