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16:50:21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킨테츠 펄스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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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a252b><colcolor=#ffffff>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Osaka Kintetsu Buffaloes
大阪近鉄バファローズ
구단 법인명 ㈜오사카 버팔로즈
창단 1949년
해체 2004년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흡수 합병
연고지 오사카부 (1952~2004)
구단명 변천 킨테츠 펄스 (1949~1958)
킨테츠 버팔로 (1959~1961)
킨테츠 버팔로즈 (1962~1998)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1999~2004)
홈구장 변천 후지이데라 구장 (1950, 1984~1996)
오사카 구장 (1950~1957)
일본생명 구장 (1958~1983)
교세라 돔 오사카 (1997~2004)
모기업
(해체 당시)
킨키 일본 철도
영구 결번
(해체 당시)
1 스즈키 케이시
마스코트 파일: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마스코트.svg
버필리드(バフィリード)
일본시리즈 우승
(0회)
없음
퍼시픽리그 우승
(4회)
1979, 1980, 1989, 2001
퍼시픽리그 전·후기 우승
(3회)
1975 후기, 1979 전기, 1980 후기
플레이오프 우승
(2회)
1979,1980
역대 한국인 선수 백인천[1] (1981)
포스트시즌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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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a252b> 일본시리즈 1979년, 1980년, 1989년, 2001년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1975년, 1979년,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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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출신 OB
3.1. 영구 결번3.2. 역대 1라운드 지명 선수3.3. 투수3.4. 포수3.5. 내야수3.6. 외야수3.7. 감독3.8. 최후의 멤버
3.8.1. 감독 및 코칭스태프3.8.2. 투수3.8.3. 포수3.8.4. 내야수3.8.5. 외야수
4. 유니폼
4.1. 1966 ~ 1973 전기리그4.2. 1973 후기리그4.3. 1974 ~ 19964.4. 1997 ~ 2004 홈 유니폼4.5. 1997 ~ 1998 원정 유니폼4.6. 1999 ~ 2004 원정 유니폼
5. 응원가6.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7. 역대 성적8. 관련 문서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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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소속이었으며 2004년 시즌 종료 후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합병, 해체할 때까지 존재했던 구단. 1950년 양대 리그제 시행과 함께 창단했으며 모기업은 킨키 일본 철도였다. 약칭 킨테츠.

2. 역사

연고지는 오사카였으며 창단 이후 후지이데라 구장, 일본생명 구장, 오사카 구장 등을 홈구장으로 써 왔다가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오사카 돔(現 쿄세라돔 오사카)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팀명은 3번 변경됐는데, 처음엔 킨테츠 철도가 경유하는 이세만의 특산물인 진주의 영어 명칭을 따서 킨테츠 펄스(1950~1958)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하다가 치바 시게루 감독이 취임한 이후인 1959년에 치바 감독의 별명을 따 킨테츠 버팔로(1959~1961), 그리고 1962년에 팀명인 버팔로에 복수형인 s를 추가해[2] 킨테츠 버팔로즈(1962~1998)라는 이름으로 사용했다. 이후 팀의 연고지 정체성을 살리고자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1999~2004)로 개명했고 이 이름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팀 이름과 공격적인 팀 야구 스타일 때문에 이 팀의 별칭은 맹우군단(猛牛軍団)이었다.

55년간의 팀 역사에서 해체할 때까지 일본시리즈 우승을 거둔 적이 없는 비운의 콩라인 팀이었다(...) 게다가 50여년 이상 존재했던 일본 프로야구 12개 구단 중에서 가장 늦은 1979년에서야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다.[3][4] 팀의 전성기는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이 이끌던 1970년대 후반과 오기 아키라 감독 시절인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반이었으나 이때마저도 일본시리즈에선 굴욕만을 맛봐야 했는데, 니시모토 감독은 우승과는 거리가 멀 것 같았던 이 팀을 1979, 1980년에 2년 연속 퍼시픽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일본시리즈에서는 코바 타케시 감독의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패배[5], 오기 감독의 경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989년 일본시리즈에서 먼저 3승을 따 놓고도 4연패로 리버스 스윕을 당하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6] 그나마 위의 3번의 일본시리즈는 그래도 7차전까지 가며 나름 치열한 승부였지만, 마지막 진출인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2001년 일본시리즈는 아예 투타의 심각한 부조화로 1승 4패로 일방적으로 밀리고 말았다.[7]

이 시기를 제외하면, 50년에 걸친 팀 역사의 대부분은 성적이 저조했다. 1958년에는 29승 97패 4무 승률 .238로 1955년 타이요 훼일즈(31승 99패)와 함께 양대리그 출범 이후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저 승률 타이 기록을 세웠고[8] 심지어 1961년엔 36승 1무 103패의 전적으로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시즌 100패팀이 되었다.[9] 2005년에 지난 해 5위-꼴찌였던 킨테츠와 오릭스 선수들 중에서도 기량이 밀리던 선수들만 모아서 만든 라쿠텐이 전력 문제로 개막부터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이 기록을 경신하리라 예상했지만 간신히 97패에 그쳤고, 2000년대 후반 막장가도의 절정을 달리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가 거의 매년 100패에 근접한 성적을 찍고 있었으나 결국 100패까지 가는 건 면했다.

이 때문에 한때 같은 리그의 한큐 브레이브스가 (매년 성적도, 인기도 그저 그래서 특색이 없는) '회색 구단'이란 멸칭으로 놀림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킨테츠는 허구헌날 연전연패로 밑바닥만 찍는다는 의미에서 '지하철 야구단', 혹은 '퍼시픽리그의 짐짝(...)'이라는 멸칭으로 놀림받았다. 오죽했으면 1957년에 당시 7구단 체제로 진행되어 리그 일정을 짜는 데 문제가 생기자 아예 최하위 구단을 해체해서 구단 수를 짝수로 맞추려 한 퍼시픽리그 높으신 분들의 해체 타겟이 되기도 했으며[10], 1979년 킨테츠를 최초로 우승시킨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은 만년 하위권 팀을 우승시켰다는 공로로 마찬가지로 팀을 첫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히로시마 도요 카프 코바 타케시[11] 감독을 제치고 일본프로야구에서 야구인에게 주는 최고의 상인 쇼리키 마츠타로상을 수상했다.[12] 그리고 한큐와 킨테츠는 후일 같은 팀으로 파이널 퓨전했다[13]

투수와 수비력보다는 공격력, 특히 장타력을 중심으로 하는 공격적인 야구와 한번 분위기를 타면 팀의 상징마냥 초원을 질주하는 들소떼처럼 걷잡을 수 없이 몰아치는 팀 컬러를 특징으로 했기 때문에[14] 화끈한 공격야구를 좋아하는 팬들을 끌어들인 구단이었다. 특히 7월까지 최하위를 기록하다가 7월에서 8월 중순까지 38경기 32승 6패를 기록하면서 우승전선에 뛰어든 1994년 시즌[15]과 팀 평균자책점 4.98[16]로 무너지는 투수진을 화끈한 공격야구로 메워 우승까지 차지했던 2001년 시즌[17]이 이러한 팀 컬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시즌이었다.

또한 이 팀은 극적인 승부가 많아서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손꼽히는 명승부를 찾아보면 거의 이 팀이 얽혀 있는 경우가 많았고, 팀의 인기는 없을지언정 팬들에게 준 임팩트는 큰 팀이었다. 대표적인 명승부만 해도 1979년 일본시리즈 7차전 9회말의 에나츠의 21구, 1988년 10월 19일 전설의 카와사키 구장 더블헤더[18], 1989년 랄프 브라이언트의 4연타수 홈런[19], 1989년 일본시리즈의 3연승 후 4연패[20], 2001년 시즌 3점차로 뒤진 상황에서 12년 만의 우승을 결정짓는 대타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21][22][23]등등.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킨테츠가 명승부의 희생양이 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로 당연히 일본시리즈 우승이 없다.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마저[24] 콩라인의 전설 호시노 센이치 휘하에서 창단 9시즌만에 처음으로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하면서 이제 킨테츠는 영원한 콩이 되어버렸다.

이 구단 출신의 유명한 선수로는 1989년 드래프트때 8구단에서 지명을 받은 노모 히데오[25]와 킨테츠 해체 후 4구단을 돌아다닌 저니맨 강타자 나카무라 노리히로 등이 있다. 그리고 찰리 매뉴얼, 랄프 브라이언트, 터피 로즈 등 수준 높은 용병들도 이 팀에서 뛰었다. 1960년대 초반부터 활약한 강타자 도이 마사히로는 일본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한 선수들 중 최다안타(2,452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스즈키 케이시는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최초의 영구 결번이자 킨테츠, 더불어 퍼시픽리그의 유일한 영구 결번(1번)의 소유자였으나[26] 오릭스와 킨테츠의 합병이후 오릭스 구단 측의 영구결번 제의를 거부하여 무효화가 되었다. 그리고 스즈키 케이시 이후로 일본야구에서는 현재까지 300승을 달성한 투수는 나오지 않고 있다.

경영난으로 인한 킨테츠의 해체로 인해 2004년 일본프로야구계는 리그 재편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선수회 회장이었던 후루타 아츠야, 킨테츠의 주력 선수였던 이와쿠마 히사시 등과 팬들 주도로 거센 반발이 일어나 일본프로야구 사상 초유의 선수회 파업이 일어나는 등 파란이 있었다. 결국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킨테츠 버팔로즈가 합병된 후 선수들은 분배 드래프트를 통해 오릭스 버팔로즈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나눠지게 되었다.

2004년 마지막 경기[27]가 시작하기 전에, 당시 감독이었던 나시다 마사타카[28]가 선수들에게 했던 "모두 당당하게 시합해라. 너희들이 달고 있는 등번호는 모두 킨테츠 버팔로즈의 영구 결번이다."라는 말은 야구계의 명언으로 자리잡았다.

2020년 기준 킨테츠 시절의 소속 경험이 있는 현역 선수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소속의 사카구치 토모타카와 콘도 카즈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 이와쿠마 히사시로 총 3명밖에 남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사카구치와 콘도가 2016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와쿠마가 201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면서 킨테츠 최후의 선수 3인방이 도쿄, 그것도 같은 센트럴리그 팀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2020시즌 말엽 콘도와 이와쿠마도 은퇴를 선택하면서 남은 선수는 사카구치 단 한명. 그 사카구치도 2022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면서 킨테츠는 완전히 역사의 영역이 되었다.

2022년 일본시리즈에서 오릭스 버팔로즈가 우승하면서 마침내 킨테츠-오릭스로 이어지는 버팔로즈 팀명을 사용한 팀이 61년[29] 만에 우승에 성공했다. 다만, 2010년대 후반 이후 오릭스는 킨테츠 시절과 다르게 일본프로야구에서 가장 투수 뎁스가 튼튼한 팀이고, 재정도 12구단 중 가장 튼튼하다.

3. 출신 OB

괄호 안은 재적 연도, 굵은 글씨는 오릭스와의 합병 당시에 재적 중이었던 팀 최후의 멤버

3.1. 영구 결번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c2f42> 파일:킨테츠 버팔로즈 화이트 심볼.svg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영구 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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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No.1
스즈키 케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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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합병 이후에도 오릭스 측에서 영구 결번 유지를 제안했지만 스즈키 본인이 거절하면서 영구 결번이 해제되었다.

3.2. 역대 1라운드 지명 선수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width=400><tablebordercolor=#0c2f42><tablebgcolor=#0c2f42> 파일:킨테츠 버팔로즈 화이트 심볼.svg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역대 1라운드 지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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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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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folding [ 쇼와 시대 ]
{{{#555555,#aaaaaa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
1965년 ~ 1988년
1965년 1966년 1차 1966년 2차 1967년 1968년
타바타 켄지로 (2)
(田端謙二郎)
카토 에이지
(加藤英治)
카도노 토시지
(門野利治)
미와타 카츠토시 (4)
(三輪田勝利)
미즈타니 히로시
(水谷宏)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오오타 코지
(太田幸司)
이치하시 히데히코
(市橋秀彦)
사사키 쿄스케
(佐々木恭介)
나카네 마사히로
(仲根正広)
우카이 카츠오
(鵜飼克雄)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1978년
후쿠이 야스오
(福井保夫)
나카노 히데아키
(中野英明)
쿠보 야스오
(久保康生)
카네미츠 코지 (4)
(金光興二)
토우키 켄야 (1)
(登記欣也)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1983년
후지하라 야스유키 (1)
(藤原保行)
이시모토 요시아키 (1)
(石本貴昭)
카네시로 노부오 (2)
(金城信夫)
카토 테츠로
(加藤哲郎)
오노 카즈요시 (2)
(小野和義)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사사키 오사무 (2)
(佐々木修)
히야마 야스히로 (1)
(桧山泰浩)
아와노 히데유키 (2)
(阿波野秀幸)
타카야나기 이즈미 (1)
(高柳出己)
요네자키 쿤지
(米崎薫臣)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헤이세이 시대 ]
{{{#555555,#aaaaaa
1989년 ~ 201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노모 히데오 (2)
(野茂英雄)
테라마에 마사오 (1)
(寺前正雄)
타카무라 히로시
(髙村祐)
코이케 히데오
(小池秀郎)
사카이 히로키 (3)
(酒井弘樹)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타나카 히로카즈 (1)
(田中宏和)
후쿠도메 코스케 (2) (4)
(福留孝介)
마에카와 카츠히코
(前川勝彦)
마키 마사키 (1) (3)
(真木将樹)
우다카 신지 (3)
(宇高伸次)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미야모토 다이스케 (1)
(宮本大輔)
야마모토 쇼고 (3)
(山本省吾)
아사이 히데키
(朝井秀樹)
사카구치 토모타카 (1)
(坂口智隆)
카츠키 료타 (3)
(香月良太)
2004 시즌 이후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흡수 합병
}}}}}}}}}}}} ||
(1) 하즈레 1라운더: 첫 지명에서 중복 지명된 선수의 교섭권 획득에 실패했을 때 차순위로 선택한 선수.
(2) 중복 지명 추첨 성공.
(3) 역지명, 희망 입단 범위: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한 제도로, 선수를 확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4) 지명 후 미입단,
}}}}}}}}} ||

3.3. 투수

  • 세키네 준조 (1950 - 1964)
    창단 초기 지하철 야구단[30]이라고 조롱당하던 킨테츠를 투타 양면에서 혼자 먹여살리던 좌완 에이스. 훗날 어깨 통증으로 인해 외야수로 전향했고, 타자로써도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투타 양 포지션으로 올스타전 출장, 평균자책점-타율 상위 10위권 달성, 양대리그제 이후 사상 유일의 통산 50승-1000안타를 모두 달성한 선수 등의 진기록을 세웠다. 선수생활 마지막 해인 1965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승의 기쁨을 맛본 뒤 은퇴했고, 은퇴 후 노년까지 해설가로 활동하는 한편 1982-84시즌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31]와 1987-89시즌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2020년 4월 9일 노환으로 향년 93세로 별세.
  • 스즈키 케이시 (1966 - 1985)
    일본프로야구 최후의 300승 투수로써 킨테츠의 암흑기 청산과 상위권 도약을 이끌었으나, 감독으로썬 자신의 야구관을 계속 고집한 탓에 노모 히데오, 요시이 마사토 등과 불화를 일으켜 이들이 팀을 떠나는 원인을 제공했고, 이것이 결국 팀의 전력 악화에 영향을 미치면서 결국 3년차 시즌 도중 최하위로 떨어져 중도해임되며 선수로썬 팀의 레전드였지만 감독으로서는 자기의 아집 때문에 훌륭한 선수와 갈등을 빚고 팀을 망친 무능한 감독이라는 이미지만 남고 말았다. 일본프로야구 통산 최다 피홈런 1위(560개)에 랭크되어 있으며 킨테츠 구단이 존재할 당시 유일한 구단 내 영구결번이었으나 팀이 오릭스와 합병되면서 영구결번도 사라지고 말았다.
  • 칸베 토시오 (1970-1978)
    KIA 타이거즈 투수코치. 구속은 느렸으나 수비와 견제가 뛰어나 후쿠모토 유타카가 스즈키 케이시 다음으로 가장 까다롭게 생각했던 투수였다고 한다.
  • 오타 코지 (1970-1982)
    아오모리 현립 미사와 고등학교 3학년 때 팀을 토호쿠 지역 최초로 코시엔 결승전으로 이끈 우완 파이어볼러 투수. 수려한 용모의 혼혈 선수로 많은 여성 팬들로부터 인기를 끌었고[32], 프로 입단 이후에는 스즈키, 칸베와 함께 킨테츠 선발투수진을 지탱하면서 킨테츠의 창단 첫 리그 우승과 리그 2연패에 일조했다.
  • 요시이 마사토 (1984 - 1994)
    킨테츠에서 구원왕을 차지하면서 아카호리 모토유키 이전까지 킨테츠의 주전 마무리로 뛰었으나 수뇌부와의 마찰로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한다. 말년에는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선수생활을 하였는데, 킨테츠의 마지막 경기가 된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경기에서 킨테츠의 대선배로서 후배 선수들과 함께 나시다 감독과 이소베 선수회장의 헹가레에 참가하기도 했다.
  • 아와노 히데유키 (1987 - 1994)
    노모 히데오 입단 직전까지 팀의 에이스 역할을 하던 좌완투수. 신인이던 1987시즌 닛폰햄 파이터즈의 니시자키 유키히로와 치열한 신인왕 경쟁을 벌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우락부락한 마초적인 이미지가 대세였던 일본 프로야구에 니시자키와 더불어 TV 드라마에 나오는 탤런트같은 호리호리한 몸매에 미남형의 얼굴로 얼빠 여성팬들을 양산하면서 라이벌 니시자키와 더불어 「트렌디 에이스」라고 불렸다. 1989년 우승에 공헌했지만 그 때의 무리로 부상을 입으면서[33] 현역 후반기엔 요미우리 자이언츠,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를 떠돌다 당초 기대치에 못미치는 통산 75승을 끝으로 은퇴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말년에 요코하마에서 중간계투로 반등하여 1998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하며 무관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었다. 킨테츠 해산 당시엔 요미우리 1군 투수코치로 재직중이었고, 이후 요코하마, 요미우리, 주니치에서 투수코치로 재직했다. 2022년부턴 재차 해설자로 복귀.
  • 노모 히데오 (1990 - 1994)
  • 사노 시게키 (1991 - 1999)
    90년대 초중반 중간계투로 활약하면서 1996년 일본프로야구 최초로 연봉 1억엔 중간계투가 되었던 선수이다. 그러나 정작 이 이후엔 부상으로 먹튀가 되면서 주니치, 오릭스를 떠돌다가 은퇴했다(...) 은퇴 후엔 방송인 등으로 꾸준히 활동 중. 여담으로 선수 시절때부터 탈모가 심했는데, 이걸 역으로 활용해서 선수 시절 때나 은퇴 후 OB 시합 출장 때 탈모를 이용한 개그씬을 매번 보여준다(...)
    2023년 4월, 중증하지허혈로 인해 입원, 오른발 가운데 발가락을 절단했는데, 2024년 4월 30일, 추가 감염증으로 인해 오른팔을 절단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심장판막증과 당뇨병, 동맥경화 등 종합적인 병증에 더해 감염증이 발생한 것이 원인으로, 매일 격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
  • 코다 이사오 (1995 - 2001)
    본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주축 선발진 중 한 명이었으나 성적 부진으로 경쟁에서 밀려나 킨테츠로 트레이드되었다. 킨테츠에선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뛰었고 은퇴 직후 2년간 불펜 코치를 역임했다.
  • 오츠카 아키노리 (1997 - 2002)
  • 모리타 코키 (1998 - 2002)
  • 나르시소 엘비라 (2000 - 2001)
  • 카도쿠라 켄 (2000 - 2003)
  • 미사와 코이치 (2001 - 2003)

3.4. 포수

3.5. 내야수

  • 코다마 아키토시[34] (1953 - 1967)
    펄스 - 버팔로 - 버팔로즈 시대를 모두 거쳐간 팀의 원조 프랜차이즈 스타. 베스트나인을 4년 연속 수상을 포함해 도합 5번이나 수상하고 3할 타율도 마찬 가지로 4년 연속을 포함, 도합 6번이나 달성할 만큼 뛰어난 실력을 자랑한 3루수였다. 킨테츠에서의 마지막 해였던 1967년엔 선수 겸 감독까지 맡았지만 팀의 최하위 탈출을 막지 못하고 1년만에 해임되었고, 결국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하여 말년을 보냈다. 공교롭게도 선수 겸 감독을 맡으면서 지나치게 늘어난 중임 탓인지 급격하게 기량이 떨어지는 바람에 2000안타까지 단 37안타를 남겨둔 상태에서 34세라는 다소 이른 나이에 은퇴하고 말았다. 2019년 5월 19일에 신장암으로 83세의 나이로 별세.
  • 도이 마사히로 (1962 - 1974)
  • 이시와타 시게루 (1971 - 1982)
    그 유명한 에나츠의 21구 당시 번트 실패와 마지막 삼진으로 팀의 일본시리즈 패전을 결정시켜버리고 만 것으로 유명한 비운의 인물. 그 점을 빼면 현역 시절 베스트나인을 2차례 수상했던 괜찮은 유격수였지만 1981년 이후 기량이 악화되며 결국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말년을 보냈다. 은퇴 후 킨테츠에서 스카우트를 맡다가 2000~2004년에 1군 감독으로 승격한 나시다 마사타카의 후임으로 2군 감독직을 역임했고 2004년 킨테츠가 해체되면서 킨테츠 최후의 2군 감독이 되었다. 이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도 코치직을 역임했다.
  • 하다 코이치 (1972 - 1989)
  • 오오이시 다이지로 (1981 - 1997)
    킨테츠를 대표하는 공격형 2루수. 1983년 후쿠모토 유타카의 14년 연속 도루왕 기록을 저지한 것을 포함해 통산 4차례 도루왕에 올랐고, 20-20도 두번이나 기록했다. 은퇴 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수석코치와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을 역임했다.
  • 카네무라 요시아키 (1982 - 1994)
    재일교포 3세로 한국명은 김의명(金義明). 고3시절 에이스 겸 4번타자로 모교인 호토쿠가쿠엔 고교를 고시엔 우승으로 이끈뒤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되어 장기간 팀의 주축선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말년엔 출장이 급감하며 결국 주니치 드래곤즈,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말년을 보냈다. 1986년 7월 17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전에서는 사상 40번째로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했는데, 이는 쇼와 시대 최후의 사이클링 히트 기록이다.[35] 은퇴 이후는 야구 평론가로 지내는데, 출신이 출신인 만큼 오릭스 버팔로즈를 유독 편애하며[36], 오릭스의 홈인 오사카 야구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한신 타이거스에 대해서 안좋게 말한다는 논란이 있다.[37]
  • 무라카미 타카유키 (1984 - 2000)
  • 이시이 히로오 (1990 - 1996)
    90년대 전반기에 4번을 맡아 브라이언트와 쌍포를 이루었던 슬러거. 93년의 최다안타 1위(.309 147안타 22홈런 80타점), 94년의 타점 1위 및 1.001의 OPS로(.316 154안타 33홈런 111타점) 전성기를 누렸으나 4번타자 연속출전을 위하여 참아왔던 부상이 재발하면서 이후 기량과 시합출전 빈도가 급격히 하락. 요미우리로 이적해서는 먹튀4번 대열에 합류했다(...) 말년의 치바 롯데 마린즈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를 거쳐 은퇴후 요식업으로 사업을 차렸다가 정계에 진출, 현재는 자민당 참의원으로 활동중이다.
  • 무토 타카시 (1996 - 2003)
    공수주를 겸비한 2루수로 기대를 모았으나 부상이 잦았다. 2000년 .311 116안타 20도루가 커리어하이. 이후 부상으로 은퇴 이후 오릭스, 라쿠텐 등에서 스카우터로 근무.
  • 필 클라크 (1997 - 2000)
    3할-30홈런을 기대할 수 있는 컨택과 파워를 모두 겸비한 강타자로 1990년대 후반 터피 로즈와 외국인 콤비 거포를 형성했다. 4년간 통산 .305 93홈런 324타점 OPS .888의 뛰어난 스탯에 1997~1999년 3년 연속으로 베스트나인에 선정되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2000년엔 왼쪽 어깨 부상과 몸에 맞는 공으로 인한 오른팔 골절상이 겹치면서 66시합 .258 10홈런 33타점에 그쳤고 복귀해도 이전과 같은 실력을 보여주긴 어려울 것이란 킨테츠 구단의 판단 하에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이후 2002년 독립리그에서 한 해만 뛴 뒤 은퇴했으며 마이너리그 타격코치,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타격코치 보좌를 거쳐 현재는 대만프로야구 웨이취안 드래곤스의 타격코치를 역임하고 있다. 여담으로 원래 킨테츠 측은 마이크 그린웰을 영입하려 했으나 그의 에이전트가 과거 다이에에서 여러 깽판을 친 것으로 유명한 케빈 미첼의 에이전트라는 이야기를 듣고 대신 클라크를 영입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린웰이 한신에서 뭘 했나를 생각하면 신의 한 수가 된 셈.

3.6. 외야수

  • 칼 볼스 (1966 - 1968)
  • 사사키 교스케 (1972 - 1982)
    1978년 타격왕. 은퇴 이 후 1996년부터 99년까지 킨테츠의 감독을 역임했으나, 4-3-5-6의 부진한 성적만을 남긴 채 물러났다. 참고로 에나츠의 21구 당시 무사 만루의 역전찬스에서 대타로 나와서 삼진을 당하면서 기적의 명승부의 조연역할을 했다.
  • 히라노 미츠야스 (1972 - 1985)
    선수 생활 전부를 킨테츠에서만 했던 프랜차이즈 외야수로, 별명은 가츠맨이다. 2023년 9월 9일 히메지시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공식 발표는 9월 17일에 이뤄졌다.
  • 쿠리하시 시게루 (1974 - 1989)
  • 후지세 시로 (1976 - 1984)
    70년대 중후반 킨테츠의 전문 대주자로써 요미우리 자이언츠 스즈키 타카히로가 기록을 깨기 전까지 통산 대주자 도루 기록(105개, 대주자 이외의 사례도 포함한 종합기록은 117개)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킨테츠가 처음으로 우승한 1979년에 기록한 대주자 도루 25개는 시즌 최다 대주자 도루 기록으로써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1979년 일본시리즈 에나츠의 21구 때 대주자로 나섰다가 견제사를 당하는 바람에 팀의 우승 실패에 일조하고 만 불행한 일화로 유명하다(...) 은퇴 후 킨테츠에서 코치, 프런트를 역임했다가 팀이 해체된 후엔 아마추어 야구계에서 지도자로 뛰는 중.
  • 야마모토 카즈노리 (1977 - 1982, 1996 - 1999)
    1970년대에 데뷔한 일본프로야구 선수 중 마지막으로 은퇴한 선수. 본래는 드래프트 번외로 킨테츠에 투수로 입단했으나 자질 미달 판정을 받아 외야수로 전향했다. 그러나 난청[38]과 부진한 성적이 겹치며 6년만에 방출되었고 이렇게 별 볼일 없는 선수로 끝나나 했지만, 재기를 노리며 배팅 센터에서 타격 연습을 하던 도중 당시 난카이 호크스의 감독이자 2군 시절부터 야마모토의 재능을 꿰뚫어보던 아나부키 요시오의 눈에 들어 난카이에 입단하게 되면서 다시 프로에서의 기회를 받았고 그 후 뒤늦게 재능이 만개하며 호크스의 주축 타자로서 자리잡는다. 타자로의 재기로써뿐만 아니라 난청으로 인해 타구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타구 판단에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맹훈련을 통해 약점을 만회하며 1986년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불굴의 근성으로 유명했던 선수로, 1990년대엔 그 시대에 드물었던 강한 2번타자 롤을 맡으며 번트를 대지 않는 2번타자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고 1994년엔 스즈키 이치로와 잠시나마 수위타자 경쟁을 벌여 타율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1995년 시즌 종료 후 노쇠화와 고액 연봉을 이유로 2번째 방출을 겪었으나 이번엔 킨테츠 시절 선배이자 당시 막 감독에 취임했던 사사키 쿄스케의 부름을 받아 킨테츠에서 4시즌을 더 뛸 수 있었고, 그 와중에 1996년 잠시나마 수위타자에 오르는 활약으로 팬 투표 선발로는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장해[39] 1차전에서 호크스 말기에 뛰었던 후쿠오카 돔에서 야부 케이이치를 상대로 결승 홈런을 때리며 MVP를 수상하고 시상대 위에서 눈물을 쏟아내는 감동적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 후 은퇴시즌인 1999년에도 후쿠오카 돔에서 열린 킨테츠 - 다이에의 마지막 경기이자 본인의 은퇴경기에서 또 다시 결승 홈런을 때리는[40] 명장면과 함께 양팀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파란만장했던 현역 생활의 막을 내렸다. 현재는 요시모토 흥업 소속의 야구해설자, 예능인 등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다이에 말기에 썼던 등록명인 카즈 야마모토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 찰리 매뉴얼 (1979 - 1980)
  • 백인천 (1981)
  • 스즈키 타카히사 (1985 - 2000)
    1980년대 중후반부터 교세라 돔 오사카 이전 첫 해인 1997년까지 킨테츠의 중심타선의 한 축을 맡았던 강타자. 3할을 한 번도 기록한 적이 없을 정도로 컨택은 떨어졌으나, 통산 192홈런 및 4년 연속 20홈런을 기록한 장타력과 수비에서 부상을 무서워 않는 허슬 플레이를 보여주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은퇴 후엔 2군 코치로서 후배 선수들을 양성했으나, 킨테츠 구단 최후의 해였던 2004년 5월 17일 급성 기관지염으로 향년 40세의 젊은 나이에 급작스럽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팀으로써의 마지막 홈경기였던 9월 24일 대 세이부 라이온즈 전에서 킨테츠 선수단은 세이부를 3:2로 격파한 뒤 마지막으로 팀 사진을 찍을 때 스즈키의 사진을 가운데에 놓고 함께 찍으며 그의 넋을 기렸다.
  • 아라이 히로마사 (1986 - 1992)
  • 벤 오글리비 (1987 - 1988)
    1980년 아메리칸리그 홈런왕.
  • 랄프 브라이언트 (1988 - 1995)
    1988년 시즌 도중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이적해와, 그해 74경기에서 34홈런을 기록하며 하위권을 전전하던 팀을 일약 우승 경쟁에 끼워넣는 깜짝 활약을 보였다. 이해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10.19에서도 홈런을 때렸다. 다음 해인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뛰며 49홈런을 치며 홈런왕, 리그 MVP를 차지했는데 특히 우승을 다투던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시즌 마지막 더블헤더 경기에서 두 경기에 걸쳐 4연타수 홈런을 때려내는 하드캐리를 선보이며 킨테츠를 일본시리즈까지 끌고 간다. 이후에도 1993~1994년 홈런왕, 1993년 타점왕을 차지하면서 킨테츠의 주포로서 오랜 기간 활약했다. 상술했듯 도쿄돔 천장 스피커를 맞추는 타구를 때려낼 정도의 상상을 초월하는 장타력으로도 유명했지만, 반면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시즌 200삼진 및 역대 시즌 삼진 1~3, 5위를 독식하는 흠좀무스런 호쾌한 선풍기 스윙으로 유명 했다.
  • 나카네 히토시 (1989 - 1997)
    킨테츠 시절엔 준레귤러로 활약하다가, 1998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하여 이해 플래툰+ 대타 등으로 맹활약하며 구단 사상 38년만의 우승에 공헌한다.
  • 터피 로즈 (1996 - 2003)

3.7. 감독

3.8. 최후의 멤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마지막 해였던 2004년의 멤버들이다.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영구 결번

3.8.1. 감독 및 코칭스태프

3.8.2. 투수

  • 11. 카와지리 테츠로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라쿠텐 행
    한신 시절 이종범에게 던진 사구 때문에 본의 아니게 한국 야구팬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던 선수. 이 선수가 던진 사구로 팔꿈치 골절을 당한 이종범이 그 전에 보여줬던 기량과 그 후에 보여줬던 기량이 너무나 차이가 나서 마치 이 선수 때문에 이종범의 일본 프로야구에서의 수명이 단축된 것처럼 받아들여졌다.[42]
  • 12. 야마무라 히로키 (2000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라쿠텐 행
  • 13. 아리메 카네히사 (2002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라쿠텐 행
  • 14. 카토 신이치 (2002 - 2004) - 시즌 후 은퇴
    킨테츠가 해체 전까지 유일하게 FA로 영입했던 선수로, 난카이/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오릭스 블루웨이브 3구단에서 선발 투수로 뛰었던 저니맨이다. 킨테츠에서도 선발진의 일원으로 뛰었지만 부상과 노쇠화 때문에 기대치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3년간 29등판(28선발) 8승 10패의 미미한 성적에 그쳤고, 2004년 시즌 종료 후 전력외 통보를 받고 방출되었는데 분배드래프트가 실시되기 전에 방출되었기에 분배드래프트에 참여하지 못했고 다른 구단에서의 영입 제안도 없어서 그대로 은퇴했다. 은퇴 후엔 해설가와 친정팀 호크스의 투수 코치를 맡았다가 지금은 큐슈 사회인야구 팀 감독을 맡고 있다.
  • 15. 후쿠모리 카즈오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라쿠텐 행
  • 17. 카츠키 료타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오릭스 행
  • 18. 야마모토 쇼고 (2001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오릭스 행
  • 19. 아카호리 모토유키 (1989 - 2004) - 시즌 후 은퇴
    1990년대 퍼시픽리그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써, 구원왕을 5번 수상할 정도의 출중한 실력을 가진 선수였다. 한편으로 이쪽도 혹사의 희생양이기도 했는데, 오기 아키라 감독이 마지막으로 킨테츠를 지휘한 1992년에 50시합에 등판해[43] 무려 130이닝을 던지면서 규정이닝까지 채우고 구원왕과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동시에 수상했던 일화가 있으며, 그 후에도 근육통 등으로 52이닝에 그친 1995년을 제외하곤 매년 70이닝 이상을 소화할 정도로 계속해서 등판하며 킨테츠의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결국 1998년 이후론 그동안의 혹사가 부상으로 되돌아오면서 마무리 투수 자리에서 밀려난 것도 모자라 부상에 시달리며 제대로 출장조차 못했고, 결국 킨테츠가 해산된 2004년에 방출되어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엔 오릭스 버팔로즈, 주니치 드래곤즈 등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하다가 2024년부터 일본프로야구 2군에 새로 참가하게 된 쿠후 하야테 벤처스 시즈오카[44] 감독에 취임했다. 또한 2010년에 SK 와이번스 2군 투수코치 직을 맡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 21. 이와쿠마 히사시 (2000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오릭스에 지명되었으나 합류 거부. 이후 현금트레이드로 라쿠텐 행
  • 22. 아이쿄 히사시 (2001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라쿠텐 행
  • 23. 케빈 번 (2003 - 2004) - 자유계약신분으로 오릭스 행
  • 24. 타카무라 히로시 (1992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라쿠텐 행
    1992년 신인왕. 킨테츠 최후의 신인왕 수상자. 현재 소프트뱅크 호크스 투수코치로 재직중.
  • 25. 제레미 파웰 (2001 - 2004) - 자유계약신분으로 오릭스 행. 이후 요미우리를 거쳐 소프트뱅크에서 은퇴.
    등록명 J.P.
  • 30. 헥터 카라스코 (2004) - 자유계약신분으로 미국 메이저리그 워싱턴 내셔널스 행
    1년간 활약했지만 구단 합병과 관련하여 프로야구 팀 재편문제로 인해 킨테츠 선수 뿐만 아니라 프로야구 선수회에서도 반발하며 반대시위를 투쟁을 하는데, 카라스코 본인도 메이저리그에 있을때 비슷한 문제를 격은 적이 있어서 킨테츠 선수단에게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고 한다.
  • 33. 타카기 야스나리 (2000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오릭스 행. 이후 요미우리에서 은퇴.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마지막 승리투수.
  • 34. 코이케 히데오 (1993 - 1999, 2002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라쿠텐 행
  • 36. 아사이 히데키 (2002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라쿠텐 행. 이후 요미우리에서 은퇴. 현재 요미우리 구단직원으로 재직중.
  • 40. 세키구치 이오리 (2001 - 2004) - 시즌 후 은퇴
  • 48. 아베 켄타 (2003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오릭스 행
  • 49. 요시다 토요히코 (2002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라쿠텐 행
  • 54. 미야모토 다이스케 (2000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오릭스 행
  • 60. 후지사키 히로노리 (1999 - 2004) - 자유계약신분으로 라쿠텐 행
  • 65. 콘도 카즈키 (2002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오릭스 행. 2020년 야쿠르트에서 방출 통보를 받았는데 현역 연장 의사를 표명하며 12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에 나갔다. 여기서 합격해서 새 팀을 구할 시 킨테츠 최후의 현역 투수가 될 수 있었으나 끝내 팀을 구하지 못하고 독립리그행.
  • 99. 요시카와 카츠나리 (2000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오릭스 행

3.8.3. 포수

3.8.4. 내야수

  • 3. 요시오카 유지 (1997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라쿠텐 행
    원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투수로 데뷔했으나 이후 타자 전향을 거쳐 노망주로 머무르다 트레이드로 킨테츠에 이적한 뒤 타격 포텐이 터지면서 중심타선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라쿠텐 이적 후에도 창단 첫 해 팀의 중심타자로 활약하다 서서히 노쇠화가 찾아오며 은퇴했고, 이후 닛폰햄 등에서 코치를 역임했다.
  • 4. 타카스 요스케 (1998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라쿠텐 행
  • 5. 나카무라 노리히로 (1992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오릭스에 지명되었지만 합류 거부 이후 MLB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킨테츠 최후의 4번타자. 터피 로즈와 함께 공포의 중심타선을 형성해 2001년 우승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호쾌한 풀스윙과 견고한 3루 수비로 유명했으나, 2004년 킨테츠 해체와 함께 예정되어 있던 오릭스 이적을 회피하여 도전했던 메이저리그에서 실패를 맛본 후 오릭스, 주니치, 라쿠텐, 요코하마 4팀을 전전하는 저니맨 인생을 걸었다. 이 중 주니치 시절엔 2007년 일본시리즈에서 팀을 53년 만의 일본시리즈 제패로 이끄는 맹활약으로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 10. 미즈구치 에이지 (1991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오릭스 행
  • 32. 마에다 타다토키 (2000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라쿠텐 행
    2005년 시즌 도중 트레이드로 한신 이적.
  • 37. 나가이케 야스오 (2003 - 2004) - 자유계약 신분으로 라쿠텐 행
  • 38. 야마시타 카츠미 (2000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라쿠텐 행
  • 41. 아베 마사히로 (2001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오릭스 행
  • 43. 야마사키 코지 (1999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오릭스 지명 직후 트레이드로 히로시마 행. 이후 오릭스 재이적(2008) - 세이부(2013) - 라쿠텐(2015)을 거쳐 2015시즌 종료 후 은퇴.
  • 46. 키타가와 히로토시 (2001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오릭스 행
    위에서 언급했던 2001년 구단 역사상 마지막 퍼시픽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3점차 역전 끝내기 대타 만루 홈런의 주인공. 원래는 한신 타이거스의 대형 포수 유망주로 각광받았으나 제대로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킨테츠로 트레이드된 뒤 내야수로 전향하며 뒤늦게 실력이 만개했고 이후 오릭스 버팔로즈에서도 중심타자로 활약한다. 현재는 데뷔팀인 한신 타이거스의 2군 타격코치로 재직중이다.
  • 62. 호시노 오사무 (2002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라쿠텐 행
    본래는 한신 타이거스에서 주전 경쟁을 벌였으나 경쟁에서 밀린 채 킨테츠로 트레이드되었고, 킨테츠 이적 후에도 준주전이나 백업 멤버를 맡았다. 킨테츠 구단 사상 최종전이었던 2004년 9월 27일 오릭스 블루웨이브 원정경기에서의 마지막 타자이기도 하다.

3.8.5. 외야수

  • 00. 모리타니 아키히토 (1998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라쿠텐 행
  • 0. 마스다 다이스케 (2001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라쿠텐 행
  • 7. 오무라 나오유키 (1994 - 2004) - FA 선언 이후 소프트뱅크 행
  • 8. 이소베 코이치 (1997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라쿠텐 행
    팀 최후의 선수회장. 프로야구 재편 문제에서 선수회 회장인 후루타 아츠야와 함께 선봉에 서서 싸웠지만, 그 댓가로 빈약한 전력의 신생구단인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귀양가듯이 이적되어야 했다. 그래도 라쿠텐의 수뇌부와 팬들에게 개국공신으로 인정받았고, 선수로서 은퇴한 뒤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라쿠텐에서 코치직을 수행중하다가 현재는 프런트로 전임.
  • 9. 타카노 후미토시 (2000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라쿠텐 행
  • 26. 시모야마 신지 (2003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오릭스 행
  • 27. 사카구치 토모타카 (2003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오릭스 행.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출신 선수 중 마지막까지 현역으로 뛰었던 선수.[45] 분배 드래프트로 오릭스로 간 이후 포텐이 터지면서 준수한 컨택과 수비를 자랑하며 2011년까지 활약했으나 이후 부진을 이어가다 2015년을 끝으로 방출되었고, 이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한 후 부활에 성공해 부상으로 거의 못 나온 2019년을 빼곤 2020년까지 주축 타자로 활약을 이어갔다. 이후 기량 하락으로 백업으로 밀려나 2022년을 끝으로 은퇴했고, 이로써 킨테츠 출신 선수들은 사카구치를 끝으로 모두 모두 현역에서 물러났다.
  • 42. 래리 반스 (2004) - 시즌 후 미국 메이저리그 플로리다 말린스 산하 트리플A팀 앨버커키 아이소토프스 행
  • 50. 오니시 히로아키 (2003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오릭스 행
  • 61. 카와구치 켄시 (1994 - 2004) - 시즌 후 분배드래프트로 라쿠텐 행

4. 유니폼

4.1. 1966 ~ 1973 전기리그

파일:buffaloes66u.jpg
LA 다저스의 유니폼에서 모티브로 딴 유니폼. 필기체 로고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홈/원정 색은 이전과 동일하게 흰색/ 회색.

모자와 스타킹은 보스턴 레드삭스를 본땄는데, 모자 로고가 K( 킨테츠)와 B( 버팔로즈)를 합친 형태에서 K를 뗀 보스턴 레드삭스와 비슷한 형태인 B로 바뀌었고, 스타킹은 윗부분이 짙은 남색에 3개의 두꺼운 흰 선이 그려진 형태, 아랫부분이 주황색인 디자인이었다. 왼쪽 어깨엔 킨테츠 버팔로즈를 상징하는 맹우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중간인 1968년에 홈 유니폼 폰트가 둥글게 바뀌었고, 1972년엔 모자챙이 주황색으로 바뀌었으며, 1969~71년엔 B 로고 대신 맹우 로고를 그려넣은 헬멧을 따로 쓰기도 했다. 참고로 맹우 로고가 그려진 헬멧은 1974년 디자인 변경 후에도 모자챙만 빨간색으로 바뀐 형태로 종종 사용되었다. 얼터 헬멧이라고 봐도 좋을 듯.

4.2. 1973 후기리그

파일:buffaloes73u.jpg
1973년 전기리그를 최하위로 마치자 분위기를 바꿀 겸 칙칙하기만 한 팀 컬러를 바꿔보려 한 건지 목, 어깨 끝부분, 바지 옆면에 남색- 빨간색의 이중선을 도입하고, 스타킹을 주황색의 단색 스타킹으로 바꿨다. 그러나 후기리그도 최하위로 마치면서 반년밖에 가질 못했다.

4.3. 1974 ~ 1996

파일:buffaloes74u.jpg
1974 ~ 1976년[46]
파일:buffaloes78u.jpg
1977 ~ 1996년

무려 23년 동안이나 사용한, 킨테츠 버팔로즈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니폼. 주황색을 버리고 빨간색을 새로이 팀 컬러에 도입했다. 유니폼은 70년대의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유니폼[47]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유니폼을 단추형에서 라운드넥형 벨트레스 유니폼으로 바꿨으며, 스타킹은 1973년 전기리그 때까지 쓴 디자인을 주황색을 빨간색으로 바꿔 재도입했고 모자 챙과 로고가 주황색에서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어깨 부분은 빨간색을 새로이 넣었고, 그에 맞춰 어깨의 맹우 로고도 애틀란타 브레이브스가 당시 유니폼에 사용한 로고와 엇비슷한 로고로 바뀌었다. 허리 부분은 남색 선에 빨간색 바탕.

후에 1977년부터 새로이 디자인이 바뀌는데, 어깨 부분의 로고가 다시 맹우 로고로 돌아왔고 맹우 로고의 색깔이 남색으로 바뀌었다.(눈 부분은 빨간색) 이듬해인 1978년엔 선수명을 도입하면서 다시 벨트를 도입했고, 이해 후기리그부터 그때까지 쓰던 남색 모자를 버리고 그 유명한 3색 모자를 도입한다. 모자 형태는 챙은 빨간색, 앞부분은 하얀 바탕에 KINTETSU BUFFALOES맹우 로고가 그려져 있고, 앞부분 위쪽과 뒷부분은 남색, 옆부분은 빨간색의 형태로 이뤄져 있었다. 지금도 킨테츠 버팔로즈 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한 모자. 참고로 이 모자의 모티브를 따온 것은 몬트리올 엑스포스.

만년 최하위권 지하철 구단이란 오명을 씻고 1975년 후기리그 우승, 1979년 첫 퍼시픽리그 우승, 1980년 리그 연패, 1989년 극적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반면 가을야구에선 에나츠의 21구로 유명한 1979년 일본시리즈에서의 통한의 패배, 첫 우승까지 단 1승만 남겨두고 리버스 스윕을 당한 1989년 일본시리즈 등 비운의 콩라인으로 남게 된 유니폼이기도 하다(...)

KBO 리그 태평양 돌핀스의 1994~1995년 유니폼이 이 유니폼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4.4. 1997 ~ 2004 홈 유니폼

파일: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긴데쓰2.jpg
교세라 돔 오사카로 홈구장을 바꾸면서 유니폼을 새로이 일신했는데, 유니폼에서 빨간색이 사라지고 다시 흰색 단색으로 바뀌었고 어깨 부분의 맹우 로고는 새로 나온 구단 마스코트인 버필리드의 얼굴로 바뀌었다. 단, 목 부분과 어깨, 팔 끝부분, 바지 옆면에 남색 라인을 새로 도입하였다. 구단 로고도 새롭게 디자인되었으며 메인 로고와 등번호 색깔이 주황색으로 바뀌었다.[48] 모자와 스타킹도 다시 남색 단색으로 바뀌었고, 모자에 쓰여 있던 팀명이 사라졌다. 선수명은 푸른색으로, 모자의 맹우 로고는 흰색으로 변경.

4.5. 1997 ~ 1998 원정 유니폼

파일:buffaloes97vu.jpg
1997년 홈 유니폼의 새 디자인 적용과 함께 원정 유니폼도 변경 되었다. 원정 유니폼 로고도 홈 유니폼과 같은 형태로 새롭게 디자인되었으며 빨간색과 짙은 남색의 두 가지 유니폼을 원정 유니폼으로 채택했다. 상의의 어깨, 목 부분의 선은 색 구분을 위해 흰색으로 변경.

빨간색 유니폼은 금요일~ 일요일 원정경기 때, 짙은 남색 유니폼은 화요일~ 목요일 원정경기 때[49] 입었다고 한다. 바지와 어깨 부분의 버필리그 얼굴 로고는 홈과 동일했고, 목 부분과 어깨, 팔 끝부분에 흰색 라인을 새로 도입하였다.

등번호와 선수명의 경우, 등번호는 빨간색과 짙은 남색 버전 모두 앞부분은 푸른색으로 동일했지만 뒷부분의 등번호는 빨간색 버전은 똑같이 푸른색으로 한 반면 짙은 남색 버전은 홈과 똑같이 주황색으로 했다.(선은 흰색) 선수명의 경우는 빨간색 버전은 흰색, 짙은 남색 버전은 홈과 똑같이 푸른색.(마찬가지로 선은 흰색) 어깨 부분의 버필리그 얼굴 로고는 홈과 동일.

다만 이 시기의 유니폼은 이전까지의 팀 컬러를 찾기 힘들고, 디자인도 이전에 비해 다소 밋밋해 보였는지 2001년 우승 때까진 별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나 빨간색 유니폼은 팬/선수단 모두에게 심한 반발을 얻었는데, 사실 짙은 남색 유니폼은 본래는 사용할 계획이 없었으나 팬/선수단 모두의 빨간색 유니폼에 대한 반발이 너무 심해서 급하게 도입한 것이었다고 한다.

4.6. 1999 ~ 2004 원정 유니폼

파일:attachment/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긴데쓰3.jpg
1999년에 연고지인 오사카를 팀명에 반영해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가 되면서, 킨테츠(Kintetsu)라 적혀있던 유니폼의 원정 유니폼 로고도 오사카(Osaka)로 바뀌었다.[50] 하지만 빨간색 유니폼은 결국 팬/선수단의 반발을 이기지 못하고 1999년을 끝으로 퇴출당하고 말았다.

5. 응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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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 노모 히데오
  • 요시이 마사토 (야쿠르트 스왈로스-뉴욕 메츠-콜로라도 로키스-몬트리올 엑스포스-일본 복귀후, 오릭스 블루웨이브/버팔로스-치바 롯데 마린스)
  • 오츠카 아키노리 (주니치 드래곤즈-샌디에이고 파드리스-텍사스 레인저스)
  • 나카무라 노리히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일본 복귀후 오릭스 버팔로스-주니치 드래곤즈-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요코하마 베이스타스/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 후쿠모리 카즈오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텍사스 레인저스-일본 복귀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 이와쿠마 히사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시애틀 매리너스-일본 복귀후, 요미우리 자이언츠)

7. 역대 성적

­ 리그 우승[51]
­ 2위
­ 3위
B클래스
<rowcolor=#ffffff> 연도 정규시즌 순위 최종순위 팀이름 경기수 승률 포스트시즌
1950 7위/7팀 <colbgcolor=#0066b3><colcolor=#ffffff> 7위 킨테츠 펄스 120 44 72 4 .379
1951 7위/7팀 7위 98 37 56 5 .398
1952 7위/7팀 7위 108 30 78 0 .278
1953 7위/7팀 7위 120 48 69 3 .410
1954 4위/8팀 4위 140 74 63 3 .540
1955 5위/8팀 5위 142 60 80 2 .429
1956 5위/8팀 5위 154 68 82 4 .455
1957 6위/7팀 6위 132 44 82 6 .356
1958 6위/6팀 6위 130 29 97 4 .239
1959 6위/6팀 6위 킨테츠 버팔로 143 39 91 3 .300
1960 6위/6팀 6위 131 43 87 1 .331
1961 6위/6팀 6위 140 36 103 1 .261
1962 6위/6팀 6위 킨테츠 버팔로즈 131 57 73 1 .439
1963 4위/6팀 4위 150 74 73 3 .503
1964 6위/6팀 6위 150 55 91 4 .377
1965 6위/6팀 6위 140 46 92 2 .333
1966 6위/6팀 6위 133 48 82 3 .369
1967 6위/6팀 6위 132 59 71 2 .454
1968 4위/6팀 4위 135 57 73 5 .439
1969 2위/6팀 2위 130 73 51 6 .589
1970 3위/6팀 3위 130 65 59 6 .524
1971 3위/6팀 3위 130 65 60 5 .520
1972 2위/6팀 2위 130 64 60 6 .516
1973 전기 6위/6팀
후기 6위/6팀
6위 130 42 83 5 .336
1974 전기 5위/6팀
후기 4위/6팀
5위 130 56 66 8 .459
1975 전기 3위/6팀
후기 1위/6팀
2위 130 71 50 9 .587 플레이오프 (1-3 vs 한큐)
1976 전기 5위/6팀
후기 4위/6팀
4위 130 57 66 7 .463
1977 전기 3위/6팀
후기 6위/6팀
4위 130 59 61 10 .492
1978 전기 2위/6팀
후기 2위/6팀
2위 130 71 46 13 .607
1979 전기 1위/6팀
후기 2위/6팀
우승 130 74 45 11 .622 플레이오프 (3-0 vs 한큐)
일본시리즈 (3-4 vs 히로시마)
1980 전기 2위/6팀
후기 1위/6팀
우승 130 68 54 8 .557 플레이오프 (3-0 vs 롯데)
일본시리즈 (3-4 vs 히로시마)
1981 전기 2위/6팀
후기 5위/6팀
6위 130 54 72 4 .429
1982 전기 1위/6팀
후기 3위/6팀
3위 130 63 57 10 .525
1983 4위/6팀 4위 130 52 65 13 .444
1984 4위/6팀 4위 130 58 61 11 .487
1985 3위/6팀 3위 130 63 60 7 .512
1986 2위/6팀 2위 130 66 52 12 .559
1987 6위/6팀 6위 130 52 69 9 .430
1988 2위/6팀 2위 130 74 52 4 .587
1989 1위/6팀 우승 130 71 54 5 .568 일본시리즈 (3-4 vs 요미우리)
1990 3위/6팀 3위 130 67 60 3 .528
1991 2위/6팀 2위 130 77 48 5 .616
1992 2위/6팀 2위 130 74 50 6 .597
1993 4위/6팀 4위 130 66 59 5 .528
1994 2위/6팀 2위 130 68 59 3 .535
1995 6위/6팀 6위 130 49 78 3 .386
1996 4위/6팀 4위 130 62 67 1 .481
1997 3위/6팀 3위 135 68 63 4 .519
1998 5위/6팀 5위 135 66 67 2 .496
1999 6위/6팀 6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135 54 77 4 .412
2000 6위/6팀 6위 135 58 75 2 .436
2001 1위/6팀 우승 140 78 60 2 .565 일본시리즈 (1-4 vs 야쿠르트)
2002 2위/6팀 2위 140 73 65 2 .529
2003 3위/6팀 3위 140 74 64 2 .536
2004 5위/6팀 5위 133 61 70 2 .466
<rowcolor=#000000> NPB 통산 55시즌 4회 우승 7252 3261 3720 271 .467 일본시리즈 0회 우승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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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킨테츠 소속 한국 국적 선수들 중에서 유일한 한반도 출신 선수. [2] 참고로 Buffalo의 복수형은 Buffalo 또는 Buffaloes이다. 즉 Buffalo 자체도 복수형이므로 바꾸기 전이든 후든 복수형인 건 변함이 없는 셈. [3] 2위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1978년, 3위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1975년. 참고로 2위인 야쿠르트와 1위인 킨테츠 이 두 구단에서 우승을 이끈 주역이 있으니 그가 바로 前 필라델피아 필리스 감독인 찰리 매뉴얼. 특히 매뉴얼은 1979년에 양대리그 출범 이후 외국인 선수로써는 최초로 MVP를 수상했다. [4] 4년 전인 1975년에 후기리그에서 우승하고 그 해 정규시즌 1위까지 달성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정규시즌 2위였던 전기리그 우승팀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패배하면서 한큐가 첫 일본시리즈 제패까지 하는 것을 바라봐야 했다.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이 킨테츠 감독 이전에 한큐에서 전성기를 열었지만 일본시리즈에선 번번히 요미우리 자이언츠한테 패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 이 때의 울분은 4년 뒤인 1979년 첫 우승 때 플레이오프에서 한큐를 꺾는 것으로 갚았다. 재밌는 건 이 땐 4년 전과 다르게 정규시즌 순위와 전후기리그 우승이 뒤바뀌어서 킨테츠가 전기 우승에 시즌 2위, 한큐가 후기 우승에 시즌 1위였다. [5] 특히 1979년 일본시리즈는 7차전 9회 말에 에나츠의 21구라는 명장면을 선사하며 3승 4패로 아쉽게 첫 우승을 놓쳤고, 1980년에도 똑같은 스코어로 우승을 놓치고 말았다. 심지어 2번 모두 2승을 먼저 따내고 무너진 건 덤. [6] 그것도 하필 리버스 스윕이 결정된 7차전이 후지이데라 구장 홈경기였다. 킨테츠 팬들 입장에선 창단 40여년 만에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후지이데라 구장에서 열린 일본시리즈에서 저런 굴욕을 목도해야 했던 셈. 대신 오기 감독은 이후 오릭스 블루웨이브 감독으로 영전한 1996년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꺾고 우승하면서 이 때의 굴욕을 씻어낼 수 있었다. [7] 야쿠르트도 킨테츠 못지 않은 핵타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로베르토 페타지니, 알렉스 라미레스, 이나바 아츠노리, 후루타 아츠야, 이와무라 아키노리 등이 대표적이다. [8] 참고로 현행 계산법과 다른 이유는 당시 무승부를 0.5승 0.5패로 계산했기 때문이다. 현행 규정대로 계산한다면 승률 .230이 되어 아예 단독 최하위가 된다. [9] 참고로 시즌 100승 팀은 나온 적이 없다. 1955년 츠루오카 카즈토 감독이 지휘하던 난카이 호크스가 100승에서 단 1승 모자란 99승을 거둔 것이 최고 기록이다. [10] 이전까지 최하위만 거듭한 탓에 사실상 킨테츠가 해체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나, 이 해 어찌저찌 분전하면서 6위를 기록해 탈꼴찌와 함께 해체를 면했고, 대신 꼴찌로 떨어진 다이에이 유니온즈 마이니치 오리온즈와 합병당했다. 아이러니한 건 이 제안을 했던 당시 퍼시픽리그 총재가 다름아닌 다이에이 사장 겸 구단주 나가타 마사이치였다는 것. 대신 나가타는 두 구단이 합병한 다이마이 오리온즈의 경영권을 독차지하게 되어 세간에서 오히려 마이니치가 다이에이한테 역합병당했다는 소리가 나돌았다. [11] 대신 코바 감독은 이듬해인 1980년 팀을 2년 연속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쇼리키상을 수상했다. [12] 현재까지 리그 우승만으로 쇼리키상을 수상한 감독은 니시모토와 호시노 센이치(2003년)뿐이고, 그 호시노 감독도 2013년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를 창단 첫 일본시리즈 제패로 이끈 공로로 한 번 더 쇼리키상을 수상했다. 참고로 리그 우승을 하지 못하고도 수상한 오 사다하루(2006년)의 경우는 당해 개최된 초대 WBC에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끈 공로로 수상했다. [13] 남코의 고전 야구 게임인 패미스타 초기작에서는 용량 문제로 이 두 구단에 난카이 호크스를 합해 '레일웨이즈'라는 철도 구단으로 퉁쳐서 수록되기도 하였다. 식품 회사가 모기업이었던 롯데 오리온즈 닛폰햄 파이터즈는 '푸즈푸즈'로 통합.(...) 퍼시픽리그 구단 중 제대로 수록된 팀은 일본시리즈의 단골손님이었던 세이부 라이온즈(라이오넬즈)한 팀 뿐. 당시 퍼시픽리그가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14] 한번 발동이 걸리면 당시 황금시대를 보내고 있던 세이부 라이온즈조차 무참히 얻어터질 지경이었고, 그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당시 세이부가 가장 까다롭게 생각하는 팀이기도 했다. 실제로 세이부 라이온즈가 1985~1994년부터 9번의 퍼시픽리그 우승을 할 동안 중간인 1989년에 연패 기록을 끊어서 그 V9 시대의 요미우리조차 이뤄내지 못했던 리그 10연패의 가능성을 막아버린 것이 바로 킨테츠였다. 자세한 건 후술할 내용 참고. [15] 그러나 9월에 노모 히데오가 퍼지는 바람에 선발진에 큰 구멍이 생기면서 다시 하락세를 탔고, 결국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우승을 내준 채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공동 2위를 기록했다. 여담으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는 이 해에 간만에 A클래스를 유지하며 16년 만의 B클래스 탈출을 노리고 있었으나 킨테츠가 후반전에 초월적인 승률을 쌓는 바람에 불과 승률 6모 차이로 4위를 기록하게 되었고 결국 4년 더 B클래스 행진을 연장하다 1998년에야 간신히 21년 만의 A클래스를 기록했다. [16] 이것도 시즌 내내 5점차를 달리다 막판에 분전해서 겨우 4점차로 내린 것이었다. 선발 로테이션을 담당한 6명의 투수 중에 션 버그만 단 1명을(이마저도 4.10) 제외한 나머지 5명이 전부 평균자책점 4.90을 넘어갔으며 그 중 3명이 5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특히 카도쿠라 켄평균자책점 6.48로 로테이션의 제 3선발 역할을 했다(...) 그나마 구원진은 선발진처럼 방화만 저질러댄 건 아니라서 오츠카 아키노리는 방어율이 4점대로 높았지만 클로저 역할을 해줬고, 무엇보다도 셋업맨 오카모토 아키라가 60경기 102.1이닝을 던지며 2.73 ERA를 기록하면서 애니콜로 활약했다. [17] '이테마에 타선'(いてまえ打線, 오사카 사투리로 '박살내라'라는 뜻의 속어)으로 대표되는 이 해의 킨테츠 타선은 20홈런 이상이 4명, 특히 3번 타자 터피 로즈와 4번 타자 나카무라 노리히로 단 둘이서 101홈런 263타점을 합작해냈으며 5번 이소베 코이치는 홈런은 17개에 불과했으나 95타점을 뽑아냈다. 클린업 트리오가 모두 타율 .315를 넘겼으며 6번 타자인 요시오카 유지도 26홈런 85타점, 7번 타자이자 규정타석 미달이었던 카와구치 켄시도 21홈런 71타점을 기록했다. 이 해의 킨테츠의 리그 성적은 78승 60패 2무 승률 .565였지만 투수진이 무너진 탓에 피타고리안 승률은 고작 71승 67패 2무 승률 .514에 지나지 않을 정도였는데, 참고로 아쉽게 리그 3연패를 놓친 2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피타고리안 승률이 75승 64패 1무 승률 .540(실제 성적은 76승 63패 1무 승률 .547)였으니 이런 심각한 투수진을 커버하고 우승까지 만든 타선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를 뒷받침하는 증거. 다만 타선을 공격력에 몰빵한 대신 주루 성적은 정반대로 별로 좋지 않아서 팀 도루가 고작 35개에 그치며 단독 꼴찌를 기록했다. 팀 득점의 핵심이었던 1번 타자 오오무라 나오유키가 고작 5개에 그쳤는데, 사실 오오무라는 통산 도루 203개에 시즌 31도루(2005년)까지 기록해본 적이 있을 정도로 나름 빠른 발을 가졌으나 1999~2002년엔 특이하리만치 도루 수가 격감했다. 참고로 팀 최다 도루는 메이저리그에서 리드오프 육성까지 생각할 정도로 나름 준족이었던 터피 로즈의 9개. [18] 더블헤더 전까지 반 게임차로 세이부에게 뒤져 있었는데, 이 더블헤더에서 홈팀인 롯데 오리온즈를 상대로 전승하면 역전 우승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더블헤더에서 1차전은 9회 초 무승부가 되면 그대로 끝장인 상황에서 은퇴 예정인 나시다 마사타카의 현역 마지막 안타였던 극적인 적시타로 이겼으나, 2차전을 4시간을 넘으면 새로운 이닝에 들어갈 수 없다는 당시 규정으로 인해 무승부에 그치면서 우승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필 경기 도중 주루사 판정을 놓고 당시 롯데 감독 아리토 미치요가 격하게 항의하여 시간을 질질 끌게 만든 게 4시간을 넘기게 된 원인이라 킨테츠 팬들 입장에서는 피눈물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 참고로 이 날 더블헤더는 퍼시픽리그 역대 정규시즌 TV중계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30.9%) [19] 도쿄돔에서 천장을 맞춰 그라운드 룰로 인정홈런을 날린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일본프로야구 외국인 타자 중 최고의 파워 히터로 손꼽히는 랄프 브라이언트가 시즌 막판 우승이 걸린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10월 12일 더블헤더 원정경기에서 4연타수 홈런(중간에 고의사구로 출루)으로 세이부를 격파했고, 이 4연타수 홈런 덕분에 킨테츠는 선두경쟁을 벌이던 오릭스 브레이브스와 세이부를 단 1리, 2리 차이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참고로 이 4연타수 홈런은 1차전에서 3개, 2경기에서 1개를 기록했는데, 1차전에선 0:5로 지고 있다가 브라이언트가 만루홈런 1개를 포함한 홈런 3발로 혼자 6타점을 만들며 역전승, 2차전에선 2:2 동점에서 솔로 홈런을 날렸고 이 솔로 홈런이 그대로 결승타가 되면서 더블헤더를 모조리 쓸어담았다. 그야말로 필요한 순간에 나온 엄청난 임팩트. [20] 시리즈 3연승으로 스윕시리즈 직전까지 갔으나, 3차전 승리 투수였던 카토 테츠로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요미우리 타자들 박력이 모자르네요. 차라리 롯데 타자들이 더 무섭네요."라 조롱해 요미우리 타자들의 기를 되려 살려줬다. 참고로 1989 시즌 파리그 최하위가 롯데 오리온즈(...) 한편 이 인터뷰는 공개된 장소도 아닌 라커룸으로 향하는 통로에서 행해진 인터뷰였고 3연패로 몰리던 요미우리의 기를 살리기 위해 요미우리빠 기자들에 의해 발언의 취지가 왜곡되어 기사화되었다는 진실이 숨어있었다. 가토는 롯데는 언급도 안 했고 기자들이 낚시성으로 "요미우리의 타선이 롯데보다 더 약해보이지 않냐?"는 질문에 "거인은 투수력으로 우승한 팀이라서 그런지 타선은 좀..."이라고 대답했는데, 기자들이 가토의 발언을 멋대로 왜곡해 기사로 쓴 것. 어쨌든 그 때문에 요미우리 선수단이 분개한 것은 사실이고, 이 시리즈 5차전에서 하라 타츠노리가 부진을 씻는 홈런으로 시리즈의 불씨를 다시 되살렸다. 그리고 그 후는... [21] 당시 3년 연속 리그 우승에 도전하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 시즌 막판까지 치열한 격전 끝에 2.5게임 차이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혹자에 의하면 나온 홈런에 붙일 수 있는 수식어는 다 붙은 홈런이라고도 한다. 투아웃에 볼카운트 2-3가 빠지기는 했지만... 이 때 홈런을 친 선수가 2012년 한때 이대호와 클린업 트리오를 맡기도 했던 키타가와 히로토시 였다(키타가와는 2012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나 오릭스 버팔로즈의 2군 타격 코치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동영상을 잘 보면 우승 축하 세레머니에서 카도쿠라 켄, 오츠카 아키노리, 제레미 파웰, 이와쿠마 히사시등도 보인다. 기구하게도, 마지막 리그 우승의 제물이 된 상대는 몇 년 뒤 그 비참하게 제물이 된 곳의 새 주인이 되었다. [22]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대타 끝내기 만루홈런은 일본에서만 나왔다. 한국에서는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지을 때, 미국에서는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4승째를 거둘 때, 대만에서는 전기나 후기 리그 우승을 확정지을 때 해야 하는데, 매우 힘들다. 게다가 이 홈런은 만루홈런이 아니면 역전이 불가능한 3점차로 뒤진 상황에서 나왔다. 앞으로도 이정도 조건을 갖춘 상태에서 이런 홈런이 나오는 건 3국리그 통틀어서 거의 불가능할 듯. 일단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들기가 힘들다. 한국, 일본, 미국, 대만을 통틀어서 그런 상황을 만들 수 있는 게임 수부터가 1년에 7게임으로 국한되는데다 9회까지 3점차로 뒤지고 있으면 상대팀은 자동으로 자기 팀의 주전 마무리 투수를 투입한다. 그런 투수를 상대로 만루찬스를 만드는 것 자체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만루찬스를 만들고 나서 대타를 투입해야 하는데 상황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일단 대타라면 적어도 자기 포지션에서 주전자리에서 밀리는 애매한 기량의 선수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선수가 상대팀 마무리 투수의 공을 받아쳐서 담장을 넘겨야 되니... [23] 만일 이 경기에서 오릭스가 이겼으면 오릭스가 3위로 올라가고 세이부가 승차없이 4위로 추락하여 1982년부터 이어져온 세이부의 A클래스 기록이 깨질뻔했는데 기적의 만루홈런이 나옴으로써 세이부의 A클래스의 기록은 2006년까지 이어져 올수 있었다. 세이부: 늬들덕에 살았다. [24] 라쿠텐이 킨테츠의 해산으로 인해 생겨난 팀인걸 생각하면... [25] 아직도 일본 프로야구 기록. 마쓰자카 다이스케 다르빗슈 유도 8개구단의 지명을 받지는 못했다. 이와쿠마 히사시는 드래프트 4순위. [26] 킨테츠 해체 8년 후인 2012년 이나오 카즈히사의 24번이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후신구단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영구 결번으로 제정되며 다시 퍼시픽리그에 영구 결번이 생겼다. 사실 정확히는 2010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가 제정한 오오코소 요시노리의 100번이 먼저지만 오오코소는 선수가 아니라 구단 오너 겸 모기업 사장이었던 데다 일본프로야구 규정상 지배하 선수, 코치들은 두자릿 수 번호까지만 사용 가능하고 세자릿 수부터는 육성선수, 구단 스태프들만 사용 가능하게 되어 있어서 제외. [27] 9월 27일 고베구장 원정경기. 하필 마지막 상대가 합병 대상이었던 오릭스 블루웨이브였다. 경기는 2:7로 패배. 승리투수는 구대성, 패전투수는 이와쿠마 히사시. [28] 1970년대~80년대 킨테츠에서 포수로 맹활약한 프랜차이즈 스타. 킨테츠 해체 이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도 리그 우승을 이룩하는 등 감독으로서 상당한 커리어를 쌓는다. 일본시리즈 우승을 못 해서 그렇지. [29] 킨테츠:1962년~2004년, 오릭스:2005년~2022년 [30] 리그 순위에서 허구헌날 꼴찌만 찍다보니 야구팬들이 밑바닥으로만 다닌다고 붙인 멸칭이다(...) [31] 여담으로 이 당시 타이요에서는 나가시마 시게오를 차기 감독으로 초청할 계획도 있었기에 감독 취임 조건에 나가시마가 감독직을 수락하면 교대한다는 조건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계획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32] 고교에서의 혹사 여파로 인해 1군에서 패전처리로 연명하던 1970~72년에 3년 연속 올스타전 팬투표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당시 킨테츠가 지하철 야구단이라고 야유받던 만년 B클래스 비인기팀인 점을 생각하면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저 3년 연속 팬투표 1위에 뽑힐 당시 킨테츠는 암흑기를 끝내고 4년 연속 A클래스를 찍을 만큼 그럭저럭 잘 나가고 있었다. [33] 1990년 시즌부터 보크 규정이 강화되었는데, 당시 상대팀에서 아와노의 투구폼을 두고 집요하게 항의를 했다. 이로 인해서 투구폼을 바꾸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투구가 흐트러지고 이전의 혹사 후유증까지 겹치면서 1990년 시즌을 기점으로 성적이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34] 본명은 하루토시다. [35] 그 다음(41번째) 사이클링 히트는 3년 후 헤이세이 시대 원년인 1989년 7월 13일 세이부 라이온즈 아키야마 코지가 대 킨테츠 버팔로즈 전에서 달성했다. 참고로 헤이세이 시대 최후의 사이클링 히트 기록은 2019년 4월 9일 한신 타이거스 우메노 류타로가 대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 전에서 달성한 74번째 사이클링 히트이다. [36] 2020년 시즌 예상을 하라니까 대놓고 오릭스가 우승한다고 찍었다(...) 다른 평론가들은 죄다 오릭스가 꼴등을 하거나 잘 쳐줘도 5위로 예상한 판에... [37] 가장 유명한 논란이 후지나미 신타로가 코로나 19에 걸렸을 때 그룹섹스 찌라시가 일본과 한국에서 돌았고 한국에서는 거의 정설취급을 받았는데, 이 찌라시는 이 사람이 근거도 없이 말한 것으로부터 시작. 주의가 필요하다며 일축되었던 2021년 한신 타이거스 사인 훔치기 논란을 비시즌에 재점화 시킨것도 이 사람이다. [38]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든지, 고등학교 시절 선배에게 구타당한 후유증이 원인이라는 2가지 얘기가 있다. 정확한 사유는 불명. [39] 첫 출장은 1986년으로, 이땐 감독 추천 제도로 출장하였다. 그 해에도 1차전에서 MVP를 수상했다. [40] 이때 홈런을 맞은 투수였던 시노하라 타카유키는 이날 이전까지 14승 무패를 기록해 1981년 닛폰햄 파이터즈 마시바 시게쿠니 이래 2번째의 승률 10할 투수를 노리고 있었지만, 이 경기에서 야마모토에게 홈런을 맞고 패전투수가 되어 무패기록이 깨져버렸다. [41] 단수형이다. 이후 치바 감독이 퇴임한 후 명칭을 복수형인 버팔로즈로 바꾼다. [42] 다음날 가와지리가 이종범을 찾아가 사과를 했고, 그 이후 부터 이종범을 상대로 몸쪽 승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43] 심지어 마지막에 규정이닝을 채우고 평균자책점 타이틀까지 먹을 찬스가 생기자 코칭스태프들이 아예 선발 투수로 등판시켜 적극적으로 밀어줬고, 이에 보답하듯 2시합에 선발로 나서 완봉승까지 1차례 달성한 끝에 정확히 규정이닝(130이닝)을 채우고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까지 수상했다. [44] 팀의 연고지인 시즈오카현은 아카호리 자신의 고향이기도 하다. [45] 이와쿠마 히사시는 2020년을 끝으로 은퇴. 2020년을 끝으로 방출당한 콘도 카즈키 역시 새 팀을 구하지 못하고 독립리그로 떠나면서 사실상 프로 커리어가 끝났다. 때문에 현역 투수는 완전히 사라졌고 타자만 놓고 보면 사카구치가 최후의 현역 선수. [46] 그림에 보면 알겠지만 1977년에 어깨 부분의 맹우 로고를 원상복구했다. [47] 우리가 아는 그 빨간색 위주의 유니폼이 아니며,( 한큐 브레이브스가 바로 우리가 아는 그 빨간색 위주 유니폼을 그대로 가져간 사례다) 이 시기엔 파란색 위주의 유니폼을 사용했다. 참고로 행크 애런이 홈런 신기록을 달성할 때 입은 유니폼이기도 하다. [48] 다만 이때의 주황색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도 쓰던 빨간색에 좀 더 가까운 주황색의 형태였다. [49] 원래는 야간 원정경기 때 빨간색 유니폼을, 낮 원정경기 때 짙은 남색 유니폼을 사용할 계획이었지만 사용도를 양쪽 다 적절히 맞추기 위해 변경되었다고 한다. [50] 이는 한신에게 밀리는 입지를 타파하고자 낸 고육지책에 가까웠으나 당시 한국에서는 일본에서는 기업명이 있더라도 지역명을 우선시 하면서 지역팬들을 생각하는데 한국에서는 기업명을 우선시한다면서 팬들이 비판을 하는 좋은 소재가 되었다. 참고로 2024년 기준 이렇게 하는 팀은 지역명을 모기업명으로 쓰는 한신 타이거스를 빼면 요미우리 자이언츠,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그리고 히로시마 도요 카프이다. 닛폰햄과 세이부는 병기를 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지역명을 아예 넣지 않는다. [51] 볼드체는 일본시리즈 우승. 그런데 알다시피 횟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