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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워드로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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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28b22><colcolor=#fff>
에티오피아 제국 솔로몬 왕조 제59대 황제
테워드로스 2세
ዳግማዊ ቴዎድሮስ
파일:TewodrosII.jpg
출생 1818년
에티오피아 제국 베겜데르주 크와르
사망 1868년 4월 13일 (향년 49~50세)
에티오피아 제국 월로주 마그달라
재위 기간 에티오피아 황제
1855년 2월 11일 ~ 1868년 4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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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28b22><colcolor=#fff> 가문 솔로몬 가문
이름 ካሳ ኀይሉ
Kassa Haile
카사 하일레
아버지 하일레기요르기스 월데기요르기스
어머니 워이제로 아티테겝
배우자 테와베흐 알리 (1831년–1858년)
티루워크 우베 (?–1868년)
자녀 6남 3녀
종교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

1. 개요2. 생애
2.1. 유소년기2.2. 귀족 의적2.3. 복수 끝에 제위를 쟁취하다2.4. 황제 테워드로스 2세, 국가를 통합하다2.5. 에티오피아 대개혁2.6. 외교 무대에 나서다2.7. 개혁에 반대하는 움직임들2.8. 몰락의 시작2.9. 믿었던 영국의 손에 최후를 맞다2.10. 사후
3. 평가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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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제. 판관의 시대 또는 대공의 시대라 불리는 에티오피아의 난세를 종식시키고 제국을 통일하였으며 서구화의 포문을 연 황제이다. 드라마틱한 일생으로 인해 에티오피아 국내와 국외를 막론하고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황제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유소년기

1818년, 제국의 수도 곤다르 서쪽의 크와르에서 귀족 하일레기요르기스 월데기요르기스와 워이제로 아티테겝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명은 카사 하일레[1]였다. 월데기요르기스 가문은 황가 솔로몬 왕조의 방계 가문으로, 1632년 즉위한 파실리데스 황제의 후손이기 때문에 제위 계승권과는 매우 멀었다. 가문은 카사가 태어나기 전부터 카사의 고향 크와르가 속한 뎀비야라는 지역을 다스렸다. 뎀비야를 처음 분봉받은 이는 하일레기요르기스의 형이자 카사의 삼촌인 마루였다. 마루는 에티오피아 전통 귀족 작위 데자즈마흐[2]를 받은 명망 있는 인물이었다. 부계 가문뿐만 아니라 모계 가문도 훌륭했는데, 어머니 워이제로 아티테겝은 베겜데르 지역 전체에서 힘을 쓰던 라스[3] 워다조의 손녀였다.

출생 환경 자체는 유복했지만, 곧 그의 인생에 첫 번째 먹구름이 다가왔다. 카사가 아직 아기일 때 부모님이 이혼한 것이다. 어머니 워이제로 아티테겝이 양육권을 받았다. 그녀는 카사를 데리고 제국의 수도 곤다르로 이주했다. 카사가 곤다르로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하일레기요르기스가 사망했다. 그런데 월데기요르기스 가문 사람들은 워이제로 아티테겝은 이혼했으니 워이제로와 카사에게는 상속권이 없다고 선포하고 멋대로 하일레기요르기스의 재산을 자기들끼리 분할하였다. 그 때문에 워이제로와 카사 모자는 얼마간 가난하게 지내야 했다.[4] 하지만 워이제로는 대가문의 딸이었던만큼 친정 식구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카사가 소년이 될 때쯤에는 아주 부유하지는 않지만 가난하지도 않은 적당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1827년, 9살 소년이 된 카사는 곤다르 남쪽에 있는 테클라 하이마놋 수도원 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금세 끔찍한 일을 겪게 된다. 그가 학교에 입학한 1827년, 카사의 삼촌 데자즈마흐 마루는 그가 지배하는 뎀비야 동북쪽의 세미엔 지역에서 새롭게 나타난 신흥 강자, 데자즈마흐 우베 하일레마리암을 굴복시키기 위해 자신의 상위 귀족인 베겜데르의 라스 이맘을 끌어들여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마루가 승리하였다. 그러자 우베 하일레마리암은 후퇴하면서 보복을 위해 월데기요르기스 가문의 아이들이 주로 입학하던 테클라 하이마놋 수도원을 급습했다. 우베는 수도원을 건물째로 무너뜨려버리고 도망치는 아이들을 일일이 잡아 참수하고 화형했다. 아비규환 속에서 카사는 간신히 도망치는 데 성공하여 그의 삼촌 또는 이복형인 켄푸 하일레기요르기스에게 의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카사의 평생에 강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켄푸는 카사를 잘 돌보아 주었다. 켄푸의 슬하에서 카사는 행정, 전통 문학, 무예, 병법 등 각종 실용적인 제왕학을 배울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카사는 일찌감치 유럽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에티오피아는 완전히 고립된 왕국이 아니라, 16세기에 포르투갈이 내정에 개입해 곤욕을 치른 적이 있는 등 유럽과 꾸준히 관계를 맺고 있었다. 거기에 카사가 살던 시대는 19세기 초중반으로, 제국주의의 신호탄이 쏘아올려지면서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 점령을 개시하던 때로 에티오피아 주변에 다시 한 번 유럽인들의 그림자가 드리우던 시기였다. 하지만 에티오피아는 대공의 시대라는 난세의 상황이었고 많은 귀족들은 서구화에 별 관심 없이 당장의 권력 다툼에 골몰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사는 유럽인들의 문명이 가진 힘을 통찰했고, 켄푸 밑에서 교육받는 동안 유럽 역사, 유럽 문화 등을 열심히 공부했다. 영국 측의 기록에 따르면 셰익스피어 전집까지 구해 읽었다고 한다. 청소년기를 교육적 환경 속에서 보내면서, 카사는 제국 최고의 인재로 성장하였다.

2.2. 귀족 의적

카사는 10대 중반에 켄푸의 군대에 입대하면서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 에티오피아 북서부와 에리트레아 일대에서는 북쪽의 이집트 태수령[5]과 에티오피아 사이에 분쟁이 종종 일어나고 있었다. 1837년, 수단 지역의 소수민족 루파족이 이집트군을 피해 에티오피아로 도망쳤다. 그들을 눈여겨본 켄푸는 루파족들에게 군사를 더 붙여주어 수단에 무력도발을 감행했다. 이에 분노한 수단 총독 아흐마드 카시프는 켄푸의 부하에게 뇌물을 주고 루파족 족장을 납치해 와서 처형한 후 1,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켄푸가 다스리는 뎀비야를 침공했다. 아흐마드 카시프는 루파족과 함께 온 켄푸 군대의 숫자를 보고 켄푸 군대의 숫자를 과소평가해서 턱없이 적은 군사를 데리고 갔다. 이에 켄푸는 20,000명의 군사를 내어 이집트군을 포위하면서 와드칼타부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 경험이 없던 아흐마드 카시프는 켄푸 군대를 보고 겁먹어 도주했고, 켄푸는 기병대를 돌진시켜 이집트군을 쉽게 제압했다. 이 공격의 선봉에 카사가 섰다. 카사는 몸소 돌격하여 적을 여럿 베고 이집트군 장수를 생포했다.

카사는 멋지게 데뷔했지만 곧 역경이 닥쳤다. 카사를 후계자감으로 생각해서 잘 키워 준 켄푸가 막상 자신의 아들 메콘넨이 장성하자 메콘넨에게 뎀비야 땅을 물려주고 싶어지게 되면서, 카사를 껄끄럽게 여기게 된 것이다. 다행히 1839년, 켄푸가 죽어서 은인인 켄푸와 싸우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켄푸가 죽자 뎀비야를 노리고 다못 공작 겸 고잠 공작 데자즈마흐 고슈 저우디가 북상하여 뎀비야를 급습했다. 메콘넨, 메콘넨의 동생, 카사는 힘을 합쳐 고슈 저우디와 맞서 싸웠지만 많은 군사를 거느린 고슈 저우디에게는 역부족이었고, 카사는 도망쳤다. 그렇게 몇 달간 기회를 노리며 방황했지만 틈이 보이지 않았고, 결국 카사는 현실에 순응하고 고슈에게 가서 복종을 맹세하여 그의 군대에 입대했다. 하지만 고슈 저우디는 처음부터 그를 백안시했는지 아무리 무공을 세워도 승진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그는 전역하고 고향 크와라로 돌아갔다. 하지만 크와라로 돌아온 카사를 꺼리는 이가 또 있었다. 바로 제국의 황후 메넨 리벤 아메데였다. [6] 고슈 저우디가 뎀비야를 점령하지 않고 돌아가면서 뎀비야가 무주공산이 되었는데, 이에 메넨 리벤이 슬쩍 관리를 파견해 뎀비야를 슬쩍 자신의 사유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카사는 뎀비야를 통치할 정당한 권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민들의 마음이 기울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메넨 리벤이 파견한 관리는 카사를 추방했다.

분노한 카사는 산적[7]이 되었다. 카사는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쌓은 무공 덕분에 이미 유명인사였던데다가 잘생기고 유능해서 순식간에 많은 전사들이 카사를 따르기 위해 모였다. 그가 처음에 크와라에서 추방당했을 때 그를 따르는 전사는 12명이었지만 곧 전사 300명이 찾아와서 산적단에 가입했다. 본격적으로 거병할 때는 600명이 넘는 기병대가 생겼다. 카사는 마치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에티오피아 북서부 전역을 활보했다. 카사의 도적단은 주로 어느 곳의 누구를 털겠다고 공공연하게 발표한 후, 한밤 중에 기병대로 기습하여 순식간에 털어먹고 사라지는 수법을 사용했다. 주요한 공격 대상은 상인들과 세금 운반인들로, 이들은 여느 전근대 농업국가가 그렇듯 대다수 농민들의 미움을 사는 존재였기 때문에 카사의 이미지가 크게 올라갔다. 그리고 수도 곤다르로 가야 할 세금이 끊기면서 제국 중앙정부도 진땀을 흘릴 만큼 피해가 누적되기 시작했다. 거기다 카사는 악녀 이미지가 강했던 황후와 대립각을 세우는 한편 이렇게 약탈한 세금의 상당량을 에티오피아 곳곳의 농민들에게 이 돈으로 농기구와 씨앗을 사라면서 나눠주었다. 이런 카사의 행보에 제국의 국민들은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고 그를 영웅시했다. 결국 중앙정부의 권위는 나날이 추락하게 되었고 반대로 카사는 제위를 차지할 새롭고 강력한 대권주자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카사의 행보에 식겁한 메넨 리벤 황후는 카사를 제압하기 어렵다고 판단, 그를 끌어안으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1840년대 초반에 황후의 손녀 테와베흐 알리를 카사에게 시집보냈다. 테와베흐 알리는 메넨 리베 황후가 첫 남편인 예주 공작 라스 알룰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라스 알리의 딸이었다. 라스 알리는 당시 에티오피아 제국 섭정이었기 때문에 테와베흐 알리는 상당히 신분이 높은 여성이었다. 카사는 정략결혼, 심지어 정적의 손녀였지만 테와베흐 알리를 처음 만나고 한눈에 반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메넨 리벤 황후는 카사에게 크와라 땅을 떼어주어 총독으로 삼고 각종 명예로운 호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여기까진 좋았지만, 정작 메넨 리벤 황후는 중요한 실수를 저질렀다. 끝까지 카사를 불신하여 카사를 박대한데다가 카사의 처갓집 사람들, 즉 황후의 집안 사람들도 계속 카사를 공공연히 모욕하게 내버려둔 것이다. 결국 카사는 아내와의 금슬과는 별개로 처갓집에 원한만 한가득 쌓게 되었다.

2.3. 복수 끝에 제위를 쟁취하다

결혼 관계 때문에 한동안 화를 참고 있던 카사는 결국 폭발해 1846년, 메넨 리벤 황후와 라스 알리를 기습했다. 그해 가을에 제국 중부에 있는 도시 뎀베아를 약탈했고, 1847년 초에 수도 곤다르를 기습해 점령했다. 카사는 멋대로 곤다르 시장을 임명해 앉히고 궁정 곡물 창고를 약탈했다. 그해 말에 카사가 곤다르에서 물러나자 메넨 리벤 황후는 후퇴하는 카사 군대의 뒤를 치면서 타나 호수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는 최악의 판단으로 제국 중앙군이 참패했고 요하네스 3세와 메넨 리벤 황후 부부가 카사에게 사로잡히는 참사까지 벌어졌다. 라스 알리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치욕을 참으며 데자즈마흐 작위를 얹어주고 뎀비야 땅의 통치권을 카사에게 반환했다. 이에 카사는 황제 부부를 석방하고 크와라로 돌아갔다. 이후 카사는 자신의 권위를 세울 겸 이집트에 무력도발을 감행하여 수단으로 진군했으나, 다바르키 요새 전투에서 훨씬 수가 적지만 서구화된 이집트군에게 대패하였다. 이 경험에서 서구 무기와 전술의 무시무시함을 체감한 카사는 서둘러 서구 총기와 대포를 구해 자신의 군대에 조금씩 보급하였다.

1848년, 라스 알리는 카사를 예주 공작령의 중심지인 데브레타보르로 소환했다. 하지만 카사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라스 알리는 카사를 끌고 오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나, 카사는 군대가 오는 족족 이를 격파했다. 카사가 일곱 번째로 라스 알리의 군대를 격파하자, 1852년에 라스 알리는 크와라 정벌 및 카사 체포를 선언하였다. 이에 맞서 카사 역시 라스 알리 격파와 허수아비 황제인 요하네스 3세 사흘레 덴겔[8] 폐위를 천명하면서 먼저 진군하기 시작했다. 진군의 목표는 제국의 수도 곤다르였다. 이 전쟁은 카사의 제위를 향한 투쟁임과 동시에 그의 초년기에 만났던 수많은 원수들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다.

카사를 처음으로 가로막은 이는 이전에 뎀비야를 놓고 싸워서 카사를 패배시키고 그가 복종했음에도 굴욕을 준 상대, 다못 공작 겸 고잠 공작 데자즈마흐 고슈 저우디였다. 라스 알리가 카사의 땅을 고슈 저우디에게 준다고 선언했기에 군대를 끌고 와 선봉을 맡았다. 고슈 저우디의 군대는 강대했기 때문에 라스 알리 측은 자신만만했다. 이 소식을 들은 카사는 우선 산 위에 올라가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러자 고슈 저우디는 이를 회피해 뎀비야 땅 깊숙히 들어갔다. 두 군대는 한참동안 유리한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기동전을 펼쳤는데, 그러다 카사의 군대가 평지로 나오자 고슈 저우디가 즉각 공격 명령을 내리면서 구르 암바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카사는 손쉽게 고슈 저우디의 군대를 대파하면서 첫 복수를 성공했다. 고슈 저우디는 카사의 손에 전사했고 상당수의 군사는 전장에서 전사했으며, 일부 패잔병은 가진 것을 모조리 털린 채 고잠으로 돌려보내졌다. 고슈 저우디를 격파한 카사는 일단 숨을 고르자는 판단 하에, 라스 알리에게 승전보를 알리는 한편 화친을 제안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카사의 승리 소식을 듣고 공포에 질려버린 라스 알리는 카사를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을 것이라 판단, 황제와 조정을 이끌고 데브레타보르로 도망쳤다. 덕분에 카사는 곤다르에 무혈입성하였다.

데보르타보르에서 라스 알리는 예주, 월로, 티그레이 세 지방의 모든 군대를 소집했다. 예주와 월로는 오로모인 지역이고 티그레이는 티그라이인지역으로, 두 민족은 에티오피아 내에서도 잘 싸우기로 유명한 민족들이었다. 또 라스 알리는 데자즈마흐 우베 하일레마리암과도 동맹을 맺었다. 카사를 공공연히 모욕하고 천대한 라스 알리와 카사가 어릴 때 학교를 불태우고 카사의 친구들을 무참히 살해한 우베 하일레마리암이 손을 잡은 것이다. 사실 10여년 전 1842년에, 우베 하일레마리암이 제위를 노리고 곤다르를 침공해서 라스 알리가 크게 패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 역시 사이가 무척 좋지 않았지만, 그들과 악연이 깊은 카사가 무서우리만큼 강해지자 임시 동맹을 맺게 된 것이다.

1853년 봄, 라스 알리의 군대가 진군하였다. 라스 알리 군대를 이끄는 사령관은 월로 공작 데자즈마흐 비루 알리가즈로, 이전에 우베 하일레마리암이 라스 알리를 이겼을 때 우베 하일레마리암을 쳐서 내쫓고 라스 알리가 권력을 찾게 도와준 인물이었다. 그를 따라 무려 네 명의 데자즈마흐가 종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카사는 곤다르에서 도보 3시간 거리에 있는 골고라 비셴이라는 곳에 진지를 만들고 적을 맞을 준비를 했다. 진군 한달 후 두 군대는 골고라 비셴 인근의 타쿠사에서 맞닥뜨렸고, 타쿠사 전투가 벌어졌다. 카사는 수 배나 많은 적군을 상대로, 오히려 데자즈마흐 다섯 중 둘을 전사시키는 괴력을 발휘하며 또 다시 대승을 거두었다.

타쿠사 전투에서 승리한 카사는 다시 진군을 시작했다. 이번 목표는 라스 알리 가문의 본거지 데브레타보르였다. 공포에 질린 라스 알리는 고잠으로 도망쳤고, 카사는 손쉽게 데브레타보르를 점령한 후 대대적으로 약탈했다. 그리고 라스 알리를 잡기 위해 고잠으로 진격했다. 라스 알리는 두 번의 전투에서 많은 군사를 잃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카사에 비하면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고잠은 당시 에티오피아의 최남부로, 더 도망칠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고잠의 아이샬이라는 곳에서, 라스 알리는 친히 카사를 맞아 싸웠다. 더 물러날 곳이 없는 라스 알리와 군사가 많지는 않아 한번의 패배가 치명적인 카사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운 아이샬 전투에서, 라스 알리는 무참히 패배했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라스 알리는 강대했던 세력을 모두 잃고 몸만 간신히 빠져나와 자신의 영지 예주로 도망쳤고, 요하네스 3세와 메넨 리벤 황후는 다시 한번 붙잡혔다. 아이샬 전투 이후 카사는 황제 내외를 데리고 곤다르로 돌아갔다. 그리고 요하네스 3세 폐위를 발표했다. 다만, 카사는 예전에 메넨 리벤 황후와 라스 알리 가문이 자신을 괴롭힐 때 요하네스 3세만은 자신을 좋게 보고 대접해 준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메넨 리벤 황후와 이혼하는 것을 조건으로 귀족 작위를 유지하고 카사의 가신으로 살게 해주었다. 메넨 리벤 황후는 투옥되어 10여 년을 갇혀있다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한편, 패배하여 도망친 라스 알리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패배의 고통으로 인해 병까지 앓다가 1856년 병사한다.

1853년 하반기에는 곤다르에서 자신의 패권을 확립하는 데에 주력하면서 휴식한 후, 1854년 봄에 다시 원정을 나갔다. 이번 목표는 일전에 아이샬 전투가 있었던 고잠으로, 이전의 구르 암바 전투에서 카사가 죽였던 데자즈마흐 고슈 저우디의 아들 비루 고슈를 토벌하기 위함이었다. 비루 고슈가 아버지의 복수를 천명하면서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1854년 3월에 카사가 고잠 지역에 도착했다. 그러자 비루 고슈는 아내에게 중심지인 암바 제벨리 성의 수비를 맡기고 자신은 성을 나와 성문 앞에 진을 쳤다. 비루 고슈는 이전에 아버지가 라스 알리와 소규모 전투를 벌일 때 보고 배운 전술을 시도했으나, 에티오피아 제일의 전쟁 전문가인 카사에게 얕은 수는 먹히지 않아 참패하고 포로로 잡혔다. 비루 고슈는 투옥되어 1868년에 감옥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아내는 남편과 이혼하고 성을 바치는 조건으로 살아남았다.

네 번의 큰 전투와 셀 수 없는 작은 전투 끝에 카사는 마침내 에티오피아의 패자가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북쪽 세미엔의 우베 하일레마리암, 그의 가장 큰 원수였다. 이 시점에서 카사와 우베 하일레마리암은 긴장 속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이샬 전투의 결과를 본 우베가 식겁하여 선물을 주면서 화친을 청했고, 남쪽 고잠에서 싸우고 있던 카사가 양면전선을 막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사는 본래 우베의 세력권인 티그레이에서 군대를 철수시켰지만, 우베가 데리고 있던 에티오피아 총대주교 아부네 살라마는 곤다르로 불러들였다. 아부네 살라마는 우베가 에티오피아의 지배자를 사칭하여 콥트 교황에게 총대주교 임명을 부탁하여 내려온 주교로, 본래 우베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침 이때 에티오피아에는 삼생론이라는 이단이 발생하여 창궐하고 있었는데, 카사가 아부네 살라마를 도와서 이단을 박멸하고 그의 권위를 살려주면서 감동한 아부네 살라마는 충성을 카사에게 바치게 되었다. 우베의 권위의 중요한 축이던 아부네 살라마를 빼앗긴데다가 원래 카사와 악연이 깊던 우베는 분노하여 1855년 초에 휴전 파기를 선언했다. 이에 카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북진하여 1855년 2월 9일에 티그레이의 중심지인 다라지에서 우베의 군대와 대전투를 벌였다. 이것이 다라지 전투이다. 우베는 전력으로 맞서싸웠으나 채 하루를 못 버티고 대패하였고, 이 전투에서 사로잡혔다. 카사는 그를 투옥시켰다. 우베는 1867년에 감옥에서 사망한다.

이로써 길었던 에티오피아 판관의 시대는 끝이 났고, 제국은 통일되었다. 카사는 그를 괴롭혔던 이들을 모조리 쳐부수고 죽이거나 감옥에 집어넣었다. 다라지 전투 이틀 후, 카사는 황제에 즉위했다. 그의 즉위명은 테워드로스로, 당시 에티오피아에서 옛 황제인 테워드로스 1세의 영웅 전설이 유행 중이어서 테워드로스 1세의 좋은 이미지에 편승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으로 테워드로스 2세 치세가 시작되었다. 우베에게 굴욕을 주고자, 대관식을 일부러 우베의 거점이던 다라지의 마리암 성당에서 열고 우베를 묶어 대관식에 전시하듯 놓아 두었다. 대관식에서, 테워드로스 2세는 조국의 재건과 서구화를 이루어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2.4. 황제 테워드로스 2세, 국가를 통합하다

테워드로스 2세가 즉위 후 처음으로 벌인 일은 또 다른 전쟁이었다. 라스 알리와의 전쟁 과정에서 제국 중북부의 베겜데르 일대와 세미엔, 티그레이 등을 토벌하는 데 성공했으나 오로모인 왕조가 지배하던 제국 동부의 월로와 솔로몬 왕조 방계가 지배하던 제국 동남부의 셰와에는 아직 강력한 귀족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월로의 오로모인들은 군사적으로 강력했으며, 셰와 지방은 판관의 시대에 북부 지방을 휩쓴 내전의 참화가 지나가지 않아 평온하고 부유했기 때문에 이들 지방을 석권해야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대관식을 치르고 그해 가을에 바로 월로 지방을 공격했다. 월로의 7개 오로모 부족들은 연합하여 테워드로스 2세에게 대항하여 오랜 기간 방어해냈으나 결국 테워드로스 2세는 1년 6개월만에 월로의 중심지 마그달라를 함락시켰다.

월로를 안정화시키는데 집중하려는듯 테워드로스 2세는 군대를 흩뜨렸고, 이에 셰와 대공 하일레 멜레코트는 테워드로스 2세가 즉각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방심했다. 하지만 테워드로스 2세는 급작스럽게 군대를 모아 셰와를 강력하게 기습했다. 이에 하일레 멜레코트는 동생 사이프 사일레 셀라시에와 군대를 나누어 방어에 나섰다. 하지만 베레콧 전투에서 셰와 군대는 패배했고, 형의 능력에 실망한 사이프 사일레 셀라시에는 자기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혼자 퇴각했으며 이 패배에 낙담하여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하일레 멜레코트는 테워드로스 2세가 다가오던 1856년 여름에 급사하고 만다. 셰와의 귀족들은 우선 하일레 멜레코트의 아들 메넬리크를 데리고 불가라는 지역으로 모여서 저항을 시도했지만 테워드로스 2세는 이들까지 무찔렀다. 결국 셰와 귀족들은 테워드로스 2세를 셰와의 지배자로 인정하고 메넬리크를 테워드로스 2세에게 넘겼다. 테워드로스 2세는 1857년 초에 셰와의 중심지 안코베르에 입성할 수 있었다. 테워드로스 2세는 처음에는 하일레 멜레코트의 시체를 부검하라 명하는 등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곧 태도를 바꾸어 그의 죽음을 형제의 죽음마냥 슬퍼하고 울면서 하일레 멜레코트의 장례식을 왕의 예를 갖춰 성대하고 치러주고 메넬리크를 거두어 양자처럼 키웠다. 이 전쟁을 마지막으로 에티오피아 제국의 원래 영토가 완전히 통일되었다.

2.5. 에티오피아 대개혁

테워드로스 2세는 기존의 에티오피아 황제들과는 완전히 다른 국정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선대 황제들이 추구한 에티오피아는 시바의 여왕이 다스리던 고대 악숨 왕국이었다. 항상 과거를 바라보며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것을 구상했다. 하지만 테워드로스 2세는 과거를 싫어했다. 그의 고향 크와라와 뎀비야는 서구화된 이집트에 수시로 공격당하던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자라면서 그가 본 에티오피아는, 중앙정부는 허약해서 지방 사람들이 곤경에 처해도 돕지 못하고 성직자들은 사이비로 변해서 자신만의 교회를 차리고 돈을 챙겼으며 사람들은 끊임없는 가난에 고통받는 국가였다. 또한 테워드로스 2세는 젊은 시절에 이집트군과 싸우면서 서구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테워드로스 2세는 나라의 모든 것을 개혁하려 했다.

우선 그는 몸소 도로 공사에 나서서 사람들이 도로 공사에 나서도록 부추겼다. 에티오피아는 아비시니아 고원 위에 있는 국가로 산 때문에 통행이 어려워 다른 지방과 교류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중앙집권 강화를 위해 테워드로스 2세는 도로 공사를 대대적으로 벌여 수도와 각 지방들을 잇고자 했다. 황제는 몸소 공사장에 가서 돌을 골라내는 작업을 하기도 했고, 가난한 인부들에게 선물을 베풀기도 했다.

또 황제는 에티오피아의 오래된 노예제 혁파를 시도했다. 즉위 전 전쟁을 치를 적부터 점령한 지역의 노예 시장을 공격해 노예들을 해방했으며, 황제가 된 후 전쟁 포로들을 노예로 팔지 않고 석방함으로써 모범을 보임은 물론 각종 법령을 포고해서 농노제와 노예 무역을 금지했다. 노예 무역은 밀수로 변해서 한동안 지속되었지만, 19세기 후반에 가서는 정책이 성과를 거둬 노예 무역이 중지된다.

테워드로스 2세는 최초로 현대화된 중앙 집권 체제를 에티오피아에 도입했다. 기존의 에티오피아는 철저한 봉건제였고, 중앙정부는 지역 공작들에게 별 힘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테워드로스 2세는 근대 관료제를 도입하고 세무와 사법-치안에 종사하는 공무원들에게 봉급을 지급하여 중앙의 지배 하에 두었다. 지역 귀족들의 권력도 약화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첫째로 기존 수도였던 곤다르를 떠나 옛 라스 알리 가문의 본거지인 데보르타보르로 천도하였다가, 최종적으로 월로 지역 중심지 막달라로 옮겨갔다. 이 때문에 라스 알리 가문과 오로모인들의 영향력이 크게 감소했다. 또 고잠에서는 기존의 공작 가문을 추방시켰다. 이로 인하여 기존 에티오피아 귀족층의 영향력이 크게 꺾였다. 한편으로는 현실과 타협하는 면도 있어 기존 지역 귀족들의 위치를 어느 정도 보전해주기도 했다. 티그레이에는 기존 티그레이인 왕가의 후예 카사 피리를, 셰와에는 하일레 멜레코트의 배다른 동생 하일레 미카엘을 총독으로 앉혔다. 그래도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은 바로 성과를 거둬서 셰와 총독 하일레 미카엘은 중앙정부를 소 닭 보듯이 하던 선대 셰와 공작들과 달리 수시로 수도를 찾아 테워드로스 2세를 알현했고, 중앙정부에 지속적으로 반발을 일으키던 티그레이는 되려 중앙정부에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지역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테워드로스 2세는 공작 밑의 백작, 남작 등의 소귀족들의 수가 상당하고 이들을 전쟁으로 복종시키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소귀족들에게 겁을 줘서 확실하게 제압하고 장기적으로 영토 확장을 위해 테워드로스 2세는 오랜 염원이던 군대 서구화에 돌입했다. 군대 서구화야말로 테워드로스 2세의 최고 업적으로, 최초의 주에티오피아 영국 공사였던 월터 플로든은 이를 대개혁이라고 따라 빼내어 지칭할 정도였다. 군대 개혁은 세 개의 요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첫째는 체계, 둘째는 규율, 셋째는 장비였다. 체계적인 면에서, 기존의 에티오피아 제국군은 전형적인 봉건 군대로, 상비군이라 할 만한 조직은 아예 없었고 그나마 중앙군이라 할 만한 조직은 황제 직할령에서 징집한 징집병이었으며, 전쟁을 벌일 필요가 있을 때는 지역 귀족들을 설득하여 그들의 사병을 끌어와야 했다. 때문에 황제가 귀족들을 압도할 수 없었다. 테워드로스 2세는 최초로 에티오피아 상비군을 창설했으며, 지역 귀족들의 사병들도 상비군의 지휘 체계에 포함시켰다. 단순히 전사-귀족 수준이 아닌 군대 계급도 처음 도입하였다. 현대에 우리가 아는 군 계급과 완전히 같지는 않고 십인대장, 오십인대장 등을 두었는데 이는 현대의 분대장, 소대장 등과 기능이 유사하다. 현대 에티오피아군의 계급 체계에도 테워드로스 2세가 만든 계급 체계의 흔적이 남아있다. 규율적인 면에서, 기존의 에티오피아 제국군은 별다른 봉급이나 보급 체계가 없었고, 이를 전부 국민들을 약탈할 수 있는 권리를 줘서 해결했다. 테워드로스 2세는 군인들이 멋대로 국민들을 괴롭히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여, 이를 철저히 금지시키는 대신 봉급 제도를 창설하고 기초적인 보급 체계도 마련했다. 실제로 한 농민에게 씨암탉을 잡아 바치라고 협박했던 군인이 사형당하고 피해자는 보복당하지 않도록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킨 후 국가로부터 암소 한 마리를 보상으로 받은 재판 사례가 있다. 또 명령불복종도 철저히 금지하여 멋대로 싸우러 나가거나 아군과 불화를 일으킨 군인들은 모조리 척살했다. 월로 토벌전에서는 아예 싸우다 죽은 군인보다 명령불복종으로 즉결처형당한 군인이 더 많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장비에 대해서, 테워드로스 2세는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이집트군과 싸울 때 그들의 체계적인 면에서도 영감을 받았지만 역시 서구 장비의 화력에서 받은 인상이 더욱 강했기 때문이다. 재위 초기에 군에 보급한 서구식 장비들은 모조리 노획품으로, 상당수는 우베 하일레마리암의 군대에서 빼앗아 온 것이었다. 우베는 일찌감치 서구와 무기 교역을 터서 서구 무기를 많이 구해두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획품은 군에 모두 보급하기엔 적고 수리도 어려웠다. 따라서 무기 국산화를 위해, 유럽의 무기 기술자들을 초빙해서 가파트라는 곳에 최초의 무기 공장을 설립하고 그 맞은편에 기술학교를 설립했다. 이곳은 무기를 팍팍 생산하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의 무기 생산량을 충당했음은 물론 무기 유지보수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2.6. 외교 무대에 나서다

기존의 에티오피아는 외교와는 거리가 먼 전근대 국가였다. 먼 거리에 있는 국가와는 교류할 이유도 여력도 없었고, 가까운 데 있는 국가 중 에티오피아와 겨룰 만한 국력을 갖춘 국가는 이집트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판관의 시대 말기에 우베 하일레마리암 등 일부 지방 귀족들이 세력 확장에 도움을 받기 위해 유럽 국가들과 접촉하려 했다. 테워드로스 2세 역시 이런 경향을 이어받아 여러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트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의 외교를 위한 노력에는 장애물이 너무도 많았다. 첫째는 황제가 유럽 내의 외교 관계를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열린 사람이라고 해도 에티오피아 국내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고, 테워드로스 2세는 유럽 국가들 간에 복잡한 외교적 균형 관계가 있다는 것과 종교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테워드로스 2세는 에티오피아가 기독교 제국이며 이교도 이집트와 성스러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같은 기독교도로써 지원해달라는 논조의 편지를 보냈으나, 이런 논리는 유럽 국가들에게 별로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았다. 황제는 크림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했다고도 한다. 이교도 오스만 제국과 기독교 국가인 영국, 프랑스가 협력하여 기독교 국가인 러시아 제국을 친다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유럽 국가들의 인종차별적 경향이었다. 이때는 아직 에티오피아가 유럽 국가들의 인정을 받기 전이었고, 유럽 국가들에게 테워드로스 2세는 그저 아프리카의 수많은 우가우가 부족장들 중 하나로 보일 뿐이었다. 당연히 그를 외교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국가 자체가 거의 없었다. 셋째로, 이러한 인종차별적 경향 때문에 각국 외교관들도 제대로 일하지 않았다. 황제의 뜻이 유럽 국가들에게 잘 전해지지도 않았고, 심지어 곡해되어 전달되기도 했다.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민간 상인들을 통해 무기 수입을 어느 정도 해낸 것 말고는 외교적 성과를 얻기 어려웠다. 가장 에티오피아를 친밀하게 대했던 국가는 러시아였다. 당시 러시아는 영국을 견제하고 싶어 국력이 닿는 만큼 해외에 세력권을 넓히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러시아가 크림 전쟁에 휘말리면서 약속했던 무기, 기술 지원이 전면 중단되어버렸다. 지원 중단 소식을 들은 테워드로스 2세는 새롭게 주조한 대형 대포에 세바스토폴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러시아가 보여준 마음에 감사를 표했다. 반면 프랑스는 외교 관계 수립의 조건으로 황제가 싫어하는 가톨릭 선교 전면 허용을 내걸었다. 이는 사실상 외교 관계 수립 거부나 다름없었다. 가장 외교 관계가 많이 진척된 국가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비교적 덜 인종차별적으로 외교를 하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또 황제는 어릴 때부터 영어 공부를 하고 셰익스피어를 읽는 등 개인적으로 영국을 좋아하기도 했다. 적지 않은 영국인들이 에티오피아에 입국했고, 이 중 영국 공사 월터 플로든과 무역상 존 벨은 황제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황제는 이 두 사람이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영국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지만, 영국 정부는 에티오피아와 거리를 두면서 관계를 냉정하게 설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영국은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치르는 중이었는데, 영국 눈에 에티오피아는 친러 국가였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집트와는 대놓고 전면전을 벌이진 않았지만,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이집트와 대립각을 세우고 분쟁도 자주 했다. 1854년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키릴로스가 에티오피아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에티오피아 총대주교 아부네 살라마와 만났다. 당시 테워드로스 2세는 아직 즉위 전에 귀족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아부네 살라마는 그를 위해 이집트군을 동맹으로 끌어들이려고 했고, 키릴로스는 이 뜻에 동의해 이집트에 돌아가서 군주 이브라힘 파샤에게 에티오피아에 군대를 보내줄 것을 부탁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를 알게 된 테워드로스 2세는 노하여 키릴로스를 잡아 가두었다. 키릴로스는 이집트와 에티오피아 간의 외교 관계를 주선하려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에야 1855년에 석방될 수 있었다. 또 황제는 수단 지역의 반란을 지원하기도 했다.

2.7. 개혁에 반대하는 움직임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들은 당연히 반발을 일으켰다. 우선 테워드로스 2세는 종교계와 갈등을 빚었다. 테워드로스 2세는 "그리스도의 곁을 떠나면 공허함만 남는다"라고 발언할 만큼 종교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는 당대의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의 행태를 굉장히 싫어했다. 오랜 판관의 시대 동안 교회들은 불안한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헌금을 잔뜩 받아 막대한 재산과 토지를 모았는데, 교회는 면세라 국가 세수에 막대한 손실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사제들의 부패도 심각했다. 테워드로스 2세는 이러한 부패 사제들을 '지팡이나 질질 끌며 마을들을 도는 놈들'로 부르며 비난했다. 1856년 초에, 황제는 국내의 사제들을 모아놓고 교회 토지 몰수를 발표했다. 모든 교회들의 토지의 절반을 떼어 인근의 농민들에게 분배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에티오피아에 꼭 필요함은 물론 테워드로스 2세가 이름을 따 온 테워드로스 1세 선황의 업적과 같은 것이라 황제의 염원이기도 했다. 사제들은 강력히 반발했으나 1860년에 결국 토지 분배가 단행되었고 종교계와 황제 간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또 이때 교회들의 사제 수도 제한했다. 총대주교 아부네 살라마를 중심으로 사제들은 테워드로스 2세를 찬탈자라며 비난하고 사람들을 선동했다. 결국 1864년 총대주교 아부네 살라마는 체포되어 가택연금당했으며, 지병인 기관지염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연금 상태에서 1867년 병사하고 말았다. 에티오피아 정교회 뿐만 아니라 제국 내 다른 종교들과도 관계가 나빴다. 개신교와는 초창기에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855년 스위스에서 장로회 선교사들이 오자 그들이 무기 기술을 제공해준다는 조건 하에 그들을 환대하고 제한적으로 선교도 허락했다. 선교사들은 무기 전문가가 아니라 썩 숙련되지는 못했지만 어떻게든 서구식 대포를 만들어 내서 황제를 기쁘게 했다. 하지만 개신교 선교사 중 하나였던 영국인 헨리 스턴이 대형 사고를 치면서 한순간에 관계가 경색된다. 바로 황제의 어머니가 시장에 나가서 장사할 정도로 가난했다는 거짓말을 유럽에 진실인 것처럼 소개한 것이다. 이를 알게 된 황제는 슬퍼하며 분노했고, 곧 국내의 모든 개신교 선교사들을 잡아다 투옥시켰다. 이슬람 역시 처음에는 인정받았으나, 홍해 일대에 오스만 제국이 세력 투사를 시도한 것과 이슬람 상인들이 노예 밀수를 주도한 것 때문에 황제의 분노를 사 1863년에 신앙을 금지당했다. 이슬람을 금지하자 국내 무슬림들은 반발하며 파업했는데, 황제는 이들을 잡아 가두는 등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가장 관계가 나빴던 종교는 가톨릭이었다. 북쪽의 반황제 세력이 가톨릭을 신앙하며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결탁했기 때문이다. 1854년에 테워드로스 2세는 가톨릭 신자 추방령을 내렸다. 이에 프랑스는 북부의 가톨릭교도 지역 귀족 아그웨 니구세를 지원하며 맞불을 놨다. 아그웨 니구세는 기세등등하며 황제와 대립했으나 결국 1860년에 황제의 군대에 패배해 전사했다.

지역 귀족들과의 관계 역시 날이 갈 수록 나빠졌다. 귀족들은 황제의 거침없는 중앙집권화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1860년을 기점으로 각지에 남아있던 귀족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일련의 귀족 반란들을 묶어서 고트 반란이라 일컫는다. 고잠의 테달라 괄루, 월카이트의 티소 고베저, 셰와의 사이프 사일레 셀라시에, 월로의 리벤 아메데 등의 공작급 귀족들이 일제히 봉기했다. 와그의 와그슘 고베저가 이끄는 군대는 옛 수도 곤다르를 함락시키는 패기까지 보여주었다. 북부 지역 일대에서도 반란군이 일어났는데, 북부 지역은 원래 테워드로스 2세의 핵심 지지층 지역이라 황제의 상심이 컸다. 이 북부 지역 반란군의 수령이 앞서 언급한 가톨릭교도 아그웨 니구세였다. 아그웨 니구세가 죽은 후에는 카사 메르하라는 인물이 급부상해 티그레이 일대를 장악하고 황제에게 대적했다. 오로모인들 역시 반기를 들었다. 오로모인들은 수니파 이슬람교도가 대다수였는데, 이 덕분에 오스만 제국 이집트의 비밀 지원을 받으면서 에티오피아 고원 중부 및 해안가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민심도 이탈하기 시작했다. 재위 초기에 농민들은 의적 영웅 카사를 존경했고, 황제가 농민들 모두를 잘 살게 해줄 구세주와 같은 존재라 믿었다. 테워드로스 2세 역시 그런 치세를 이루고 싶어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아,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서구화 개혁과 농민들의 삶의 질 보장을 함께 추진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세금이 일제히 인상되었고, 농민들은 실망감을 느꼈다. 이에 죄책감을 느낀 황제는 지역별로 돌아가며 면세나 감세를 해주고 교회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분배해주기도 했으나 대다수 농민들의 마음을 다시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불만을 느낀 농민들은 반란군에 가담했다. 게다가 즉위 전 의적 활동의 영향 때문에 상인 계층들도 황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2.8. 몰락의 시작

에티오피아의 국내외의 많은 학자들은 테워드로스 2세의 몰락의 시작을 1858년으로 잡는다. 1858년 8월 19일, 황후 테와베흐 알리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황후는 비록 라스 알리의 딸이었지만 테워드로스 2세가 라스 알리과 맞서 싸우는 동안 흔들림 없이 황제를 도운 인물로, 아름답고 현명해서 테워드로스 2세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상처 많은 심리 상태로 인해 황후에게 심적으로 의존하는 모습도 보였다. 트라우마 가득한 황제가 종종 급발진하여 잔인한 면모를 보이려 할 때 황후는 옆에서 그를 말리며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죽자 이제 황제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테워드로스 2세는 급격히 잔인해지기 시작했다. 황후의 사망 전에는 적을 물리치면 적대 세력의 수장은 감옥에 가두고 그 부하들은 석방해주었는데, 황후의 사망 이후 포로들은 거의 예외 없이 전원 학살당했다. 이러한 잔혹함은 상술한 민심 이반을 가속화시켰다.

일단의 황제의 당면한 과제는 고트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우선 각 반란군 중 중요한 지역인 셰와를 틀어쥔 사이프 사일레 셀라시에를 공격해 내쫓았고, 셰와의 기존 공작 가문 사람들을 모두 수도로 끌고 온 후 셰와에 아토 베자베라는 타 지역 출신 인물을 총독으로 앉혔다. 그 다음에는 수도와 가깝고 세력이 강대한 아그웨 니구세부터 토벌하기로 결심해, 1860년에 북부를 토벌했다. 아그웨 니구세는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고, 칼에 찔려 전사했다. 급한 불부터 끈 후 수도와 지방을 오가면서 개혁 정책을 독려하는 한편, 끊임없이 반란군들과 싸우면서 이들을 제어하려 시도했다. 또 1860년에 우베 하일레마리암의 딸 티루워크 우베와 재혼하기도 했다. 황제와 티루워크 우베 간의 금슬은 별로 좋지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티루워크 우베에게 테워드로스 2세는 아버지의 원수였기 때문이다. 둘은 자주 싸웠고 황제가 원정을 떠나 헤어져 있는 기간도 길었지만 어쨌든 결국 화해했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알레마예후는 황제의 총애를 받아 황태자로 선포되었다.

1862년 황제의 영국인 친구이자 초대 영국 영사 월터 플로든이 영국으로 귀국하던 중 반란군에게 살해당하자 황제는 또 다른 영국인 친구 존 벨과 함께 출병해 반란군을 토벌하고 포로 500명을 전원 학살했다. 1863년에는 고잠의 테달라 괄루를 토벌한 후 포로 7천명을 전원 학살했다.

1865년에는 셰와 총독 아토 베자베가 반란을 일으켰고, 연달아 황제가 좋아하던 전 셰와 공작의 아들 메넬리크가 탈출했다. 메넬리크는 황제의 사위이기도 했는데, 셰와 공작 가문 사람들이 셰와가 이방인인 아토 베자베의 통치를 받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결의하고 메넬리크를 마그달라에서 탈출시킨 것이다. 메넬리크는 셰와로 들어가 민심을 모아서 아토 베자베를 내쫓았고, 그대로 셰와를 독립시켜 버렸다. 야반도주해 자신의 뒤통수를 친 메넬리크에게 황제는 대단히 분노했다.

1866년부터 1867년까지 황제는 월카이트의 티소 고베저 및 오로모인들과 맞서 싸웠다. 싸움을 무척 잘 하는 황제답게 반란군들에 맞서 계속 승리했지만, 군인들은 더 이상 인기가 떨어지고 있는 황제와 싸우기 시작했고 많은 수의 군인들이 전쟁 중 탈영했다. 1856년 에티오피아군은 십만 명이 넘었으나 1866년에는 만 명 언저리까지 군인이 줄어들었다. 1867년 말에 총대주교 아부네 살라마가 가택 연금 중 병사하면서 국민들에게 황제가 기독교단을 탄압한 것처럼 받아들여져 불타기 시작한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곧 수도 주변까지도 폭동이 번졌고, 마그달라와 데브레타보르를 연결하는 중앙도로마저 반란군이 점거해서 안전하게 통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황제는 원래 수도권인 베겜데르 지역 주변의 모든 땅의 통제권을 상실하고 말았으며, 베겜데르 지역 곳곳도 반란군에게 파먹힌 형국으로 전락했다.

2.9. 믿었던 영국의 손에 최후를 맞다

1862년, 테워드로스 2세가 쓴 편지가 런던에 도착했다. 편지의 내용은 기독교 국가 에티오피아가 이슬람에 위협받고 있으므로 군사 장비와 기술을 지원해주어 에티오피아의 성전을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상술했듯이 영국은 에티오피아를 친러 국가로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황제의 편지를 인도 제국 정부로 미뤘고, 인도 제국 정부 측도 결국 답장을 하지 않고 보류 문서함에 던져놓았다. 반란군과 이집트와 맞서 싸우는 것이 버거워지고 있던 테워드로스 2세는 에티오피아를 도와줄 것이라 믿은 기독교 국가 영국이 영 미적지근하게 굴자 점점 영국에 배신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마저 느끼기 시작했다. 2대 주에티오피아 영국 영사 찰스 던컨 카메론 대위는 황제를 달래며 어떻게든 외교 관계를 진척시키려 해 보았으나, 영국 정부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목화 수입 및 영국제 제품 판매를 원활히 할 수 있는 시장인 이집트에 훨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친근히 접근하였다. 카메론 대위는 1863년 다시 한 번 답장을 채근하기 위해 항구로 나갔는데, 오히려 영국 정부는 이집트령 수단 일대의 노예 밀무역 실태 조사를 나갈 것을 명했다. 영국이 이집트와 친밀하게 지내려 한다는 것을 알아챈 테워드로스 2세는 카메론 대위가 이집트 땅인 수단으로 갔다는 소식에 대노했다. 황제를 완전히 눈이 돌아가게 만든 것은, 1863년 오스만 제국이 예루살렘 내 에티오피아 성직자 및 민간인들을 추방했을 때 영국이 이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다. 또한 상술한 영국인 선교사 헨리 스턴의 망발도 황제를 노하게 만들었다.

1864년 1월 2일, 테워드로스 2세는 국내의 모든 유럽인들을 잡아 가둘 것을 명령했다. 카메론 대위를 비롯해 국내의 모든 영국인 및 유럽 각국 사람들이 일시에 투옥되었다. 이 충격적인 소식을 보고받은 영국 정부는 급하게 황제의 편지를 찾아서, 빅토리아 여왕의 명의로 답장을 썼다. 이 답장을, 원주민 외교의 전문가 호르무즈드 라삼을 대표자로 하는 사절단을 꾸려서 에티오피아로 보냈다. 사절단은 1864년 에티오피아 땅에 도착했으나 오락가락하는 테워드로스 2세의 마음과 도로를 장악한 반란군 때문에 1866년 1월에야 황제의 궁정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황제는 처음에는 이들을 무척 반겼으나, 정작 첫 편지에서 부탁했던 군사 고문단은 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되자 정색했다. 이후 황제는 라삼과 대화했고, 곧 라삼과 친해지면서 석방 협상은 진척되었다. 그러나 무척 불안정한 황제의 심리 때문에 협상은 다 되어가다가도 파탄나는 과정을 반복했고, 황제는 라삼에게 매우 친밀하게 굴다가도 갑자기 욕지거리를 하거나 영국인 포로 또는 에티오피아인 부하를 구타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영국인 인질들이 몰래 본국과 소통하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된 황제는 또 다시 대노, 호르무즈드 라삼마저 잡아가두었다.

이 소식까지 들은 영국은 6월에 선교단을 보냈다. 이 선교단은 영국의 최후통첩을 전하는 임무를 받고 왔다. 영국 정부는 지금이라도 인질들을 전원 석방하면 반드시 빠른 시일 내에 군사 지원을 하겠으나 조금이라도 석방이 늦어지면 전쟁에 돌입함을 선포했다. 그러나 반란군이 도로를 틀어쥐는 바람에 이 최후통첩은 황제에게 닿지 못했다.

최후통첩을 전하러 간 선교단마저 감감무소식이 되자, 영국은 구출을 위한 군사 행동을 준비했다. 1867년 8월 21일에 빅토리아 여왕은 에티오피아 공격 명령을 내렸다. 9월에 공병대만으로 이루어진 선봉대가 출정했고, 12월 4일, 인도 제국 봄베이 방위군 1만 3천 명 및 군무원 2만 6천 명, 총원 3만 9천 여명의 영국군이 봄베이에서 출발하였다. 영국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은 백전노장인 로버트 네이피어 공병 중장으로, 영국-시크 전쟁, 세포이 항쟁 제2차 아편전쟁에서 활약한 베테랑이었다. 이로써 앵글로-아비시니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은 이 전쟁에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었다. 에티오피아는 일개 부족 국가 따위가 아니었고, 에티오피아 고원의 자연환경은 침략군에는 너무나 거친 곳이었기 때문이다. 네이피어 장군이 공병 장교 최초로 총사령관을 맡은 이유도, 최소한의 피해를 내며 진격하려면 공병이 앞서서 각종 시설을 부설하며 진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군의 규모도 너무 적지도 너무 많지도 않게 과학적으로 계산해서 결정한 것이었다.

저항 없이 미츠바 항구에 내린 선봉대는, 3개월 간 기지와 군항을 건설하면서 우물도 수없이 팠고 32km 길이의 해안 철도도 놓아서 영국군의 계산대로 전쟁을 수행할 준비를 완벽히 하였다. 1868년 1월 2일에 본대가 기지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네이피어 장군은 현지 지도를 구해 작전계획을 수립한 후 1월 25일에 인근의 세나페로 진격했다. 세나페에서 네이피어 장군은 두 개의 포고문을 냈다. 첫째는 테워드로스 2세를 향한 포고문으로, 지금이라도 인질을 전원 석방하면 공격하지 않고 퇴각하겠다는 포고였고 둘째는 에티오피아 전역의 모든 사람들을 향한 포고문으로, 테워드로스 2세의 국제법 위반으로 인해 영국군은 오직 인질 구출 및 테워드로스 2세 처벌의 목적으로 에티오피아에 들어왔음을 밝히는 포고문이었다. 이 두번째 포고문에서 네이피어 장군은 영국이 에티오피아에 어떠한 적대감도 없으며, 에티오피아 땅을 조금도 점령하지 않을 것이며 일체의 약탈도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자 에티오피아 전역의 반란군들이 앞다투어 영국군에 협력할 것을 청했다. 가장 강대한 세 반란 세력인 티그레이의 카사 메르하, 와그의 와그슘 고베저, 셰와의 메넬리크가 모두 영국군에 붙었다. 오로모인들도 영국군에 포섭되었다.

영국군이 포고문을 냈을 때 테워드로스 2세는 오로모인들과 싸우기 위해 동쪽으로 나가 있었는데, 영국군이 세나페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수도 마그달라로 회군했다. 전장에서 마그달라까지 가는 길은 와그슘 고베저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테워드로스 2세는 강행돌파에 성공했다. 그 와중에 수도 코앞의 마을 델란타에 당도해서 왜 구하러 오지 않았냐면서 델란타 일대에서 학살을 벌이기도 했다. 이 학살로 인해 당장 테워드로스 2세가 주둔하는 마그달라를 제외한 모든 에티오피아 지역들이 황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쨌든 영국군이 신중히 진격했으므로 황제는 영국군보다 열흘 먼저 마그달라에 들어갔다. 이 시점에서 에티오피아 중앙군은 보병 기병 합쳐 약 1만 명 이하에 대포 30문 가량이었다.

4월 9일 영국군은 동북부 해안에서 마그달라로 향하는 유일한 도로의 아로예 고지에 도착했다. 테워드로스 2세는 마그달라 성에서 나와 아로예 고지에 진을 친 상태였다. 4월 10일, 아로예 전투가 발발했다. 영국군은 에티오피아군이 수비 진형을 유지할 것으로 판단하고 에티오피아군의 대포 사거리 밖에서 천천히 공격을 준비하려 했다. 하지만 이를 예측한 테워드로스 2세는 방어하면 필패하지만 기습 공격을 가하면 일말의 승산이라고 판단, 군을 전면 돌격시켰다. 4천 명의 에티오피아 보병이 일제히 영국군의 진영으로 돌격해오자, 영국군은 무척 당황했다. 하지만 숙련된 레드 코트들 답게, 금세 진형을 차려 영국군 특유의 초고속 재장전 전술로 맞섰다. 결국 에티오피아군의 돌격은 영국군의 총알 세례에 와해되었다. 영국군이 부상자 20여 명을 낸 반면[9] 에티오피아군은 최소 500여 명 이상이 전사했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결국 테워드로스 2세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마그달라 성으로 돌아갔다. 그 와중에 탈영까지 일어나면서 남은 군대는 약 4천 명 정도였다.

4월 12일, 영국군은 마그달라 성 밑에 도착했다. 네이피어 중장은 인질을 전원 석방하고 무조건 항복하면 명예롭게 대접해주고 물러가겠다고 편지를 썼다. 이에 테워드로스 2세는 네이피어 중장에게 답장을 썼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삼위일체를 믿는 카사가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전하오..(중략) ..신민들은 짐이 세금과 규율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이를 거절하고 짐에게 반기를 들었소. 하지만 규율을 잘 갖춘 그대들은 짐을 정복했구려.짐을 사랑하고 따라와 주었던 사람들은 총알 한 발을 두려워해 짐을 버리고 도망쳤소. 결국 그대들이 짐을 공격했을 때, 짐은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던 거요. 짐은 내가 그들의 주인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짐은 부족한 대포로 분투했거늘.. 아아! 우리나라 사람들은 짐이 프랑크인들의 신앙을 받아들였고 무슬림이 되었다고 수없이 떠들어 댔소. 그렇지만 짐은 짐이 그들에게 잘못한 것들이 있는 것을 알며,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랄 뿐이오.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대로 되기를. 짐은 한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다스리는 군주가 되겠다고 생각했소. 반대로 하나님이 짐에게서 능력을 앗아가신다면, 짐은 죽어야만 할 것이라 각오했소. 돌이켜보니 짐이 세상에 태어난 후 짐의 손을 잡아 준 이가 단 한 명도 없었구려. 짐의 부하들이 도망치려 할 때마다 짐은 일어나서 그들을 안심시키는 버릇이 있었소. 하지만 드디어 어둠이 짐을 못 일어나게 막아서는군. 어제까지 행복 속에서 살아왔던 그대들을, 하느님께서 짐의 신세처럼 만드시려 하지 않기를 기도하오. 짐의 꿈은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투르크 놈들을 몰아내는 것이었거늘.. 다른 사람을 붙잡는 사람은 남에게 붙잡힐 수 없는 것이오.

위의 편지는 에티오피아에서 '용맹의 말'이라는 명문으로 취급받는다. 이 편지와 함께 유럽인 인질들이 전원 석방되었고, 마침 4월 12일이 부활절이었으므로 부활절 선물로 소 한 마리 역시 같이 보내졌다. 네이피어 중장은 편지를 받고 인질들을 반겨 맞았지만 소는 돌려보냈다. 당시 유럽 사람들은 미개한 야만인들에게 인질들이 고문당하고 굶겨져 꼴이 말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으나, 정작 인질들은 수염이 좀 텁수룩할 뿐 건강 상태는 무척 좋았다. 인질들은 테워드로스 2세가 자신들을 신사적으로 대하고 좋은 집에 가택 연금을 시키는 정도로만 구속받았다고 증언했다. 이렇게 유럽인 인질들은 별 탈 없이 풀려났지만 함께 갇혀있던 반란군 포로들은 모조리 손발을 자르고 성벽 밖으로 던져 죽였다.

인질들은 석방되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황제를 체포해야 했던 네이피어 중장은 13일 오후 3시에 총공격을 개시했다. 마그달라는 산 위에 위치한 요새로 성문과 성 내 통로가 하나뿐인 난공불락의 요새라 영국군은 신중하게 접근했다. 우선 야포, 박격포, 로켓포 등 모든 가용 화력을 마그달라에 쏟아부었다. 그 후 공병대가 보병대의 엄호 속에 성문과 성벽에 접근해 폭파시켰다. 성문이 날아가자 보병대가 총검 돌격을 감행했다. 에티오피아군은 포격에 이미 기세가 꺾였고, 보병대가 밀려오자 제2방어선으로 후퇴했다. 영국군은 진격해 제2방어선까지 돌파했다. 제2방어선에 붉은 옷을 입은 영국군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본 테워드로스 2세는,
다 이루었다!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죽겠노라!

라고 외치고, 자신의 권총[10]으로 머리를 쏴 자살했다. 향년 50세였다.

2.10. 사후

제2방어선을 돌파한 영국군은 내부 요새에서 황제의 시신을 발견했다. 한 영국군 보병은 잘생기고 옅은 미소마저 머금고 있는 황제의 시신을 보고 경외감을 느꼈다는 기록을 남겼다. 곧 영국군은 황제가 죽었다고 외쳤고, 황제가 죽은 것을 알게 된 에티오피아군은 저항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전원 항복했다. 마그달라는 테워드로스 2세의 수도였으므로 영국군의 약탈 금지 약속에서 예외였기 때문에 철저히 약탈당했다.

테워드로스 2세의 시신은 자살인지 전사인지 확인하는 검시 절차를 거친 후, 황후 티루워크 우베의 요청에 따라 마그달라의 황실 교회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매장되었다.

황태자 알레마예후는 황후 티루워크 우베의 간곡한 요청으로 인해 영국으로 옮겨졌다. 티루워크는 그의 아들이 강력한 영국의 보호를 받으며 서양식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기를 원했다. 이에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나서서 알레마예후를 챙겼고, 에티오피아 귀족 작위를 갖고 있던 영국인 트리스트람 스피디가 알레마예후의 후견인 자격을 받았다. 티루워크 우베는 처음엔 에티오피아에 남으려다 갑자기 알레마예후를 따라가겠다고 하였고, 이를 고깝게 여긴 스피디가 그녀를 괴롭히면서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항구까지 가는 길에 사망하고 말았다. 알레마예후는 영국과 인도에서 귀족 교육을 받았으나 갈수록 부모님과 고향에 대한 향수병이 깊어지다가 결국 1879년에 1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빅토리아 여왕은 일기에 알레마예후의 사망을 기록하고 매우 슬펐다고 강조했다. 황제의 적자는 알레마예후 뿐이었기 때문에, 남은 황제의 아들은 서자인 메샤샤 뿐이었다. 메샤샤는 일찍이 셰와의 메넬리크가 마그달라를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가 걸려서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았는데, 이 때문에 오히려 아버지의 몰락 이후에도 건재할 수 있었다. 이후 셰와의 메넬리크가 메넬리크 2세로 제위에 오르자 그는 뎀비야 공작 작위를 받아 테워드로스의 가계를 이을 수 있었다. 또 황제가 제일 아끼던 딸 워이제로 알리타쉬는 메넬리크와 결혼했다가 메넬리크가 야반도주하면서 그녀를 버리면서 다시 홀몸이 되었다. 그녀는 아드와 백작 데자즈마흐 바리와우 파울로스와 재혼하였다. 훗날 메넬리크 2세가 즉위하자 바리와우 파울로스는 처음으로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려 수도를 방문했는데, 이 이후 워이제로 알리타쉬와 메넬리크가 다시 연인 관계가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아예 수도를 방문한지 한달 만에 그녀가 누가 봐도 명백히 메넬리크 2세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이 소문은 사실이 되었다. 이후 그녀의 행보에 관한 설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메넬리크 2세의 황후 테이투 베투가 워이제로 알리타쉬를 시기해 독살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녀가 남자아이를 낳았으나 결국 사생아였던 그 아이를 평민 가정에 입양시켰다는 것이다. 현재 메넬리크 2세와 워이제로 알리타쉬의 사생아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가문이 케냐에 거주하고 있으며, 일부 지지자들은 이쪽이 진정한 테워드로스 2세의 직계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

영국은 에티오피아를 점령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테워드로스 2세의 유산은 에티오피아의 유력한 귀족들에게 분배되었다. 먼저 마그달라의 영유권을 놓고 분쟁이 있었다. 영국을 도운 현지 세력 중 오로모인들은 월로 일대가 원래 오로모인 거주 지역이므로 마그달라를 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네이피어 중장은 오로모인들은 무슬림들이라 마그달라 같이 훌륭한 요새를 넘기면 에티오피아가 이슬람에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이를 거절하고, 그 대신 와그슘 고베저에게 마그달라를 넘기려 했다. 와그슘 고베저가 마그달라에 주둔하면서 테워드로스 2세 휘하에 있던 에티오피아인들을 관리하고 오로모인들을 견제하길 바란 것이다. 그런데 정작 와그슘 고베저는 마그달라 땅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고, 다만 테워드로스 2세가 보유하고 있던 대포들만 넘겨줄 것을 청했다. 이에 네이피어 중장은 아예 마그달라를 폭파해 없애버렸다. 영국군은 다시 항구로 회군하면서 해안가를 다스리던 카사 메르하에게 테워드로스 2세에게서 노획한 물품 및 굳이 가지고 돌아갈 필요가 없는 무기들을 모조리 넘겼다. 이후 6월 10일에 인도로 돌아갔다. 이 전쟁의 공으로 네이피어 중장은 마그달라 남작 작위를 받았고, 봄베이 방위군에는 아비시니아 훈장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영국군이 회군한 후 에티오피아의 제위는 가장 유력한 세 귀족 티그레이의 카사 메르하, 와그의 와그슘 고베저, 셰와의 메넬리크 중 가장 수도권과 가까운 곳에 있었던 와그슘 고베저가 차지했다. 그의 즉위명은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였다. 하지만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에게는 혼란상을 수습할 능력이 없었고, 에티오피아는 다시 혼란의 시대에 들어간다.

당시 약탈당하거나 현지에서 영국인들이 발굴한 유물들은 영국 및 유럽에서 에티오피아와 악숨 왕국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 유물들의 일부는 훗날 에티오피아로 반환되었다. 1870년대에 이콘 한 점과 서사시 케브라 나가스트의 필사본이 반환되었고, 1924년에 테워드로스 2세의 두 왕관 중 하나가 반환되었으며, 1960년대에 엘리자베스 2세가 에티오피아를 국빈 방문하면서 테워드로스 2세의 개인 물품들을 모조리 반환했다. 2019년에는 영국군이 검시를 하면서 채취한 테워드로스 2세의 머리카락이 반환되었다.

3. 평가

에티오피아의 역사학자 바흐루 저우더는 테워드로스 2세의 삶을 크게 세 지역, 크와라-데보르타보르-마그달라에 거주한 시기로 분류했다. 크와라는 카사 하일레가 태어나서 테워드로스 2세가 될 때까지의 기반이 되준 곳이다. 데보르타보르는 테워드로스 2세의 개혁 정책이 진행된 에티오피아 개혁의 상징이 되는 곳이다. 마그달라는 황제가 몰락하며 숨어든 곳으로 황제의 길지 않은 인생의 마지막을 맞은 곳이다. 바흐루 저우더는 테워드로스 2세의 개혁 정책 대다수를 '완전히 구현하지 못한 실험'으로 규정했고, 개혁의 효과는 성공과 실패를 가리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실질적으로 개혁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번째는 아비시니아 고원의 산악 지형이었다. 테워드로스 2세는 이를 극복하려 열심히 도로 공사를 진행했지만 당시 에티오피아의 기술로는 아비시니아 고원을 돌파하기 어려웠고, 결국 지방 간의 교역량을 늘리지 못해 개혁 정책은 먼 지방까지 퍼지지 못했다. 두번째는 에티오피아가 수백 년 간 지방분권 상태여서 중앙집권이 빠르게 도입되지 못한 것이다. 테워드로스 2세의 개인 역량만으로는 무리였다. 결국 기존의 봉건제와 어느 정도 타협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개혁의 칼날을 피해 간 지방 세력들은 테워드로스 2세의 치세 말기에 반란군으로 돌변했다. 역사학자 폴 헤인즈는, 황제에게 오직 전문적인 관료 집단만 주어졌어도 모든 개혁을 성공했을 것이라 단언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에티오피아의 상태에 비해 개혁이 너무 성급하고 모순적이었다. 유럽의 중세 후반과 다름없는 상태였던 에티오피아에 테워드로스 2세가 꿈꾼 각종 서구화 정책은 도저히 맞아들어가지 않았다. 그 결과 농민 복지를 향상하려다가도 군대 개혁을 위해 농민 세금을 올리는 요상한 상황이 으레 벌어졌다. 이렇게 급격한 개혁은 많은 모순적 상황을 낳음은 물론 더욱 과격한 반동을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에티오피아인들에게 테워드로스 2세는 단순한 옛 황제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에티오피아인들의 눈에 테워드로스 2세는 현대 문명의 문을 열어젖힌 지도자이자 '통일되고 강력한 에티오피아"의 상징이다. 국가의 정치적, 종교적 통합과 고대의 영토를 회복하는 것은 당시 에티오피아인들의 소망이었고 테워드로스 2세는 이것이 실현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폴 헤인즈는 테워드로스 2세를 에티오피아 최초의 현대적 지도자로 규정했다. 심지어 그의 죽음마저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비록 테워드로스 2세가 죽을 때쯤에 지지도가 아주 낮았지만, 그가 영웅적으로 죽는 모습은 에티오피아인들을 계몽시켰고 테워드로스 2세의 지지자들이 다시 힘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역사학자 해롤드 마커스는 에티오피아에 처음으로 현대적 중앙집권 정부를 도입한 것에 주목했다. 그는 테워드로스 2세가 중앙정부라는 개념을 최초로 도입했고 요하네스 4세가 복원했으며 메넬리크 2세 치세에 중앙집권 정부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했다.

꼭 개혁 정책 뿐만이 아니더라도, 그의 드라마틱한 일생도 인기의 주요한 요인이다. 평범한 귀족 소년 카사 하일레가, 외적 이집트와 맞서 싸우며 이름을 높이고, 높은 사람들의 괴롭힘에 마침내 의적이 되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민중들을 돕다가 마침내 황제 테워드로스 2세가 되고, 나라를 위해 진력하다가 외적 영국과 맞서 싸워 영웅적인 최후를 맞는 일련의 삶의 과정은 에티오피아인들과 심지어 뭇 유럽인들의 심금까지 울렸다. 그의 최후의 순간은 수많은 그림의 소재가 되었고, 많은 작가들이 그의 일생에 대한 소설이나 극을 썼다. '테워드로스'나 '카사' 등의 이름은 에티오피아인들에게 인기 있다. 국내의 에티오피아 식당에 가면 종종 테와드로스 2세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주로 '국부'라고 대답할 정도니 그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4. 기타

빅토리아 3에서 에티오피아의 "무법자 대공" 이벤트를 통해 지도자로 추대된다.

[1] 아버지의 이름을 모두 넣어 카사 하일레기요르기스라 하기도 한다. [2] 중군 사령관이라는 뜻으로, 유럽의 봉건제와 비교하면 백작이다. [3] 에티오피아 전통 귀족 작위로, 유럽의 봉건제와 비교하면 공작에 해당된다. [4] 훗날 카사, 즉 테워드로스 2세의 정적들은 이 시기 워이제로가 시장에 나가서 곡물 장사를 할 정도로 거지 신세가 되었다고 선전했지만, 이는 당대의 에티오피아 문필가들에게 반박당했다. [5] 메흐메드 알리가 통치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이집트는 이미 오스만 제국에게서 반독립적인 지위를 쟁취했다. [6] 제국 황제 요하네스 3세의 아내이다. 자신보다 정치력이 훨씬 부족한 남편을 멋대로 폐위시켰다 복위시켰다 할 만큼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7] 정확히는 동아프리카권의 전통적인 도적 스타일인 시프타이다. 시프타는 단순히 살인, 약탈을 즐기는 도적이라기보다는 마치 중국 수호전 양산박 같이, 최소한의 낭만과 질서를 지키는 반정부 무법자에 가까운 조직이었다. [8] 방계 황족으로, 라스 알리의 신하에 가까운 사람이라 메넨 리벤 황후와 라스 알리가 요하네스 3세와 의견 차이가 생길 때마다 황제를 맡았다. [9] 이후 그 중 2명이 부상 악화로 사망했다. [10] 비극적이게도, 이 권총은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한 결투용 권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