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4 20:14:25

클레오파트라 7세/생애

1. 개요2. 초기, 실각3. 카이사르와의 관계4. 안토니우스와의 관계5. 사망

1. 개요

클레오파트라 7세의 생애에 대해 다룬다.

2. 초기, 실각

기원전 51년, 부왕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세상을 떠나자 이집트의 당시 전통인 근친 결혼에 따라 18세 나이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미 멸망의 징조가 보이고 있었다.

넓게 볼 경우 망조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타국과의 전쟁에서 이겼지만 정작 내치에 부족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여서 측근들의 부정부패를 막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급사하여 어린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 정세는 더욱 복잡해져서 셀레우코스 왕조 안티오코스 3세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해외 영토들을 차지하기 시작하는걸 시발점으로 해서 해외 영토들을 야금야금 빼앗긴다.

와중에 로마의 개입과 동맹으로 한숨 돌리나 싶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6세 시절 기원전 170년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에게 다시 패배한 후 로마 덕에 간신히 목숨을 보전하는데 성공했지만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왕위를 주장하며 서로 다투는 통에 또 다시 로마의 개입을 초래했다. 그 결과 이집트에 대한 로마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고, 외세가 자꾸 개입하다보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더욱 막장이 되었다.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왕위를 지켰으나 그도 다른 전투에서 전사한 후 사실상 로마의 보호국 수준으로 전락할 정도였다.[1][2] 거기에 더해 피지배인인 기존 이집트인들이 무려 20여 년에 걸친 장기적인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고,[3] 피지배층과 이렇게 지나치게 괴리된 상태에서 지배층 내에서도 암투와 내분이 난무했고 부정부패와 착취도 많았다. 클레오파트라가 태어나기 수십 년 전부터 이 사단이 일어나서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라의 망조가 거의 확실하다시피 해진 것이 다름아닌 클레오파트라의 시대였다.

거기에 더해 그녀의 바로 전대에 왕위에 앉았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역시 선대 왕들의 실정으로 어려워진 내치를 수습하기는 커녕 더욱 악화시킨 암군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자기 시대에서 점점 거세지는 로마의 압력이나 내정의 혼란을 신경쓰지 않고 태평하게 지냈기 때문에 '피리 부는 사람'이라는 뜻인 아울레테스라고 불리며 야유받았다. 물론,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가 정통인 후계자가 아니며 권력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로마의 세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은 고려해야 한다.[4] 그런데도 로마에 뇌물을 주거나 많은 공납을 바치는 행위 등은 이집트 사람들의 세금부담을 가증시켰다.[5]

또한 남동생이 통치하던 키프로스의 섬을 로마에 빼앗기는 것을 방치했는데 결국 시민들의 쌓였던 불만이 폭발하여 반란이 일어났다. 왕은 이 와중에 로마로 튀었고, 딸인 베레니케 4세[6]가 잠시 즉위해서 비어버린 본국의 왕좌를 채웠으나, 그는 폼페이우스 빽으로 돌아와서 베레니케 4세를 처형이란 방식으로 치워버리고 자기가 다시 왕좌를 찾았으나 크게 한 건 없었다. 그리고 아들(프톨레마이오스 13세)과 딸(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사망했다.

이런 복잡한 상황이 연신 누적된 덕에 나라가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일단 남동생과 함께 왕좌에 올랐으나, 이후 어린 남동생을 배제하고 전권을 차지하려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정치적 움직임은 큰 반발을 샀다. 그 결과 권력 투쟁에서 패하여 지방으로 쫓겨났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전권을 차지했다.[7]

3. 카이사르와의 관계

기원전 47년에 이집트를 방문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만남으로 재기의 발판을 얻었다. 마침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로마의 내전으로 인해 알렉산드리아에 피난 왔던 자신의 정적 폼페이우스를 암살한 것이 "비겁한 행동"이라며 분노하여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였는데, 클레오파트라 7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만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때 카이사르의 나이는 50대 초반, 클레오파트라 7세는 20대 초반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융단을 선물 받았는데 그 융단을 풀어보니 안에 클레오파트라가 있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의 눈을 속이기 위해 클레오파트라가 잠입한 것이다.[8][9] 그리고 카이사르는 시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의 분쟁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를 지원했다. 이를 알렉산드리아 전쟁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이 야사가 드라마틱하긴 하나, 사실 정치적으로 따져도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지원하는 결정을 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부왕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죽기 전에 '남매의 공동 통치'를 유언으로 남기고, 로마인들에게 유언의 집행을 맡겼다.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현직 집정관으로서 부왕의 유언대로 공동 통치로 되돌아갈 것을 결정한 것이다. 게다가 폼페이우스는 패장이었다고는 하나 로마의 전직 집정관이었고, 전직 집정관(프로콘술)은 공화정 로마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는 지도층 인사였다. 이런 사람을 살해한 왕을 동맹국(사실상 속국)의 단독 국왕에 앉혀놓는 것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고 또 신용하기 어렵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카이사르의 집행에 앙심을 품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 측은 펠루시온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 2만 명과 갤리선 72척을 활용해 카이사르가 소수 병력만 이끌고 있는 것을 노려 그를 공격했으나, 로마에서의 원군 도착으로 패배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나일강 부근에서 이루어진 최후의 공세에서도 패배한 뒤 도주하다 익사했고, 아르시노에 4세는 포로가 되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막내 남동생과 재혼하여 그를 명목상의 공동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14세로 세운 뒤 실권을 장악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4세의 나이가 10세에 불과했기에 권력은 완전히 클레오파트라의 것이었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카이사리온[10]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이후 카이사르를 따라 귀빈으로서 로마를 방문하기도 했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의 개선식에 참석한듯 하며 카이사르는 코끼리 40마리를 대동하고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내려왔다 한다.

자국의 최고 권력자와 내연 관계라는 타국의 미인 여왕의 방문에 로마 시민들은 흥미를 보인 사람들도 많았지만[11]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키케로는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동맹국인 이집트의 국왕이 로마 최고권력자의 손님으로 온 것이니 명분은 충분했다. 키케로에게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은 오히려 키케로가 쓸데없이 로마와 이집트의 관계를 훼방놓는 말을 한 거라고 해석하기도 할 정도. 카이사르 자신도 공사 구분에는 꽤나 철저해 클레오파트라 때문에 본처를 버리거나 큰 정치적 악수를 둔 것은 없었기에[12] 그냥 사람들이 좀 수군거리는 정도에서 그쳤다.[13]

그러나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카이사르의 장례식에도 참석했으나[14] 이집트에서 공동 통치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이집트로 급히 돌아와서 자기 아들 카이사리온을 공동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15세로 세웠다. 또한 로마 내의 카이사르 파와 반 카이사르 파의 내전에도 관여하여 카이사르 파를 지원하려 했지만 폭풍으로 실패하였다.

4. 안토니우스와의 관계

기원전 41년에는 킬리키아의 타르소스에서 제2차 삼두정의 선두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났으며, 그 역시 클레오파트라 7세와 사랑에 빠졌다. 당시에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에 쓰일 자금을 얻기 위해 만남을 요청했으나, 곧바로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졌다. 이후, 둘 사이에서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가 태어났다.

옥타비아누스와 관계가 틀어진[15]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7년,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동방을 다시 방문했고, 아예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하여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를 낳았다. 기원전 34년,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동방 원정을 지원한 공으로 "알렉산드리아의 기증"을 통해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 자녀들에게 로마 제국의 동방 속주들을 전부 나눠주었는데, 클레오파트라를 왕 중의 여왕으로 선언하고 카이사리온과 함께 이집트를 공동 통치하도록 했으며, 쌍둥이 중 남자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에게 아르메니아, 메디아, 파르티아를 주었고 쌍둥이 중 여자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에게 크레타와 키레나이카, 막내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에게는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주었다.( 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

클레오파트라가 한 세기의 연애에 대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연애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를 일절 인정하지 않았고, 유언장에서도 클레오파트라나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카이사리온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로마에서 단지 구설수에 오르는 정도 이상의 문제는 겪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에서의 정치적 입지가 로마에서의 카이사르와는 달라서[16] 아들 이름을 대놓고 작은 카이사르라고 짓고 카이사르와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열심히 이용했지만, 카이사르 입장에서도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에서의 지위를 안정시키는 것이 유리했으므로[17] 이 관계는 양쪽 모두 정치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이었으며, 카이사르는 언제나 그랬듯이 바람둥이 노릇과 정치가로서의 입장을 잘 조화시켰다.
그녀는 여인의 아름다움이 꽃을 피우고 지성이 힘을 발휘하는 나이에 안토니우스를 향해 갔다.[18]
플루타르코스 <안토니우스>
그녀는 언제나 관능적인 쾌락을 새롭게 찾아냈고, 그것으로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안토니우스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으며 잠시도 그가 한눈을 팔지 못하게 했다. 함께 주사위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냥을 했다. 안토니우스가 훈련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늘 함께했다.
플루타르코스 <안토니우스>
반면 안토니우스는 정말로 홀렸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사실 안토니우스도 여색에 빠져 모든 것을 맡기는 한량은 아니었다. 안토니우스가 추진했던 파르티아 정벌을 위해 군자금이 필요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풍부한 경제력을 지원하는 대신 안토니우스의 군사력을 원했던 것이다. 서로 정치적인 계산 하에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런 정치적인 계산만으로 보기에는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에서 너무 많은 것을 퍼주었다. 로마에서만 하게 되어 있는 개선식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열었고, 클레오파트라의 세 아들[19]이 로마를 분할하여 공동 통치하게 하려는 계획까지 세워서 로마에서 정치적으로 강한 비난을 받았다.[20]

게다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였던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소 옥타비아와도 이혼했고, 유언장에서는 로마가 아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고 하는 등의 행동으로 인해 개인적 인망 역시 크게 잃었다. 더구나 사실상의 마지막 전투가 된 악티움 해전에서의 전개를 보더라도 자신이 전투를 주도하지 못하고, 전쟁 지휘 경험이 없다시피 한 클레오파트라에게 끌려다녔다. 따라서 안토니우스가 처음에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클레오파트라에게 접근했을지 몰라도 정말로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렸다고 할 만하다. 반론으로는 안토니우스가 정치적으로 너무 무능해서 단지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카이사르 생전에 군사적으로만 훌륭했을 뿐 정치적인 면에서는 낮은 평가를 받았으므로 무리는 아니지만,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딱 빠지지 않고서야 그 정도로 무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21][22][23]

5. 사망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달렸고[24]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 침공을 선포한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맞섰으나, 군사적 무능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패착을 저지르는 바람에[25][26]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막강한 경제력으로 패배를 만회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긴 듯하지만 상황은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악티움에서의 패배를 기점으로 클레오파트라-안토니우스 측의 몰락이 확정되자, 안토니우스 휘하의 로마 군인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전향하면서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그럼에도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왕위에서 물러날테니 카이사리온을 비롯한 자식들의 목숨만은 살려달라며 회유하려고 했고, 안토니우스 역시 은퇴한 뒤 소시민으로 살겠다고 협상을 제시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두 사람 모두에게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다. 급기야 최후의 동맹인 안토니우스마저 클레오파트라가 생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하는 바람에 로마와의 마지막 연결고리도 끊어졌다.

안토니우스가 자결한 뒤에도 클레오파트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옥타비아누스에게 탄원하고자 영묘에서 나와 궁전으로 갔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을 로마에서 개최될 개선식에 전리품으로 내세울 계획이라는 게 분명해지자 결국 모든 희망을 잃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최후는 코브라가 자신을 물게 하여 자살했다는 설이 가장 유명한데, 이집트 코브라를 과일 바구니에 숨겨 가져왔다 한다. 다만 이는 후대에 붙인 이야기라는 말이 있다. 이집트 코브라가 2m나 되어 숨기기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린다고 해서 즉사하는 것도 아니고, 독사한다고 해도 2시간 뒤에나 사망하기에 말이 되지 않는다고. 그외에 음독 자살이라는 설, 안토니우스와 동반 자살했다는 설, 옥타비아누스가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했다는 설 등, 다양한 설이 난무하지만 대표적인 떡밥거리다.

사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아들인 카이사리온은 옥타비아누스의 로마군에게 살해당했다.[27] 안토니우스와의 자녀들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도 로마로 압송되어 옥타비아누스의 개선식에 강제 참석해 어머니가 독사를 붙잡은 채 자살하는 모습이 새겨진 조각상 뒤로 끌려가는 수치를 당했다.[28] 클레오파트라의 나라 이집트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멸망하면서 로마의 속주로 전락하고 만다.

옥타비아누스가 개선식 때 클레오파트라를 반드시 구경거리 전리품으로 삼아야 할 정치적 필요는 없었다. 로마를 멸망시키려 한 요부로 포장했으니 엄청난 효과를 낳을 수도 있겠지만, 클레오파트라의 이복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가 카이사르에게 끌려왔을 때는 로마 시민들의 동정을 받아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처럼 죽이지 못하고 귀양을 보낸 일이 있었다. 즉, 로마에서는 여자를 이겼다거나 여자를 앞세워서 영광을 얻으려 한다고 여론이 좋지 않게 조성될 수도 있었기에, 클레오파트라가 죽는 것도 옥타비아누스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를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살해했다는 근거라고 하기에는 많이 미흡하다. 전리품으로 가치가 있음은 사실이므로 카이사리온과는 달리 일부러 죽일 이유는 되지 않기 때문. 이 때문에 두 설을 절충해 '일부러 죽일 이유는 없었지만 알아서 사라져주는 게 편했기에, 클레오파트라의 자살을 막을 수도 있었지만 그냥 내버려두었다'는 설도 있다. 아마도 옥타비아누스로서는 클레오파트라를 데려와서 로마인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자살해도 개선식에서 조금 아쉬운 것 빼고는 크게 상관은 없다는 정도였을 터이다. 사실 클레오파트라는 위에서도 나왔듯 카이사르 생전에도 화려하게 로마에 온 적이 있었고 카이사르가 죽었을 때도 장례식 참석과 유언장 확인을 위해 로마에 왔었기에, 이제 와서 구경거리로 내돌리는 것도 새삼스럽기도 했다.

[1] 이렇게 된 데에는 군사력이 급속도로 축소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그리스-마케도니아 군인들에게 각지의 땅을 주어 정착시켜서 예비 군사력으로 삼았다. 셀레우코스 왕조 항목에도 나오지만 이런 정착 군인들을 카토이코이(Katoikoi) 혹은 클레루코이(Klerouchoi)라고 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군대의 주력인 팔랑기타이로 복무했다. 그리스의 유입 인구가 줄어들자 그 대신 갈라티아의 켈트 병사들과 같은 여러 용병들을 적극 유치, 정착시켰다. 클레루코이들과 마찬가지로 땅을 주어 정착시켰는데, 그 땅(파윰 분지)엔 아직도 켈트 혈통의 후손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를 위한 재원은 이집트 농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충당했다. [2] 하지만 왕조에 유입되는 그리스인 인구가 거의 단절되고 용병 고용에도 한계가 찾아오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군사력은 급속히 기울기 시작했다. 거기에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시도때도 없는 전쟁은 그 한정된 병력 자원마저 빠르게 소모시켰다. 나중에는 도저히 군사력을 유지하지 못하여 라피아 전투 때처럼 이집트 병사들을 대거 훈련시키거나 이집트인들을 클레루코이에 받아들이는 등의 시도도 있었지만, 이미 불신과 반발심이 팽배하여 그다지 좋은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만약 승리한다면 승리에 공을 세운 이집트 병사들이 그 대가를 요구하고, 이를 그냥 받아들여 주면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의 배타적 권력 독점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 그러다보니 지배층은 공을 세운 피지배층인 이집트인 병사들의 요구에 불성실하게 응하게 되었으며 자연히 피지배층인 이집트 원주민들의 불만도 누적되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20년 동안 이집트인들의 반란 시달리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이런 구조로 일이 진행되다보니 이집트 내에서 군대를 만들어 강력하게 유지시키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으며 자연히 이는 군대의 급격한 축소로 이어지게 되었고 당연히 국력도 이에 맞춰서 축소되었다. 중국의 사례이긴 하지만 몽골족의 정복왕조인 원나라 만주족의 정복왕조인 청나라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정복왕조의 태생적 한계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3] 앞 각주에서 언급된 피지배층인 이집트인들이 공을 세워도 처우를 제대로 안 했던 게 문제였다. 게다가 이들의 요구사항도 지배층 입장에선 들어줄 수 없는 난제였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4세 무렵 라피아 전투에서 팔랑크스의 주력이 된 이집트 병사들이 분전하여 승리를 거뒀지만, 승전 후 독립을 주장했는데, 저 독립이 누구에게서 독립을 원하는건지 생각해보면 왜 수용되지 않았고 반란으로 이어졌는지 알 수 있다. [4]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경우 선대인 프톨레마이오스 11세의 직계자손이 아니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아들인데 프톨레마이오스 10세 혹은 프톨레마이오스 11세가 되지 못했었다. 이유는 그의 아버지였던 프톨레마이오스 9세 다음엔 9세의 남동생 겸 아울레테스의 작은아버지가 프톨레마이오스 10세로 즉위했고 그 다음엔 자신의 사촌이 프톨레마이오스 11세로 즉위했다. 계보상 그는 방계여서 정통성이 부족했지만, 먼저 왕위에 앉은 사촌인 프톨레마이오스 11세가 제대로 자기 후계에게 왕위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고 딱히 즉위시킬만한 사람도 없자 왕위에 앉게 된 것이었는데 여기엔 로마의 영향이 컸다. [5] 그리고 이런 피지배층에 대한 착취성 정치는 이미 전 세대 왕들이 꾸준히 누적시켜오고 있었다. [6] 즉 클레오파트라 7세의 자매이다. [7] 참고로 이런 지배층간의 정치적 내분은 앞서 언급되었듯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연신 반복되는 고질적인 문제점들 중 하나였다. 사실 동격의 왕을 둘이나 둔다는 점에서 이미 예고된 파탄이나 마찬가지였을 것. [8] 참고로 이는 전설일 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집트의 더운 날씨에 오랜 시간 동안 융단 안에 들어가 있었으면 열사병으로 죽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실제로 클레오파트라가 융단 속에 숨었으면 나왔을 때는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역으로, 그렇기에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부하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들 '설마 미쳤다고 저 안에 숨었겠냐'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리고 이 일화를 다룬 옛날 서양 그림들을 보면 클레오파트라를 나체로 그린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감상자의 눈요기를 위한 것이지만 화가들은 열기 때문에 옷을 다 벗은 거라고 핑계를 대기는 했다. 뭐 어차피 카이사르를 유혹하러 간 거니 나체라도 이상할 일은 아니긴 하겠지만 말이다. [9] 이 시기를 다룬 게임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에서는 현실성을 위해서인지 새벽에 궁으로 들어간다. 실제 양탄자에 들어가 있던 기간도 그리 길지 않고. [10] 작은 카이사르라는 뜻. 풀 네임은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였다. [11] 이때 카이사르는 이미 12년 전 혼인한 정실부인 칼푸르니아도 있었다. 그러나 로마 문화는 가부장제가 강한 편인 데다 카이사르는 온 로마가 알아주는 유부녀 킬러(...) 바람둥이로 유명했기에, 클레오파트라와 연애 좀 해도 '아, 카이사르 또 저러네' 정도의 가십거리 이상으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12] 오히려 폼페이우스가 이집트에서 죽음으로써 로마의 내전도 끝났고, 이집트의 혼란스러운 정세를 평정해 확실하게 로마 세력권에 두고, 폼페이우스 살해범의 세력과는 관련이 없는 클레오파트라를 옹립함으로써 나름 정의도 세우는 등 정치적 업적도 얻었으니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님도 보고 뽕도 딴 셈. 게다가 죽을 때까지도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을 로마 정계에 끌어들이려는 시도도 안 해 별달리 반발도 안 샀다. [13] 카이사르가 죽은 후 클레오파트라의 남자가 된 안토니우스도 정적으로부터 비슷한 비판을 받게 되지만,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와 달리 본처 옥타비아를 버리고 정치적으로도 잘못된 선택을 연이어 하는 바람에 여론이 등을 돌린 것은 물론이고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해 몰락하고 만다. [14] 카이사르 사후 유산을 기대했던 듯하지만 카이사르는 카이사리온에 대해 유언장에 단 한 마디도 적어놓지 않았고 클레오파트라는 급 실망했다고 한다. 물론 클레오파트라가 돈이 없어서 카이사르의 유산을 기대한 건 아니었을 테니 사실상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아들이자 후계자로 인정하는 내용이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물론 노회한 정치가인 카이사르가 공사도 구별하지 못하고 로마 정계에 초위험인물인 클레오파트라를 끌어들일 일 따윈 없었다. 무엇보다도 카이사르가 이미 마음을 정해 유언장에 적어 둔 후계자는 아직 젊지만 그렇다고 주변 인물들에게 마구 휘둘리지 않을 만큼은 나이를 먹었고 그만한 자질도 있는 양자 옥타비아누스였다. [15] 다만 파르티아 원정까지 둘의 관계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파탄나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소 옥타비아의 간곡한 청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소 옥타비아는 남동생과 남편이 결별하는 것과 전쟁이 나는 것을 원치 않아서(소 옥타비아는 이미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두 아이가 있었고 안토니우스의 전처 풀비아의 아이들까지 맡아서 키우고 있었다) 남동생을 설득했고 결국 누이를 무척 아끼던 남동생은 이 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결국 안토니우스가 저지른 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났고 로마에서 안토니우스의 명성도 바닥까지 추락해 버렸다. [16] 이 당시 카이사르는 원로원파를 싹쓸이하고 로마 정계의 정점에 올랐다. 반면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가 생전에 많이 정리해주긴 했지만 여전히 정적들에 비해 약세였다. [17] 로마가 소비하는 밀의 대부분이 이집트에서 생산되었으므로 당연히 친로마파인 클레오파트라가 정권을 잡는 것이 유리했다. [18] 당시 클레오파트라의 나이는 28세였다. [19] 1명은 카이사르의, 2명은 안토니우스의 아들이었다. [20] 카이사르의 관계와 비교해보면 안토니우스가 얼마나 클레오파트라의 관계에서 손해를 봤는지 알 수 있다. 카이사르는 정치9단답게 국력은 약해졌지만 막강한 부와 오래된 문명을 가진 이집트를 로마의 세력권 안에 편입시키면서도, 그녀와 낳은 아들은 적자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클레오파트라가 로마 국내 정세에 개입하는 것을 막았다. 그렇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통해 오히려 정계에서 입지가 강화됐으며, 그녀 역시 아직 불안정하던 자신의 왕권에 든든한 후원자를 얻었기에 윈윈관계였다. 이 과정에서 젊고(무려 33세 연하) 아름다운 이집트 여왕과 밀회를 즐긴 건 덤. 반면 안토니우스는 그녀가 로마 정계에 간섭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데다가 소 옥타비아와 이혼,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는 유언으로 로마인들의 드높은 자존심까지 상처내며 정계에서 입지가 줄었다. [21] 애시당초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사후 카이사르 파와 원로원 파를 조정해서 로마의 내전을 막는 등 정치가로서 나름 능력을 보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상관 카이사르의 정적 폼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투쟁에서는 상당히 무능한 모습을 보였던 건 사실이다. 상술한 대로 로마 내전을 막긴 했지만 키케로의 술책과 원로원파의 공작으로 인해 로마의 적으로 찍혔을 정도니 말이다.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적잘한 시기 원로원파를 배신하고 안토니우스를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안토니우스는 로마와 전쟁을 벌였을 수도 있었다. [22] 또한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상관인 카이사르가 삼두정치 당시 정치의 중심인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를 자신의 지배하에 둠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내전에서 승리한 것을 보고도 정치의 중심지 로마를 옥타비아누스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부유한 동방에서 사치를 누리면서 정작 로마의 일에는 옥타비아누스가 어떤 고생을 하든, 자기 마누라와 친동생이 뭘 하건 전혀 신경쓰지도 않았다. 이 때 옥타비아누스는 지중해를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점령한 상태에다 풀비아가 안토니우스를 등에 업고 계속 정치적 공격을 계속하던 도중이라 안토니우스와는 정반대로 그의 일생 중 가장 위험한 순간 중 하나였다고 할 정도고 특히 폼페이우스는 시칠리아에 눌러 앉아 로마의 밀 수입을 방해했고 그로 인해 하마터면 로마인들이 들고 일어나 쫒겨날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안토니우스는 이 기회를 이용해 옥타비아누스를 도와서 정치적 빚을 지우고 생색을 낸다거나 혹은 그를 공격해 정치적 영향력을 줄이고 때에 따라서는 숙청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이 황금 같은 기회를 그냥 넘겼을 뿐 아니라 2개 군단을 꽁으로 넘겨주기까지 하였다. [23] 이외에도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의 정치공세에 밀려 로마에서 쫒겨나 위험한 상황에까지 몰렸던 적도 있었다. 그런 그가 해방자 내전에 승리하고 다시 로마 정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옥타비아누스가 그에게 손을 내밀어줬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바로 직전까지 싸우던 사이였음에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키케로를 팽한 뒤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았고 두 사람은 레피두스까지 끌어들여 제2차 삼두정치 체제를 실현시켰다. [24] 특히 옥타비아누스는 누나 소 옥타비아를 매우 아꼈는데 안토니우스가 삼두정치의 결속의 일환으로 옥타비아와 결혼했으면서 이후 클레오파트라와 재혼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하자 더욱 격분했다고 한다. [25]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모두 치열하게 맞붙고 있는 와중에 성급하게 뱃머리를 돌려 멋대로 도주해버렸다. 이로 인해 아군의 전선과 사기마저 말아먹은 건 당연지사. [26] 다만 고증상 '뱃머리를 돌려 도주했다'는 말은 틀렸고 그냥 '곧바로 직진해 도주했다' 봄이 적절하다. 악티움 뒤편 클레오파트라의 함선이 머무르던 곳은 좁은 만이었고 그 앞에 옥타비아누스의 함대가 만을 빠져나가려는 안토니우스의 함대를 막은 형국이었기 때문. 즉, 뱃머리를 돌려 도주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27] 사실 카이사리온은 안토니우스나 클레오파트라보다도 더 우선 순위의 제거 대상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일한 후계자는 옥타비아누스 단 한 명이어야 했기 때문. 물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도 이를 잘 알았기에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내세웠지만... [28] 그러나 로마에 당도하기 전에 요절한 걸로 추정되는 필라델포스를 제외한 나머지 두 아이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이자 안토니우스의 전처인 소 옥타비아가 친자식처럼 길러주었다. 다만 헬리오스도 로마에 온 지 몇 년 안 되어 요절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