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15:31:08

콥트 정교회

콥트교회에서 넘어옴
오리엔트 정교회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알렉산드리아 전례 <colbgcolor=#FFF,#1c1d1f> 콥트 정교회 ·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 에리트레아 테와히도 정교회
아르메니아 전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서시리아 전례 시리아 정교회 · 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
같이 보기: 기독교의 종파 }}}}}}}}}

파일:콥트 정교회 십자가.svg
콥트 정교회
Coptic Orthodox Church | ϯⲉⲕ̀ⲕⲗⲏⲥⲓⲁ ⲛ̀ⲣⲉⲙⲛ̀ⲭⲏⲙⲓ ⲛ̀ⲟⲣⲑⲟⲇⲟⲝⲟⲥ
[1]
파일:external/images.memphistours.com/239855706_cathedral3.jpg 이집트 카이로의 성 마르코 대성당
<colbgcolor=#4b0082> 규모 약 2천만 명
콥트 교황 타와드로스 2세 (제118대)

1. 개요2. 전례양식3. 이슬람과의 공존과 박해4. 한국에서의 콥트 정교회5. 여담

[clearfix]

1. 개요

콥트 정교회는 그리스도교 오리엔트 정교회의 한 종파다. 비칼케돈파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를 수장으로 하는 교회로 고대 이집트 교회가 가지고 있던 전통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이슬람의 확산 이전까지는 비칼케돈파 교회의 총본산이었으며[2] 이슬람의 오랜 종교적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현대까지 교세를 이어와 많은 신자들이 남아 있다. 공식적으로는 이집트 인구의 10% 내외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신분증에 '그리스도인(مسيحي / masīḥiyy)'이라고 표기한 인구의 비중을 나타낼 뿐이다. 콥트 정교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것보다 많은 최대 20~25%의 인구가 콥트 정교인이라고 한다.

실제로 한국일보에 실린 김나미 기자가 만난 이집트 대사관 콥트 정교인 직원도 이집트 인구의 30% 가량이 콥트 정교인이라고 했다. 통계치의 차이가 나는 이유는 콥트 정교인 신자는 이슬람권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이집트 정부에서 정치적 이유로 줄여서 발표하는 것도 있고[3] 박해와 차별 문제 때문에 콥트 정교인 스스로 무슬림인 척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이집트의 그리스도인 중에서는 95%가 콥트 정교인이다.

아울러 수단 공화국 남수단에 도합 60만, 리비아에 5만 명 남짓한 콥트 정교회 신자가 있다. 이집트 본토에서 멀찍이 떨어진 케냐의 투르카나 주 같은 북서부에도 콥트 정교회 신자가 있다. 전체적으로는 약 2천만 명의 신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 전례양식

파일:콥트 정교회 십자가.svg
콥트 정교회 십자가
Ⲓⲏ̅ⲥ̅ Ⲡⲭ̅ⲥ̅ ⳿ⲡϣⲏⲣⲓ ⳿ⲙ⳿ⲫϯ
이에스 프크스 업셰리 어머프티. 풀어쓰면 'Ⲓⲏⲥⲟⲩⲥ Ⲡⲓⲭⲣⲓⲥⲧⲟⲥ ⲉⲡϣⲏⲣⲓ ⲉⲙⲉⲫⲛⲟⲩϯ(Iêsous Pikhristos Epshêri Emefnouti, 이에수스 피크리스토스 업셰리 어머프누티)'가 되며 '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다.
파일:external/st-athanasius.org/UK-Coptic-Cathedral-Holy-Week-congregation.jpg 파일:external/theologia.kr/edbd58146542a20620230d0c94bd2c9c.jpg
콥트 정교회의 성주간 성찬예배 모습 콥트 정교회의 전통적인 이콘
파일:external/www.antiochian.org/article-2227679-15d8b383000005dc-665_634x422.jpg 파일:external/cf.ltkcdn.net/144688-850x563r1-Egyptian-coptic-cross.jpg
콥트 정교회의 전례는 다소 독특한데 알렉산드리아 전례 문화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콥트 전례를 사용한다. 전례력도 고대 이집트의 태양력이 거의 그대로 이어진 독특한 콥트력을 사용하는데 각 달의 이름이 신왕국 시대 이집트어와 거의 유사하다. 콥트 정교회는 이집트의 그리스도인들을 심하게 박해하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즉위한 서기 284년을 순교자기원 원년, 즉 교회력의 원년으로 정한다. 콥트 정교회에서 지키는 크리스마스는 1월 7일이고[4] 성탄 40일 전부터 단식하며 부활절이 오기 전 55일간 단식도 하는데 낮에 음식물을 먹지 않고 육식을 피하여 올리브유로 요리한 음식만 먹는다.[5][6] 콥트 정교회 신자들은 보통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예수의 십자가형을 기억하는 의미, 그리고 일평생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과 정체성을 유지하겠다는 의미로 손목 안쪽에 하늘색 십자가 문신을 새긴다고 한다.

이 교회에서 사용하는 콥트어 고전 이집트어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데 콥트어는 고전 이집트어의 직계 후손이며 마지막 발전 단계이기 때문이다.[7] 그러나 문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와 동로마 제국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 용어에서는 거의 절대적으로 그리스어의 영향을 받아 경문의 상당 부분이 중세 그리스어와 똑같다는 것이다. 게다가 콥트어는 전례언어다 보니 순수 이집트어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니다. 이뿐만 아니라 18세기부터 이집트 아랍어가 대중화됐다.[8]

3. 이슬람과의 공존과 박해

파일:7918812431572867437.jpg
1919년 이집트 혁명의 상징인 십자가-월성기. 이집트 양대 종교가 단합하여 제국주의에 저항할 것을 뜻한다.

사실 이집트 테오도시우스 2세 때부터 칼리프 우마르의 점령 이전까지 그리스도교 지역이었지만 이슬람 세력의 지배 이후 기독교인들은 이집트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무슬림들에게 차별을 받아 왔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카이로 부근 협곡 '성 시몬 동굴 성당' 부근에 있는 '자발린'(쓰레기 마을)이다. 무슬림들이 버린 쓰레기를 처리하면서 사는 마을인데 3만 5천명이 사는 꽤 규모가 큰 마을이다. 영상[9]

그렇다고 콥트인들이 다 이렇게 대우 못 받고 사는 것은 아니다. 이집트의 민족 의식이 고조되면서 종교를 초월한 ' 이집트인'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 메흐메드 알리 시절 이후 관료로 진출하는 기회가 넓어지면서 상당수가 대도시 중산층으로 편입되었고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 오라스콤 사장[10] 온시 사위리스 등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물론 현재도 절대적인 관료들의 숫자도 적고 사회, 문화적 차별이 시정된 건 아니지만 그리스도교를 못 잡아먹어 난리인 골수 이슬람 중동 국가에 비하면 여긴 그리스도교도들의 대접을 꽤나 잘해 주는 동네였다. 지금도 콥트인 중산층들은 무슬림들에 비해 교육 수준도 높고 경제력도 상당하다.

하지만 이집트에서 살라피즘 기반의 이슬람 근본주의가 급증하기 시작하던 1980년대부터 다시 박해가 급증하기 시작했는데 현재까지 나아질 기미가 없이 계속 심해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무슬림만 쓰는 히잡을 안 썼다고 학교에서 들어오지 말라고 내쫓기는 처분을 받거나 여학생은 머리가 깎이고 퇴학도 당한다고 한다. 성당 건물이 낡아서 신축한다는 이유로 무슬림들이 성당을 공격하질 않나(!), 이집트 의대 대입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콥트 정교회 신자인 소녀가 (아마도 무슬림의 압력으로 추정되는) 모종의 이유로 성적이 모조리 0점 처리되는 등 # 일상생활에서 받는 차별도 상상 이상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납치당해 살해당하는 경우도 빈번하고 언니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고 동생에게 참수하라고 시키며[11] 그리스도인 할머니를 발가벗겨 거리에 끌고 다니며 집단폭행한 사건이 있었는데 가해자들은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이집트 무슬림들은 만만한 그리스도인을 분풀이 삼아서 공격하고 집단학살을 자행했다. 그리스도인 학살의 동력은 그들이 드리는 모스크 금요예배 때의 충돌 때문이었다. 2007년 5월 11일 금요기도회 직후 분노한 무슬림들이(무슬림 금요집회 후 자주 일어나는 분노 행위) 이집트 기자(Giza) 지구 밤하(Bamha) 마을에서 그리스도인 점포와 가옥 27개를 불태웠다. 이집트에서 그리스도인 박해, 살인 방화 사건은 무수한데 그 각본들의 공통점은

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② 금요기도회(비무슬림 학살 선동이 매번 이루어지는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인두세를 지불하지 않으므로 더 이상 보호받는 소수민족이 될 수 없다는 전단지가 돌려지면 살상과 파괴를 저지르기 위해 모스크에서 몰려 나간다.
③ 그리스도인 집단 학살에 대한 뉴스는 별로 다뤄지지 않으며
④ 무슬림들은 "콥트교인들에게 아무런 편견도 없다. 무장한 무슬림들은 비주류 소수의 극단주의자들이고, 그들은 이슬람을 대변하지 않으며 정신이 불안한 몇몇 개인들이 일으킨 사건일 뿐"이라고 변명한다.
파일:external/pressian.wcms.newscloud.or.kr/40110211161626.jpg 파일:external/www.ceohr.org/Netherland2.jpg
2011 이집트 혁명 때는 이렇게 무슬림과 손잡고 민주화 시위에 뛰어들어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를 끌어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폭력에 의해 박해가 더 심해지고 말았다.

이집트 혁명 이후에도 무슬림 형제단의 집권과 퇴진, 무슬림의 순진함 영화 논란과 무함마드 무르시를 축출하고 군부 정권에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무슬림 형제단이 이를 갈면서 더 고난이 커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생각해 보면 이들이야말로 고대 이집트의 문화를 그나마 가장 잘 보존하는 편인데 극심한 박해와 차별을 받고 있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12] 콥트교회 성당에 무슬림 폭도들이 쳐들어와 총을 쏘고 돌을 던지고 난동을 피우는 것은 예사고 콥트교회가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무슬림 해커들에 의해 해킹되지를 않나, 성당에 몰래 들어와서 불을 질러 대고 콥트 정교회 신자들에 대한 각종 린치, 살인 성경 모독 행위 등도 매우 빈번하다고 한다.

이들이 역사적인 차별 대우와 더불어 이슬람에 말 그대로 이를 박박 가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이집트 소수 기독교인들, 무슬림 압박에 두려움

이집트 살라피스트 무슬림들은 그리스도인을 분풀이 삼아서 공격하고 집단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2007년 5월 11일 이집트 기자(Giza) 지구 밤하(Bamha) 마을에서 그리스도인 점포와 가옥 27개소를 불태웠다.

무슬림들이라고 마냥 콥트교인에게 적대적이지는 않으며 2011년 민주화 혁명 시기에는 무슬림 형제단과 무바라크 독재에 항거하는 투쟁을 함께했다. 극단주의자가 위협이 감지될 때 성당 주변에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인간방패를 자처하기도 하는데 문제는 이들조차도 극단주의자들의 표적이 된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냐면 압델 파타 엘 시시 이집트 대통령이 이집트 공화국 역사상 최초로 콥트 교황을 접전하고 크리스마스 성찬예배에 참석할 때 테러 방지를 위해 대성당 주변에 장갑차를 동원했을 정도다.
파일:21-martyrs1-640x480.jpg
ISIL의 집단 참수에 의해 순교한 콥트 정교회 21위 순교자 이콘.

2015년 2월에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에서 이집트군이 자신들의 리비아 거점을 공습한 보복으로 콥트 정교회 교인 21명을 리비아에서 집단으로 납치한 뒤 참수했다고 한다. 이들이 참수 핑계로 콥트 정교회에게 무슬림들이 박해받는다는 이유를 내세우자 사람들은 이들의 억지 논리를 비난했다. 참고로 처형당한 교인들은 모두 콥트 정교회가 시성했다. 엘 시시 대통령도 애도기간 7일을 정하고 반드시 IS를 처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집트 징병제 국가지만 콥트 정교회 신자는 병역면제된다.[13] 하지만 실질적으로 무슬림인 척하는 콥트 정교인의 수가 적지 않다 보니 갈 사람은 간다.

현대에는 외방 선교에 힘을 쓴다. 다수의 악재로[14] 인해 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교인의 비율이 점차 줄어들었고 근래 백 년 동안 중동 지역에 이슬람 극단주의의 난동으로 교단의 존망마저 위협받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무슬림 선교가 쉽지 않음을 가장 잘 안다.[15] 미국에는 50만 명이 넘는 콥트교인이 살고 있으며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 전역에 텍사스, 캘리포니아 및 동부/서부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콥트 정교회 성당이 세워졌다. 친구나 직장 동료를 통해서나 이집트인 신자와 결혼하는 등의이유로 이집트계 이민자가 아닌 신자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고 한다. 더불어 캐나다, 호주 등지에도 콥트 정교회 성당이 상당수 세워졌다.

2016년 8월 30일 이집트 당국이 콥트교회 건물의 신축에 관한 새로운 법률을 제정했지만 이집트 국내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슬림들에게서도, 상대적 소수파인 콥트교도들에게서도 불만을 샀다. # 샤리아에 따르면 콥트교 교회 건물은 신축할 수 없으며 개축과 수리도 반드시 지역 모스크 이맘들의 허가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고 기독교도들에게 모욕을 줄 목적으로 문과 천장은 1미터 20센티미터를 넘을 수 없다. 사문화된 지 매우 오래된 계율인데 무슬림 형제단의 극단주의적 요구를 무함마드 무르시가 받아들여서 1840년 이후 무단 수리, 개축한 47개의 교회 건물의 원상복구 및 21개의 교회 철거를 명령함으로서 교회 개축과 관련한 문제가 첨예한 갈등으로 떠올랐다. 무르시가 축출된 후 이 요구는 철회되었지만 신축과 개축은 모두 정지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어느 정도 불안정하게나마 지역 무슬림들의 허락 없이 수리 및 개축, 신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016년 11월 10일 이집트는 세계그리스도교박해순위(World Watch List, WWL) 64점(작년 대비 3점 상승)을 기록하며 22위를 차지했다. 그만큼 콥트교회에 데한 박해가 심각한 상황이다. 엘 시시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콥트교회에 대한 박해를 금지하고 대책을 논의하지만 이집트의 공권력이 하도 부패해서 크게 효과가 없다.

얼마나 부패했냐면 이집트 인권단체들의 발표에 따르면 이슬람 광신자들과 무장단체들이 콥트교도들에게 폭력을 행사해도 이집트 공무원과 경찰, 군인들은 보호해 줄 생각도 안하고 처벌도 제대로 안 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한다.[16] 사실 무르시 집권기에 경찰은 무슬림 폭도들이 신원이 밝혀질 염려없이 약탈과 파괴를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기독교도들이 농성하고 있던 교회 안에 연막탄을 쏴서 기독교인들이 공격받고 교회가 약탈당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2016년 12월 11일에는 주교좌 성당이자 타와드로스 2세 교황이 상주하는 성 마르코 대성당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26명이 사망하고 57명이 부상하였다. 엘 시시 대통령은 피해자를 위해 3일간 애도할 것을 공표했다.

하지만 여전히 표적 테러는 잦아들 조짐이 안 보인다. 2017년에는 성지주일을 맞는 날에 동시 다발 테러가 터져 45명이 사망했다. 엘 시시 대통령은 애도를 표하며 3개월 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용의자들을 무더기로 체포했다. 한편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집트를 방문해 희생자를 애도하고 세례성사의 상호 인정을 위해 합의하는 등 중대한 성과가 있었다.[17] 그러나 같은 해 5월 26일 민야 주로 향하던 버스에 괴한들이 총기를 발포해 28명이 사망했는데 IS 이집트 지부는 후에 자신들의 소행임을 밝혔다.

이집트의 전통 그리스도교 종파인 콥트 정교회 신자들에 대해서는 심각한 탄압이 벌어지고 있다. 이슬람 군중들이 분노하여 학살, 납치 및 가옥 파괴를 일삼아도 정부와 경찰들은 가해자인 무슬림들의 형량을 줄이거나 기소를 취하하여 석방하고 오히려 콥트 그리스도인들을 신성모독죄로 감옥에 가두거나 조사를 핑계로 고문한다. 2000년 이집트 알 코셰에서는 반그리스도교 폭동이 벌어졌으며 2006년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콥트 정교회 성당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칼을 들고 난입해 13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북동부 민야 주에서는 2011년부터 2013년까지 150명 이상의 그리스도교도들이 납치당했다.

이집트가 영국의 보호령이던 시절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물론 아랍의 봄 당시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를 쫓아내는 데 그 누구보다도 앞장선 것이 콥트 그리스도교 신자들인데 정작 콥트 교회는 독재자 시절만도 못한 극심한 박해와 차별을 받기도 하였다. 무바라크 몰락 후 집권했던 무슬림 형제단에서 명목상이나마 콥트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혁명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공로를 인정하는 법안 상정 및 그리스도인의 권익을 보호하는 위원회를 발족하려고 했는데 이슬람 극단주의 정당인 알누르당(Al-Nour Party)이 노발대발하며 즉시 선거연대를 끊겠다고 압박했을 정도다. 결국 무슬림 형제단마저 그리스도교 탄압으로 나가다가 세속주의 성향의 군부에 의해 둘 다 해산당했다. 애초에 사이드 쿠틉이 콥트교도 박멸을 주장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무슬림 형제단이 콥트 정교회 탄압의 원조로 콥트 정교회 주교좌 성당인 성 마르코 성당을 주도적으로 공격한 적도 있다. 공격의 정도도 장난이 아니어서 무슨 전쟁터마냥 무슬림 폭도들이 성당에 최루탄과 돌을 던져대고 건물 지붕에 올라가서 성당을 향해 을 난사하는 지랄발광 퍼포먼스를 벌였는데 결국 이러한 근본주의자들의 난동에 무슬림들도 지치는 건 매한가지라 결국 무바라크 퇴진 후 얼마 안 가 무함마드 무르시 정권 몰락으로 이어졌다.

콥트 정교회 박해는 리비아 지역 ISIL에 의해 벌어진 그리스도교도 납치 및 집단 참수영상 공개 사건으로 절정에 달한다. 심지어 ISIL에 의해 순교한 그리스도교도들의 가족들이 희망을 버리지 않고 힘을 내려는 모습을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무슬림들이 피해자 가족들의 집에 2015년 4월 말경에 밤을 틈타 몰래 처들어와서 화염병으로 방화와 공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이슬람 근본주의 선교집단의 인권 의식 수준은 군부 독재자들보다 더 후진적인 수준이다.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2228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2228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

4. 한국에서의 콥트 정교회

파일:한국 콥트 정교회 로고.jpg

한국에 선교사제를 공식 파견하고 교회 공동체를 구성한 최초의 오리엔트 정교회다. 한국에 콥트 정교회 공동체가 조직된 것은 2010년경인데 직접적인 설립 이유는 울산 부산을 비롯해 콥트교를 믿는 이집트인 노동자들이 조선소 등지에서 근무하면서 조금씩 늘어났기 때문이며 마침내 한 콥트교 신자의 노력으로 서울에 공소[18]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신부는 알렉산드리아 총대교구 소속으로, 비자 문제 때문에 보통 한국을 방문할 때 1개월에서 3개월 정도 체류한다.

공소 명칭은 '성모 마리아 성당'이며 위치는 홍대입구역 5번 출구 앞 주택가에 있다. 출구를 나와 옛 용산선 부지를 가로질러 처음 나오는 4층짜리 건물[19]에 입주해 있는데 3층 가정집을 개조한 거의 경당 수준이다. 밖에서 보면 평범한 주택이지만 내부에는 성찬예배에 필요한 제대부터 각종 이콘에 이르기까지 그럴듯하게 자리하고 있다. 특히 지성소로 들어가는 아치와 휘장 등은 전문 디자이너를 고용해 규격을 지켜 설치했다. 공간이 좁아서 신자들은 의자 없이 바닥에 앉아서 성찬예배를 드린다. 참고로 신부가 영어를 잘하는 편이기 때문에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한국인 신자도 몇 명 있는데 콥트 정교회에 관심을 가져 신자가 되거나 이집트인과 결혼하면서 신자가 된 경우다.

5. 여담

파일:external/www.spc.rs/thumb_large_1.jpg
정교회
테오도로스 2세
콥트 정교회의
타와드로스 2세

재밌는 사실은 2012년 새로이 착좌한 콥트 교회의 교황/ 총대주교 이름이 이집트 아랍어식으로 '타와드로스(تواضروس / Tawāḍrōs)', 즉 그리스어식이나 콥트어식으로 명명하면 '테오도로스(Θεόδωρος, Ⲑⲉⲟ́ⲇⲱⲣⲟⲥ)'인데 현재 동방 정교회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의 이름도 '테오도로스'라는 점이다. 각기 역사적 이유로 갈라져 동일하게 복음사가 성 마르코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두 교회 수장이 공교롭게도 같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미 착좌해 있던 정교회 테오도로스 2세 타와드로스 2세에게 '이름이 같은 우리 두 사람이 같이 잘해보자'는 식으로 축전을 보내기까지 했다.


[1] Ti.eklyseya en.remenkimi en.orthodoxos [2] 로마 제국의 시리아-아프리카 속주는 칼케돈 신경을 거부하고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와 갈라섰다. 단성론파 교회라고도 하지만 본인들은 이를 멸칭으로 여겨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은 예수의 본성이 신성과 인성을 겸비했다는 합성론을 믿지, 신성만 밀어 붙이지는 않는다. [3] 대도시권인 알렉산드리아나 카이로에 집중되어 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데 상이집트(즉 나일강 상류)에도 의외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상이집트의 미냐 같은 곳은 콥트교인이 인구의 50%다! 하지만 이 지역은 공권력이 매우 약해 인구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외부에서 잘 모르고 이슬람 극단주의자에 의한 박해도 심하다고 한다. [4] 러시아를 비롯한 일부 정교회 국가들도 마찬가지인데 그 이유는 이들이 그레고리력이 아니라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5] 낮에 먹는 것을 기피한다는 점에서 이슬람의 라마단과 유사하다. 물론 딱딱한 것은 아니라 마찬가지로 예외사항이 존재한다. 다른 나라에 살면서까지 금식기간과 조항을 지키기는 힘들기 때문에 이 경우는 본인의 양심에 맡긴다. [6] 사순 시기는 사도 전승이 있는 교회는 모두 지키기 때문에 이상할 것이 없다. [7] 사실 교회력 월별 명칭을 고대 시절과 똑같은 것을 사용하는 등 콥트 정교회에는 고대 이집트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다. [8] 그나마 다행인 건 이집트 구어체 아랍어는 고대 이집트의 언어나 콥트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점이다. [9] 여행 유튜버인 빠니보틀이 직접 방문하여 찍은 영상이다. [10] 류경호텔을 인수하고 북한에 휴대전화 통신기반을 구축한 것으로 유명한 회사다. [11] 경찰은 피해자 가족에게 재산을 다 팔아서 10일 내로 마을을 떠나라고 명령했는데 이 지역 무슬림들과의 갈등을 피하려면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12] 물론 콥트교인만이 고대 이집트의 후손이고 무슬림 아랍 이집트인은 고대 이집트인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무슬림 이집트인들의 문화도 어느 정도는 이집트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데, 단지 콥트인만큼은 아닐 뿐이다. 다만 콥트인들은 설령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런 말을 말로 했다간 피라미드까지 부술 기세인 이슬람 극단주의자에게 살아남을 수 없으므로 고대 이집트로부터의 연속성을 크게 강조하지 않는다. [13] 옛날에는 콥트 정교회인도 군 복무가 가능했다. 셰누다 3세 교황은 공화국 수립 이전인 1940년대 후반에 군생활을 한 경력이 있다. [14] 그리스도인의 상대적인 저출산, 무슬림들의 직, 간접적 차별 등. 샤리아로 인해 콥트교인이 이슬람으로 개종은 가능하지만 반대는 불법이다. 빠질 구멍이 없는 건 아니지만 더럽게 힘들다. 게다가 근대 이후에는 전세계로 향하는 이민 때문에 심각한 인구 유출이 일어나고 있다. [15] 튀르키예 튀니지, 그리고 중앙아시아 국가를 제외한 대다수 이슬람 국가에서는 배교를 처벌하는 조항이 아예 법조화되어 있다. 게다가 법을 뚫고도 이슬람이 완전하다고 믿는 대다수의 무슬림들을 설득하기는 더더욱 어렵기도 하고 지구상 어느 문화권보다 비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에게 가혹하게 집단괴롭힘을 저지르고 박해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삼중고를 뚫고 이슬람에서 개종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지만 대부분 개종한 사실을 숨기거나 이슬람권 국가가 아닌 나라로 떠나서 산다. 유럽 영미권의 콥트 정교회인들 중에서 이런 부류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오리엔트 정교회는 무슬림이 그나마 다가가기 쉬운 그리스도교 종파이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괜히 이집트 인구의 30%가 콥트 정교회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한편 다른 나라에서 무슬림 이집트인이 고향 사람을 만나기 위해 성당에 나가다가 신자가 되는 경우도 많은데 출신이 복잡한 모스크에서 같은 이집트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콥트교인과는 종교만 빼면 문화가 완벽하게 동일하니까. [16] 이집트는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보다는 친족 관계가 더 중시되는 사회다. 잘못을 해도 여럿이 모여서 우기고 발뺌하면 끝이다. 경찰과 군대에 그리스도인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경찰 앞에서 피해를 호소해 봤자 뇌물 없이는 경찰이 얼마나 성의있게 나올지는 미지수다. [17] 이전에는 오리엔트 정교회가 정교회의 세례성사만 유효한 성사로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18] 사제가 상주하지 않는 그리스도교 예배용 시설 [19] 주소는 마포구 양화로18안길 40(동교동 170-33).