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08:28:47

토모히토

토모히토 친왕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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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 결혼으로 인한 황적이탈
[궁]: 분가하여 새 미야케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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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모히토 친왕
寛仁親王
파일:external/blogimg.goo.ne.jp/dde3ebc58d0a3d208d171dd74317384e.jpg
<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이름 토모히토(寛仁)
출생 1946년 1월 5일
가나가와현 하야마마치
미카사노미야 어가우소(三笠宮御假寓所)
사망 2012년 6월 6일 (향년 66세)[1]
도쿄도 치요다구
사사키 연구소 부속 쿄운도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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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신위 친왕(親王)
경칭 전하(殿下)
부모 부친 다카히토 친왕
모친 유리코 비
형제자매 누나 고노에 야스코
남동생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여동생 센 마사코
남동생 노리히토 친왕
배우자 노부코 비
자녀 2녀
아키코 여왕
요코 여왕
학력 가쿠슈인 유치원 (수료)
가쿠슈인 초등과 (졸업)
가쿠슈인 중등과 (졸업)
가쿠슈인 고등과 (졸업)
가쿠슈인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 학사)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 (중퇴)[2]
종교 신토
오시루시
(お印)
[3]
측백(柏) }}}}}}}}}
파일:tomohito.png
소쿠타이(束帯)를 입은 토모히토 친왕

1. 개요2. 호칭3. 약력4. 결혼5. 가족
5.1. 황실 가계도5.2. 자녀5.3. 결혼 생활
6. 이슈메이커
6.1. 매스컴 노출6.2. 자위대 음악제 참석6.3. 황적이탈선언6.4. 여계 인정 반대6.5. 조선학교 학생과 벌인 싸움6.6. 알코올중독
7. 투병과 사망8.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의 황족. 쇼와 덴노의 막내 동생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장남. 나루히토 천황의 당숙. 아소 다로 내각총리대신은 그의 처남. 젊어서부터 수염을 기르고 다녀서 수염 전하(ヒゲの殿下)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4]

2. 호칭

장남인 관계로 미카사노미야의 당주 자리를 이어받을 것으로 예상해 두 남동생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이나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과 달리 미야고(궁호)를 받지 않았는데, 아버지 다카히토 친왕이 100세가 넘도록 장수하는 바람에 먼저 세상을 떠나는 불효 아닌 불효를 저질렀다.

따라서 그의 정식 호칭은 그냥 토모히토 친왕(寬仁親王)이다. 일부 언론에서 미카사노미야 토모히토(三笠宮 寬仁)라고 쓰는 경우가 있지만, 미야고는 미야케의 당주 개인에게만 붙이는데 토모히토는 미카사노미야의 후계자였기 때문에 미야고를 붙이지 않음이 원칙이다. 따라서 '미카사노미야 토모히토 친왕'이라고 부름은 잘못된 것.

예전에는 친왕가를 이을 아들에게 '와카미야(若宮)'라는 칭호를 붙였으니, 굳이 미야고를 쓰겠다면 '미카사노와카미야(三笠若宮)'가 맞는다. 아니면 '三笠宮家の寛仁親王(미카사 궁가의 토모히토 친왕)'이라고 쓰던지… 히사히토의 경우도 마찬가지. 하지만 '와카미야'라는 표현은, 황실의 규모가 확 줄어든[5] 2차대전 패전 이후에는 거의 쓰지 않는다. 현재 궁내청에서는 궁가의 당주 여부에 상관없이 미야고를 빼고 그냥 XX 친왕 전하라고만 한다.

토모히토가 문제 삼았던 부분은 당주인 아버지 다카히토 친왕이 멀쩡히 살아 계시는데 아직 후계자에 불과한 자신에게 미야고를 붙이면 예의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황족을 부르는 경칭은 " 전하"인데, 민간이나 언론에서는 이걸 놔두고 그냥 "XXさま(님)"이라고만 하는 현실. 참고로 2차대전 이후 언론에서 황족에 대한 경칭 사용이 많이 완화되어, 웬만한 매스컴에서는 공식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딱딱한 경칭 대신 "XXさま(님)"이라고 부름이 일반적이다. 물론 산케이 신문을 비롯한 우파 계열에서는 꼬박꼬박 경칭을 사용한다.

3. 약력

  • 1946년 1월 5일 출생
  • 1966년 1월 5일 성년식(만 20세)

    • 파일:external/fimg.freeml.com/l_efee8276428d20f86a150b03d591c2cb92ef2b85.jpg

    미쓰이(三井) 클럽에서 열린 토모히토 친왕의 성년식 때 미카사노미야 일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첫째 고노에 야스코(당시 22세), 넷째 센 마사코(당시 15세), 셋째 요시히토 친왕(당시 18세), 어머니 유리코 비(당시 43세), 막내 노리히토 친왕(당시 12세), 둘째 토모히토 친왕(당시 20세), 아버지 다카히토 친왕(당시 51세).
  • 자식이 없던 그의 막내 큰아버지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高松宮 宣仁)[6] 친왕의 영향으로, 장애인 복지 및 체육진흥관련사업에 관여했다. 또한 영국 유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일영(日英) 협회 명예총재를 지냈고, 훗날 나루히토 황태자와 후미히토 친왕이 영국에 유학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 총각 시절에 책도 썼다.

    • 파일:external/run-run-kazu.cocolog-nifty.com/tomohito1.jpg
      <황족의 혼잣말>
  • 2012년 6월 6일 오후 3시 35분, 다장기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66세. 타계 당시 그의 황위계승 순위는 6위였다. 막냇동생 노리히토 친왕은 이미 2002년에 사망하여, 그의 후순위 계승자는 남동생 요시히토 친왕뿐이었다. 그런데 요시히토 친왕도 독신인 채로 2014년 타계하면서 사실상 미카사노미야 가문 남성 계통은 사라졌고 최소 1세대~2세대 후면 절손이 확정되어버렸다.

4. 결혼

파일:external/blogs.c.yimg.jp/img_1?1371973903.jpg

1980년, 9살 연하인 아소 노부코와 결혼했다. 노부코 비는 아소 시멘트 회장인 아소 타카키치(麻生太賀吉)의 딸로, 친정 오빠가 바로 아소 다로이다. 위 결혼사진의 얼굴을 보면 확실히 아소 다로의 모습이 보인다.

노부코의 외할아버지는 요시다 시게루, 어머니는 아소 카즈코(麻生和子)이다. 카즈코의 외할아버지, 즉 시게루의 장인인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顯)[7] 화족이자 정치인이었다. 1936년 2.26 사건 때 카즈코는 외할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군인들로부터 습격당했는데, 그들과 맞서 총격전까지 벌이면서 무사히 외할아버지와 함께 탈출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외외고조할아버지는 사실상 일본 최초의 총리, 증조할아버지는 유력 정치인이었고 할아버지도 총리, 오빠도, 손위올케의 사돈어른[8]도 총리. 대단한 명문가의 딸이었던 셈. 게다가 본인은 황실로 시집가 왕자비가 되었다.

노부코는 쇼토(松濤) 유치원에 이어 가톨릭 미션스쿨 세이신 여학원 초등과와 중등과를 졸업했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Rosslyn House College[9]를 졸업했다. 귀국 후에는 자신이 다녔던 쇼토유치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했다.

사실 노부코가 17세이던 1972년에 26세인 토모히토 친왕이 청혼했으나, 한 세대 전이라면 모를까[10] 1970년대에 10대는 시집가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여서[11] 결혼을 미루었고 실제 혼사는 8년 뒤에야 이루어졌다. 두 딸 아키코 여왕(彬子女王)과 요코 여왕(瑤子女王)을 낳았다.[12]

5. 가족

5.1. 황실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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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카사 도시미치
         
이케다 다카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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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히사나가
구로다 요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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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다다테루
 ╟─
센 소시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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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게 구니마로
모리야 케이



5.2. 자녀

  • 차녀 요코 공주: 1983년 10월 25일생([age(1983-10-25)]살). 가쿠슈인여자대학 국제문화교류학부 일본문화학과를 졸업했다. 특기는 검도로, 가쿠슈인 초등과 5학년 때부터 시작하여 가쿠슈인여대 시절에는 검도부 부주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로도 검도 관련 행사에 종종 참가했다. 일본 적십자에서도 일했으며, 몸이 아픈 부모와 해외 유학 중인 언니 아키코 공주를 대신하여 각종 공무를 하였다.
파일:external/fimg.freeml.com/l_aa6ab0b32c4e1abc6edc03260abb1fb5ae85d373.jpg
젊은 시절의 노부코 비. 왼쪽의 아기가 차녀 요코 공주, 오른쪽의 아기가 장녀 아키코 공주이다.

5.3. 결혼 생활

아내 노부코 비와 관계가 좋지 않아 1990년대쯤부터 별거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아래에도 나와 있지만 토모히토는 노부코 비와의 별거 소문, 알코올 중독 여성 천황과 여계 계승을 반대하며 " 후궁을 들여서라도 아들을 낳아 남계로 계승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등, 말만 들으면 꽤나 가부장적인 듯하다. 그러나 평소 똑똑한 큰딸 아키코 공주를 자랑스러워했고, 아키코 공주에게 "국민의 세금으로 공부하는 거니 열심히 해야 한다"고 충고하고, 아키코 공주도 아버지의 충고를 잘 따르고, 어머니 노부코 비를 대신해서 아버지의 장례식과 제사를 주관하는 걸 봐서는, 딸들과 사이가 나쁘진 않은 듯하다.

한편 노부코 비는 남편의 장례식과 제사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사실상 이혼한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6. 이슈메이커

6.1. 매스컴 노출

파일:external/ef81hokutosei.way-nifty.com/photo_6.jpg
1975년에는 심야 라디오 방송인 올 나이트 닛폰 DJ를 맡은 적이 있다. 지금까지도 황족으로서는 유일무이했던 일. 비슷한 시기에 테츠코의 방이라는 유명 토크쇼에 출연해서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웠다." 하거나, "사촌형수 미치코 황태자비가 더 이상 아들을 낳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등의 말을 했다. 사실 사촌형수 이야기에 대해서는 '자기는 행운의 7을 좋아하는데, 본인 계승권이 7위 밖으로 밀려나기 싫어서'라는 농담조 말이라는 식으로 넘어갔다.[15]

6.2. 자위대 음악제 참석

별거 아닌 것 같지만1981년 11월에 자위대 음악제에 출석하겠다고 했다가 논란이 일어났다. 그간 일본 황실은 자위대 등 군사 전반과는 거리를 두었는데 이를 깨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군대사열과 다르게, 음악제는 개인홍보행사의 성격이 짙어서 토모히토 친왕 & 노부코 비 부부를 행사 주빈이 아닌 특별 게스트로 하기로 타협을 봤다.

6.3. 황적이탈선언

1982년 ' 복지사업에 힘쓰겠다.'는 이유로 황적이탈 선언을 해서 일대소동을 일으킨 바 있다. 당시 밝힌 이유는 황족 신분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제약받는다는 것. 결국 무산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오랫동안 그의 유별난 성격 탓에 벌어진 해프닝으로 여겼다.

하지만 2014년 그의 남동생 요시히토 친왕이 타계하면서, 이 무렵의 그와 연관된 새로운 증언이 나왔다. 요시히토 친왕의 가쿠슈인 동창생이 언급한 "국민의 세금으로 사는 주제에(税金で生活しているくせに)!!"라는 말을 듣고서 충격을 받아 그랬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가 가쿠슈인 초등과 시절 학교에서 들었다는 세금도둑이란 말을, 이들 형제도 들었다는 것.[16]

그나마 성격 활달한 토모히토 친왕은 좌충우돌하면서 이런저런 이슈를 만들어 내는 식으로 표현을 하곤 했는데, 이게 폭발한 것이 1982년 황적이탈선언이라는 것. 물론 일본 황실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그게 쉽게 될 일은 아니었기에, 어디까지나 일종의 시위로 보는 게 타당하다. 이때 요시히토 친왕도 심적으로는 여기에 동조했으나, 내성적인 성격 탓에 잠자코 있었다고. 어차피 이들 형제는 황위계승순위에서도 밀려 있었기에, 황실이라는 울타리를 많이 버거워했던 모양이다. 그 소동 이후로도 "젊고 멀쩡한데도 국가로부터 생계보조나 받고 산다."는 자학 멘트를 날린 적도 있다. 이것도 누구한테 듣고서 내뱉은 말로 보인다

6.4. 여계 인정 반대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아들이 없자 대안으로 제시된 여계(女系) 미야케 인정에 반대한 바 있다. 천황의 여계 계승에 반대해 후시미노미야 구황족의 복적을 주장했다. 이 문제만큼은 나루히토 황태자를 제외한 다른 황족들도 보수적 입장에 있다고 보인다. 딸 아키코 공주도 여계 천황에 반대하고 아키히토 덴노도 다른 문제와 달리 이 문제만큼은 보수적인 입장인 게 현실.

덧붙여 진심인지 농담인지 후궁을 두어서라도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큰아버지인 쇼와 천황부터가 과거에 궁내성(현 궁내청)이 후궁 도입을 요청한 것을 완강히 거부한 마당에 당연히 비판받았다.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여계 계승을 추진했는데, 2006년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나면서 유야무야되었다.

6.5. 조선학교 학생과 벌인 싸움

2007년 뉴욕타임스와의 회견 때 조선학교 학생과의 악연을 언급해서 생긴 일. 한국에서는 이 때문에 그를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가쿠슈인 재학 당시 야마노테선을 타고 등하교했는데, 조선학교 학생들은 가쿠슈인 교복을 보면 매일같이 항상 덤벼왔다고 한다. 그가 학창시절을 보낸 1960년대 초반이면, 일본에서 좌파학생운동과 자이니치 폭동이 절정에 치닫고 재일교포 북송에 한창이던 때다. 한편 이 때에 "황실은 거대한 스트레스 덩어리"라고 발언해서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6.6. 알코올중독

타모리의 회고담에도 등장하는데, 젊은 시절부터 말술로 유명했다고 한다. 부부가 알코올중독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토모히토 친왕은 2007년부터 자신이 알코올 중독임을 인정한 바 있다.[17] 부부관계는 좋지 않아서, 진작부터 별거상태라는 소문이 있었다. 장례식 때도 아내 노부코 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두 딸 아키코 공주 요코 공주만 나와 울고 있었다. 언론에서는 "몸이 안 좋아서 그렇다." 하고 넘어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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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모히토 친왕의 장례식에서, 상복 차림의 장녀 아키코 공주(왼쪽)와 차녀 요코 공주(오른쪽).

7. 투병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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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모히토 친왕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촌 형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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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히토 황태자와 서양식 상복을 차려입은 마사코 황태자비, 두 딸 아키코 공주 요코 공주.

1991년부터 식도암으로 투병하다가 2012년 세상을 떠났다. 10년 동안 대수술을 14번이나 받았는데, 2010년경에는 아예 성대 적출수술로 목소리를 잃고, 목에다 스카프를 감은 채 전자 인공후두로 목소리를 냈을 정도였다.[18] 일본 황실 자체가 대대로 병약한 천황들이 재위했고 대부분의 황족들이 저마다 소소한 지병을 앓고 있는 상황인지라 토모히토도 황족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이상 가족력 때문에 억울하게 지병을 많이 갖고 있는 것도 있지만, 토모히토 본인도 스스로 알코올중독임을 고백한 바 있고, 젊은 시절 인터뷰에선 자주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여줬던지라 암을 여러차례 앓고 목소리까지 잃은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일 수 있다. 당장 자신에게 그 병약한 가족력을 넘겨 준 아버지 다카히토는 100세 넘게 장수했다. 황족은 병원비를 국비지원해서 망정이지, 보통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콩가루 집안이 되었을 것이다. 2년이 지나 2014년에는 큰동생인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이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죽으면서 미카사노미야 가문의 3형제가 모두 아들을 낳지 못하고 부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다카히토 친왕도 2016년 10월 27일 향년 100세로 작고하면서 결국 부계로 이어지는 적통이 끊기고 말았다.

큰딸 아키코 공주는 시집가지 않고 평생 왕족으로 살며 미카사노미야 가문을 지킬 계획이라고 하며, 작은딸 요코 공주도 언니처럼 독신 선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고 있다. 토모히토 친왕이 죽은 후로, 두 딸들도 아버지가 생전에 하던 야스쿠니 신사참배와 자위대 행사 참석 등의 우익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8. 여담

  • 그의 응접실에는 큰아버지인 쇼와 덴노의 사진이 있었고, 공개석상에서 "쇼와 덴노를 제일 존경한다." 하고 말한 바 있다.
  • 정작 그 쇼와도 전범 묻힌 이후론 안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는거나 토모히토 친왕이 친하게 지내던 주변 인물들을 봐도 정치적 성향은 우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토모히토 친왕의 아내 노부코 비의 오빠, 즉 토모히토 친왕에게는 손위처남이 정치인 아소 다로다.

[1] 66년 5개월 1일 [2] 모들린 칼리지 [3] 일본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 주로 식물이며,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 [4] 반대로 다카히토 친왕의 막내아들인 노리히토는 형제들 중 유일하게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 [5] 1947년에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방계 황족들과 화족(귀족)들은 모두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이를 신적강하라 한다. [6] 다이쇼 덴노 데이메이 황후의 3남. 자식이 없는 이유는, 노부히토 친왕에게 동성애 성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7] 본래 오쿠보 도시미치의 차남인데, 마키노 가문의 양자 입양되어 '마키노 노부아키'가 되었다. [8] 아소 다로의 아내는 스즈키 젠코 총리의 딸이다. [9] 일본어 위키백과를 보면, Rosslyn House College를 신부학교(花嫁學校)라고 표현하였다. 신부수업을 가르치는 학교인 듯 [10] 1940년대 정도만 해도 10대에 결혼하는 일은 흔했다. 실제로 1943년, 1925년생인 쇼와 덴노 장녀 히가시쿠니 시게코 내친왕이 17세의 나이에 결혼했다. [11] 당장 1946년 천황의 인간선언과 1947년 신적강하 이후로 일본은 천황과 일부 황족들 외에는 "공식적으론" 화족이든 신적강하한 구황족이든 만민이 평등한 관계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구 제국 시기마냥 미성년자를 데려가 아내로 삼았다가는 여론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12] 일본 황실에서 천황의 손녀까지는 내친왕,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부른다(남자는 친왕/왕). 토모히토 친왕의 두 딸 아키코 요코 다이쇼 덴노의 증손녀이기 때문에 내친왕이 아닌 여왕 지위를 받았다. [13] 나루히토 황태자도 가쿠슈인 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14] 아키코 공주의 사촌 여동생인 센게 노리코의 남편 센게 구니마로(千家國麿)가 고쿠가쿠인대학 신도학과 출신. 구니마로는 졸업 후 신사 신관(神官)이 되었다. [15] 토모히토 사후 미치코 황후가 남편과 같이 생전 퇴위를 해서 미치코 상황후가 되는 수백 년 만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실제로는 황실 내에서 미치코를 견제하는 것과 궁내청의 무능함을 돌려서 비꼬았을 가능성이 크다. 본인도 황적이탈 하겠다고 제대로 폭발한 이력이 있고. [16] 가쿠슈인에서 황족과 함께 수업을 듣는 고가쿠유(御學友)로 있을 정도면 보통 집안의 자제는 아니다. [17] 2007년에 자신이 알코올중독임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던 어느 강연 자리에서 밝히기를 궁내청에서 노골적으로 (내가 알코올중독임을) 발표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그걸 숨기면 뭐할 거냐고, 걔(토모히토 본인)는 안 나왔는데 뭐 재발한 거냐, 아니면 삐져서 안 나온 거냐 하는 여러 말 듣는 게 싫었다고 발언했다. [18] 미국 성인애니 < 사우스파크>의 등장인물 네드 거블란스키가 차는 것이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