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17:38:00

탐관오리가 상태창을 숨김

탐관오리가 상태창을 숨김
파일:탐태창2.jpg
장르 대체역사, 환생
작가 코락스
출판사 (주)제이트리미디어
연재처 문피아
네이버 시리즈
카카오페이지
연재 기간 본편 : 2023. 07. 03. ~ 2024. 08. 02.
외전 : 2024. 08. 07. ~ 2024. 08. 14.
이용 등급 전체 이용가

1. 개요2. 줄거리3. 연재 현황4. 역대 표지5. 특징6. 등장인물7. 설정8. 개변된 역사
8.1. 국내8.2. 국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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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코믹 대체역사물 웹소설. 작가는 《 죽지 않는 왕-무왕 단종》, 《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를 집필한 코락스. 약칭은 탐태창, 또는 변경 전 제목에서 따온 조선뒤주. 대역소설 중에는 보기드문 피카레스크물로 주인공이 악인(?)이며 말 그대로 탐관오리이다.

시대 배경은 1748년( 영조 24년)부터 시작한다.

2. 줄거리

조선에 떨어졌다. '게장의 영조대왕'과 '뒤주의 사도세자' 사이에서 영의정이 되어야만 한다.
비누도 총도 증기기관도 만들 줄 모른다.
본격 문과형 대체역사소설 시작합니다.

3. 연재 현황

문피아에서 2023년 7월 3일부터 연재를 시작하였다. 본래는 '조선 뒤주 서바이벌 : 나는 영의정이다.' 라는 제목이었으나 제목 변경 공모전을 통해 8월 11일 자로 현재의 제목인 '탐관오리가 상태창을 숨김'이 되었다. 제목을 바꾼 효과가 있었는지 8월 19일자 문피아 무료 소설 3위에 올랐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8월 23일부터는 유료로 전환되었다.

2024년 8월 2일, 총 315화로 본편 완결, 8월 14일 총 8화로 외전이 완결되었다.

2023년 10월 18일 시리즈에서 병행 연재가 시작되었고, 완결 후인 2024년 10월 1일에는 카카오페이지에 전 편이 업로드되었다.

4. 역대 표지

역대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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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특징

현대인이 화약과 비누라는 기술 치트나 빠른 문명개화 같은 현대인 천재론으로 승승장구하는, 클리셰적인 전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점이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이세계라고 생각될 만큼 낯선 사회상으로 이뤄진 18세기 조선에 주인공이 철저하게 적응해서 조선의 논리와 방식으로 출세의 계단을 하나씩 밟아가는 전개를 보여준다. 한국 대체역사 웹소설에서는 대체로 배척되는 상태창이 작중에서 적극 활용되는 것도 특징. 대체역사물이 아니라 '18세기 조선이라는 이세계'에 현대인이 떨어지는 이세계 전생물에 가까운 작품이다.

작품의 전체적인 컨셉은 승경도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작 중 내에서는 초반에만 잠깐 언급되고, 중간중간에 조금씩만 언급되어서 잘 알아보기 어렵지만, 작품 공개 전에는 '영조가 주인공을 말 삼아서 승경도 쥬만지를 하는 작품' 이라는 스포일러가 알려져 있었다.

조선의 미시적인 생활사나 조선인들의 사고 방식이 매우 상세하게 고증되어 잘 묘사된 작품이다. 마치 작가가 정말 18세기를 체험하고 온 듯한 생생한 조선 묘사가 돋보인다. 하지만 이런 고증으로 인해 문체가 딱딱하다거나 읽기 어려운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전전작 죽지 않는 왕-무왕 단종에서 꽃 피고 전작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에서 영근 블랙코미디적 서술이 이 작품에 와서는 여물대로 여물어서 시종일관 쏟아진다. 전작들과 달리 주인공 김운행 시점의 1인칭 시점 서술이 메인인데, 빙의한 지 몇 시간도 안 돼서 조선의 사대부의 사고방식을 완벽하게 체화하여 현대인들이 알아듣기 쉬운 형태의 비유로 쏟아내는 서술들이 그 자체로 이 작품의 블랙코미디의 정수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그러나 나로서도 입의 혀 같은 장복이를 몇 번 데리고 다녀보니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대의 하인은 단지 가사 노동만 맡는 것이 아니다. 외출 시에도 필수적이다. 스마트폰, 키오스크, 자동차, 장바구니, 혹은 불미스러운 사태 발생 시의 대전사(代戰士) 등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수행하는 만능 비선형 컴퓨터인 것이다. 없으면 생활이 안 된다.
5화. 너 내 동료가 돼라(1)
가장 멍청한 노비조차 21세기의 어떤 최첨단 AI로도 도저히 따라오지 못하는 상황 판단력과 유연성을 보여준다. 음성 인식과 얼굴 인식은 기본. 밥만 주면 충전도 알아서 한다. 심지어 복사도 된다!
17화. 스나이퍼 엘리트(1)
서신을 여기저기 몇 장 쓰고 나자 저녁 먹을 때가 됐다.
나는 음성인식을 시도했다. 하이, 관노비.

"게 아무도 없느냐? 때가 되었는데 왜 저녁이 나오지 않는가. 속히 들여라."

대답이 없다.
뭐지? 펌웨어 오류?
31화. 15. 1+1=3(2)
...대략 이런 식이다. 게 아무도 없느냐 = 하이 빅스비 특히 이런 식으로 노비를 스마트폰에 비유하며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숨 쉬듯 나와서 독자들을 요절복통에 시달리게 한다. 이런 기가 막힌 드립의 향연에 독자들은 작가가 직접 조선 사대부로 빙의했다가 돌아온 거 아니냐는 댓글을 달게 된다. 이렇게 밈과 인터넷 유행어를 드립과 블랙코미디에 자유자재로 녹여서 서술이 밈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도 꽤나 긍정적인 부분이다. 보통 이런 웹소설은 당대의 밈이나 유행어를 무작정 우겨넣는 식으로 반영했다가 거기에 휘둘려서 서술 자체가 어색해지거나 나중가서 구식으로 보일 수 있는데 서술 자체에 힘이 있어 주도권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은 작가의 필력에 물이 올랐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한편 자칫하면 가벼워 보일 정도로 넘쳐나는 블랙 코미디와는 달리, 이전작들에서도 보인 강점인, 인물 간의 대화는 정말 조선인 당대인들의 대화처럼 생생한 문체를 보여준다는 점 역시 유지되는 중. 상반된 두 문체를 자유롭게 오가면서 장점만 뽑아내고 있다.

전작들인 죽왕과 혁내취도 그런 소설들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현대인이 역사를 현대인으로서 바꾸는 소설이었다면 이 소설은 완전히 전근대인(에 가까운 현대인) 입장에서 바라본 조선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다. 죽지 않는 왕에서 불사신 먼치킨 주인공의 대활약상을 통한 블랙코미디에서,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에서 작가는 점점 더 현실적 주인공 상에 접근해갔고 마침내 이 작품에서 더욱 현실적인 이세계 조선 블랙코미디를 그려내는 데 한층 더 성공적인 작품을 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일단 본문도 본문이지만 작가가 작품을 쓰면서 수집한 18세기 조선, 주변국들의 현실이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시대 인물들에 대한 지식들을 푸는 것도 매우 상세한데, 이것만으로도 본 작품을 직접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러 모로 등장인물 중에 집안의 차남들이 조명을 많이 받고 첫째들은 뭔가 모자란 듯한 묘사가 이루어 지기도 한다. 일단 주인공 김운행부터가 집안의 차남이며 그의 군주 이훤도 효장세자에 이은 영조의 차남이다. 김운행의 형 김적행은 잘 나가는 동생에게 치여서 사실상 장남 노릇도 옳게 못하고 동생에게 벼슬이나 구걸하다가 약방 운영을 떠맡아 먹고 사는 처지라서 혹시 서자 아니냐는 소리나 듣는 형편이며, 이훤의 아들 이정이 김운행에 의해 살아남아 세자가 되는 바람에 원 역사와 달리 영조의 세손이 아니라 대군이 된 이산도 어리숙한 형에 비해 훨씬 더 영특하게 묘사된다.

김운행의 아들들을 봐도 그러한데, 장남 김이환의 경우 김운행과 홍세화 부부의 간교함을 많이 타고나는 탓에 벌이는 돌발행동이 김운행을 골탕먹이는 경우가 잦아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반면[1], 둘째 아들 김이찬은 좀 더 순박하면서도 엉뚱한 면모가 있고 부친의 무공을 보고 무관 커리어를 지망하는 것을 응원해 주는 등, 집안의 둘째들이 은근히 가질 수밖에 없는 형에 대한 열등감, 부모에 대한 억하심정 등이 잘 묘사되고 이런 것들이 직간접적으로 해소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대체역사 팬덤 사이에서 '흉참하다'라는 표현이 퍼지게 한 작품이다. 이 표현 자체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나오는 오래된 표현이지만 현대에는 잘 쓰이지 않았는데, 이 작품에서 인용한 나주 괘서 사건에 대해 '흉참하다'라는 표현이 나오면서 유행하게 된 것.

6.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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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설정

7.1. 승경도

회원은 승경도의 최종지점인 의정부 영의정에 도달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주어진 12개의 필수 목표와 숨겨진 부가 목표를 완료해야 합니다
목표를 완료함으로써 수강료를 납부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목표를 완료할 때마다 스킬이 개방되고 다양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이는 대부분 진행에 유익할 것입니다
수강료를 전부 납부할 경우 계약이 종료되며 한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다만 수강료를 납부하지 못하고 육체적인 사망, 영구적인 무력화 등으로 더 이상의 진행이 불가능할 경우(사후 추증은 인정되지 않습니다.)영혼에 대한 강제추징 절차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때 회원의 영혼은 당사의 영구적 관할하에 놓이며, 절대로 벗어나거나 소멸할 수 없습니다.
작중 주인공이 약관을 읽지 않고 참가 사인해버린 게임이자 상태창 능력. 12개의 필수목표를 달성하면서 영의정에 올라야 한다는 정신나간 난이도를 자랑한다. 대신, 목표를 클리어하면 치트 능력을 보상으로 제공하기에 주인공은 유용하게 써먹는다.[2] 스킬 이름들이 죄다 '(사람이름)의 ***' 식의 형식인데, 초반엔 무슨 스킬인지 알아보기 쉬웠으나 갈수록 바로 알아보기 어렵게 이상하게 꼬여 있다[3]. 유교에 대한 지식이 좀 있으면 느낄 수 있는 부분인데, 스킬 종류들이 조선의 사대부들이 가져야할 필수 교양(육예)과 관련된 것들이라는 점도 특징.[4] 다만 주인공에 의해 조선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엇나가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주어지는 스킬들도 육예와 엇나가게 된다.

[ 튜토리얼 ]
* 튜토리얼 - 집으로 돌아가기
빙의되자마자 제시된 미션. 다만 그 시점이 면신례 현장이었고...
* 추가목표 - 면신례 통과 (실패)
선배 관료를 몽둥이로 후려쳐서 실패. 덕분에 '타구봉'이라는 별명이 붙어버리고 나중에는 호가 되어버린다. 달성 시 보상은 튜토리얼이라 마제은 대신 보너스 스킬이 지급되는 것이었으나 클리어하지 못해 무슨 스킬이었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소설 초반의 추가목표 보상이 마제은 30~40개 정도라 캐시 상점의 병~무급 뒤주에서 나올 수준의 스킬로 추정된다.
* 보상 - 한석봉의 필체(액티브)
첫째 스킬이라 조선시대를 아직 체화하지 못한 운행은 이런 쓸데없는 거 말고 완전최면 같은 기술 없냐고 화냈지만 2달간의 수련을 거쳐 완벽한 활자판 해서 통상의 3배속도로 붓으로 뽑아낼 수 있게 되어 본인이 직접 최고 수준의 사수 역할을 맡을 수 있었기에 과거 레이드(...) 팀을 짜는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사실 조선 시대라는 특성상 사대부가 명필이라는 것은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는 특성이라 꽤 많이 활용된다.[5]

[ 첫 번째 필수목표 ]
* 첫 번째 필수목표 - 과거에 합격하기
  • 부가목표 - 10번째 내에 답안지 제출 (성공)
    목표 달성 보상은 마제은 30개.
  • 추가 선택 목표 - 갑과 이상으로 전시 합격 (성공)
    목표 달성 보상은 마제은 40개. 여기에 초과 달성(장원) 보상으로 선견지명 스킬(숨겨진 부가 목표 확인 가능) 획득.
  • 보상 - 이성계의 궁술(액티브), 정력증강(패시브)
    이성계의 궁술의 경우 '내가 무과도 아닌데 어디 써먹으라고'라며 불평했지만 이훤과의 호감작에 쓰이는 등 소소히 쓰이다가 대호를 활로 잡아버리는 위력을 보였다. 다만 궁술 실력은 이성계의 것이지만 몸뚱이는 본인의 것이기에 활을 여러 번 당기면 금방 지친다.
    정력증강의 경우 쓸데없다고 생각했지만 잦은 야근을 하는 데 도움을 줬으며 결혼 후 참으로 쓸 데 많았다. 동시에 전 현생 통틀어 총각이었음에도 너무나 절륜하였기에 부인에게 온갖 여자를 후리고 다닌 난봉꾼으로 오해받는 부작용이 생겼다.

[ 두 번째 필수목표 ]
* 두 번째 필수목표 - 송덕비를 획득[6]하십시오
  • 부가 목표 - 본인의 혼례 거행 (성공)
    세화의 계략에 넘어가 혼인당해서(?) 성공. 달성 보상은 마제은 60개.
  • 특별 보상 - 암중모색 (개시에서 상자 개방 전, 스킬의 대략적인 종류 확인 가능)
    담당지 목천은 물론 옆 고을 직산에서까지 송덕비를 받아서(...) 얻은 특별 보상.
  • 보상 - 이혈의 친화력(액티브), 장각의 부적(아이템)
    이혈의 친화력은 애완 원숭이에게 옷까지 해 입히려다 신하들에게 타박당할 정도로 동물 애호가였던 드루이드 킹 성종에게서 모티브를 따 온 스킬. 어지간한 동물은 순식간에 길들일 수 있다. 승마를 수월하게 하거나 집안의 쥐들 중 절반을 떠나게 만들거나, 군집을 이룬 쥐들의 생리를 이용하여 일거에 소탕하는 등 유용하게 써먹는 액티브 스킬. 다만 어디까지나 '친해지는' 것에 불과하기에 장난으로 날린 냥냥펀치 한방에 이승을 하직시킬 수 있는 육식동물 상대로는 시도할 엄두를 못냈다. 또한 동물들을 맘대로 조종하는 건 불가능하고 그저 경계심을 극도로 낮추고 무언가를 이렇게 해달라고 '청탁'하는 것에 가깝다. 머리가 좋고 통제에 잘 안 따르는 동물들은 확률적으로 뇌물만 먹고 생까는(...) 경우도 발생하며, 머리가 나쁜 동물은 복잡한 부탁을 하면 실행하지를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장각의 부적은 일회용이지만 육체적 병을 완쾌시킬 수 있는 효과를 지녔기에 비장의 수단으로 아껴두다, 병에 걸린 왕세손(본래 역사에서는 사망)을 살리는 데 사용한다.

[ 세 번째 필수목표 ]
* 세 번째 필수목표 - 3명 이상을 탄핵하여 귀양 보내십시오.
  • 부가 목표 - 당상관을 1명 이상 탄핵하십시오. (성공)
  • 부가 목표 - 왕으로 하여금 본인의 간언을 가납하게 하십시오. (성공)
    목표 달성 보상은 마제은 150개.
  • 보상 - 관우의 인내심(액티브)
    통증이나 감각을 둔화시키거나, 역으로 민감하게 만들 수 있다. 유래는 연의에서 화타의 외과 수술을 맨정신으로 바둑 두며 견뎌냈다는 일화. 본래 받을 보상은 이게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나, 목표 달성 중 김운행의 행로가 비정상적인 것을 감지한 시스템 측에서 이걸로 지급했다.

[ 네 번째 필수목표 ]
* 네 번째 필수목표 - 아카마가세키(赤間關, 지금의 시모노세키)의 특산품 붉은 벼루를 10개 이상 입수하십시오. 왜관을 통한 거래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김운행의 개입으로 역사의 물줄기에 큰 개변이 발생하며 변경된 필수목표. 제한조건부터 부가목표까지, 대놓고 국가 공무역의 범위를 벗어난 필수목표이다. 나중에 밝혀지기로는 계속해서 상태창의 의도를 벗어나고 잡지 못할 변수를 추가하는 김운행을 숙청하기 위한 목표.
* 부가목표 - 일본에 국가 소유가 아닌 선박을 보내십시오.
달성 보상은 마제은
* 보상 - 을지문덕의 불꽃(액티브)
살수대첩의 수속성으로 유명한 을지문덕에게 갑자기 화속성이 붙어서 역사의 그 불꽃 어그로인 줄 알았으나, 실제로는 그 수속성에서 기인한 화속성 면역기였음이 밝혀진다.

[ 다섯 번째 필수목표 ]
* 다섯 번째 필수목표 - 세자 이훤을 조선 국왕으로 만드십시오. 이훤은 살아 있어야 하며, 사후 추숭 및 존호 등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기한은 임오년(1762년)까지입니다.
역사를 엄청나게 꼬아버린 덕분에 시스템이 GG치고(...)[7] 목표 설정을 김운행에게 맡겼다. 원역사에서 세자 이훤이 뒤주실험을 당하는 임오년까지라는 기한을 제시해 수강료를 단숨에 3회 지불하게 되었다.
세자 이훤의 왕위 계승 자체는 1757년 정축하성과 1758년 건륭제의 양위 허가로 달성되지만 기한 설정 때문에 완료는 1762년까지 버티고 나서야 달성.
* 보상 - 한니발 바르카의 전술(액티브)
한 쪽 눈을 감으면 휘하에 있는 모든 병력들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휘하 병력은 김운행의 상관인 조선 국왕 이훤의 허가와 해당 병력이 대표자로 인정하는 인물의 동의를 모두 얻을 경우에만 인정된다.

[ 여섯 번째 필수목표 ]
* 여섯 번째 필수목표 - 청나라를 군사적으로 공격해 승리하십시오. 종전 조약에는 영토, 인구, 재화 등의 양도 내용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북벌. 인류의 주인 건륭제와의 대결인만큼 수강료 5회분을 건 최후의 퀘스트.
* 부가목표 - 중국 강남에 상륙한 유럽 원정군의 전쟁 개시 이전의 형태로의 완전한 철수.
김운행 본인이 원하는 스킬 하나를 가불받는 대가로 직접 설정한 부가목표.

7.2. 개시

작중 시스템이 제공하는 캐시상점 기능. 추가보상으로 얻는 마제은으로 상자(김운행 왈 뒤주)를 열어서 그 안의 스킬을 얻는다.
  • 신숙주의 절개
    병丙급 뒤주(마제은 100개)를 구입했을 때 얻은 스킬. 이름만 들으면 없으니만 못한 쓰레기 스킬 같지만, 보이는 인물의 '전 분야에 걸친 가치'에 가까운 무언가를 시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왕의 경우는 무슨 지상에 강림한 외신에 가까웠을 정도. 운행은 강약약강의 신들린 줄타기 처세를 보인 신숙주의 삶을 체현한 스킬로 파악했다. 술을 마시면 1주일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 제한 사항도 아마 신숙주가 술마시고 세조에게 관절기를 건 일화(...)와 숙주나물의 재배기간이 1주일인 것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작중 묘사에 의하면 김운행이 가진 이 스킬의 정밀함에는 비하지 못해도 조선 사람들은 한눈에 상대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간 있었어도 없어지기에 누구나 패시브로 가지고 있는 기술이라고 한다. 이 스킬 이펙트를 두고 영압이라느니 선비력이라느니 하며 드립치던 김운행도 '인류의 주인' 건륭제의 기운을 보고는 노을(...)이라고 착각하며 말을 잃었다.
  • 이명복의 ???
    가장 급이 낮은 무戊급 뒤주의 알멩이를 암중모색 특성으로 살펴봤을 때 나온 스킬
    워낙에 장점이랄 게 없는 고종 베이스 스킬이기에 김운행이 보자마자 기겁하며 급 낮은 뒤주를 열어볼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게 만들었다.
  • 진회의 간교함
    갑甲급 뒤주의 보상으로 나왔으나 김운행이 태생부터 간교해서 그런지 중복이라며 뽑기가 무효화 되었다. 열받은 김운행이 상태창을 후려치려다가 실수로 을乙급을 누르는 바람에 이연의 속도를 얻게 되었다. 김운행의 능력과 중복이라고 판정된 것을 보면 말발이나 설득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며 정신계 간섭 계열[8]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 이연의 속도
    을乙급 뒤주의 보상. 진회의 간교함이 중복처리로 무효화되자 화를 내다가 실수로 뽑은 능력. 마차나 가마의 속도를 크게 늘린다.

{{{#!folding [ 스포일러 ]
* 이훤 뒤주
6번째 필수목표 지정 당시 주식회사 승경도社와과 협상을 통해서 남은 마재은과 부과목표를 걸고 받은 보상. 임오화변 당시 사도세자가 뒤주 안에서 8일 후 죽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스킬 발동 시 근처에 있는 뒤주로 들어가 8일 동안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다. 원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원균의 행방불명을 받으려 했으나 승경도사의 거절로 인해서 대신 선택했다고 한다. 회맹 당시 아무르사나의 습격에서 살아남는 데 사용되었다.
}}}

8. 개변된 역사

8.1. 국내

작중 김운행은 병조정랑에 올라 균역시무삼조를 영조에게 올리는데, 불필요한 지방군을 해체한 후 장용영을 세우면서 조선 중앙군을 소수정예화하고 근대 우편산업의 토대가 되는 통신 정비, 재정 확충까지 이루어내면서, 절대왕정국가로 가는 시초를 닦는 개혁 정책을 깔끔히 수행하여 영조의 눈에 든다. 이게 다 본인이 해처먹으려는 수작질이긴 해도, 당대 조선의 골칫덩이였던 균역법으로 인한 재정과 군대의 문제를 원활히 해결하고 근세-근대의 시초를 이루는 개혁을 이루는 데 성공해서 역시 능력은 있는 인물이라는 찬사를 댓글과 대역갤에서 받고 있다.
  • 조선의 우편 제도 도입
    이전에도 파발이나 역마가 물론 존재했고, 양반들은 이런 것들을 사적으로 활용하고 역졸 등은 이 사적 활용에서 뇌물을 받는 것으로 생계에 보탬했는데, 김운행의 시무로 우표와 우편제도를 만들고 음지에 있던 이런 사적 배달들이 그대로 중앙 재정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우표 값이 아깝거나, 귀중한 물건을 공공기관에 맡기기 힘들었던 사족들의 우편은 '김운행'의 해상 우편업체가 수요를 흡수했다(...).
  • 조선의 평시선덕관 도입
    김운행의 시무 3조 중 하나. 원래 역사에서도 영조가 균역법을 시행한 후 빵꾸난 재정을 메우기 위해 균역청을 운용하였으나, 지방 관아의 환곡을 장부상에서 이관하거나 어염세를 걷었을 뿐이어서 재정은 재정대로 펑크나고 부족한 재정을 수령들이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으로 때우려고 하는 부작용이 심했다. 여기선 김운행에 의해 한양 도성 시장에서 판매되는 모든 품목에 대해서 소비세가 부여되는걸로 대체되었고 영조가 무척 마음에 들어할 정도로 세수가 증대되었다. 이 세수는 새로이 증강된 장용영의 재원이 되었다. 원래 역사의 조선은 물품의 유통에 대해 세를 메긴다는 개념이 없었고 배, 그물, 전답 등 생산 수단에만 세금을 메겼다. 이로 인해 발생할수 있는 서울 지역의 물가 상승은 박문수가 지방의 물자를 서울로 더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공급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해결했고 나중에는 굳이 국가가 개입하지 않아도 물류가 알아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증대되어, 결과적으로는 조선 전체의 유통 수요를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선덕관 자리 팔아먹는 데 눈이 뜨인 영조는 팔도 전체에 도입하려고 했지만, 그나마 선덕관 수수료가 더해져도 물가가 거기서 거기인 한양이라 괜찮지, 지방에서는 그냥 장사 접을 게 뻔해서 박문수가 필사적으로 막는다. 결국 1,2년 후에는 팔도 전체로 퍼진다. 또한 이 선덕관들은 '소비세'가 늘어야 이득을 더 보기 때문에 어떻게든 장사를 번성시키는 데에 적극적이다. 상업은 천한 것이라며 거리를 두고 뇌물이나 받아먹던 기존 문무관들과는 체질부터가 다른 셈. 명절 선물이 커지는 걸 유행시키거나, 지방 1차 산업을 어떻게든 더 끌어들이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하기에 조선 상업은 근간부터 체급이 커지고 있다.
    • 부르주아의 등장
      평시선덕관은 관직이기는 하지만, 양반 계층에서도 가장 말단인 잔반, 중인, 서얼들 등이 주로 임명받았다. 기존의 사농공상 질서에서는 이미 반쯤 외면당한 신세던 이들은 적극적으로 상업의 확대를 꾀했는데, 보통이라면 이들을 경시하거나 핍박해야 할 기존 기득권층은 오히려 평선관들이 바치는 소비세 덕에 국고와 자신의 주머니가 동시에 불러오는 것에 오히려 그들의 성장을 지원했다.

      평선관들은 물목의 확대와 이득 증대를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했다. 외국 작물을 기르거나, 오리를 기르고 어장을 치는 등 농축산의 다각화는 안 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천하만물변증논고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 온갖 지식을 빨아들였고 심화 지식은 하나의 거래 수단이 되었다. 단위와 규격의 표준화는 이미 진작에 정리가 끝났다. 문화와 예술에 발을 걸친 평선관들은 시장을 키우면서 조각가, 화가, 평론가 등 관련업종에 지식을 쌓고 때로는 비싸게 고용해 시장을 새로이 만들었다.

      평선관들은 잔반 위주에서 보부상, 건달, 기생, 백정 등 사방에서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계층을 끌어들였다. 평선관들의 활약장은 국내만이 아니었다. 김운행이 만든 거대한 해외 시장(의주, 제주) 등에서는 일본어, 청어 통역 겸 브로커 업무를 통해 부를 모으는 이들도 이들도 생겼다. 자연히 평선관들은 부와 전문지식, 인맥을 전부 가진 조선땅에서 전례가 없는 하나의 새로운 계층이 되었다. 그러기를 10여년. 이제 평선관들은 의연계 파벌 하나에서 30만냥이라는 거금을 지원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이 되었으며, 자의적으로 뜻을 모아 국책 사업을 가속하거나 방향을 조정하기를 시도하기에 이른다. 명실상부한 조선의 주요 세력이 된 것이다.
  • 지방 수군영 해체 및 장용영과 해방별대 창설
    장용영은 본래 정조 시대에 만들어지나, 김운행에 의해 영조 대에 만들어지게 되었다. 상인들과 조졸들이 조세를 운반하는 체계를 해체하고 그 인력들을 활용하여 창조된 친위부대라 볼 수 있다.

    해방별대는 해체된 수군영에서 병사들 중에서 재모집한 조직으로, 본래 창설 취지는 해안 밀수, 밀매를 단속하고 어염세 등을 걷는 일종의 관세청 조직으로 만들어졌으며, 실제로 처음에는 인근의 불법 조업선을 잡는 것에 열중했으나 사실 김운행의 표적은 청-일본-서양의 무역선이었고, 이후 몇번의 일본, 네덜란드인과의 충돌 과정에서 이게 쏠쏠이 돈이 되며 노략질을 해도 타국에서 항의할 일이 없다는 일을 알아채고 조선 주변 해역을 항해하는 중국, 일본, 서양 선박을 조선에 위협이 된다는 명목하에 마구잡이로 긴빠이나포하고 있다. 현대적으로 비유하면 명목은 관세청인데, 실제 행태는 사략선 역할을 하며 활약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관세 100%

    명목상으로는 군대도 아닌 조직이 조선 후기에 어울리지 않게 강력한 해군력을 가지게 된 비결은 수군영 해체 과정에서 배를 불하할 때 군선이 딱히 민간에선 쓸모가 없어서 불하가 안 된지라 해방별대로 그대로 이관된 점과, 조선시대 특성 상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수군인데도 작 중 표현에 따르면 '자기가 이순신이라고 착각하는지 수상할 정도로 장구류를 철저하게 챙기고 정예한 병사들'이 일부 남아 있었고, 그들을 해방별대로 재투입한 결과이다. 황해도 해방별대가 수군 정예를 흡수해 악명을 떨친 시초이고, 그 후 경상지역의 해방별대가 일본 밀무역선 사이에서 날뛰고 있다. 정예선별에서는 떨어졌거나, 군에 남는 걸 거부한 사람들이 주축이지만, 전역하고도 다시 배를 탄 데다가 당시 사회상에서 세도 잡히는 합법 해안 경비대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황해도 정예가 아니라도 정예함은 보통이 아니다. 조선-왜 합쳐 수가 두배는 되는 무장 밀수업자들이 울산 해방별대에게 전멸했다.

    정식명칭은 해방별대지만 백성들이 편한대로 해병대라고 부르고 있어서 아마 이것이 후대에 해병대로 고착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해방별대는 당시 서양과 무역이 상당했던 일본, 중국의 무역선들도 닥치는대로 털기 때문에 외국 문물이 자연스럽게 조선에 유입되고 있다. 감자와 고구마는 이미 남부지방에 상당한 기세로 퍼지고 있을 정도.

    개혁 10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평시선덕관과 함께 조선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주요 변화로 언급된다. 이제 해방별대는 모두의 부러움을 받는 직업이 되었고, 바다 건너 서양 세력의 존재 등은 특별한 게 아니라고 한다.
  • 세손의 수명연장
    원 역사의 의소세손이 무사히 살아남아 세손이 되었고 차남인 이산은 세손이 아닌 왕자로서 용두군에 책봉된다. 세자는 세손에게 본인의 목숨을 구한 사람에 대해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어 김운행이 세자의 후계인 세손시대에도 왕의 총신이 될 것으로 보인다.
  • 부산포 왜관 토벌
    김운행이 일본에서만 만드는 벼루를 얻어야 한다는 퀘스트에 맞추기 위해 부산포 왜관이 난을 일으켰다고 날조하면서 토벌하여 공무역을 폐하고 대신 본인의 목적을 위해 밀수를 동반한 민간 사무역을 증진시킴으로써 조선-일본간의 사무역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 이 과정에서 콩고물을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상관 설립을 요구하며 접근한 네덜란드인들이 조선을 침공하려 했다고 김운행이 누명을 씌워다가 잡아왔는데 이 때문에 조선이 자꾸 왜구나 네덜란드인들이 나라를 침범하려 한다고 오해(?)하여 군기시정을 맡은 김운행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다시 확충하게 되었고, 조선에 들어온 네덜란드의 선박 플류트 제조기술 및 각종 서구 문물이 조선에서 널리 퍼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정작 주인공이자 미래인인 김운행은 '나라는 오직 덕으로 다스려야 하니 흉참한 서양 선박 따위는 불태워버리자' 고 주장하고 조선인들이 서양 선박을 복제하는 기괴한(...) 전개를 자랑한다.
  • 살곶이 공과대학 설립
    왜관 토벌과정에서 잡혀온 네덜란드인들의 기술(크로노미터)를 보고 세자가 관심을 가져 김운행과 최천약에게 명해 연구하게 하면서 만들어진 공방. 당대 조선 특징 상 이런 일은 원래 관료가 사제를 털어서 해야하는 일인지라 운행은 돈도 안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튈지 궁리하고 있었으나, 마침 명의도용을 당해 빡쳐 항의하려고 온 홍대용이 그걸 보고 자신이 아는 실학자들을 총동원해 부르고 최천약은 그 상황을 세자에게 직간하여 김운행에게 비용을 부담시키는 바람에 설립된다. 명목 상으로는 군기시의 하위 기관이다.

    공과대학이라고 이름 붙인건 김운행의 현대 관련 개드립으로, 연구와 후학 양성을 목적으로 모인 본격적인 서구의 대학이라기보다는 물건을 실제로 제조하는 공방이며, 최천약과 홍대용의 권력 남용 및 김운행에게서 비용을 빼와서(...) 딱히 관료가 아닌 실학자나 공인들도 들여와서 다 같이 모여 연구하는 친목회 성격도 있다. 말하자면 대학보단 동시대 서구의 호기심의 캐비닛(Cabinet of curiosities) 같은 곳. 김운행이 미래에도 왕십리에 공과대학이 들어서는거 보면 이게 역사의 복원력인가 보다라고 드립을 치는데, 왕십리에 있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을 두고 한 말로 보인다. 김운행은 Salgoji Institute of Technology를 줄여서 SIT이라 부르는데, 이건 영화 억셉티드에 나온 남하몬대학교(SHIT, South Harm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모티브를 따왔을 가능성이 크다.

    김운행은 돈이 안되는 이 공방에서 어떻게 수익을 창출할지 궁리하다가 태엽으로 돌아가는 카라쿠리를 만들거나 왜관에서 잡은 일본인들을 동원해서 태엽 진동 딜도를 만드는 등 기상천외한 사업을 한다. 세자가 서양 학문에 관심없는 운행을 회유하려고 이런저런 서양 학문 책을 주곤 하는데 운행은 그 책들을 다 이곳에 모인 실학자들에게 월급 대신으로 짬처리(...)하기도 한다.

    후에는 채제공이 군기시정으로 임명되며 김운행의 손을 떠나며, 김운행이 있는 동안에는 딱히 돈 안되는 무기 사업 개발은 운행의 만류 때문에 지지부진 했으나 채제공은 일을 성실히 수행하며 서구의 포를 복제하거나 새로운 화포술을 발명하는등 군기시 하위기관으로써 일을 충실히 수행한다.
  • 조선풍 춘화의 유행
    김운행이 부산포 왜관 토벌의 정당성을 갖추기 위한 날조 증거 제작 목적으로 당대 최고 화가들을 끌어들여 만든 현대 만화적 화풍이 가미된 조선식 춘화가 널리 국제적 인기를 얻게 되었다. 춘화의 종가(?)라고 할 수 있는 당대 일본에도 조선 춘화가 일본 춘화의 위상을 밀어낼 정도.

    참고로 부산포 왜관 토벌이 마무리 되고 난 뒤 김운행은 왜관 대표로 나온 일본인들 앞에서 자신이 만든 춘화가 날조 증거로써 일본인들을 추궁하는 데에 쓰이자, 혹시나 일본인들이 본고장(?)의 춘화와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 때문에 증거의 신뢰성에 대해 태클을 걸면 어쩌나 하고 속으로 잔뜩 쫄려하고 있었는데, 정작 그 춘화를 본 일본인들 역시 어찌됐던 춘화집들을 몰래 가지고 다니고 있었던 것 자체는 사실이었기에 당사자인 일본인들마저도 진짜로 자기들이 들고 온 춘화 모음집들 중에 새어 나간 건가 싶어서 전혀 의심을 못 했으므로(...)[9] 그 자리에서 일본인들이 진짜로 가지고 있던 춘화집들까지 모두 압수되며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다만 김운행 본인은 결과적으로는 증거 날조도 들키지 않고 목적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은 어메이징한 춘화집들이 정말로 만연해 있던 당대 일본의 현실을 목도하고 묘한 패배감을 느꼈다(...).
  • 나주 괘서 사건의 규모 확대와 영조의 권력 축소
    김운행이 벌인 여러 책략들 때문에 원역사에서는 반란이 시작되기도 전에 진압된 나주괘서사건이 네덜란드와 손을 잡은 소론 준소의 대대적인 반란으로 확대된다. 이 과정에서 영조가 김운행의 책략으로 여러 실책을 저질러 정치력이 약화되고 대리청정을 맡고 있던 사도세자와 세자의 총신 김운행의 힘이 대폭 커지는 계기가 된다.
  • 낙선당 화재
    조선 사회, 문화,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친 다른 사건들에 비해 그냥 창경궁 내 건물에 불이 난 사건이 뭐 그렇게까지 큰 일인지 체감이 되지 않을 수 있으나, 원 역사의 낙선당 화재 사건은 긴긴 세월 지속된 영조의 갈굼으로 인해 사도세자가 완전히 망가진 광인이 되었음을 조정의 대소신료 모두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그 일이 있던 날 사도세자는 아침 일찍 낙선당에 찾아온 영조가 잠에서 깬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의 생트집을 잡아 금주령 중에 술을 처먹었다는 말도 안되는 야료를 부리자 영조가 돌아간 뒤 화를 내다가 실수로 불을 내는데, 이에 영조는 또다시 신하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세자를 크게 힐책하고 망신 준다. 이때 내몰릴 대로 몰린 처지를 도저히 견디다 못한 사도세자는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탐태창의 낙선당 화재 때에는 이훤에게 김운행이라는 심리적 버팀목이 존재하고 있었던 데다가 이금에게 불려가기 전 그가 귀띔해 준 사건의 전말을 토대로 스스로를 변호하고 이금의 어딜 금주령 중에 술을 쳐마시냐는 힐난에 실수로 의영고(국왕 전용의 식음료품 창고)에서 오미자차와 솔잎차[10]를 잔치에 잘못 가져다 쓴 자신의 죄를 벌해달라며 이금의 도덕성을 물어뜯는 한편, 신료들로 하여금 오히려 이금이 아들을 내쫓거나 죽이기 위해 궁에 불까지 지르는 미친 노인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등의 반격을 날린다. 학습된 무기력에 빠져 대항하거나 스스로를 변호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이금에게 일방적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이훤이 처음으로 제대로 반항하여 정치적으로 판정승을 따낸 사건으로, 본인이 베푼 연회에서 일어난 궁내 화재라는 대위기를 가지고 오히려 본인의 정치적 입지를 처음으로 다져놓는 정치력을 선보임으로써 부왕의 샌드백 신세를 벗어남과 동시에 심리적으로도 이금의 속박을 벗어나 자신만의 세력을 구성하고 온전한 한 사람의 군주가 되어가는 매우 중차대한 분기점이 된다.
  • 영조의 정축하성과 사도세자의 즉위
    대비 김씨는 사도 세자를 지키는 방벽이었다. 때문에 영조는 독살까지 고려했으나,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대비 김씨는 얼마 못가 1757년에 사망했는데 양위 허가라는 초대형 폭탄을 떨어뜨려 자신을 증오하던 영조를 엿먹인다. 이제 사도가 살아있는 한 영조는 '양위하겠다고 대비를 압박해 허가를 받았음에도 양위하지 않은' 이란 오점을 짊어지게 될 판이었다. 때문에 세자를 찾아 죽이려고 편집증에 걸린 영조는 김운행이 퍼뜨린 청나라가 세자를 즉위시키기 위해 병력을 요동으로 집결시켰다는 역정보에 제대로 속아 남한산성으로 도주하는 실책을 저지르고야 만다. 이 사이 잠시 뒤주로 몸을 피했던 세자와 김운행은 궁으로 환궁하고, 이를 저지하려고 세자를 공격한 구선복을 처지하며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결국 정권을 차지한 세자파에 의해 고립된 영조는 사실상 세자에게 항복하고 모든 조선의 권력은 세자, 그리고 그의 유일한 총신 김운행에게 돌아간다.
  • 제주의 국제 무역항화
    조선에서 나지 않는 물자들 중 가장 필요했던 두 가지. 설탕과 구리를 얻기 위해 계획되었다. 삼해 사황(해방별대)[11]와 제주 목사의 협조로 실행된다.
    사실 이 시대에 대한 오해 중 하나로 류큐에서 설탕이 나기는 하지만, 해당 항로는 너무 남쪽이고 해방별대의 사정권에 들어올 때는 사쓰마 번과도 가까워서 함부로 치기 애매했다. 무엇보다 장사할만한 양이 아니기도 하고... 이 시대 진짜 일본에 들어오는 설탕은 대부분 중국산이었다. 물론 이것도 함부로 건드리기는 애매한데, 남중국 해적들과 청나라가 신경쓰는 구리 공무역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12]
    사실 김운행은 이 정도로 만족했지만... 당시 사도 정권은 입장상 국내 반발을 사지 않는 범위에서 친청 행보를 보여줘서 건륭제의 호감을 사야했다. 그래서 꺼낸 것이 중계무역이었다.[13]

    나가사키를 향해 가던 중국 상선들 앞에 2~30척이 넘는 네덜란드 양식 해적선이 나타나자, 관선들은 부드럽게 상선만 버리고 빠졌고, 해적선들은 느릿하게 상선을 제주도까지 표류시킨다. 강남 상인들은 제주 목사 조위진에게 구조되기는 했으나, 무역 실패로 손해만 왕창보고 구리 무역 실패까지 덮어쓸 위험을 생각하며 미래가 암울했는데, 여기서 조위진이 저번에 일본인들에게 산 구리를 설탕과 물물교환해준다고 하자 감격하면서 전부 교환한다.

    상식적으로는 직교역이 더 이문도 남고 안전할 것 같지만, 이 시대 직교역이라는 게 판매-구매 양측에 뇌물을 바치고, 언제 해적한테 털릴지 모르는 위험한 일인데 조선에는 강력한 수군(해적)이 바다를 지켜주는 데다가 뇌물도 조선에만 주면 되는지라 오히려 더 싸게 먹혔다. 심지어 거리까지 훨씬 가까우니... 청나라 역시 조선에서 호의를 표했다고 생각해 제주 중계 무역을 허가하면서 조선조 내내 구휼의 대상이었던 제주는 겨우 몇 년 만에 조선에서 손에 꼽는 부촌이 된다.
  • 조선의 화과자, 고구마, 감자 대중화
    해방별대와 춘당 소속 실학자들의 활약으로 원 역사보다 고구마, 감자의 대중화가 빨라져 1760년대 기준으로 이미 고구마, 감자는 임금인 이훤의 조서에서 가난한 이들도 즐겨먹는다 할 정도로 대중화 되는데 성공한다. 또 해방별대의 활동으로 인해 설탕이 널리 보급되고 카오루를 통해 일본식 화과자가 도입되면서 설탕을 사용한 풀빵류의 과자들이 아이들의 간식이 되는 장면들이 나온다.
  • 조선의 북벌
    청나라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북방 유목민 전쟁, 일본 원정, 강남 반란군과 영국과의 남방 전쟁에 이어 화북에서 백련교의 난까지 일어나면서 무한해보이던 국력을 거의 소진하게 된다.
    청나라는 메말라가는 국고를 지방 착취로 해결하려 했고, 이는 30만 적로군으로 나타나 북방 러시아를 거의 패퇴시키고, 화북 백련교군도 거의 패퇴시킨다. 그러나 아직 강남 일대를 휘젓는 영국군과는 치열한 혈투 끝에 양쪽 공멸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렇게 수많은 전쟁으로 국력이 깎이고 군사력이 소진된 청과 달리 정축하성 즉위 이후 계속 국력을 증진한 조선은 이 시기엔 정병 6만에 달하는 동원력을 갖게 된다. 명분이라도 남아 유사시 대군을 징병할 지방군을 혁파했기에 상비군과 해병대만 남았지만, 질적으로는 배 이상 강력해진 상태였다. 거기다 더해 근래 팔도 식자와 백성들에게 사서삼경이나 훈민정음 이상의 필독서인 만물변증고를 통해 인삼스라움과 쌀슐루스의 개념을 전파, 북벌을 향한 의지는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반년 전부터 조선이 청나라의 오해를 씻겠다고 평양에 이훤이 직접 머물고 있었는데, 이에 따라 대부분의 군사들도 조선 북방에 머물면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었다.

    지방 착취도 한계에 달한 청의 요청으로 조선군이 출병했으나, 이미 산둥의 백련교도들과 밀약을 맺은 도원수 김운행은 흩어진 백련교도들 상당수를 비밀리에 조선으로 탈출시켰다. 여기에 더해 건륭제에게 천진으로 이동해 영국과 싸우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이를 빌미삼아서 1만 병력을 아홉으로 나누어 일주일 만에 성 하나를 깔끔히 약탈하고 마침 도착한 해방별대의 배를 타고 조선으로 복귀하는 신기를 보여준다.

    산동의 청나라 관리들을 공격한 일로 결국 청나라도 조선의 배신을 확신하게 되었으나, 남중국에서 거병한 후명, 천진 일대까지 점거하고 공격하는 영국군, 청나라의 약체화를 눈치채고 다시 공세를 시작한 러시아-준가르 연합군, 남만에서 북상하는 버마군의 북상 등으로 더는 위험했다. 직례의 마지막 여력인 부찰부항의 대군은 강남에서 후명의 방해로 귀로가 막혀서 입촉해서 보급을 받은 후 버마군을 무찌르고 남하하든 북상하든 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만주로 다시 수도를 이전해 재정비 후 다시 중원을 정복하자는 천명 이전 프로토콜이 시행된다. 이에 따라 청나라의 유일한 우호국이자 경계대상인 내몽골의 기마 3만이 다시 소집되어 영국군에 대한 반격에 나서면서 대영전선을 잠시 밀어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왕이 직접 이끄는 군대가 투석기로 삼전도비를 폭파한 잔해를 투척하는 것으로 조청전쟁의 막이 오른다.

    이에 청의 권신인 화신은 조선군이 요동 방어선에 막혀 시간을 낭비하면 병력을 보내 격파할 계획을 짰으나, 김운행은 산둥에서 보여준 구두룡섬 기동을 다시 발휘, 조선군을 다시 수 갈래로 나누어서 요동 전역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화신은 이런 분산 행군은 아직 조선보다 우세한 병력수를 가진 청에게 각개격파할 기회만 준다면서 의아해했으나, 김운행이 이번 전쟁의 기획자라는 사실을 감안하고 건륭제에게 보고해, 길림, 흑륭강 장군의 팔기를 남하시켜 조선 주력이 있는 평안쪽이 아닌 함경도를 공격시킨다. 본토가 공격당하면 요동의 조선군이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노린 것이다. 이 두 세력의 병력은 기병 위주의 만 팔천여명에 달해서 결코 얕볼 만한 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는 김운행이 노린 바였다. 김운행은 포로가 된 조지 워싱턴과 유구에 팔려간 버지니아 민병대를 포섭했고, 그를 앞세워서 대만에 있던 유럽 연합군의 보급품을 빼돌린 다음 그대로 동해로 다시 들어왔다. 함경도 주민들은 이미 소개 처리가 다 되었고 김운행의 수하인 길상이 의병들을 이끌고 길을 파괴하고 저격전을 벌이는 등의 유격전에 나섰다. 여기에 일본과의 무역으로 얻은 쌀과 콩 등의 식량으로 군량도 어느정도 보충이 되었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장지항은 1만에 달하는 길림 팔기가 접근해오자 바로 육진 병력을 전부 이끌고 가장 남쪽의 함경 부령부까지 후퇴했다. 그리고 먼저 도착한 김이환과 해방별대와 합류한다. 그리고 부령으로 들어오는 회랑을 버지니아 민병대가 막아섰다.

    당시 이미 영국군은 대청전쟁에서 실패했고, 아메리카인 민병대에게는 보상은커녕 손해를 메꾸기 위한 착취만 할 것이란 걸 인정한 민병대는 고민 끝에 독하게 길림 팔기 3천명을 막아낸다. 반나절 이상의 싸움 끝에 길림 팔기 선봉대의 돌격은 전부 좌절되었고, 그 사이 함경도의 길상 의병대가 퇴로를 전부 막아버렸다.

    한편 두만강을 넘어 종성부까지 들어온 길림과 흑룡강 팔기 본대는 의기양양했으나 곧 길림 팔기 선봉부대가 고립되었다는 보고와, 후방의 보급기지가 있는 훈춘을 2만명에 달하는 조선군사가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온다. 두 군대는 당황해 각자 부대를 끌고 나섰으나... 결국 넝마가 된 길림 선봉대는 장지항이 육진 보병들로 마무리를 지으면서 괴멸당한다. 길림 팔기 본대는 의병 유격부대에 시달리며 간신히 부령부 주변까지 도착했지만 이미 구해야 할 선봉대는 괴멸당했고 정면의 장지항군, 사방의 길상 의병대 조선군이 몰려오는 상황에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도망쳐야 했다.

    훈춘의 보급을 지키러 간 흑룡강 팔기부대는 해방별대가 보급기지를 탈탈 터는 걸 보고 분노해 두만강을 건넌다. 그러나 해방별대가 대포로 두만강을 사정없이 두들기면서 얼음 위를 도하하던 흑룡강 팔기는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전장이 물 반이 되자 2만에 달하는 조선군이 공세를 개시, 4천에 달하는 병력을 잃고 간신히 후퇴한다. 결국 다시 쫓겨운 두 팔기는 합쳐도 1만도 안되는 병력으로 세종대왕이 세운 육진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기병 위주의 팔기군이 산성에서 잘 싸울 리도 만무, 김응성이 끌고 온 해병대와 장지항의 육진 병력의 합공으로 두 팔기 부대는 궤멸당한다.

    기존에 중원에서 소집한 성경부의 병력까지[14] 생각하면 만주의 청군도 거의 괴멸한 것. 그리고 천진에서는 서해해영을 지휘하는 홍약수가 사전의 계획대로 천진에서 몽골군과 영국이 맞붙는 순간 해병대와 백련교도 군을 이끌고 기습을 가해 양 군에게 치명타를 입혀서 붕괴시켜버리는 데 성공한다.

    이것으로 사실상 요동을 구원할 청군 병력은 사라졌고, 남은 건 건륭제의 친위군 뿐이었다. 이후 이훤의 전군 전진 명령에 좌중우군의 사이가 멀어 어렵다는 말이 나오자 김운행은 청군을 유도할 계략을 짠다. 그로부터 얼마 후 양익을 담당하는 천진의 서해해영+백련교, 동만주의 남해해영+함경군이 진격속도를 조절해 건륭제가 이휜을 직접 잡으러 오게 한다.

    화신은 길림과 흑룡강 팔기의 연락이 끊긴 걸 보고 패전을 눈치챈다. 그러던 중 지금까지 요동 전역을 초토화시키고 요하 방어선을 야금야금 찌르던 조선군 병력 3천명이 흥경성을 친다는 보고를 접한다. 곧 있을 황제의 이어를 위해서라도 실적이 필요했던 화신은 양황기 도통 오륵등에게 명령해 성경부 병력 일부를 더한 3천 기병으로 흥경성을 구원하러 움직인다. 조선군의 미친 구두룡섬 기동 탓에 요하의 청군 장수들이 지레 겁먹고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기에 외부에서 물꼬를 트려고 시도한 것이다.

    당시 흥경성 주변 조선군 지휘관은 신흡이었다. 그는 의심없이 김운행이 훈련시킨 춘식진을 펼쳤고, 본영의 김운행은 이 진영을 보고 청군 포로를 심문해 적장의 정체와 병력 수를 알아낸다. 그리고 흥경성에서는 한나절의 전투 동안 조선군의 의외의 맹렬한 반격에 오륵등이 당황해서 물러난 후 흥경성의 보군과 같이 2차 공세를 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하루 사이에 조선군은 오륵등을 완벽하게 엿먹이고 도주한 후였다.

    상당한 피해를 보고도 승전은커녕 적에게 농락당한 오륵등은 흥경성의 보군까지 끌고 신흡을 추격했다. 흥경성을 비우면 안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조선군이 다른 전선의 군을 움직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 도망친 신흡의 조선군을 붙잡을 시간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오륵등은 몇날 며칠을 수색해도 조선군을 찾을 수 없었고, 그 사이에 비어버린 성을 들이친 조선군에게 흥경성과 오녀산성이 함락되면서 '청나라의 요하 방어선은 붕괴한다. 오륵등은 뒤늦게야 신흡의 조선군이 요양에 있다고 달려갔으나 무려 1만 5천이라는 조선군이 몰린 탓에 겨우 도망쳐 요하를 다시 건너야 했다.

    그리고 1766년 4월, '마침내 건륭제가 요하를 넘어 조선군과 대치한다.[15] 요동과 남만주 백성들이 변발을 자르고, 조선의 복식을 차려입는 동안 마침내 요양 인근에서 조선 중군과 청군 최후의 군사가 대치한다. 조선 중군 병력은 약 18,000명(기병 6,7천), 청군이 금려팔기 15,000명에 보군 4만명으로 수는 3배나 차이가 났다.

    청은 선봉에 팔기병, 후열에 보병을 두었고, 조선은 중앙에 보병 방진, 양익을 기병이 감쌌다. 3배의 수적 차이에도 조선군은 여유가 있었는데, 청군은 단순히 전쟁이 아니라, 대규모 이주를 겸하는 만큼 불필요한 치중이 과하게 많았기 때문이다. 보병은 물론 기병들도 지친 기색이 보일 정도였다.

    패전 후 청군에 합류한 양황기 도통 오륵등이 기병을 끌고 선봉에서 조선군을 공격했다. 이에 조선군은 보병을 앞세워서 사격을 개시, 전열보병 훈련을 받은 조선군은 수월하게 양황기에 연속 사격을 퍼부어 큰 피해를 입힌다. 정예한 금려팔기는 이 사격을 돌파해 조선 보병들을 공격했으나, 조선군은 호흡을 맞춰 전력으로 양측으로 갈라지며 기병돌격의 피해를 줄였다. 팔기는 그대로 조선군영을 돌파하려 했으나, 보총병들 뒤에는 포병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은 기병을 맞추려 하지 않고 대포를 터뜨리고 도망쳤다. 정백기 지휘관은 의외의 역습에 당황하면서도 우회해서 돌파하려 했지만, 방금 그들이 가르고 들어온 조선군이 양측에서 거리를 좁혀오면서 오히려 팔기가 조선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속도와 사기를 잃은 기병은 수적 우위인 보병을 당할 수 없었고, 그렇게 금려팔기는 계속해서 격파당한다.

    조선군의 전술은 간단했다. 청군이 앞세울 금려팔기의 돌격을 조선군 보병들이 받아내면서 끌어들여 포병과 함께 포위섬멸하는 것이었다. 이론상으로는 쉽지만 군대의 정예함, 신속한 포위기동, 정확한 지휘부의 명령 중 하나라도 없으면 수적으로 적은 조선군이 오히려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태창으로 전장의 조선군 전체를 내려다보는 김운행의 지원으로 이훤은 이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금려팔기가 패퇴하자 분노한 건륭제는 4만 보군을 일제히 진군시켜 조선군 전체를 포위하려 들었다. 조선 중군을 돌파할 수 없다고 여긴 오륵등도 이를 보고 기병을 양익에 지원했다. 이에 양측에 배치된 조선군 기병 6천기가 전투를 준비했으나... 이훤은 모든 기병에게 명령해 정면으로 돌격한다. 이훤의 목적은 병력 대부분을 진군시키면서 호위가 얇아진 건륭제 본인이었다. 그렇게 6천기 기병에 이훤의 호위까지 더해 7천여기의 조선 기병군 전부가 송곳이 되어 중앙으로 돌진하자, 남은 조선군 보병 1만 2천이 4만여명 청군에게 포위당했다.

    국왕 이훤과 오도도원수 김운행 다음의 최고 사령관인 장용영 대장 김성응은 이에 겁먹지 않고, 가지고 있는 포를 일제히 발사해 가까이 붙은 청군을 두들기기 시작한다. 사전에 보았던 대로 청군은 너무 많은 치중을 가지고 온 탓에 움직임이 느렸다. 또한 기병들 대다수가 보병들과 계획 없이 붙는 바람에 제대로 속력을 내지 못했다. 수만 청군은 홍이포와 영국 야포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보면서 진군은커녕 점차 물러나고 있었다.

    청군 지휘관인 이부상서 탁은다가 총병과 방패를 앞세워서 진군하려 들자, 조선군은 직전에 팔기에게 하던대로 다시 전열 보병 사격을 시작한다. 청군은 물러났다가 후방의 독전으로 다시 다가오고, 조선군은 한열씩 물러나면서 사격했다. 양익을 포위한 청군에게 물러나기에 점차 조선군의 화망은 밀도가 높아졌고, 이제는 금려팔기가 방금 전처럼 돌격할 수도 없었다. 이에 금려팔기는 본영의 중포를 가져온다면서 사실상 공세를 포기한다.

    한편 중군은 오륵등의 금려팔기와 조선 기병들이 충돌했다. 훈련도감 대장 윤필덕의 지휘하에 금려팔기와 조선기병들이 화살을 교환하며 가까워졌다. 오륵등은 그 직후 조선군의 돌격을 막아내기 위한 마상 전투를 준비하나, 윤필덕은 영국군에게 빼앗은 총을 근거리에서 발사, 창칼을 꺼내던 금려팔기에게 기습을 가한다. 그리고 조선 국왕 이훤이 편곤을 휘두르며 돌격한다.[16]

    이훤은 괴력을 휘두르며 팔기를 휘저었고, 주변의 훈국 철기들도 왕을 지키기 위해 악착같이 싸웠다. 팔기병들이 도저히 이길 것 같지 않자, 오륵등이 화살을 쏴서 조선왕을 저격하려 했으나, 아슬아슬하게 김운행이 화살을 쏴서 그를 저격하고 어지가 오륵등을 참살한다. 금려팔기는 지휘관의 사망과 조선군의 맹공으로 결국 무너진다.

    조선군이 눈에 보일만큼 다가오자, 건륭제는 전선의 보군을 불러들이고 수천의 호위들을 남겨서 조선군을 저지시키고 자신은 태자하를 따라 북쪽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이는 전선의 승패를 확정지었다. 이미 전장에서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며 버티던 구문제독 휘하 보군인 청나라군 4만명은 황제의 복귀 명령에 더해 도망치는 황제의 깃발을 보자마자 패배를 깨닫게 된다. 청군은 조금씩이라도 적과 가까워지던 직전과는 달리 멀어지기 시작했고 김성응은 후퇴 사격을 전진 사격으로 바꾸어 4만 청군을 몰아붙였다. 이에 당황한 청군 이부상서 탁은다는 망설이다가 병력을 반으로 나누어서 2만은 조선을 막고 2만은 건륭제를 구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모든 병력이 자신들이 황제를 구하러 간다면서 도망쳤다.

    붕괴해가는 청군을 눈치챈 김성응은 전 조선군에게 전하께서 전리품을 하사하는 걸 아끼시겠냐면서 독려했고, 그러자 청나라 황제가 끌고 온 막대한 보물이 생각난 조선군은 용기가 충천하여, 전군이 창칼을 들고 청군을 돌파해 본영까지 휩쓸었다. 이로써 요양 전투는 조선군의 완승으로 끝난다.

    한편 건륭제를 추격하던 이훤의 조선 철기 7천여기는 선택지를 골라야 했다. 김성응의 본군과 너무 멀리 떨어지면서 전황의 즉각적인 판단이 어려워진 것이다. 김운행이 상태창으로 본군에 큰 변동은 없다는 건 알았지만 청군 4만여명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만일 보병 전투가 소강상태라면, 청군이 병력을 갈라서 압록강을 위협하면 곤란했다. 해당 지역에는 함경도처럼 따로 수비할 준비가 되어있지도 않았다. 윤필덕은 이를 근거로 일단 물러나자고 하지만, 이훤은 건륭제를 요양 입성 전에 잡지 못하더라도, 북쪽의 심양성과 연계하는 건 막아야 한다며 추격을 계속한다. 몽골 호위 수백기가 조선군을 가로막았으나, 어지와 이훤을 막지 못했고 결국 무너졌다. 건륭제는 그렇게 번 시간으로 요양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한나절 후. 청나라 구문제독 휘하 보병을 완전히 정리한 김성응이 보병을 지휘해 합류했다. 건륭제는 포위당했고, 심양과의 교통도 차단당했다. 홍대용이 아라사군과 함께 심양과의 통로까지 차단했다.

    감금당한 건륭제는 한고조의 고사를 본받아, 화신을 자신으로 위장하고 여자들까지 제물로 내보내고 자신은 따로 탈출하려 했다.[17] 그러나 이는 김운행에 의해 실패하지만 어쨌든 시간은 약간 벌어서 조선군은 두 개의 무리를 추적하게 된다. 못해도 수천에 달하는 북쪽 무리와, 겨우 수백인 남쪽 무리였다. 대부분 조선 지휘관은 군사 대부분이 모인 데다가 심양으로 향하는 북쪽 무리가 진짜라고 여겼지만 김운행은 상태창으로 남쪽이 진짜임을 눈치채고 추격한다.

    결국 하루만에, 태자하를 건너던 건륭제는 뒤주 안에 숨은 추한 꼴로 붙잡히게 된다.

    한편 서북으로 가던 미끼 일행은 조선의 포위를 빠져나가기는 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수천 명 중 반수를 잃기는 했지만, 의외로 조선군은 약탈만 했지 추격에 열심이진 않았다. 일행의 가짜 황제인 15황자 애신각라 영염과 병부상서 아리곤은 자신들을 추격하는 조선군이 없다는 사실을 보고 황제의 마지막 도박조차 실패했음을 깨닫는다.

    병부상서 아리곤은 건륭제의 15남(생존자 중 칠남)인 영염을 데리고 심양에서 재정비해 직례로 돌아가면 죽거나 포로가 된 황제의 유조를 주장해 5명의 형들을 제치고 영염을 황제로 세우려 한다. 그러나 그 길에 심양을 정찰하던 카자크 기병대와 홍대용이 나타난다.

    홍대용은 영염을 황제라 착각하고 잡으려 했지만, 카자크인들은 수가 겨우 백여명인지라 삼천은 되는 청군과 싸우지 않고 바로 퇴각한다. 그러나 아리곤 역시 계획을 수정해야 했는데 요양 전투 직전 흥경성이 조선에게 넘어갔으니, 거길 지키던 조선군이 나온다면 이들은 도망도 칠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엔 요동의 마지막 거점인 심양성도 떨어졌을 것이고 그 말은 곧 청의 천명 이전 프로토콜 실패, 만주의 완벽한 상실을 뜻했다.[18]

    아리곤은 태자하를 건널 수도 심양으로 가지도 못하는 상황이니, 아예 북동쪽으로 돌아서 내몽고를 거쳐 북경으로 귀환하기로 한다. 아무리 분산기동과 추격의 달인인 김운행이라도 흥경성 동쪽까지 따로 빼둘 조선군은 없을 것이라는 추리였고, 이는 사실이었다.

    약 두달 전의 함경도. 육진에 갇힌 흑륭강 팔기와 길림 팔기 1만여는 겨우 열흘만에 붕괴했다. 이후 남해해영은 남명을 감시하러 빠졌으나, 함경 북병사 장지항에게는 병력이 남았다. 이에 이름을 떨치겠다는 야심에 불탄 장지항은 김이환을 만나 작전안을 수립한다. 바로 조선에 남은 철기를 모아서 비어버린 흑룡강과 길림, 동만주를 들이친다는 것이다. 김이환은 동만주가 비기는 했지만 함경도를 비웠다가 적이 들이치면[19] 안된다고 했으나, 장지항은 뒤를 받쳐줄 의병들이 있다면서 안심시키고 결국 김이환도 가세한다.

    장지항이 믿는 의병은 평선관들이 만주의 이권을 노리고 모집했다. 함경도에선 2천 철기들이 모여 동만주로 진격한다. 주력군을 육진에서 상실한 동만주의 팔기 잔존병력은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연파당했고, 두달 간 동만주를 정리한 2천 철기는 영염과 아리곤 일행이 지나는 곳, 사르후로 향했다.

    결국 함경도군은 영염 일행을 발견, 워싱턴의 양이팔기 300명이 선두에 서서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리곤은 절망했으나 아슬아슬하게 이 전장을 목격한 심양성의 성경 부도통이 800명의 기마를 끌고 지원을 나온다. 이에 장지항은 남은 1500여 기마로 그들을 요격하면서 전투가 벌어진다. 청군은 필사적이었으나 지난 전투에서 정병을 빼가고 남은 심양성의 병력은 독기가 바짝 오른 장지항 휘하의 조선군을 이기지 못하고 격파당한다.

    게다가 전면의 조선군과 싸우던 영염 일행도 후방을 카자크 기병들이 들이친 것을 보게 된다. 홍대용도 황제 생포의 기회를 포기하지 않고 멀리서 추적하다가 요격한 것. 황제의 일행에 여자들이 있다고 선동된 카자크인들이 미칠 듯이 용맹히 덤볐고, 유럽연합군 유일의 승리자가 될 기세를 놓칠 수 없던 워싱턴과 버니니아 민병대도 독하게 공격했다. 아리곤이 영염 하나라도 데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김이환이 추격해 붙잡으면서 결국 항복한다.

    살아남은 건 심양성 부도통과 휘하의 병력 200기 뿐이었으나... 이들이 성을 비운 사이에 건륭제를 앞세운 김운행과 소수 조선군이 심양에 무혈 입성해 버렸다. 결국 그렇게 심양의 청군도 항복하거나 전사하고, 영염 일행도 붙잡히면서 조청 전쟁은 끝난다.

    그리고 김운행은 만백성의 여론이 된 칭제건원을 반대하고[20] 대국의 스승이 되자고 제안하며 조선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온다. 이는 사기가 천장을 돌파한 국민들과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으나, 건륭제에게 아편과 마약성 식물을 먹여 협조적으로 만들려던 계획은 건륭제의 자결로 실패하면서 지금 칭제건원을 했다간 다시 대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낀 대신들이 결국 김운행이 짠 계획을 인정한다.

8.2. 국외

  • 조선에 관심을 가지는 네덜란드 쇄국을 강화하는 일본
    김운행이 왜관을 토벌하고 여기에 관심을 가지던 네덜란드인들을 때려잡아 국제적인 분쟁거리가 된 탓에 일본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추방하고 쇄국정책을 강화하게 되었으며, 네덜란드인들은 조선인들이 자신들과 분쟁이 있어서 배를 탈취한 사실을 깨달아 조선에 개입할 준비를 하게 되어, 일본은 쇄국하는데 조선이 100년 먼저 서구와 개항을 두고 부딪치게 생겼다. 이 과정에서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 위정척사파 등의 파벌들이 훨씬 일찍 탄생하게 되는데 재미있게도 원 역사에서 위정척사파가 꽤 세력이 있었던 반면 본작의 위정척사파(?)인 김운행은 이상하게 외국에 관련된 일만 되면 꼰대가 된다면서 외국문물을 적당히 이용하고 싶어하는 조선인들에게 뒷담화를 당한다.[21]
    김운행이 일으킨 나비효과로 사대부들이 무역으로 얻는 돈 맛을 알게 되었고, 이훤의 개화 의지가 워낙 굳건하기 때문에 대놓고 개화를 반대하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 심지어는 김운행 파벌에서도 '사실 김운행도 개화를 지지하지만 겉으로만 쇄국을 부르짖는다'라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 청의 대외전쟁
    • 청의 준가르 원정 난이도 상승
      준가르족은 청나라와 여러번 마찰한 끝에 건륭제 시대에 수십만 청나라 대군의 공세에 멸망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약간의 변수가 추가되는데 건륭제가 김운행이 퍼뜨린 영조 관련 불온한 소문이 도는 조선을 견제할 목적으로 병력 1만 정도를 나누어 조선과 접경한 심양에 파견한데다가 본래 칸 자리를 노리고 청나라에 투항한 흑역사를 가진 칸인 아무르사나가 조선의 반청 거병을 과장해 조선군이 십만 군세로 심양을 공격할 거라고 허세를 부려 명분 삼아 일시적으로나마 준가르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데에 성공한다.
      또한 청나라에서 당시 매우 무도한 태도로 문제가 되던 러시아 공사관을 나름 사이가 가까워진 조선에게 내준다고 쫓아내고 김운행에 의해 굴욕적으로 쫓겨난 러시아 공사관이 준가르를 지원하게 된다.
      조선에서 영조의 정축하성이 종료될 무렵 근황이 나오는데 놀랍게도 진짜로 청군의 포위망을 벗어나서 세력을 유지하며 항전을 잇고 있었다. 심양의 1만 기병들은 원정군 전체를 보면 적지만, 기동력 부분에선 훨씬 비중이 컸던지라 사달이 난 것. 또한 조선을 명분으로 쓴 경험으로 발전한 아무르사나가 적극적으로 러시아 방면에 원병을 청하면서 전쟁은 장기화 된다. 심지어 몽골 일부 지역과 티베트까지 반란에 가담하면서 십전무공의 절반 정도가 한번에 초대형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 전쟁은 결국 청의 서북 국경을 명나라 시절로 후퇴시켰고, 3년이 넘는 십만 단위의 원정을 이어가고서야 티베트와 몽골을 간신히 제압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이 엘리자베타 여제의 수명이 연장되어 7년 전쟁을 승리로 끝낸 러시아가 중앙 아시아에 준가르와 군소부족들을 소집한 대병력을 투사해 청을 압박하면서 서북 전선은 끝도없이 길어진다.
    • 청의 유구왕국 구원(사쓰마 학폭위원회 개최)
      영국 함대가 조선으로 향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조선 조정은 서양에 대해 잘 아는 김운행을 남해진무사로 파견한다. 김운행은 수사들과 회의중 유구 왕국이 사쓰마 번에게 착취당한다는 사실을 알게되는데, 외왕내제도 아니고 이는 명백히 청나라 몰래 저지르는 짓이었다. 이에 김운행은 영국의 조선행을 망치기 위해 적극행정으로 유구에서 큐슈로 향하던 사쓰마번의 연락선을 습격하여 확보한 사쓰마의 유구침탈을 입증하는 증인과 증거문서들을 항주로 보내 건륭제에게 일러바친다. 여기에 김운행의 예상보다 3배 더 격노[22]한 건륭제가 함대를 파견하면서 유구의 수도 나하는 청과 영국, 사쓰마, 유구가 얽힌 난장판이 벌어졌다. 청은 영국과 사쓰마가 한패라 오해하고 영국은 청과 유구의 함정이라 오해하여 청의 함대와 해전을 벌이는 한편 유구왕성을 기습점거하여 사쓰마관리를 목베고 사쓰마는 청과 영국이 싸우는 와중에 유구침탈의 증거를 인멸하기위해 유구왕성공략을 시도하다가 이미 왕성을 점령한 영국군과 전투를 벌이고 불쌍한 새우-유구왕국은 고래들의 싸움에 등이 터지는 대환장파티중.
      결국 사쓰마는 영국군에게 격퇴되고 영국함대는 화력의 우세에도 압도적인 숫적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도주[23], 조선의 거문도로 표류하게 되고 일련의 상황을 보고받은 건륭제는 사쓰마번 정벌을 명하는 한편 서양과의 무역을 아예 금지하면서 청과 조선, 일본, 유구 모두 서양에 대한 쇄국에 들어간다.
      게다가 건륭제의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준가르를 멸절시키는 건 거의 불가능해진 걸 알게 된 건륭제는 십전무공 퀘스트의 표적을 변경. 3만의 몽골팔기를 큐슈로 파병했다. 당연히 조선 반도를 거쳐가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당시 조선은 남서북 삼방에서 오랑캐들과 전쟁을 벌이던 청에게 있어 유일한 우방이었고. 애신각라 홍염처럼 전재산을 청-조 밀수업에 투자한 청나라 거물들도 있었기에 취소되었다.
      3만 몽골팔기는 순풍을 타고 큐슈에 상륙, 오천 선봉대 몽골팔기가 1만 사쓰마 군을 분쇄하고 큐슈 전역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약 1년여에 거친 전쟁 결과 큐슈의 20개국이 전부 망했다. 다누마 오키쓰구를 비롯해 당시 막부의 실권자들이 어떻게든 원군을 보내려고 했지만 '너무 오랜 평화 탓에 실전 감각도 없고, 각자도생 기질이 강해진 혼슈 다이묘들 탓에 소집도 지지부진했다. 결국 1년을 버티던 사쓰마 번도 멸망한다.
    • 청의 양면전쟁
      준가르 토벌이 위구르-티베트와의 연계반란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이어지고, 남쪽에서는 영국군이 프랑스와 아메리카까지 끌어들여 함대를 끌고 나타났다. 도합 4만, 전열함과 프리깃까지 포함해 20척이 넘는 대함대는 강남 천주에 상륙해 청과 본격적인 대전쟁에 돌입한다. 이들은 강남에서 반란을 준비하던 천지회 기반의 반청 단체와 야합하고 아편을 뿌려서 수만의 민병대를 만들기까지 한다. 양광총독 이시요는 12만 대군을 지휘해 맞섰으나, 조지 워싱턴의 야습으로 불리해지자 고의적으로 유럽군과 뒤섞이는 내전을 유발, 안탕산에서 벌어진 혼전 끝에 청군은 5만 가까이가 죽고 영국군도 주요 전투병력 1만에 달하는 크나큰 손실을 보게 된다.
  • 백련교국 건설
    산동성에서 거병한 백련교 반란은 부찰부항의 대군에 패배하면서 백련 반란은 진압된 걸로 보였다. 그러나 사실 청에 협조하는 것 같던 조선군은 백련교도들 중 정예하고 충실한 자들만을 모아서 남몰래 조선으로 대피시켜 수천명을 생존시켰다. 이들은 조선에서 기력을 회복한 후 조선군과 협조해 대청 전쟁의 여러 전선에서 활약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산동성에 내린 맹찬과 오삼랑, 백련교는 청의 직례정부가 혼란에 빠진 사이 산동을 사실상 손에 넣게 된다. 물론 극도로 황폐한 산동이지만 조선과의 무역과 교도들의 믿음으로 어느정도는 갈음되었다.
  • 진-오명 전쟁
  • 옐리자베타 여제의 생존과 프리드리히 대왕의 패사
    원 역사에서는 7년 전쟁 막바지에 숨을 거둔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가 조선과 접촉한 러시아인들이 가져온 홍삼을 처방 받고 병세에 차도가 생겨[24] 7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버텨낸다. 반대로 원 역사에선 옐리자베타 여제의 사망으로 기사회생했던 프로이센 왕국[25] 거의 모든 영토를 잃고 빈사상태에 빠진다. 궁지에 몰린 프리드리히 대왕이 최후의 돌격을 시도하다가 전사함으로써 7년 전쟁은 프로이센의 대패로 끝나게 되었고, 프리드리히 대왕을 존경하던 표트르 3세는 옐리자베타의 눈밖에 나 간첩 혐의로 유폐된다. 한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러시아는 유럽 전선에게 생긴 여유를 두고 준가르의 전쟁에 개입하게 되어 건륭제의 준가르 정벌은 다시 난국을 맞게 된다.
  • 아편전쟁과 조지 워싱턴의 대두
    7년 전쟁이 프로이센의 패배로 끝나며 그레이트 게임에서 한수 밀린 영국은 정책을 바꿔 중국을 침탈하고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를 강탈할 계획을 꾸민다. 중국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육군의 상륙이 필수적이었고 버지니아 민병대 중령 조지 워싱턴을 중국으로 파견한다. 워싱턴의 군재를 높이 사서는 아니었고, 미대륙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민병대에게 줄 포상이 마땅찮았고, 워싱턴이 중국에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높으신 분들 뜻대로 처분하기 쉬운 팻감으로 여겼기 때문. 즉 이겨놓고 시작하는 전쟁에 짬처리를 해버린 셈인데 워싱턴은 성공 보수는 가서 정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영국은 이를 별 생각없이 받아들였다.
  • 회맹대전
    조선의 북벌로 인해 청의 붕괴와 난세는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수 년. 중원의 정세는 혼란기를 넘어서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바로 전 패권국 청을 무너뜨리려는 신생 세력들의 도전기였다. 가장 유력한 후보인 강남을 반분한 오명은 대만에 이어 호북, 호남성이나 산동성을 노렸지만 조선의 방해와 촉진의 반격으로 어려웠다. 애당초 표면적인 강력한 동맹이자 후원자인 조선은 오명의 중화 통일을 원치 않아 적극 방해했다. 이에 오명의 통치자 이시요는 영국 함대를 끌어들여서라도 조선을 쫓아낼 심산으로 마닐라에 사람을 보낸다. 그렇게 오명이 책략을 꾸미는 사이 파촉을 시작으로 관중까지 차지하고 함곡관 동쪽을 넘어오기 시작한 촉진은 이제는 이 모든 난세의 원흉이자 대적인 청을 노리고 과거 삼진 조나라의 수도 도시인 한단을 노리며 청을 향해 서진했다.
    서북 준가르 제국의 아무르사나는 더했다. 그는 조청 전쟁 이후 몽골의 선지자가 되었고, 러시아의 기수인 중앙 아시아 이민족들보단 최근 청에게 이탈하기 시작하는 몽골 부족들을 끌어들였다. 산동 백련교국은 태평천국을 개국한 이후 나라의 형태를 갖추어갔다.
    청나라의 오랑캐전대 오형제는 각자 황실의 직함을 가르는 거국적 합의를 치르고 내홍 수습에 나선다. 그러나 몽골 도통이자 양황기의 수장 색극신은 한때는 천하인의 직함이자, 몽골의 절대자인 몽골의 칸 직함이 서열 2위인 영용에게 배분되고 자신 역시 그 아래에 놓이자 배신감에 반발해 준가르에 붙는다. 청나라가 가장 두려워한 몽골제국의 재림이나 마찬가지였다. 부활한 몽골제죽의 아무르사나는 적극적으로 초원을 제압해나갔다.

    한편 조선은 곧 다시 청을 치고서 북경 회맹을 개최할 것을 각국에 알리나, 진, 몽골, 오명 등은 당연히 탐탁잖아 했다. 조선은 아직 범접할 엄두도 안나는 제국이 아니었기에 회맹에 조연으로 참가해 조선을 패자로 치켜세워주기 싫었던 것이다. 이후 준가르와 몽골은 스스로 세력을 가다듬으면서 공세를 완화시킨다. 이는 조선의 회맹 선언에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참가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중원이 자기들끼리 싸우는 와중 조선에서는 당당하게 '열병식'을 열어서 수만 대군을 나열하면서 언제든 북경을 침공할 의사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조선이 언제든 북경을 차지한 다음 우호적인 제후들만 모아서 중원을 갈라먹을 능력이 있음을 자각한 촉진, 준가르는 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야 했다. 다만 조선은 바로 군사를 움직이진 않았고 만주와 중원 사이에는 방어선이 서, 북에 비해 단단했기에 여전히 촉진과 준가르가 뒤쳐졌다고 볼 수는 없었다.

    청나라의 실권을 차지한 레드, 애신각라 영염은 의외로 조선의 위협을 낮게 보고 있었다. 왜냐면 조선은 여전히 보총병, 포병, 기병 등을 혼합해 쓰고 있었는데 이들의 속도 상 청나라 본토를 치기 힘들었다. 심지어 침공로는 거용관을 우회해 들어올 몽고군과 겹치는 만주 서북인데 필시 경기병이 대다수일 몽골군과 이동경로가 겹쳐서 좋을 것이 없었다. 물론 조선 해방별대가 동아시아 최고의 수군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직례와 북중국 일부만을 차지한 청나라의 해안가에서 북경으로 갈만한 곳은 천진과 산동성 뿐이었다.

    영염에게 동생 영용이 준가르와 배신한 몽골군을 막기 위한 원병을 청했으나, 영염은 거부했다. 결국 영용은 남은 몽골군과 사병을 모은 4만 군세만을 가지고 청에게 돌아선 내몽골 타이시 색극신에게 패배해 자결한다.

    그리고 이는 티베트, 위구르의 수호자 직함을 받은 영기, 영성도 똑같이 장안으로 별다른 지원 없이 버려졌고, 결국 군공에 눈이 먼 파촉과 관중 병사들에게 참살당한다. 그렇게 영용에 이어 동생 둘을 더 제거한 영염이었으나, 그 댓가는 몽골의 완전한 독립과 북방 장성 방어선 붕괴, 그리고 서쪽의 장안시 상실이었다. 사실상 중원 제국은 북과 서로 거대한 구멍이 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언제든 북경을 칠 수 있을만한 사정거리가 들어오자 다시 준가르와 진은 멈추어서 정세를 관망했다.

    그리고 1772년. 요양전투(1766년) 이후 6년. 마침내 조선은 요동에 1만, 평안도에 3만 5천으로 총 4만 5천의 대군을 모아 다시 전쟁을 시작한다. 조선의 선전포고 명분에는 진과 준가르의 구원요청이라는 말이 당당히 들어가 있었다. 준가르와 진은 경악하는데, 이대로라면 회맹에 참가해주지 않은 두 나라에게 조선이 먼저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진과 준가르가 자기들 힘으로는 안되니까 조선에게 부탁을 한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진, 청, 준가르 삼국 모두가 서로 제대로 외교 관계를 구축하지 않은 지라 서로 대응이나 사실확인을 맞춰볼 수도 없었다. 이에 진과 준가르는 조선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멈춰섰다. 그러자 영염은 직례의 잔존 팔기를 전선에 보강했고 진과 준가르는 청의 격렬해진 저항에 전진을 멈춘 걸 후회하면서 격렬히 싸웠다.

    애신각라 영염의 군사 배치는 금방 정리되었다. 요서와 산해관의 정병들은 유지, 북경을 지키는 금려팔기도 유지, 그 외의 직례의 군사는 각자 서와 북으로 보낸 진과 준가르를 막고, 수도의 병력은 산동 태평천국을 향한 공세를 명했다. 천진에서 북경으로 오는 길만을 금려팔기로 철통같이 지킨다면, 구멍은 산동성 사실상 조선 괴뢰국인 태평천국만 남기 때문이었다.

    청이 지키고 있는 직례는 본래 청나라 군사력의 핵심이던 땅이었기에 여전히 십만여에 달하는 대군과 수만에 달하는 팔기가 남아있었고, 준가르와 진을 막을 군사 외에도 수만의 팔기가 곧바로 산동성의 태평천국을 공격했다. 태평천국 천왕 맹찬이 직접 전선에 나서 항전했으나 수적 열세로 수도인 임치성에서 공방전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맹찬과 태평교도들의 신앙과 충성은 굳건했기에 임치 공성전을 쉽사리 끝나지 않고 치열해졌다.

    한편 천진 수군은 조선 해방별대 대함대의 공세를 맞는다. 영염과 군부의 예상은 조선 수군의 산동성 행이었고, 이를 최대한 방해하는 게 천진 수군 함대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틀렸다. 해방별대는 맹공을 퍼부어 천진 수군을 격파하고 그대로 천진에 상륙해버렸다. 청나라가 천진-북경의 길목을 막고 방어준비를 벌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벌인 황당한 일이었다.

    북경의 청나라 조정은 곧 조선이 북경을 향해 진군할 것이라 믿고 산동의 군이나 인근의 수비병까지 끌어모으며 초긴장 상태에 들어갔을 무렵... 조선군은 의외의 행보를 벌였다. 바로 우회해서 산해관을 요격한 것이다. 요동에 있던 신흡의 조선군 1만과 천진의 3만 조선군이 동시에 내외에서 들이치자 산해관의 청군은 패닉에 빠졌다. 본래라면 북경의 금려팔기들이 산해관에 오기 전에 요격을 하든 추격을 하는 게 맞겠으나 구두룡섬이라는 환상적인 기동은 금려팔기들을 눈뜬 장님으로 만들었다.

    요동의 조선군이 손쉽게 산해관 코앞까지 온 것도 을유년 북벌에 이은 나비효과였다. 당시 사방에서 공격받던 청은 조선이 요동에서 멈추자 요서를 관리하기 곤란해했다. 요서는 몽골과 조선이 언제든 드나들 수 있는 땅이 되었고, 산해관 너머 성과 요새의 청군은 외국군에겐 약탈을, 자국군에겐 의심을 받느라고 몇년 사이 급속도로 붕괴해 버린 것이다.

    같은 날 동시에 산해관을 안팎으로 에워싸고 공세를 시작한 조선군과, 천진에서 산동 사이 청의 해안가를 파괴하기 시작한 해방별대에 의해 결국 산해관은 함락된다. 산동에서 승승장구하다 임치를 포위한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조선군은 태평천국과 힘을 합쳐서 산동의 청군을 사냥했고, 결국 산동-천진-산해관에 이르기까지 청의 동쪽 국경은 무너졌다.

    그리고 김운행과 조선군은 더욱 믿기 힘든 행보에 나섰다. 바로 장성의 해체였다. 만리장성으로 대표되는 중원 제국의 국경 방어선이 무너진다는 소식은 반대쪽 전선에서 고군분투하던 진과 준가르를 경악시켰다. 북경이 야만의 영역인 초원, 사막과 가까우면서도 수도가 될 수 있던 건 초원과 중원을 분리해놓은 장성과 관문의 존재 덕이었다. 설령 그렇지 않았다면 북경은 제국의 수도가 되기 어려운 땅이었다. 심지어 그쪽 국경에 있는 것이 이미 청을 거꾸러뜨린 조선이라고 생각하면 장성이 사라지는 순간 누가 천자가 되더라도 북경을 수도로 만들 수 없었다. 조선이 언제든지 직례 동부, 즉 북경을 초토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수도의 기능을 잃은 북경은 더는 차지한다고 천자가 되는 땅도 아닌 셈이다.

    만주에서 징발한 유민들과 범죄자 노비들에 의해 빠른 속도로 장성은 해체되었다. 준가르와 진은 이에 경악하면서 조선에게서 북경을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북과 서의 청군은 증강된 상태였기에 무리한 공세는 큰 손실만을 불러왔다. 심지어 애신각라 영염은 산해관과 장성 해체에 열심인 조선을 보고는 조선과는 강화를 맺고 진과 몽골부터 막자면서 행복회로를 돌렸다... 자연히 동부, 남부 전선의 청군이 또다시 북서에 보강되었다. 준가르 몽골과 촉진이 혈전을 벌이는 동안 조선은 공사에 열심이었다.

    사실 조선의 공사는 단순한 장성 해체가 아니었다. 가성비가 나오는 수준 하에서 장성을 해체해 요하 지방의 길을 다시 닦고 있었다. 서양인들의 수학 지식 전파와 춘식의 구두룡섬을 본 조선인들은 정확한 정보와 기동력의 매력을 알았기에 요하 일대를 언제든 중원을 칠 수 있는 통로로 만들기로 다짐한 것이다. 장성은 실시간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무력화 되어가고 있었다.

    준가르 몽골과 진은 극심한 소모전으로 수만의 손해를 보고는 결국 동맹을 맺었다. 더는 서로 견제할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르사나는 시베리아를 통해 만주로 들어간 포템킨을 통해서 조선의 후방을 흔드려 했으나, 만주에는 조선이 반드시 지켜야만 할 만한 자산이라곤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불법 의병단이나 마적단 뿐이라서 조선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심지어 홍대용과 흉노팔기가 파견되어 현지 러시아인과의 협조를 통해 수천의 러시아군을 대파했다. 결국 아무르사나는 괜히 조선에게 자신을 칠 명분만 주고 말았다.

    조선이 장성을 해체하고 요하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만들 동안, 서쪽에서는 진과 청의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협상의 여지가 있는 조선에 비해 확실하지 않지만, 진나라와 몽골은 분명히 청을 멸망시킬 것이기에 청군은 악에 받쳐 싸웠다. 한때는 장안과 낙양을 차지하고 직례를 향해 질주하던 부찰 복강안의 진군은 다시 밀려서 낙양 앞 호로관까지 후퇴해야 했다.

    그러나 이 때 얼마전에 동맹을 맺은 아무르사나의 준가르-몽골 연합군이 청군의 뒤를 요격했다. 군세가 큰 청군이 당황하는 사이 진군도 관에서 나왔고 곧 호로관 앞에서는 삼국의 난전이 벌어졌다. 그렇게 혈투를 벌이던 삼국군은 조선군이 산해관을 나온다라는 전령의 소식을 듣고 당황해 전투를 멈춘다.

    직례 북경 일대. 애신각라 영성은 조선군이 공세를 시작한다는 말을 듣고도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사실 천진 상륙 이후 당연히 북경으로 올 줄 알았던 조선군이 산해관을 구두룡섬으로 친 것이 의외였지, 정말로 함곡관에서 만족하고 물러갈 거란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청은 마지막 여력인 수만의 금려팔기와 수도 방어군을 통해 조선군을 막아내고 강화협상을 할 생각이었으나, 곧 구두룡섬으로 북경 사방을 초토화하는 조선군에게 경악한다. 요하 일대에서 보여주었듯이 구두룡섬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는 조선군은 이제 제한적으로나마 신속한 각개기동을 보여주면서 청군을 무너뜨렸다. 결국 조선군 4만여명이 별 손해도 보지 않고 북경 앞에 도착한다.


[1] 물론 자식을 박대하다 쿠데타를 얻어맞고 뒷방 늙은이가 된 게장왕 이금이 있기 때문에 도를 넘어설 정도로 갈구거나 하지는 않는다. 김이환 역시도 부친을 매우 존경하는 편. [2] 특히 유용한 것이 언어 적응능력인데 이게 당대 조선어 뿐만 아니라 당대 존재했던 모든 언어들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인지라 네덜란드어, 일본어, 중국어, 만주어 등을 자유자재로 사용가능해서 김운행에게 큰 도움을 준다. [3] 주인공이 역사의 흐름을 마구 꼬아버리면서 기존에 준비해놨던 스킬 대신 임시방편으로 가져와서 이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관우의 인내심'을 받은 주인공은 이게 원래의 필수목표 보상 스킬이 아니라 낮은 등급 가챠스킬이 아니었나 하고 의심한다. [4] 육예는 공자의 커리큘럼인 예(禮: 예의), 악(樂: 음악), 사(射: 활쏘기), 어(御: 말타기), 서(書: 글쓰기), 수(數: 수학)을 뜻한다. 이중 한석봉, 이성계, 이혈의 스킬이 각각 서, 사, 어에 속한다. [5] 사실 한석봉의 글씨체는 현대 인쇄물의 주요 서체로 이용될 정도로 대단히 내용이 명료하게 인식되는 서체라 공문서용으로 적합하기도 하다. 작중에서도 그런 점이 윗선의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나온다. 왜관 문제처리과정에서 동래 대도호부사가 김운행의 필체를 언급하며 자신의 장계를 정서해 줄 것을 부탁하자 기꺼이 받아들인 김운행은 동래부사의 장계내용에서 몇글자를 가감하여 자신의 의도에 더 적합하게 편집(?)했다. [6] 송덕비 자체만이 아니라 이를 조정으로부터 공인받아야 한다. [7] 원래 주어진 목표를 수행하면 영의정까지 올라갈 수 있게(난이도와는 별개로) 설계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김운행이 뒤틀린 방식으로 수행해버려서 대차게 꼬였을 뿐. [8] 보상이나 가챠로 얻는 스킬들은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는 서술도 있다. 반대로 사람을 제외한 동물에게는 이혈의 친화력이나 이연의 속도처럼 스킬의 대상으로 시전하여 영향을 주는 것이 가능하다. [9] 기껏 의심한 건 '''저런 그림체는 처음 봤는데 누구 거냐?" 정도였다. [10] 영조는 금주령을 내려 민생을 위하는 군주 코스프레를 하며 금주령을 어긴 사대부와 백성들은 처벌하는 반면 본인은 마음대로 술을 마셨다. 송절차나 오미자차란, 대놓고 술이라 할 수 없으니 자기가 마시는 것은 술이 아니라 차라고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11] 이미 중국-일본 직무역이 활성화된 상황이었으나, 직통 항로에서 네덜란드 VPN 켜고 해적질로 분탕을 치며(...) 제주도를 이용하도록 유도했다. [12] 마구잡이로 건들다간 정상결전 치러야 할 판이라고 한다. 일단 관선이 없는 시기에 네덜란드 상선으로 위장하고 터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만족스러운 양도 아니다. [13] 이 시기 청은 김운행 나비효과로 준가르, 티베트, 몽골의 연쇄반란이라는 개망신 일보 직전의 국책사업을 치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내심 언제든 그쪽에 붙어도 이상하지 않은 조선이 갑자기 우호적 행보를 보여주면 반가울 수밖에 없다는 것. [14] 천진의 영국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성경부 주력이 이미 떠났다. [15] 병부 상서 아리곤 등은 강을 건너지 말고, 요양성의 잔존병력과 연락해 양동을 하자고 건의했으나 건륭제는 조선군 따위에 그렇게 심력과 시간을 소모할 수는 없다면서 거절했다. 사실 요동과 만주를 시급히 청나라의 권역으로 회복하려면 그렇게 시간을 끌면 안되는 것이 맞기는 했다. [16] 윤필덕은 비명을 질렀다... [17] 건륭제가 수천에서 만에 달하는 무리를 이끌기는 했으나, 이미 군사는 바닥이 나서 심양 입성전의 지연전에도 건륭제의 개인호위인 몽골군사가 나서야 했다. [18] 사실 심양은 아직 버티고 있기는 했다. 물론 심양에서 이들의 존재를 눈치채고 구해줄 확률은 없는거나 마찬가지기에 별 의미는 없었다. [19] 당시는 요양 전투 이전이라 정말로 어떻게 될지 모를 상황이었다. [20] 칭제건원을 하면 영의정도 승상이나 상국이 될 것인데 그러면 오로지 '영의정' 직책에 올라야 하는 김운행 입장에서는 미션 실패니까. [21] 김운행은 이미 본인이 출세가도 루트에 올라탄 상황에서 외국 세력이 유입되면, 정치판이 뒤틀리면서 자신이 영의정이 되는 것에 변수가 생기는 것을 우려하고 벌이는 짓이다. 그러나 작중 인물들이 보기에 김운행은 이미 세자(왕)의 든든한 총신이자 춘당이라는 계파의 수장으로 단단히 입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런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지는 못한다. [22] 아마도 중화천조질서에 대한 침해라는 기본적인 분노에 더해 준가르정벌이 뜻대로 되지않고 만주어 표문까지 올린 유구왕의 행동이 실상은 황제인 자신에게 구원을 청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심증이 더해져 3배 분노한듯. [23] 심지어 슈리왕성을 점거한 영국군은 함대가 패퇴하자 도주하며 왕성에 불을 질렀다. 이로인해 간신히 빠져나온 유구 왕과 신하들이 사쓰마보다도 더한 놈들이라고 치를 떨게 되어 유구도 서양에 대한 쇄국이 이루어진다. [24] 홍삼의 약효가 아니라 홍삼을 복용하는 동안 사혈 관장 등 사람 잡는 유럽식 치료법을 중단한 덕분에 몸이 덜 축나서 늦게 죽은 것이다. [25] 원 역사에서 여제의 사망이 왜 이렇게 연결되는가 궁금하다면 표트르 3세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